
[연중 제14주일]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2018.7.8
제1독서 <반항의 집안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 에제키엘 2,2-5
제2독서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 코린토 2서 12,7ㄴ-10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 6,1-6
본질에서 벗어난 삶은 예언자를 미워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우리는 예언자를 바랍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있다면 우리는 인정하려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멀리 있는 예언자는 바라지만
우리 주변 혹은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예언자는 바라지 않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이 시대에 예언자가 없다 예언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고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신자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모든 공동체에 예언자가 있습니다.
심지어 악마의 소굴이라 불릴만한 곳에도 예언자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하여라.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온 예언자는 환영하지 않고 그 예언자의 말을 무시하면서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예언자,
나에게 좋은 말을 해 줄 예언자,
내가 듣고 싶은 비판,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예언자를 기다리기에
그 예언자들을 놓치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이들을 속 시원하게 비판해주고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내 단점을 충고해주며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예언자들을 원하기에
실제의 예언자들은 놓치게 됩니다.
또한 실제의 예언자들을 놓치는 다른 이유는 그들을 기피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만물의 근원이시며 본질이시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이렇게 부르며 기피합니다.
꼰대, 반역자 배신자,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히 빨갱이라는 이름을 붙이죠.
그들의 입장에서는 맞습니다.
근원에서 벗어남으로서 제 욕심을 채우는 이들에게는
이런 이익을 못보고 원칙만 이야기하는 꼰대이며
몰래 근원에서 벗어나서 이익을 취하는 것을 드러나게 하니 반역자입니다.
본질에서 벗어난 이들은 본질적인 이야기 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편한 것이며
그들의 기반을 흔들어 놓는 것이기에 자신들에 대한 배신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본질에서 벗어나서 생을 유지하는데 본질을 이야기하기에 싫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생각해보죠.
그럼 왜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일까요?
이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
신앙을 갖지 않고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기가 믿는 사상 자신의 기반이 되는 사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기반으로 정한 사상은 기본적으로는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상에 자신의 욕심이 섞이면서 망가져 갑니다.
내가 정한 사상에서
“이것을 하면 이득을 얻을 것 같은데 이렇게 하면 안전해질 것 같은데” 라는 생각으로
그 옳은 사상이 무너져 갑니다.
이런 것은 오늘 나자렛에서 바라본 예수님에 대한 시각에 담겨 있으며
이 모습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드러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에 놀라워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정한 원인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런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혈통, 노력, 적절한 인맥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는 그것이 없기에 배척합니다.
우리의 신앙으로 바라볼까요?
하느님의 지혜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이들에게 나타납니다.
즉 어떠한 노력이 없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의해 그 지혜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지혜가 어린 아이에게 나타났다면,
평소에 행실이 좋지 않던 이에게 나타났다면,
또 성당에서 별로 존재감 없던 이에게 나타났다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하겠죠.
이런 애가 무슨... 저런 사람이 무슨 하느님의 뜻이야, 성당 활동도 잘 안 했으면서...
기도도 열심히 안하는 것 같은데...
하느님께서 선택하셨기에 드러난 지혜를 우리는 무시합니다.
우리의 작은 욕망 때문에 말이죠.
하느님께 받은 행복, 은총 지혜를
어떻게 해서든 나의 공으로 돌려보려고, 조금만 돌려보려고 애씁니다.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동시에
마음 한 켠에서 내가 한 주님의 기도로 “이루어졌구나.” 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과 관계없이 인간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본래 본질은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선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떤 방법으로든 계시하신다.”입니다.
우리의 노력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떤 신앙 안에서도 신앙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전제조건은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그 전제조건을
인간의 기도, 인간의 선행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느님께서도 예상 못하는 일을 인간이 벌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인간에게 살고자 하는 욕구,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구,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인간이 택하는 것은 죽어가는 길이요, 불행해지는 길이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동반자살을 택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것도 작은 욕심 때문에 말이죠.
이는 하느님께서도 예상하신 섭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이러한 작은 욕심이 이루어낸 것은 (우리가 당장의 위협을 피하는데 썼을지라도)
우리의 약점이 됩니다.
그리고 그 약점을 가리고 보호하는데 노력하며 본질에서 계속 벗어납니다.
우리의 양심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그렇기에 매순간 진실과 대면하게 만듭니다.
그 진실로부터 도망치면 당장은 그 죄의 심판과 처벌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진실로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진실을 거부하고 죄를 선택하였기에 그 죄는 여러분의 여전히 현실로서 함께합니다.
세월호 사건을 보십시오.
수많은 이들이 지겹다 외칩니다.
그러나 그 진실에서 도망친 대가로 세월호의 진실은
우리나라를 현재진행형으로 계속해서 대면해 왔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여전히 따라오는 것은
기억하는 예언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은폐와 회피를 택했기에 계속해서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진실과 마주했다면
지금까지 거론되는 사건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를 보고 깨달으십시오.
죄를 지키기 위한 성채를 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달으십시오.
여러분이 진실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본질로 회개시키기 위해
모든 사력을 다하며 예언자를 계속 보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 약점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죄로부터 돌아서기 위해 언제나 당신 앞에 마주하는 진실과 대면하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욕심으로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의 약점이지만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하려는 일이며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포하는 진실과 마주하고 나의 약점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섭리에서 벗어나도 별 상관 없으십니다.
그러던 말던 여러분을 계속해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를 초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약점까지 모두 받아들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또한 우리의 약점을 받아들이고 본질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내 형제의 약점을 받아들이고 초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본질에서 벗어났던 인간들입니다.
우리는 본질을 벗어나 우리가 쌓은 성이 튼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약점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힘입니다.
그리스도의 힘은 우리가 듣든 말든 초대하시는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됩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실 할 수 있는 이유는
어떠한 강점이든 약점이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드러냄으로서 하느님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형제 여러분 옳고 그름을 떠나십시오.
형제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있는 그대로를 하느님을 향하게 하십시오.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욕망 섞인 말을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하느님을 뵐 수 있도록 형제를 초대하십시오.
형제의 본질을 탐구하십시오.
두려워 마십시오.
그 형제가 어떠한 삶을 살았든
그 형제도 땅을 밟고 서있고 하늘의 햇빛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신앙의 전제조건은 오직 하느님의 초대임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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