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2018.7.19
제1독서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 이사야서 26,7-9.12.16-19
복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 11,28-30
나는 주님께 모든 것을 바쳤는데 왜 안 될까요? 바치고서 무언가 잊지 않으셨습니까?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긴다.
우리는 이 과정을 배울 때 먼저 주님께 감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죄송한 것, 내가 감사할 것,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자연스레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내 스스로가 주님의 뜻에 따르기가 힘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그렇고, 미워하지 말라는 것도 그렇고,
은근히 자기 합리화하기 바쁩니다.
'나는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사람이 재수 없을 뿐입니다.'
'나는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사람이 꼴도 보기 싫을 뿐입니다.'
'나는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사람을 피하고 싶을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내어드렸는데 왜 이럴까요?
그 말씀을 반만 따랐기 때문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우리가 종종 실수하는 것은 내어드리기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승이 아닌 그저 내 말을 닥치고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으로 얻은 기쁨의 감정 감사합니다.
그 이상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주님 저 이 사람 너무 밉습니다. ' 그 이상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 이 사람이 이랬는데 이거 죽을 죄 아닙니까?' 그 이상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 어떤 사람이 저에게 이런 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이상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면 이것은 우리가 내어드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쉬운 것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이 거의 없는 것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감정입니다.
감정만을 내어드리는 것은 '주님 저 이랬습니다.' 그러고 끝입니다.
제가 들은 사례들을 이야기하자면
제가 아는 어떤 저학년 학사님께서 걱정하듯이 물어보신 것이
'어떤 사람이 저에게 심령기도도 못하냐고 신학생 맞냐고 그랬는데,
심령기도 꼭 할 줄 알아야 하는 거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심령기도를 모른다고 성소를 무시하는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죠.
심령기도라는 기쁨에 취해서 그것만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심령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하느님을 뵙는 것이라는 공식이 나옵니다.
저도 심령기도도 할 줄 알고 영가도 할 줄 압니다.
그 기도에 대한 제 생각은 알면 좋지만 필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길이 그 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령기도의 기쁨에만 취해 있던 그 사람은 자신의 판단으로 한 성소를 짓밟았습니다.
자 이제 여기서 문제입니다. 감정은 바쳤는데 무엇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첫째 나의 판단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감정은 표출해도 너는 들어라 나는 말하겠다는 식으로 나에게 돌아오는 리스크가 없습니다.
그러나 판단은 바치는 데에 리스크가 큽니다.
나의 행동에 나의 자유로움에 제약이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저 닥치고 들어주는 사람에서 명령하시는 하느님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을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판결에 따라 걷는 길에서도,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둘째, 내가 기억하는 과거를 바치지 않습니다.
내가 본 부분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여 그 기억을 놓으려 하지 않고 붙잡고 있습니다.
기억을 바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내 생각대로 나에게 했던 방식으로만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내 기억을 바치면 하느님께서는 내 예상을 벗어나는 분입니다.
내 멋대로 못하는 하느님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이 상황을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셋째, 우리의 업적, 우리의 기도를 바치지 않습니다.
내가 안심할 수 있는 하느님과의 연결고리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통해, 혹은 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면
그 기도를 그 사람을 그 물체를 놓지 않습니다.
작은 구멍만이 뚫려 있는 한 건물 속에서
빛을 보기 위해 그 작은 구멍을 숭배합니다.
그 작은 구멍이 손상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내가 보아야할 것이 명확하기에 안정적입니다.
작은 구멍이 무너지고 건물자체가 무너지면
내가 보아야할 것이 사라지기에 불안합니다.
내가 보기 편한 작은 빛줄기가
온 세상이 보이지 않도록 눈부신 빛으로 오자 두렵습니다.
눈이 멀자 마치 밤이 찾아온 것 같아 작은 구멍을 다시 찾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을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바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감정을 받으십시오.
자신의 판단을 바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판단을 받으십시오.
자신의 기억을 바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기억을 받으십시오.
자신의 업적을 바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행적을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마련하신 것을 받으십시오.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모든 것을 주님을 통해 행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내 말을 닥치고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까?
내 짐만 맡겨드리고서 주님께서 주시는 짐은 무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무거운 안식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고 있진 않습니까?
주님의 멍에를 받아 지십시오.
주님의 멍에를 받아 지고 주님께 배우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마련하신 편하고 가벼운 짐을 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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