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믿음이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2018.8.11
제1독서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 하바쿡 1,12─2,4
복음 <믿음이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 마태오 17,14ㄴ-20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
여러분은 이게 가능하다보십니까?
실제로 많은 성인들이 다양한 은사로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분들의 믿음을 본다면 절대로 겨자씨만한 믿음이 아닐텐데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습니다' 하면서
산아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한다고 산이 움직이진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귀를 내쫓으려 했는데 그게 안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니 '마귀야 물러나라' 라는 말이
정말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말인 것 같기도 한데 또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건이 있습니다.
구마자로 돌아다니는 몇몇 유다인까지도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그렇게 하자,
악령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였다.
그때에 악령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모조리 억누르고 짓누르는 바람에,
그들은 옷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그 집에서 달아났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명령했는데 왜 안 되고 왜 성인들은 될까요?
그 이유는 나는 무언가를 하려하고 성인들은 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각이 없었고 내가 명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인들은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성인들은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산은 옮기는 기적과 같이 다양한 은사로 다양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우리의 교리에는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위키백과에서 정리한 통공의 의미를 봅시다.
성인의 통공(聖人~通功, 라틴어: Communio Sanctorum)은
교회 구성원들 즉 살아있는 신자들과 죽은 신자들 간의 영적 결합을 의미하며,
지상과 천국, 연옥 등에 있는 모든 성도의 공로와 기도가 서로 통한다는 기독교의 믿음이다.
여기서 통공(通功)이란, 공(功)이 서로 통(通)한다는 뜻이다.
즉 공로와 선행이 서로 통한다는 의미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과 천국에 있는 영혼들
그리고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영혼들 모두
교회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기도와 희생과 선행 등으로
서로 도울 수 있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설명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시점에서는 상당히 부족한 설명이죠.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상당히 세속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데로 통공에 대해 잘 서술했습니다.
만약 이 설명이 위화감이 안 느껴진다면 다시 읽어 봅시다.
여기서 문제, 무엇이 빠졌을까요?
통공이 성립되는 이유, 즉 하느님에 대한 것이 빠졌습니다.
통공이 왜 성립될까요?
우리는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통공이 성립됩니다.
우리의 겨자씨만한 믿음이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닌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닌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독서의 하바쿡 예언자도 그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심판하시려고 그를 내세우셨습니다.
바위시여, 당신께서는 벌하시려고 그를 세우셨습니다.
이런 본성에 동참하고 참여하는 것은 사도들이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1코린 10.16-17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2베드 1.4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아니 겨자씨만큼이라도 하느님께 맡겨드렸다면
우리의 생각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느님께 함부로 자신의 소망을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종종 하느님께 족쇄가 된다는 것을 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동시에 우리의 소망,
아니 욕망을 가지고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라고 이야기하지만
내 뜻을 생각하면서 행동하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 맘충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들은 아이나 맘카페를 앞세워서 자신의 범죄,
즉 무전취식이나 협박 등을 합리화시키는 이들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법적처벌이 가해진다면 누구에게 가해집니까?
아이가 책임집니까? 맘카페가 책임집니까?
아닙니다. 무전취식하고 협박한 이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됩니다.
나랑 친한 높은 사람이 있다며 그 사람의 이름으로 죄를 지어도
결국 죄에 대한 책임은 본인 지게 됩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그 자리는 당신의 죄를 책임져주지 않고 어떠한 피해도 받지 않습니다.
만일 지도자라는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 자체는 피해 없고 당신만 교체될 뿐입니다.
내 가족이 참한 신앙인이라고
또 내 가족 중에 수도자나 성직자가 있기 때문에
나는 구원될 것이고 교회에서 권력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의 죄, 권력욕이나 영적게으름 또한 그 죄를 지은 자신이 지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과 관련된 무언가 강한 것을 내세워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펼쳐 죄를 짓고는 합니다.
거기에 해당된 이들이 그들을 옹호한다면 책임을 같이 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이 직접 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세운 강한 이는 그런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라고 이야기해도
우리의 뜻을 이야기한다면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 말의 대가는 자신이 지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다른 강한 것을 내세워 자기 자신을 무디게 하지 마십시오.
다른 것을 헛되이 믿지 말고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보이십시오.
하느님이 아니라더라도 내가 무언가를 믿는다면
내 생각보다 겨자씨만큼이라도 무언가를 믿어보십시오.
겨자씨만큼이라도 그 뜻에 동참해보십시오.
내 생각을 하다보면 언젠가 하느님 뜻과 맞겠지 하는 무딘 마음을 갖지 말고
겨자씨만큼이라도 내 생각보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보십시오.
그 겨자씨만한 믿음을 시작으로 하느님의 업적에 참여하여
성인들의 통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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