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나는 그들에게 내 얼굴을 감추고, 그들 끝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리라>
2018.7.30
제1독서 <이 백성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띠처럼 되고 말 것이다.>
▥ 예레미야서 13,1-11
복음 <겨자씨는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
✠ 마태오 13,31-35
별 것 아닌 상처로, 상처 주신 하느님의 경고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집 안에 바퀴벌레 하나가 나오면 그 뒤에 백 마리의 바퀴벌레가 있는 것이다'라는
속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바퀴벌레가 나오면 바로 세스코라는 회사에 전화를 하던가 합니다.
그래서 해로운 것을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의 집의 해로운 것은 그렇게 잡아내면서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해로움을 서로 미루며 살다가 커다란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우리가 최근에 받은 상처를 열어보겠습니다.
성체 모독 사건 말이죠.
성체 모독 사건을 방금 바퀴벌레의 이야기로 비유하자면
우리 집에 수백 수천마리의 바퀴벌레가 다니는 것을 보았지만
다른 누가 처리하겠지 하고 무시하고서 살아가다가
시베리아 허스키만한 즉 대형견만한 바퀴벌레를 보고서야
소리 지르고 없애야 한다고 난리가 난 상황입니다.
하지만 힘을 합쳐서 없애려 하는 것은 대형 바퀴벌레만 없애려 하지
여전히 수백 수천마리의 바퀴벌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체 훼손 사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워마드가, 혹은 어떤 극단적 페미니스트가 성체를 훼손하고 모독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마주해야합니다.
“가톨릭 신자”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는 자매가 성체를 훼손하고 모독하였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며 회피하고 싶지만
가톨릭 신자가 성체를 훼손하고 모독한 것입니다.
이 현상에 대해서는 우리 교회에 지속적으로 경고가 있었습니다.
경고의 표징이 널려 있었죠.
하느님께 얻지 못하는 평화,
하느님의 대체품을 찾는 현상 이 두 가지는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눈이 멀었는지 아니면 보고 싶지 않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경고들을 무시했습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상처를 받는 경고를 받았지만 상처만 보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경고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상징”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지만
개신교로부터 받은 “상징”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상징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상처만 떠올리며 화를 내는 이들도 많습니다.
제가 성체의 상징성 즉 보이는 것은 밀떡일지언정
본질은 그리스도의 현존이며,
우리의 봉헌과 하느님의 자비로 인한 성변화이기에
그 본질을 제대로 기억해야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그 “상징”이라는 상처 때문에 화를 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얼마나 나 자신이 중요한 공동체입니까?
하느님의 경고들을 내가 상처 입었다고 무시하는 이런 공동체가 무슨 교회입니까?
상처를 입힌 이들을 죽이려 드는 이 공동체가 무슨 교회입니까?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경고,
우리가 무시했던, 우리 스스로 하느님의 대체품을 찾으려 했던 그 죄들은 무시합니다.
내 스스로 옳다는 것,
나만을 위한 신앙은 언제나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언제까지 해야 하겠습니까?
이 사악한 백성이 내 말을 듣기를 마다하고,
제 고집스러운 마음에 따라 다른 신들을 좇아 다니며
그것들을 섬기고 예배하였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띠처럼 되고 말 것이다.
오늘 독서에서 나온 유프라테스 강에서 잠시 목을 축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다고 유프라테스 강을 하느님으로 대체한 결과는
썩어 아무 쓸모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작은 포만감에 빠져 하느님께서 주시는 충만함을 무시하고 있습니까?
교회의 이름이 드높여지고
우리끼리의 명예가 드높여졌다고 만족하는 어리석은 공동체여!
저는 한 사제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잊지 못합니다.
그 신부님이 명절에 만난 조카에게 성당 잘 다니냐고 물었습니다.
그 조카는 신부님께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고 합니다.
나는 성당 나가기 싫고 교리시간에도 가기 싫다고 말이죠.
왜냐고 하니 '거기서 신부님이랑 교리교사들이랑 서로 친목질만 하는 곳이지
우리에게는 관심이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서로 웃고 떠드느라 정작 아이들에게는 관심 없던 교리교사들의 이야기,
자 이들에게 무엇이 잊혀졌습니까?
나는 여러분의 상처든, 교회의 상처든 알바 아닙니다.
예수님의 상처를 따르는 교회가 겨우 모욕과 반대 수준의 상처를 그렇게 신경 씁니까?
상처로 인해 피하는 이야기, 여러분이 내버린 돌이 곧 쇄신의 중심 단어입니다.
상징과 본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상징은 그 안의 의미가 가시화된 것을 상징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의미가 무너진 상황에서 상징이 무슨 소용입니까?
공동체는 그 안의 개인이 하나의 믿음으로 모인 곳이 공동체입니다.
개인이 무너지는데 공동체가 무슨 소용입니까?
공동체의 대표되는 몇 명만 행복하고, 몇 명만 명예를 얻고,
몇 명만 서로 축하하면 그만입니까?
나머지는 그 몇 명의 명예와 칭송과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일회용품입니까?
우리 교회에서 “수”를 위해 세례자를 찾습니다.
그것이 우리 본당의 명예이며 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받자마자 그들은 버려집니다.
많은 이들이 세례식 때 처음 만난 대부모와 연락이 끊어지고,
뭐가 신앙생활인지도 모르겠지만 다니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냉담하게 됩니다.
저는 신자 중에 '세례를 받고서 모르는 것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고 한 분이
기억납니다. 그분은 심지어 평일 미사가 있는지도 몰랐다고 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수치상, 통계상의 서로의 업적을 축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냥 우리 공동체만 잘 이루어지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붙어 있듯이
내가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나에게 붙어 있게 한 것은
─ 주님의 말씀이다. ─
그들이 내 백성이 되어 명성과 칭송과 영광을 얻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
형제 여러분 상징은 충분히 성장했습니다.
본질 없이도 세상의 방법으로 우리의 겉모습은 충분히 성장했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영향력이 없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독재와 '사제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이야기하던 시절의
왜곡된 순종인 복종의 시절,
그저 신나고 감정적인 것을 건들면 늘어나던 겉모습은 충분히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명성과 칭송과 영광을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얻으려한
행동의 부작용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마주해옵니다.
제가 3~5월 동안 가톨릭 신문을 볼 때
'신자의 고령화 신자 수의 지속적인 감소'라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령화 사회이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통계는 전체 인구에서 천주교를 믿는 비율에 대한 조사에서 점점 줄고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이나 사회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이고,
우리 가운데에서 성체 모독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에서 그 한 명이 아닌 수만 명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결국 원점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에게 그늘이 되어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씨앗이 무엇이 되는지 다시금 읽어보십시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이 나와 마주하는 모든 새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무입니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이들만 받아들이고 오지 말라고 팔을 휘두르는 나무입니까?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여러분의 충만함은 잠깐의 감정적이며 내가 위대한 충만함입니까?
아니면 함께함으로서 얻는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로부터 오는 충만함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여러분은 비유의 이야기만을 듣는 지나가는 군중입니까
아니면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고 추구하는 제자입니까?
이웃을 되돌아보십시오.
냉담자들을 다시금 초대하십시오.
냉담(어떤 대상에 흥미나 관심을 보이지 않음)하는 냉담자들은
하느님께 흥미를 잃은 이들입니다.
봉헌을 어찌해야할지도 모르겠고 ,
무엇을 얻는지도 모르겠기에 하느님의 대체품을 찾아 교회를 떠난 이들입니다.
성체 모독 사건도 한 신자가 하느님께 흥미를 잃고 교회를 떠나
하느님의 대체품으로 왜곡된 페미니즘을 섬긴 현상입니다.
신도 아닌 것들로 나를 질투하게 하고, 헛것들로 나를 분노하게 하였다.
우리 앞의 대체품을 모두 치우고 하느님과 이웃 나 자신만 남기십시오.
우리의 대체품 술, 친교, 뒷담, 명예. 자리, 등 모든 것을 버리십시오.
진정으로 대체품이 아닌 하느님을 섬기는 법을 되찾아야합니다.
주교회의에서 이야기합니다.
“2018년 8월 4일(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에 전 신자가 한 끼 단식과 금육을 실천하며, 개별적으로 성체 조배의 시간을 갖도록 권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각 본당에서는 본당 사정에 맞게 성체 현시와 함께 성시간을 갖고 성체 공경 신심을 강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식 식사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 즐거움을 주고 충만함을 주는 모든 것을 단식하십시오.
그리고 성시간 성체현시를 통해 그리스도와 마주하십시오.
교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했습니다.
여러분은 순종하실 것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내 충만함을 찾아갈 것입니까?
다시금 우리의 계명을 되찾으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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