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2018.9.11
제1독서 <형제가 형제에게,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겁니까?>
▥ 코린토 1서 6,1-11
복음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 6,12-19
남의 길을 보지 말고 자신의 길을 걸으십시오.
여러분은 교육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등
어떠한 공동체 즉 부모와 자식은 삶, 스승과 제자는 앎,
선배와 후배는 해당 공동체에 있어서
각자 상대보다 먼저 살아보았던 선생(先生)으로서
가르쳐 본 적이 나이가 많으실수록 많을 것입니다.
사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모든 면에서 선생이 되어간다는 것일 겁니다.
또한 선생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후배가 힘든 길을 가는 것을 보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인생의 선생으로서 알려주는데 후배는 따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해도 따르지 않죠.
진짜로 불의를 저지르면서 스스로 불행해지고 있는 후배를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후배를 바꾸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마음은 좋습니다. 다만 방법에서 다시 생각해봅시다.
훈계하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 알려주는 것이 그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요?
절대 바꾸지 못합니다. 사람은 타인에 의해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남의 불의에 신경을 끄란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불의를 상대할 때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에서 훈계한다 하여도,
상대가 듣기를 거절하며 너와 나는 다르다며 선을 그어버리면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티격태격하다 못해 그 불의는 잘못된 것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공동체를 떠나 법의 심판까지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 순간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였다고는 하지만
결국 내 이야기를 무시한 그에게 상처 받은 자존심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불의를 무시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불의에 대해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불륜을 저지르는 자도 우상 숭배자도 간음하는 자도 남창도 비역하는 자도,
도둑도 탐욕을 부리는 자도 주정꾼도 중상꾼도 강도도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이런 자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렇게 명확하게 불의에 대해 선을 그으면서 가장 중점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남의 이야기를 볼 것 없이 네가 불의를 저질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너는 신앙을 통하여 불의를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리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또 속입니다.
그것도 형제들을 말입니다.
......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겼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할 것은
사람은 예의 있는 사람 앞에서 예의를 차리게 되고
예의 없는 이의 앞에서는 예의를 유지하기 싫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반말하는 사람에게 경어를 쓰고 싶지 않아 합니다.
반대로 경어를 쓰는 이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경어로 답변하게 됩니다.
지위나 권력을 서로 모르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만났을 때
나를 높여주려는 이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상대를 높여주게 됩니다.
나를 낮추려는 이 앞에서는 상대를 낮추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즉 내가 선의를 베풀면 상대도 선의를 갖게 되고
악의를 표현하면 악의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상대의 악의에 대해서 내 탓이요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종종 이야기합니다. 조금 말을 순화해서 표현하자면
“인간이 쓰레기가 되는 것은 쓰레기가 되도록 하는 수많은 주변 조건이 있어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승낙이 있기에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쓰레기가 되는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일어서서 인간이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정 반대로 쓰레기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
무의식적으로 악행을 승낙한 스스로가 있기에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그런 사정을 신경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입니다.
자 여기서 제 주장에 반론해보겠습니다. 그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레위 19.17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8.15-18
형제의 악행은 꾸짖어야 합니다.
다만 처음에 이야기하였듯이 방법을 좀 달리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다른 선택이 여러분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형제의 악행을 꾸짖게 됩니다.
그 다른 선택은 여러분부터 선행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상대가 선행을 선택할 환경을 만들어주라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말한 복음 말씀을 바라보며 들으십시오.
상대가 예의를 갖추길 원합니까? 먼저 그에게 가서 예의 있게 행동하십시오.
그래도 안 됩니까?
당신을 만나며 예의를 갖추게 된 이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서 예의를 갖추십시오.
그래도 안 됩니까?
공동체 자체가 예의를 몸에 밴 상태로 살아가십시오.
공동체의 분위기 선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무시하고 그 선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건 온전히 그 사람 몫입니다.
사람이 쓰레기가 되는 것은 주변 환경 탓이 앞서 있지만
최종적인 승인은 본인이 하기 때문에 주변 환경의 탓이 있더라도 자기 탓은 명확히 있습니다.
주변 환경의 탓이 없어졌으니 그 사람의 온전한 책임인 것입니다.
우리가 풀어줘도 스스로 묶어 버리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른 이의 불의를 보지 말고 각자의 선의 길을 가십시오.
여러분이 받고 선의를 품게 해준 행동들을 잘 보고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받고 불의를 품게 된 행동들을 잘 보고 경계하십시오.
사람 각자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르듯이
기분 좋은 지점과 기분 나쁜 지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스스로 선의를 갖게 만든 것을 행하면서 나아가면
그것이 자신의 길이 되며 다른 이를 선의를 갖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사도는 각자 다른 선행의 길,
복음 선포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여러분의 길을 나아가십시오.
상대가 공동체가 교회가 세계가 모두가 당신에게 선의를 가질 수 있는 행동을 하십시오.
물론 이를 불의로 돌려주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보다 여러분에게 받은 선의로 세상에 나아가게 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복음에서 모의를 꾸민 이보다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 받은 이들이 많습니다.
단지 여러분의 길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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