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대축일]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018.9.20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 3,1-9
제2독서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로마서 8,31ㄴ-39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 9,23-26
내 선택은 내 자신에게 맡겨야합니다
조선 시대에 천주교가 박해를 받은 이유가
정치적인 싸움에 휘말렸다고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디가 어디를 짓밟기 위해 그런 박해가 가중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 가장 처음은 그랬습니다.
왕실의 태도도 천주교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기해박해 때의 왕실의 태도를 바라보면
천주교 교리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모습이 보이며
천주교에서도 정하상 성인께서 교리적인 설득을 하려 노력하신 모습이 보이듯이
비록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낮아도
가톨릭과 조선 왕실의 싸움으로 제대로 싸우게 됩니다.
조선 시대에 천주교가 배척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이유였습니다.
유교는 현세를 중시하며 지금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가르침이지만,
천주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내세의 삶 때문에 현세를 버리는 삶을 도태시키는 종교이다.
사실 유교 사회에서 천주교를 배척한 가장 큰 이유는 이런 이유였습니다.
사람들이 천국 지옥 이야기만 강조하니 그렇게 들린 것일 수 있습니다.
다른 무신론자들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에서도 배우고 살아갈 것들이 많은데
그러한 현실을 무시하는 종교를 왜 믿느냐 이런 태도를 보입니다.
가톨릭이 내세 즉 죽음 뒤의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현세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현세를 무시하면 내세도 무시하는 것이며
현세에서 사랑하지 못하면 내세에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현세에는 다양한 상황들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지만 모든 상황이 좋을 리는 없는 그런 상태입니다.
살아가다보면 사람이 사랑하지 못할 그럴 상황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은 그 사람 책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할 수 없는 환경이라 사랑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겠다는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순교 성인들을 보았을 때
신자들을 사랑하는 그런 선택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저 나오기만 해도 죽는 그런 상황,
산 속에 숨어 살아야하며 가난하게 사는 그런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겠다는 선택을 한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내세 이론 보다는
계급 구조나 무시 받는 현실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그런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사랑에 동참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도 이러한 이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또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사랑할 수 없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 분,
내가 사랑할 수 없음에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그리스도를 만나고서
그 사랑에 동참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내세적 영광을 만난 것이 아니라
현세의 내가 사랑받았기에 동참한 이들입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 사랑 받을 사람들이 없다며
우리가 바라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나 된 세상을
내세로 넘겨버리는 이들이 일부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 방침은 사랑 받을 자격을 만들어서 하느님 나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하여 상대에게 사랑 받을 환경을 제공하며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어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 사람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고발할 거리가 없습니다.
만민의 모범이 되고 상대가 자신의 일을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이입니다.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닌 스스로 먼저 행하면서
상대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것뿐입니다.
그는 나의 선택을 주변 환경에 맡기는 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기기에 주변 환경은 그에게 아무런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그의 고통은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깨달은 이로 이를 닮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시련이 있더라도 자신이 그렇게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을 대단하게 바라보지만 순교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반응이 아닌 나의 선택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선택을 누구에게 맡깁니까?
나 자신입니까? 아니면 주변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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