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018.10.11
제1독서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 갈라티아서 3,1-5
복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루카 11,5-13
한번이라도 물어봤더라면... 또 청했더라면...
예전에 사감 관련된 일을 할 때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에 기숙사에서 아이들을 관리하는 것이 제 임무였습니다.
그렇게 관리할 때 아이들이 지켜야할 규정들이 있었죠.
만일 아이들이 그 규정을 어기면 그에 합당한 벌을 주고 했어야 했습니다.
사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점은 이것이었습니다.
애들이 먼저 말했다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문제인데 하고 말이죠.
규정을 어길 때 아이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합당한 이유가 분명 있습니다.
그걸로 나는 합당하다 스스로 정하고서 먼저 행동하고 봅니다.
그럼 뭐죠? 규정 위반이 됩니다.
‘나 이러이러해서 그랬다.’ 라고 나중에 이야기해도 벌을 주어야하죠.
예를 들어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들 경험해보셨겠지만 자다가 목마른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럼 밤에 복도에 계신 선생님께 물 한잔 마시고 와도 되냐고 한마디만 물어보고
허락만 받아도 규정 위반으로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냥 나 목말라 하고 말도 안하고 나와서 돌아다니면 규정 위반이 되는 거죠.
이와 같이 내가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먼저 행동하는 건
하느님 눈에도 계약 위반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행동이 먼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바오로 사도도
성령을 받고 자신이 합당하고 생각하는 행동을 그냥 하는 이들에 대해 지적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규정 중에 지시 불이행이라는 항목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시를 불이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충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와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다른 대안을 듣는 것과
스스로 지시를 거부하고 보는 것은 차이가 많이 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서로 사랑하라,’
가장 어려운 것이 원수를 사랑하라와 형제를 용서해라는 것인데
많은 이들이 이 가르침을 수행하기 힘들다고만 하며
주님께 기도하지 않고서 그냥 지시 불이행을 실천해버립니다.
그러고서 심판 때나 가서 이러이러한데 ‘어떻게 실천합니까?’ 하고서
심판하여 책임을 묻는 하느님께 따지죠.
사감으로서 일할 때 경험을 되살리면 이렇게 대답하실 겁니다.
“그래서 그거에 대해 나한테 한마디라도 이야기했냐?
결국엔 넌 지시불이행한 것이다”하고 냉정하게 말할 수밖에 없죠.
이런 행동들은 결국에는 하느님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참으로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왜 행동을 먼저 하는 것이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인가?
생각해봅시다.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면서 규정에 따라야하는 아이들이
자기가 생각한 합당한 이유 때문에 규정을 위반했습니다.
그 경우 자신이 생각하는 합당한 생각 때문에
자신의 생활하는 곳의 기반인 규정을 무시하고
또 그것을 집행하는 사감이나 선생님들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사감이나 선생님들은
내가 모든 것을 다 행동하고서 동의해주는 사람 정도입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대로 먼저 행동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우리가 멋대로 한 행동을 인정해주고 동의하며 칭찬하는 것이
하느님의 역할이라고 못 박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간 아이들은 결국 사회에서 큰 상처를 입습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자기중심적으로 맞춰주지 않거든요.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하느님 보호 아래 온실 속 화초처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스리는 의무에 따라 세상의 수많은 모습과 부딪히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세상의 모습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굉장히 많죠.
이렇게 되면 우리는 교육에 실패한 것입니다.
길에서 벗어난 이들은 결국 아무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비판하며 절망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제가 아이들에게 사감으로서 가르친 단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청해라.’
너희가 행동하기 전에 물어봐라.
그걸 알아듣고서 실천한 아이들은 규정의 융통성을 누릴 만큼 누리면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무시한 아이들은 규정의 일관성 속에서 규정과 싸우며 지쳐갔죠.
이건 편애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지시를 이행할 수 없는 아이가 자기에게 맞는 지시를 다시 받음으로서
규정에 적응해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규정의 융통성이었습니다.
반대로 그저 자기생각이 옳다고 규정을 위반하던 아이들은
규정의 예외 없이 집행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규정의 일관성이었죠.
이렇듯이 청한다는 것이
일관성 속에서 융통성을 열게 만드는 하나의 열쇠가 됨을 깨달은 아이들은
이에 쉽게 규정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간 것이죠.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청하는 것에 대해 곧이곧대로 들어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공동체의 목적 즉 자신을 교육하고 스스로 규정을 준수하며 살아가려는 방법에서
합당하게 제시하였다면 그것은 들어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가 규칙을 수행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을 주던지
아니면 규칙을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주던지
규칙을 지켜야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금 교육하는 등 3가지 방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길을 걸어가고자 노력하는 마음에서
이것저것 청할 때 하느님께서는 많은 것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도 생각하지 않고
내 멋대로 하는 행동에 동의해달라는 것은 들어주시지 않겠죠.
그저 하느님의 고집과 영광을 위해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청하고 있는 그 당사자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한 길로 마련하신 길인데
그걸 벗어나는 뱀과 전갈은 아버지께서 당연히 안 주실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청하십시오.
그런데 나의 청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더 잘 따르고
하느님의 사랑 속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청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무시하고 사랑을 헛되이 여기며
그저 내 멋대로 한 생각과 말과 행동들을 동의하고 동조 해달라는 청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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