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간음의 시작-남의 인생을 탐하는 것

글쓴이 :  바울라님 2018-10-07 09:10:01   ... 조회수(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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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2018.10.7

 

제1독서 <둘이 한 몸이 된다.>

▥ 창세기  2,18-24

제2독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 히브리서  2,9-11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마르코  10,2-16

 


 

간음의 시작-남의 인생을 탐하는 것

 

제가 참 오래전에 읽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자신은 아빠의 등이 굉장히 크고 의지가 되었는데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작음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를 비교하며

'왜 아빠는 다른 아빠처럼 그러지 못하냐'며 화내곤 했다고 합니다.

아이에게는 굉장히 큰 의지가 되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한 순간에 무능한 아버지로 변합니다.

사업이 망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아버지를 보기 시작해서이죠.

아이는 여기서 처음으로 간음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지금의 부모의 연을 끊고서 다른 부모와 연을 맺고 싶어 합니다.

정반대로도 부모들은 처음에 아기인 자기 자식이 한 없이 예뻐 보이다가

좀 더 커서 다른 아이들을 보면서

'내 아이가 그런 아이었으면' 하면서 간음의 유혹을 받게 됩니다.

자식의 연을 끊고 다른 자식이 자기 자식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결과 부모 자식 간의 사이가 점점 서먹해져 가죠.

이런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부부간의 간음은 가볍게 그 부부 사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논쟁의 여지없이 하느님께서 맺어준 관계인

부모와 자식 간의 간음 욕구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더 깊은 기반은 내 상황에 대한 간음으로 시작되죠.

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것을 원하는 경우가 많아지죠.

그러나 처음의 인간의 모습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만나게 해 준 것에 이름을 붙였다.

제가 아는 철학교수님은 늘 출석을 부르실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름을 부르는 것들에는 그에 따른 의미가 부여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에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만나는 모든 것에 그 자체의 의미를 부흥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의미 있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에 불만을 품고서

나에게 오지 않은 것만 바라본다면 그것대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 손으로 끊고자하는 노력은 모든 것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거부하는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와 간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이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최근 교황님께서

'성직자들이 자기들끼리 특별한 사람처럼 평신도 위에 군림하려는 성직자 주의'를

반대하십니다.

그 행동의 본질은 '평신도를 갈라놓고 자기들끼리 세력을 만들어 많은 것을 은폐하며,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을 누리려는 사제들의 문화'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교황님의 사상을 따라

성직자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일부 평신도들도 보입니다.

신학교를 폐지하고, 신품성사가 무의미함을 가르쳐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제와 같은 특권계층이 있는 것이 아닌

평신도들이 교회를 이끌어야한다고 합니다.

그들도 자신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누리려는 이들입니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리에 불만을 가지고

내가 사제의 권위가 있다면 성인이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이들입니다.

저는 비안네신부님의 강론이 기억납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길을 가다가 사제와 천사를 동시에 만나면 나는 사제에게 먼저 인사할 것'이라며

사제의 권위를 강조했습니다.

사제든 평신도는 그 권위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사랑하며

자신의 의무를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밀어내고

내게 주어지지 않을 것을 누리려는 이에게는

당연히 하느님께 오는 사랑의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형제 여러분,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겪으셨지만

그 과정을 받아들이시고

그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시며 자신의 의무를 다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성인들도

다양한 모습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사랑하십시오.

간음하지 마십시오.

남의 아내 즉 남에게 주어진 관계를 탐하지 말고

남의 재물 ,남에게 주어진 것을 탐내지 마십시오.

먼저 받아들이고 먼저 사랑하십시오.

지금을 사랑할 수 있는 이가 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상황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리라.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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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카엘라모바일에서 올림 (2018/10/07 11:5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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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감사합니다.
  
  brood (2018/10/09 1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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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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