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018.10.6
제1독서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 욥기 42,1-3.5-6.12-17
복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 루카 10,17-24
유물론적 시각 중독
세상에 다양한 중독현상이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 담배 중독, 마약 중독 등의 화학 약물에 의한 중독이 있는가 하면
게임 중독, 영화 중독, TV 중독, 운동 중독, 공부 중독 등
어떤 문화나 취미에 대한 중독이 있습니다.
중독은 좋아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과해서 그것 없이는 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중독들을 다 모아 놓고 보면 결국에는 쾌락 중독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즉 자기가 행복을 느끼는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이죠.
그것의 기반에는 또 다른 중독현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깨고자 하시는 대부분의 인간들의 중독,
유물론적 시각에 대한 중독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 눈에 들리며, 우리 마음에 울리고, 우리가 마음껏 판단할 수 있는
'보이는 것에 대한 중독'
이 중독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자체를 섬기기보다
무언가 보이는 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섬깁니다.
즉 선행, 재산 봉헌, 봉사, 본당활동 성지순례 등등
욥은 이 중독에 대한 치료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치료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선행, 재산 봉헌, 봉사, 본당활동, 성지 순례등이
나와 하느님 사이의 자리를 차지하여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가리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과거 욥이 섬기던 방식 겉보기에는 별문제 없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회복시켜주신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 욥의 섬기는 태도는 제물 봉헌을 통한 하느님 섬김이었습니다.
즉 하느님과의 관계를 그 많던 재물을 통해 맺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은 어떠했을지는 몰라도 자식들에 대한 태도를 보았을 때
자식들이 하느님과 관계를 어떻게 맺었던지 상관없이
그저 제물을 바치면 되겠지 하였습니다.
이 생각이 자식들에만 한정되어있던 것이 아닐 겁니다.
자신도 관계를 그렇게 맺었기에 자식들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전에 욥이 자식들에게 남긴
유산(선조가 남긴 가치 있는 물질적, 정신적 전통)이었습니다.
바로 재물을 통한 하느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유물론적 시간에서 보이는 피조물을 통해 맺은 하느님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변한 이후 남긴 유산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무언가를 통해 즉 피조물을 통한 것이 아닌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직접적으로 맺는 사랑의 관계
이것이 욥이 남긴 새로운 유산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의인이었기에 받은 것을 통해 맺은 관계가 아닌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직접적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우리가 집중해야할 것은 유물론적 시각으로 본 욥의 재산이 아닌
하느님께서 욥에게 주신 사랑의 관계를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에서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귀들을 내쫓았다는 유물론적인 시각보다
하느님께서 나와 관계를 맺으셨음을,
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와 관계를 맺으셨음을
더 깊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유물론적 시각에 익숙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장 나에게 보이는 것 당장 나에게 들리는 것 등의 명확한 사적계시를 원하며
나의 마음을 울리는 당장의 만족감을 주는 선행이나 감동을 찾아다니며
나의 지혜를 뽐내고 판단력의 찬양을 듣을 수 있는 자리를 바라봅니다.
유물론적 시각중독에 빠진 이들은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 생각합니다.
중독에 빠진 이들은 그것을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되는 듯이 행동합니다.
그 중독을 치유하시기 위해
모든 유물론적 시각에 해당되는 것에 메마름을 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 메마름을 통해 우리가 만족감을 얻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서
아무것도 거치지 않고서
하느님께서 부르신 초대에 응하여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즐거워하며 감사했던 내용을 기억해봅시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철부지 어린아이’
이것은 유물론적 시각에 사로잡혀 보이는 것을 갖고자
욕망을 조절 못해 그 욕망을 불태우는 아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아이’
즉 우리의 영혼이 창조되었을 당시의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그 때의 우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도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전제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내가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을 통하지 않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자신이 의지하는 피조물을 내려놓으십시오.
유물론적 시각중독에서 벗어나십시오.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인간으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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