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32주일]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2018.11.11
제1독서 <과부는 밀가루로 작은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다주었다.>
▥ 열왕기 상권 17,10-16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 히브리서 9,24-28
복음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마르코 12,38-44
인간의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지만
History is written by the victors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
과거 로마에서 이야기 되던 속담에서 유래된 말로
지금 현대에서도 많이 적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패배한 이들의 역사는 잘 기록되지 않습니다.
패배했다가 살아남아서 일어난 이들의 역사를 다시 기록하는 것도
굉장히 길고 힘든 이야기가 됩니다.
당장 우리나라도 일본으로부터 광복한지 50년이나 넘었는데도
아직도 사람들 문화에 묻어있는 일제의 잔재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역사와 관련해서도 일본과 정리하지 못했죠.
그 정도로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에서 깊게 다가오긴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승자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돈을 가지더라도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권력을 가져도 높게 갖고 싶어 합니다.
신앙을 가져도 우리가 성인전에서 본 것 같은
정말 기도가 일상이고,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며, 성스럽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을 바라며
그렇게 높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는 그런 승자의 이야기를 조심히 들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신앙의 승자는 바로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율법학자들을 왜 조심하라는 것일까요?
그들도 승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승자가 되기 위해 그들이 했던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자신을 꾸미는 것들 권력이나 지위를 화려하게 꾸미고 그걸 인정받는 것을 즐기고
그렇기에 당연히 높은 자리에 있고 윗자리에 앉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 됩니다.
그러한 윗자리의 대가를 치루기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의 것이 희생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하느님 섭리를 통해 스스로의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된 것이 아닌
욕망으로 밀고 나가서 얻은 그 자리는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기에
다른 이의 희생이 당연하게 필요한 자리로서 살아갑니다.
이들에게는 가난한 이들에게 얻는 희생이 위대한 자신에겐 당연할 일입니다.
스스로 위대하지 않아도 승자가 되어야
역사에 남아 하느님께 기억될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승자가 되기 위해 다른 이를 희생시키는 것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 모든 행동이 승자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이유에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라는 이유도 있겠죠.
하지만 인간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시야로 바라볼 수 있어야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 지지만
하느님의 역사는 인간에 의해 쓰여 집니다.
정말 평범한 인간이 하느님 역사에 쓰여 집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주변에 기다리고 있으며 인간의 선택을 기다리시기 때문이죠.
오늘은 평신도 주일인데 교회에서의 평신도는 굉장히 중요한 자리입니다.
평범한 신자이기 때문에 중요한 자리이죠.
평신도가 그 자리를 빛내기 위해서는 평범해야합니다.
평신도가 평범하다는 것을 유지할수록 인간의 뜻보다
높고 널리 펼쳐진 하느님의 뜻을 보여주는 증표가 됩니다.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교회가 평범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많은 이들이 교회에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이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승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 구원의 희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사목회장이 하느님 말씀을 따른 것이 평신도가 아니고,
묵주기도를 매일 같이 꾸준히 하는 이가 하느님 말씀을 따른 것이 평신도가 아니며,
하느님 이름으로 매일같이 싸우는 이가 하느님 말씀을 따른 것이 평신도가 아닌
그저 평범한 이가 하느님 말씀을 따른 것이 평신도이며
그리스도를 가장 잘 나타내는 표징인 것입니다.
교회의 어떠한 자리에 있던 평범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평범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던 길 중에
어떠한 직책을 맡고 직위를 받고 하는 것이지
무언가 높은 것을 얻은 채로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이야기이지 하느님의 이야기가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역사가 이어지는 순간에 과부의 따름이 있었고
과부의 온전한 봉헌이 있음을 바라보아야합니다.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형제 여러분 평범한 지금의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내가 무언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모습이 아닌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대가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습니다.
많은 성인과 같이 어렸을 때 하느님을 뵙고서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사람도 있지만
디스마 성인처럼 옆에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사람이
믿어서 죽기 전에 하느님의 길을 걸어간 이들도 있습니다.
지금 어떠한 상태든지 그대가 하느님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밝히는 평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밝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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