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없는 악은 없습니다. 사랑은 사연이 없어도 할 수 있기에 악을 이깁니다.

바울라님 2018-07-21 06:47 ... 조회(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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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018.7.21

 

제1독서  <그들은 탐이 나면 밭과 집을 차지해 버린다.>

▥ 미카 2,1-5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 마태오 12,14-21

 


 

사연 없는 악은 없습니다. 사랑은 사연이 없어도 할 수 있기에 악을 이깁니다.

 

제가 최근에 해본 게임의 내용은 사이비 교단을 적으로 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사이비 교단들이 하는 행동들에는 '왜?' 라는 질문에 정말 대답을 잘했습니다.

'하느님께 예언을 들었다.',

' 나는 나 스스로도 배척 할 만큼 좋지 않았지만 예라고 대답함으로서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 나는 진정한 행복의 길을 찾았기에 많은 사람들을 초대한다.',

' 이 일은 인류의 진화를 위한 길이다.'

결국 그 사이비 교단은 옳았습니다.

핵폭발로 인해 그 나라는 예언대로 멸망했습니다.

이제 게임속의 그들이 한 행위들을 알려드리죠.

그들은 사람들을 납치하고,

총으로 위협하며 자기들이 멋대로 정한 죄를 인정하라고 협박하고 ,

마약으로 세뇌시키고,

환상 속에 살아가는 것을 행복이라 하며,

세뇌한 사람들을 그 사람의 친구나 가족을 살인하게끔 지시합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잔학한 짓을 행합니다.

어떤 종교에 대항하여

그 도시 사람들이 총 들고서 저항할 수준이면 그들의 악행은 극에 치달은 것이죠.

그 모든 악행을 제쳐놓고서 그 교주에게 중요했던 것은 “내가 옳았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게임 속 이야기이지만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만일 진짜로 멸망 예언을 하느님께 받았다 할지라도 악을 저지르는 것이 옳았을까요?

 

제가 어제 규정에 대한 식별을 이야기하면서

'왜?'라는 질문으로 그 규정의 의미를 식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식별이 가능한 것은 그 규정이 선에 기초한 것일 때 식별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악도 의미에 가명을 씌울 수 있습니다.

상징에서 드러나는 악을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선으로 대답이 돌아옵니다.

다른 이를 위한다 하면서 다른 이의 목을 조르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대해 오늘 독서에서 이야기합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그들은 분명 능력이 있습니다.

선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옳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무너뜨리겠다는 이유는 언제나 충분합니다.

과거 조선시대에서는 부모의 원수라는 이유로 살인이 가능했고,

어떤 단체에서는 여성의 인권을 위해 남성은 모두 죽어야한다고 이야기하며,

어떤 단체에서는 자신의 보물을 모욕했다고 모욕한 이들을 파멸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기억을 되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작은 증오 작은 짜증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살인이라는 범행의 동기로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범행을 저지를 때는 그 이유가 나를 정당화시켜주는 친구로 보일지 언정

법정에서는 범행의 동기는 그 사람을 변호해주는 친구가 아닌

그 사람의 범행을 증명시키는 배신자로 돌아옵니다.

이는 하느님의 심판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짐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화답송에서는 악인들의 흉계를 하느님께 아뢰는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저 기도가 여러분의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상대가 바치는 기도입니까?

여러분이 모욕을 들으면 저 기도를 바칩니까?

아니면 그들과 똑같이 흉계를 꾸밉니까?

여러분이 하는 일이 정당화 될 것이라고 믿고서

“하느님은 벌하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진 않습니까?

저주만 퍼붓고 그 입은 거짓과 위협으로 가득 차 있진 않습니까?

 

[화답송시편 10(9),1-2.3-4ㄱㄴ.7-8ㄱㄴ.14(◎ 12ㄴ)

◎ 주님, 가련한 이들을 잊지 마소서.

○ 주님,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시나이까?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어 계시나이까? 가련한 이는 악인의 교만에 애가 타고, 그들이 꾸민 흉계에 빠져드나이다. ◎

○ 악인은 뽐내며 탐욕을 부리고, 강도는 악담을 퍼부으며 주님을 업신여기나이다. 악인이 콧대를 세워 말하나이다. “하느님은 벌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없다!” ◎

○ 저주만 퍼붓나이다. 그 입은 거짓과 위협으로 가득 차 있고, 그 혓바닥 밑에는 재앙과 환난이 도사리고 있나이다. 마을 은밀한 곳에 숨어 앉아, 죄 없는 사람을 몰래 죽이려 하나이다. ◎

○ 당신은 재앙과 재난을 보시고, 손수 나서시려 살피고 계시나이다. 힘없는 이가 당신께 몸을 맡기고, 당신은 친히 고아를 돌보시나이다. ◎]

 

우리가 저 기도를 바치려면 증오가 아닌 화해의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대항 방식입니다.

화해, 기다림, 침묵, 진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최근에 인터넷에는 또 우리가 최근에 미워하게 된 그 단체도

미러링이라는 행위를 주장합니다.

미러링, 거울을 보듯이 받은 것은 그대로 돌려주자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당한 모욕을 그대로 돌려주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미러링의 기초는 역지사지입니다.

'상대를 그 처지로 만들어서 내가 받은 모욕을 이해해라.' 라는 주장이죠. 말은 좋습니다.

그러나 불의에 대항하기 위해 불의를 행하면 불의를 옹호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살인을 했다고 내가 살인을 하고서

내가 받은 모욕을 이해해라 라고 이야기해도 살인자는 살인자입니다.

사람은 종교적인 동물이기에 하느님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기 때문이 아닌,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초대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분께 이끌리는 것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소리치지도 않지만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압니다.

옹호하든 적대적이든 무관심하든 말이죠.

 

우리도 하느님과 같이 초대하는 이가 되어야합니다.

이 초대에 호의적인 이들도 다가올 것이고, 적대적인 이들도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침묵 중에 초대하십니다. 그에 대한 반응은 이렇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불의의 반대는 선의이며,

흉계의 반대는 섬김이며,

배척의 반대는 초대이며,

조롱의 반대는 화해입니다.

하느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공동체에 선의를 선동하십시오.

섬김을 계획하십시오.

많은 이들을 초대하십시오.

화해로 초대하십시오.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갈대든 커다란 나무든, 작은 불씨든 커다란 불이든 끄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을 겁니다.

여러분의 손에 칼이 있습니까?

아니면 상대를 기다리는 빈 손이 있습니까?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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