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2019.8.29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예레미야서 1,17-19
복음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코 6,17-29
그리스도를 증거한 요한의 죽음
저는 성무일도에 있는 독서기도를 어떻게 바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독서기도에 그날 함께 묵상하면 좋은 교부들의 가르침이 적혀 있고
그래서 독서기도를 바친다기 보단 영적도서를 읽듯이 묵상하다가 읽곤 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을 맞이해서 성 베다 사제의 강론이 적혀있습니다.
이 강론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강론이 적혀있는데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죽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독서기도에 적힌 강론의 중심 주제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죽은 것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만 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순교한 것인가?
강론에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라는 억압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순교했다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이유는 조금 다르지 않나요?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의 시작이 이 지점이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을 보면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죽었다기 보단
옳은 소리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왕족들의 놀음에 휘말려서 죽은 것으로 표현됩니다.
왜 이 죽음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죽었다고 표현이 될까요?
이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조금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단순히 인간 예수를 증거 하다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다가 순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순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를 다르게 표현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고스이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네 하던 그 말씀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고 표현됩니다.
이 로고스 또한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왕인 그리스도이죠.
한 처음부터 있던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의 사랑 모든 피조물의 근간이 되었던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법칙이며
사랑으로 탄생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요한은 이 로고스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순교한 성인인 것입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관계는 단순히 죽은 형제의 자손을 일으키기 위한 관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불륜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사랑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행위이며
자신들이 하는 사랑의 행위도 하느님의 뜻과 멀어지는 행위였죠.
이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표현합니다만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를 포함한 모든 예언자들은
그리스도를 증거 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알았으며
그 사랑에서 나오는 법칙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나의 기둥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았던 이들은
왜곡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았고
이에 대항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수호하고자 선포한 것입니다.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서 세상이 제멋대로 흘러갈 때
수많은 의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수호자들을 우리는 의인이라 하며
우리는 하느님을 통해서 의화 되어 하느님 사랑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수호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법칙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지켜야할 것이며 무엇을 거슬러서 그리스도를 지켜야할 사안인지
이해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따르는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나의 삶을 돌아보아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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