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 맞서지 마라 >
2018.6.18
제1독서 ▥ 열왕기 상권 21,1ㄴ-16
복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오 5,38-42
당신 눈은 당신 자신을 평생 못 볼 지라도 당신 발은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복음을 읽을 때 이 복음을 식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옛날에 이야기 한 적 있지만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를 통해
‘무엇을 잊고 있는가?’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를 통해
‘이 행위의 결과가 무엇인가?’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를 통해
‘이것이 대상에게 어떻게 올가미가 되었는가?’
이렇게 해석하여 제 식별 기준으로 삼습니다.
저 말씀이 왜 이런 식별 기준이 되었는가?
예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기에 이는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오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 말씀이 왜 철회 되었는지 살펴봅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정말 효율적인 대처방안입니다.
사실 식별을 전하는 방법, 안 좋은 것을 안 좋다고 알리는 방법 중 가장 효과가 큰 방법이죠.
예를 들자면 만약 어떤 남자 아이가 한 여자 아이와 친해지고 싶다고
계속 아이스께끼를 합니다.
그게 악행이고 그 여자 아이와 친해질 수도 없는 방법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기 위해 바지를 벗겨버리는 그런 방법입니다.
그 아픔을 겪는 이와 똑같이 만들어서 죄를 알게 만드는 것이죠.
하느님께서도 비슷한 방법을 종종 쓰셨습니다.
대표적으로 요나 예언자에게 그러하셨죠.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느님께서는 적당히 가르침을 주시는데 문제는
인간들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나 자신 밖에는 볼 수 없었죠.
이런 방식으로 돌려받으면 자신이 했던 행위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당한 치욕만을 생각합니다.
서로 받은 걸 돌려주고 받은 걸 돌려주고 하다 보니 참 커져 있습니다.
이게 선행이면 참 좋겠지만 악행이 참 커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 입장을 알리기 위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가
복수를 위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로 변해버렸죠.
복수에 불타다보니 자신의 치욕을 극대화시켜
자신이 겪은 것 이상의 불행을 안겨주어야 복수가 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가 눈 하나에
머리를 날려버리는 상황이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기 시작했죠.
이것은 동서양의 한쪽에 치우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국 역사학자들의 이야기로는 조선에서는 유교 법률로
복수를 위한 살해는 효로 칭해져 감면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폐단이 하나 있었다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탐관오리를 신고하여 그 사람을 유배 보냈는데
그 탐관오리 아들이 신고한 사람을 살해되고 복수로 인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신고한 사람 아들은 탐관오리 아들을 죽이고
그렇게 자손 대대로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사실 오늘 독서의 이야기와 비교하자면
그래도 정정당당하게 있는 그대로 덤비는 사례이니 그래도 양반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아합이 나봇에게 거래를 거절당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제벨은 남편의 굴욕을 모함과 살해로 되갚아줍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가 실패한 이유는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눈이 평생 동안 보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의 행동을 제외하고 판단하였기에
나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 나에게 불쾌감을 안겨준 사람이 악인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객관적인 죄악과는 다른 것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여기서의 악인은
객관적인 죄악을 저지른 사람뿐만 아니라 내가 불쾌한 사람까지 포함됩니다.
오늘 나봇처럼 내 의견에 반대한 사람 저 사람만 없으면
내 인생이 필 것 같은데 저 사람만 없으면 공동체가 변할 것 같은데 하는 그 사람 말입니다.
그들에게 악으로 맞서지 마십시오.
나 자신을 못 본다 할 지라도 이를 기억하십시오.
맞서지 말고 옆에 서서 어떻게 하면 함께 갈 수 있을까 고민하십시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이 식별은
맞서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닌
옆에 서는 데에서 시작되는 식별입니다.
악인을 심판하려고 마음 먹고 있는 당신,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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