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미사 강론] 주님 공현 대축일 교황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강론[ 2019년 1월 6일 주일(주님 공현 대축일)]

글쓴이 :  Fran.님이 2019-01-10 22:39:21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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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9.index.html

https://www.vaticannews.va/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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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 2019년 1월 6일 주일(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제1독서 : 이사야서 60,1-6

                                        화답송 : 시편 72(71),1-2.7-8.10-11.12-13(◎ 11 참조)

                                       제2독서 : 에페소서 3,2.3ㄴ.5-6

                                      복음 : 마태오 복음2,1-12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9610&gomonth=2019-01-06&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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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교황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강론

 

바티칸 대성전

2019년 1월 6일 주일

공현. 이 말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2독서(에페소서 3,6 참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모든 민족들에게 알리시고 오늘 동방박사들에 의해 나타나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이들을 위해 오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심을 봅니다. 모든 민족, 언어 그리고 백성은 그분께 따뜻하게 맞아들여지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것은 빛으로 상징됩니다. 그 빛은 모든 것을 관통하고 모든 것을 비춥니다.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나타나시자 마자 헤로데 왕 궁 안에서 일어난 행동의 속임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오 복음 2,2). 그들은 그분을 찾을 것이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장소에서는 아닙니다. 즉 예루살렘의 왕궁에서가 아니고 베들레헴의 초라한 집에서입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이와 똑같은 역설을 보았습니다. 복음 말씀은 퀴리니우스가 총독으로 있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온 세상이 하게 된 호적 등록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루카 복음 2,2 참고). 그러나 그 시대의 위대한 사람들 중 아무도 역사적인 그 왕이 그들 자신의 시대에 탄생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서른 몇 살쯤에 당신 자신을 공적으로 알려지게 하셨고 세례자 요한이 앞서 나아가게 하셨을 때 복음 말씀은 다시 한번 더 엄숙하게 그 시대의 모든 “왕들”, 매우 세속적인 권력자들과 영적 권력자들을 열거하면서 그 사건을 한번 더 거룩하게 자리 매김합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본시오 빌라도, 헤로데, 필리포스, 리사니아스, 대사제 한나스와 카야파. 그리고 그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루카 복음 3,2). 왕들 중 누구도 아닌 광야에 있는 한 사람에게. 여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뛰어난 저명인사들의 명부를 들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도록 유혹 받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별이 팔라틴 언덕 위, 아우구스투스가 세상을 통치했던 곳 로마에 더 훌륭하게 나타났더라면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모든 황제들이 즉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별로 헤로데의 궁전을 비추었더라면 그는 악보다는 선을 행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빛은 그들 자신의 빛으로 빛나는 사람들 위에서 빛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어 놓으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빛나십니다. 즉, 그분께서는 어둡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빛과 세상의 빛을 혼동하는 것은 언제나 매우 큰 유혹입니다. 우리가 복음 말씀을 잘 섬기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얼마나 많이 권력과 명성의 유혹적인 빛을 추구해 왔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곳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으므로 우리는 잘못된 곳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춰 왔습니다. 그분의 친절한 빛은 겸손한 사랑 안에서 앞을 향해 비추십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또한 한 교회로서 우리 자신의 빛을 비추려고   해 왔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인류의 태양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빛, 주님이신 진정한 빛을 반사하는 달입니다. 교회는 달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십니다(요한 복음 9,5). 그분이,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빛은 그 빛을 받아 들이는 사람들을 비춥니다. 이사야서, 제1독서말씀(이사야서 60,2 참고)은 우리에게 그 빛이 어둠과 두꺼운 구름들이 땅을 덮는 것을 막아 주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빛을 받아들이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춥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예언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는 부르심에 대해 말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60,1). 우리는 일어나야 하고 우리들의 앉아 있는 삶에서 일어나야 하고 여정을 준비해야 합니다. 반면 우리는 헤로데가 물어 보았던 율법 학자들처럼 멈추어 서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비추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입을 때까지 말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빛처럼 소박하신 하느님 안에서 입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자만하는 가식의 옷을 치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헤로데와 같이 될 것입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의 빛보다 성공과 권력의 빛을 더 좋아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예언을 이룹니다. 그들은 일어나 비추고 빛을 입습니다. 그들은 홀로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봅니다. 율법학자들도 아니고 헤로데도 아니고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다른 길을 가야 하고 다른 길 그분의 길, 겸손한 사랑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오 복음 2,12)고 이야기하면서 끝납니다. 다른 길, 헤로데의 길과 다른. 세상의 그것이 아닌 선택된 다른 길,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즉 마리아와 요셉과 목동들이 가는 길과 같은 길. 동방박사들과 같이 그들은 집을 떠나 하느님의 길 위에서 순례자가 되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세속적인 집착들을 떠나 여행하는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율법학자들처럼 예수님께서 언제 태어나셨는지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곳으로 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헤로데처럼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분의 자리가 우리의 자리가 될 때, 그분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이 될 때, 그분의 사람이 우리의 삶이 될 때 그때 예언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태어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살아 있는 하느님이 되십니다. 오늘 우리는 동방박사들을 본받으라고 요구 받습니다. 그들은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출발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보기 위해 멈춰 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동방박사들은 자기자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신 한 분 앞에서 절을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에 집착하고 있지 않고 다른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들은 주님과 친밀하게 맞닿아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분께 완전히 열려 있음을, 그분과의 총체적인 관계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의 언어를, 아기이지만 이미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과 똑같은 언어를 씁니다. 사실 동방박사들은 주님께 받으려고 간 적이 아니라 드리려고 갑니다. 우리 자신에서 이렇게 질문합시다.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그분의 잔치를 위해서 예수님께 선물을 가져 갔는가, 아니면 우리끼리 선물 주고 받기만 했는가.

우리가 주님께 빈손으로 갔다면 오늘 우리는 그것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약간의 “선물 목록”을 줍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 황금, 금속 중에 가장 귀한 황금은 우리에게 하느님께 첫 번째 자리가 바쳐 드려져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분께서는 경배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첫 번째 자리에서 우리 자신을 치워야 하고 우리의 곤궁함을 인식해야 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다음으로 유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관계, 기도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분향같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시편 141,2)분향이 그 향을 내기 위해서 타야 하듯이 그렇게 또한 우리도 기도 안에서 어느 만큼 우리 시간을 “태워야” 하고 그 시간을 주님과 함께 써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몸을 사랑스럽게 감싸는데 쓰여질 기름, 몰약에서 봅니다(요한 복음 19,39 참고). 우리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몸들을 돌볼 때, 연약한 사람들과 버려진 사람들과 어떤 물질적인 것도 보답할 수 없이 그저 받기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몸들을 돌볼 때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되돌려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자비가 하느님의 눈에 소중합니다. 거저 줌! 거저 주는 것은 하느님의 눈에 소중합니다.

이번 성탄 기간 중에 그 끝에 다다른 지금 세속적인 화려함 속에서 오신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빛나는 가난 속에서 오신 우리의 왕께 소중한 선물을 드릴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그분의 빛이 우리 위에 비추실 것입니다.

 

강론영어원문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9/documents/papa-francesco_20190106_omelia-epifania.html

 

미사의 사진과 동영상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events/event.dir.html/content/vaticanevents/en/2019/1/6/epifani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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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 (2019/01/11 15: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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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F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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