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부활 축하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 사순절은 예수님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있는 전례 주간이 아니라
우리 각자 각자가 부활하기 위한 40일의 여정이라고 아마 사순절 시작할 때 제가 여러 번 얘기를 드렸습니다.
우리 자신이 뭐라고 예수님을 부활시키고 말고 합니까?
예수님은 부활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분은 이천 년 전에 부활하셔서 당신 고향으로 돌아가 성부 오른편에 이미 앉아 계시고,
해마다 오는 사순절은 우리 자신이 죄와 악으로부터 악습으로부터 부활하기 위해 필요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날, 사제인 저를 비롯해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겁니다.
‘40일 동안 어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몇 번을 넘어지면서,
얼마나 골고타 산까지 가서 오늘 예수님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했니?’
‘40일 동안에 바친 희생과 보석, 단순히 몸무게만 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세상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특별히 우크라이나의 전쟁에 길거리에 그냥 살덩어리처럼 누워있는 수많은 시신,
그들의 고통을 며칠이라도 생각하면서 봉헌했니?’
정말 부활 준비를 잘하신 분들은 분명히 부활의 기쁨이 어느 때보다도 컸을 겁니다.
성사 준비 잘해서 묵은 때까지 깨끗하게 도려낸 사람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할 겁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부활했는지 모르죠.
정말 내가 부활했는지 아는 건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저도 은퇴 후 첫 사순시기를 신자도 없이 보내느라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정신 바짝 차리고
강론 준비 잘해서 열심히 내보내려고 애썼습니다.
이렇게 사십일을 뒤돌아봤을 때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제물이 있었는가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셔야 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부활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역사를 두 쪽으로 나누셨어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시대를 우리는 BC라, 오시고 난 후의 시대를 AD라 부릅니다.
BC, Before Christ, ‘예수님 이전에’라는 뜻이고 영어로 되어있고,
AD, Anno Domini, ‘주님의 해’라는 뜻으로 라틴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우리는 주님의 해를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기원전과 기원후, 역사만 반으로 쪼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삶 전체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꿔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33년 살다 가셨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인간의 삶 전체를 완전히 바꿔 놓았을까요?
그분의 기적? 구마나 물 위를 걸으셨거나, 오병이어의 기적, 그런 것이 아닙니다.
33년의 삶 동안 역사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 놓은 것은
그분의 치유와 기적이 아니라 바로 부활입니다.
치유와 기적을 일으키고 난 다음에 그냥 죽어서 끝이라면, 그냥 유명한 마술사가 유대 땅에 살았다,
혹은 아주 훌륭한 예언자 한 분이 살다 갔다고 하는 것으로 끌일 겁니다.
그래서 부활은 인간의 역사에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은 33년 동안 살면서 특별히 마지막 3년 동안 살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모순과 악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경험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 모순과 악의 세계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문을 열고 나갔더니,
예수님에게는 진리와 은총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다시 말하면 옛날 모습,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었던 모습으로 되돌아오신 거죠.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이 세상에 수수께끼들이 다 풀렸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은 엄청난 파장을 갖고 왔어요.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은 그야말로 개판으로 살 사람들이 많아요.
그나마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래도 요나마 요 꼬라지로 사는 거예요.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 부활이 있고 심판이 있다는 걸 알면 함부로 사람을 못 죽이죠.
1917년에 제정 러시아가 볼셰비키혁명에 의해서 공산주의자가 됐어요.
그때 레닌과 스탈린이 서로 권력 싸움을 하다가 레닌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스탈린이 잡죠.
그리고 정적을 숙청하는데 약 8백만을 죽였다 해요.
그런데 놀랍게도 스탈린이 사제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소신학교 출신이에요.
신부가 되려고 했던 꿈이 있던 스탈린이 자기 권력을 위해서 800만 명을 죽였어요.
그리고 스탈린 자신도 독살을 당했어요.
참 아이러니하죠?
소신학교에서 신학교 밥 먹고, 고향 사람들에게 성인 신부 되라고 축복을 받으면 살던
스탈린이 마귀가 되어 800만을 죽인 것이죠.
큰 빛에서 큰 어둠으로 건너간 인간들은 찾아보면 많아요.
또 스탈린과 동시대에 살아서 서로 치고받았던 인간 히틀러도 있죠.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사람이에요.
오지리라고 그러죠?
오지리에 있는 수도원에서 꼬마 때부터 복사 섰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히틀러의 꿈도 수사였어요.
어릴 때부터 제일 열심히 하고, 제일 먼저 기도 준비하고 있던 애가 바로 히틀러였어요.
당연히 얼마나 수사님들이 히틀러를 좋은 수사 만들려고 노력했겠어요?
그랬던 그 히틀러가 사상에 빠지면서 1차 대전을 겪으면서 괴물로 바뀐 거죠.
그래서 수천만 명을 죽였잖아요.
스탈린이나 히틀러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을 세상 사람 대부분은 몰라요.
외인들한테 나도 쪽팔려서 얘기를 못 해요.
이렇게 이 세상은 모순과 악의 세계에요.
제가 언제인가 이야기했을 텐데, 제가 사제로 살아오면서 많은 일을 했고, 또 대개 건축과 관련이 많았죠.
그런데 어디든 꼭 한 번은 사기를 당했어요. 그것도 교우에게요.
하여튼 세상은 정말 불안전해요.
교회는 완성된 교회가 아니라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고 그랬죠
밀은 절대로 가라지가 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가라지는 영적인 세계에서는 언젠가는 밀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성당 다니면서 정말 못된 사람들 봐도
‘저 사람도 회개하면은 착한 신자가 될 수 있으니 내가 함부로 돌 못 던진다.’라고 다짐합니다.
제가 늘 얘기하죠.
‘누구한테 상처받았을 때 본인이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럼 병만 납니다.
하느님께서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알아서 심판하실 거고,
또 그분이 알아서 그 죄에 맞는 벌도 주실 겁니다.
나한테 상처 준 사람 때문에 내 하루하루를 언해피(unhappy)하게 살지 마십시오.
하루하루 얼마나 짧습니까?
하루하루 정말 기쁘고 깨가 쏟아지게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왜 나한테 상처 준 사람을 가슴에 담고 못 내보냅니까?
그 사람이 이뻐서 용서하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용서하려는 겁니다.’
예수님만큼 배반 많이 당하고 모순을 많이 보신 분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많은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 수혜자들이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죽이라고 외칠 때,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셨을지.
저는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새롭게 부활하려고 무던히 몸부림쳤어요.
부활하지 않으면 내가 사제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신자들 볼 때마다 사기꾼처럼 보이는 거예요.
하지만 내가 당한 상처들은 내 영혼에 남아있어요.
물론 못은 이미 빼냈어도, 못 박혔던 자리는 그대로 뚫려 있죠.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겠죠.
전 하느님한테 그거 치유해 달라고 애를 써요.
아마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저 밑에 나한테 돌 던지는 저놈들, 세상에! 38년 중풍 병자에 있던 애도 있네.
저 나병 환자 내가 고쳐준 애야. 그런데 제일 앞자리에서 돌을 던지고 침 뱉어?’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저 사람들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을 거예요.
사실 세상은 수많은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을 풀어보려고 이해하고 답을 찾으려고 우리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립니다.
왜 착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며 왜 악한 놈들은 떵떵거리면서 사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누가 얘기를 안 해주는 거예요.
답답하니 욥기를 쓴 저자는 욥이라는 인물을 등장시켜서 고통의 의미를 설명해보려고 애썼지만,
욥기에도 해답은 안 나와요.
결국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의인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대답이 나온 겁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 죽음의 정체가 무언지 우리는 몰라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이에요.
누구나 아무리 배짱이 든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음이 바로 코앞에 있으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을 겁니다.
내가 병원에 갔는데 ‘신부님 3개월밖에 못 사시네요.’ 하면 내가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껄껄걸, 아이고 드디어 주님 만나러 가네. 얼씨구 좋네.’ 그렇게 못할 거 같아요.
내 죽음만이 아니라 내 어머니의 죽음. 내 아버지의 죽음. 내 아내의 죽음.
더군다나 눈에 너도 안 아플 내 자식새끼가 내 앞에서 죽음의 상태로 있다면,
하느님이 정말 계신가 하며 알고 있던 교리와 상식이 다 무너져요.
강론 들었을 때 끄덕거렸던 그 많은 신앙의 다짐이 다 해체돼버려요.
세상 어떤 생명도 이 두려운 존재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죽음은 실제로 세상의 적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모순에 명쾌한 해답이 됐던 겁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은총의 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죽음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명쾌한 답을 주셨던 거죠.
그래서 당신의 부활로 세상을 건져내신 겁니다.
죽음에서 건졌고 죄에서 건졌습니다.
같은 공관 복음인 마르코 복음에서는 막달레나와 다른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천사가 거기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질겁을 합니다.
그럴 때 천사가 뭐라고 그럽니까?
‘겁내지 마라,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무서워 떨며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을 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도대체 사흘 동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니 절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죠.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던 겁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부활과 놀라운 행적에 대하여
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본래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무식하고 믿음이 약했던 자에요.
사회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자였고,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자기 사상을 논리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수준도 더더욱 아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식한 베드로가 놀라운 감화력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전도하면서
말씀으로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뭐냐? 부활 신앙이에요.
우리도 바로 그 부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 놀라운 사건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서 삶에 실천함으로써
세상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믿기는 믿어도 어정쩡한, 아무리 성당에 다녀도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갈등과 착각 속에서 고민하는 분들이 많아요.
이것은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에요.
부활 신앙이 없는 자들은 오로지 현실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지금 당장 잘 먹고 잘사는 것에 축복의 기준을 맞춥니다.
성당 가서 기도하는 이유가 현재 있는 문제 해결해 달라는 것이 주된 관심사예요.
아픈 거 해결해 주시고, 먹고 살게 해주시고, 우리 남편 사업 잘되게 해주시고,
아이들 좋은 대학교 가게 해주시고.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이 입에서 나오는 바람은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 속에서 회의만을 갖게 됩니다.
왜? 해달라는 대로 하느님은 안 해주시거든요.
그렇게 만만한 하느님이 아니에요.
하느님이 자판기예요? 아니죠.
하느님은 자기를 자판기로 아는 사람한테 답을 안 해주세요.
답이 없으니까 회의하죠.
신앙이 그렇게 끝난다면 이건 비극입니다.
어떤 형제가 세례받은 지 5년 됐는데 거의 냉담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주일미사는 물론 기도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신앙 자체를 성가시게 생각했죠.
그런데 제일 친한 친구가 갑자기 암으로 죽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다시 고백성사를 보고, 연령회에 들어가 많은 죽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활 신앙을 체험했다고 해요.
열심히 살다간 어느 할머니의 시신을 수습하는데, 그 할머니의 얼굴에서 빛이 나더래요.
죽고 난 다음에 썩은 냄새가 아니라 장미 향기가 나는 걸 자기가 맡았대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산 사람들은 이렇게 죽어서도 아름답다는 것을 체험한 거예요.
부활은 지금 내가 사는 이 현장에서 매일 새롭게 체험해야 할 숙제입니다.
그리고 내 삶이 주님을 닮아갈 때마다 우리는 부활을 미리 체험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2천 년 전에요.
그러면 누가 부활해야 한다고요?
김웅열 신부가 부활해야 하고, 느티나무 카페와 가족들도 새롭게 부활해야 해요.
부활 신앙을 체험한 사람은 바위보다 강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성당을 40년 50년을 다녀도 여전히 기복입니다.
여전히 현세에서 머물러요.
하늘을 안 쳐다봐요. 내가 가야 할 곳을 못 쳐다봐요.
그리고 행복하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신앙이 밋밋해지고 그나마 있던 신앙도 다 식어버렸다고 느낀다면 연도를 바쳐 보세요.
혼자 조용히 촛불 켜고 본인 이름을 넣고 연도 바쳐 보세요.
눈물이 콸콸 날 거예요.
내가 지금 이렇게 살면서 과연 이런 성인 성녀들의 기도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여러분들, 부활합시다.
무관심으로부터 부활하고, 무책임으로부터 부활합시다.
기도가 멀어져 있었다면 다시 잡아당겨야죠.
성사 생활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오늘 이 날짜를 기점으로 해서 다시 부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다시 한번 부활 축하드립니다.
♣2022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4/10)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