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은 죄인을 찍어누른다.

하늘호수♡님 2022-05-24 15:25 ... 조회(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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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8,1-11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어떤 범죄 심리학자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나 했대요.
한 청년을 간통한 남자로 꾸며 강력범들이 수감 되어 있는 감방에 넣었대요.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가?
그 남자가 들어가자마자 오만 죄를 다 지은 강력범들이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답니다.
너 같은 놈은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고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욕설을 하고 간수 모르게 구타도 했대요.
그 강력범들은 이미 자기 안에 지옥이 있기에 그대로 하는 거예요.
 
자, 이번에는 똑같은 죄목으로 억울하게 갇혀 있는 이들의 감방에 넣었대요.
그랬더니 정말 신기하게도 어느 한 사람도 청년을 괴롭히지 않았대요.
오히려 어떻게 하다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서 환경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더래요.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들은 죄가 없어서, 선하여서 그래요.
 
군대 생활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요.
대개 사고 친 적이 있거나 말썽을 부린 고참 일수록 졸병에게 심하게 얼차려를 주거나 몰인정하게 다룹니다.
그런데 군대 생활을 잘한 사람들은 신병이 오면 잘 챙겨줍니다.
 
제기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 복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참지 못해요.
가정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요.
그래서 라틴어 격언에 죄인이 죄인을 더 찍어 누른다.’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 속담에는 ‘방귀 뀐 놈이 성낸다.’가 있죠.
괜히 본인이 미안하니 소리 지르고 하죠.
죄인은 대부분은 죄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결국 죄인을 용서하는 자는 선한 사람들이죠.
특히 높은 선을 지향하는 사람들, 인격이 아주 높은 사람들은 절대 죄인의 죄를 묻지 않아요.
마치 오늘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과거를 들추어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모함하기 위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옵니다.
간음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3대 범죄 중의 하나입니다.
3대 범죄 첫째는 우상숭배, 다른 말로 신성모독, 둘째는 살인죄, 세 번째는 간음죄입니다.
이런 죄를 지으면 현장에서 즉결처분했어요.
끌고 나와 돌로 쳐 죽였죠.
율법에도 이런 범죄는 사형을 시키라고 활자화되어 나와 있어요.
레위기 20장 10절 ‘어떤 남자가 한 여자와 간통하면, 곧 어떤 남자가 자기 이웃의 아내와 간통하면,
간통한 남자와 여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
또 신명기 22장 13절에서 24절에도 간음한 여자와 농락한 남자는
성문 밖으로 끌어내 둘 다 돌로 쳐 죽이라고 나옵니다.
유대인에게 간음죄는 살벌합니다.
그래서 법적인 견해를 볼 때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 의견이 전적으로 맞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형을 면한 길 없는 상황이 오늘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상황이죠.
그런데 이런 여자를 예수님 앞에 딱 놓고 어떻게 하냐고 묻고 있어요.
만일 예수님이 ‘그래, 너희들 생각대로 죽여.’ 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전에 이야기했던 것,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분, 죄인들의 친구라고 하는 명성이
한순간에 사그라질 상황이었죠.
또, ‘죽이면 안 돼.’ 했다면,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깨트리는 것이고
간음을 조장하는 것으로 소문이 퍼질 수 있겠죠.
이렇게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찬성을 하기도 반대를 하기도
힘든 상황으로 몰아서 올가미를 씌워 죽일 구실을 찾았던 것이죠.
 
예수님은 어떤 행동을 취하십니까?
땅바닥을 쳐다보며 바닥에 뭔가 쓰고 계시요.
그리고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과 여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십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에게 ‘죽여? 살려?’ 하면서 서슬이 퍼렇게 되어서 대답을 다그치지만,
예수님은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뭔가를 쓰셨죠.
 
과연 무엇을 쓰셨을까요그리고 왜 몸을 굽혀서 그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수많은 영성 학자들이 정말 궁금했던 부분입니다.
보통은 세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첫 번째 해석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무언가 땅에 쓰시는 것은
성급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려는 의도이고, 본인의 시간을 좀 벌려 하는 것이다.
즉답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내가 영적 분별을 올바로 할 수 있는지를, 성부 아버지께 청하는 겁니다.
‘아버지, 제가 이래도 저래도 함정에 빠질 텐데 저에게 한 말씀만 하소서.’
화살기도죠.
하느님께 물어보고자 하는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하는 영성 학자들도 있어요.
일리가 있죠.
 
두 번째 해석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시간을 주어 스스로 잔인성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 말에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죠?
지금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흥분이 아주 극에 달해 온 거죠.
‘지금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아느냐? 그야말로 몸을 팔아먹고 살아야 하는 여자다.
아니면 굶어 죽어. 그 환경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느냐?’
잔인한 짓을 하려는 사람에게 짧은 시간의 여유만 있어도 살인을 면할 수 있다 해요.
욱하는 그 한순간에 우리는 많은 일을 저지릅니다.
살인범의 동기를 들어보면 계획 살인은 20%뿐이 안 돼요.
거의 다, 그 순간 말다툼하다 옆에 있는 것을 확 잡아서 때려죽인 것이죠.
이런 해석을 하는 영성학자는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이시기에 성부에게 답을 구하실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다음 세 번째 해석은 유명한 프랑스 모리악(Francois Mauriac)은,
간음한 여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시려 했던 것이라 했어요.
왜? 죄지은 자를 쳐다보면 얼마나 부끄러워했겠느냐는 거죠.
죄지은 여인이 부끄러워할까 봐 눈을 마주치지 않은 섬세한 사랑이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내서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해석 중 어느 것이 맞는지 저도 참 궁금한데,
나중에 예수님께 가면 물어볼 리스트 50가지 중 3번째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돌을 들고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명령 한 마디면 돌로 칠 준비가 되어 있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그렇게 여유 있고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으실 수 있는지, 참 내공이 대단하시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지금 우리 천주교로 보면 주교나 추기경 같은 고위 성직자들로 보면 돼요.
이렇게 소위 스스로도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고, 권위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 사람들의 태도는 원칙적으로
과실을 범한 자가 어찌해서 그와 같은 일은 행하였을까?’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참다운 권위의 존재 이유입니다.
 
예수님과는 달리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그런 식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살인, 간음, 우상 숭배하면 그냥 다 죽이는 것이죠.
어떤 상황에서 부지불식간에 우상숭배를 했는지, 정상 참작이라는 것은 전혀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참다운 권위가 있으려면 그래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참다운 권위를 가진 사람의 두 번째 의무는 최선을 다해 범법자를 개심시키는 일입니다.
어떠한 권위라고 단지 벌하는 것에만 급급하다면, 올바를 권위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은퇴 사제이기에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고 봐요.
예를 들어서 어느 신부님이 사고를 쳤어.
그렇다면 참다운 권위가 있는 주교님이라면 그 신부님의 옷을 바로 벗기는 것이 아니라,
면담을 통해 어떤 어려움이 있었기에 그랬는지 들어야 하죠.
신부님들이 여자 문제나 돈 문제를 일으켰다 해도, 그것을 시작으로 사고 치지 않아요.
대부분은 사제직에 대한 어떤 불편함, 뭔가 기도 생활을 못 하게 하는 것이 자꾸 꼬여,
처음에는 술을 가까이하고, 나도 모르게 여자에게 죄를 짓게 되죠.
그래서 참다운 권위가 있는 주교님은 그 과정을 이해하려 애쓰고,
일단은 공직에 물러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근신하게 하고,
그런 뒤 몇 년 지나서 다시 일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참다운 권위가 있는 주교님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현상만 보고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그냥 목을 쳐 버리는 거예요.
사실 환속한 신부님 가운데 이렇게 보면 주교님이 저 문제는 용서하실 수 있었는데,
차라리 몇 년 선교사로 내보내시든지 하시지,
그리고 저 정도는 신자들도 나중에 이해해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사제가 되었는데, 주교는 아버지인데. 자식이 잘못할 수도 있지,
자식 잘못했다고 내쫓지는 않잖아요?
본인이 인정하면 등 두드려주고 ‘그래, 애비 탓도 크다.’ 하면서 데리고 사는 것이 부모와 자식이죠,
주교와 사제의 관계도 이렇다는 말이죠.
 
참다운 권위라는 것은 범법자가 저지른 그 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단죄해서는 절대 올바른 권위라 할 수 없습니다.
죄지은 사람을 우울하게, 혹은 실망하게 만든다는지, 원한을 품게 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권위입니다.
권위의 역할은 죄인을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를 가진 사람은 마치 현명한 의사, 현명한 부모와 같아야 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권위는 단죄하는 것이었죠?
 
예수님은 이런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과는 다른 세 가지 태도를 보이십니다.
이것은 제가 묵상한 거예요.
예수님의 첫 번째 마음은 과오 없는 자만이 남의 과오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마태오 복음 7장 1절에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나오죠.
또,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갖고 시비 건다는 말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쉽게 빠지는 과오가,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 비핀적이라는 것이죠.
본인 죄에 대해서는 얼마나 너그러운 변호사 역할을 하는지 몰라요.
그러나 남의 죄에 대해서는 살벌한 검사처럼 대하죠.
자기 죄는 다 합리화하면서, 남의 죄는 자기 죄 백 분의 일도 안되는데도 그것으로 그 사람을 매장하려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누가 나한테 죄를 지었을 때 내가 심판하고 벌주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알아서 심판하고 벌줄 거예요.
 
두 번째 예수님의 마음은 죄를 범한 자에 대해서 제일 먼저 동정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 사람들과 만나면 ‘이놈은 죽일 놈이다’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내가 도와줄 수 있을까? 나도 전에 이런 죄에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하며 경험을 살려 어떻게 해서든지 영적으로 회복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요.
예수님이 쉽사리 죄를 용서하셨다고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에 그러니 이제는 돌아가거라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자비를 이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죄에는 나도 모르게 짓는 죄도 있고, 계획적으로 짓는 죄도 있어요.
우리는 후자를 대죄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남의 말을 할 때가 있어요.
오늘은 남의 뒷담화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사람은 없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남의 이야기를 하게 된 거죠.
그런 죄는 그 자리에서 통회하면 고백성사 볼 필요 없어요.
하지만 아주 계획적으로 지은 죄가 있는데, 자비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오늘 예수님의 용서는,
이제 죄는 용서했으니 염려할 것 없이 이제껏 네가 살아온 대로 실컷 죄짓고 살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지막 말씀은 ‘네가 이제까지 살아온 것은 그릇된 것이다. 나가서 너 자신과 싸워라.
아무려면 몸 안 팔면 입에 풀칠 못 하겠느냐, 세상에 먹고 살 수 있는 일이 몸 파는 것밖에 없겠느냐?’
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간음 자체를 용서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야비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이용해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아버지는 나를 안 버릴 거야.’ 하며 죄를 짓는다면 이것은 다른 문제죠.
하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죄에 떨어지고, 그다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은 정상적입니다.
 
이탈리아의 마피아 있죠?
이탈리아 사람들은 누구나 적어도 일생에 세 번 성당에 가요.
첫 번째는 태어나서 엄마 아빠가 데려가 세례를 시켜요.
두 번째 반드시 성당에서 결혼해요.
세 번째는 죽을 때 성당에 가요.
그런데 웃기는 것이 마피아도 그러는데,
영화 보면 권총 차고 패거리로 싸우러 가면서 신부님께 축복을 받으러 가요.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영화에서 신부님이 그들에게 축복을 줘요.
 
여러분, 제가 수인 사목한 것 아시죠?
그때 제가 수인들에게 세례를 많이 주었는데, 조폭들에게도 세례를 많이 주었죠.
하루는 미사 후 보니 수입차 3대가 들어오는 겁니다.
그리고 깍두기 머리가 내리는데, 그 애가 아마 청주 무슨 파 부두목 인가였죠.
그 뒤에 부하들이 내리는데, 금덩어리 차고, 몸에는 뱀인지 미꾸라지인지 문신을 했어요.
하지만 저야 감방에 있을 때부터 알았고, 조폭들도 제 앞에서는 아기처럼 굴었죠.
‘너 왔냐?’ 하면서 있는데, 미사 끝나고 나오는 우리 신자들은 너무 놀랐죠.
조폭 같은데 신부님이 조폭 머리도 막 툭툭 치고, 깍두기들이 90도 인사하고,
제가 갑자기 대부가 돼버렸죠.
왜 몰려다니냐 물으니, 무슨 파랑 나이트클럽 지분 때문에 한바탕하러 간대요.
그런데 그쪽이 연장을 쓰니, 자기들 연장 쓰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겁니다.
‘그것을 내가 왜 해 주냐?’ 하니, 자기 애들 안 다치게 축복을 달라는 거예요.
제가 축복을 주었겠어요? 당연히 안 주었죠.
그랬더니 이놈이 어서 영화는 봐서 이탈리아 갱들은 싸우러 갈 때 무기까지 축복해주는데
왜 안 해주냐고 합디다.
그래서 한국은 한국이고 이태리는 이태리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너 이상하게 되어 신문에 나오는 것 보고 싶지 않아. 너는 하느님의 자식이야. 성체 영했잖아.
너는 영원히 하느님의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임을 명심해라.’ 하고 돌려보냈죠.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를 이용하지 말라 하십니다.
용서받을 것을 미리 알고 죄를 짓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예수님은 굉장히 엄하게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다시 가서 죄짓지 마라. 남자 꾀려고 루주 바르고 분내 풍기며 다니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라는 뜻입니다.
 
용서라는 것도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용서받을 사람이 용서받을 자세가 안 되어 있다면 용서 못 해 줍니다.
‘나 너 용서할게’ 하면 마음이 조금 편할 따름이지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없죠.
 
오늘 복음은 정말 많은 영성 학자들의 잉크를 흘리게 했던 돌아온 탕자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많은 묵상 거리를 제공해 주는 그런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오늘 이 잡혀 온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라는 설도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나오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죠.
또 그들의 한마디에 돌로 쳐 죽이려고 돌을 들고 모여있던 군중들이 우리 자신일 때도 있을 겁니다.
또 오늘 주인공인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얘기라는 것을 깨닫고 얼마 남지 않은 사순절 잘 마무리 합시다.
 
아멘


2022년 사순 제5주일 (4/03)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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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릭스1254 (2022/05/25 11: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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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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