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치유의 단계

글쓴이 :  하늘호수♡님이 2021-02-22 21:00:10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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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1, 29 - 39

+ 찬미 예수님

일주일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특별히 말씀을 통해 오시는 주님께서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치유의 은혜 내려 주실 것을 믿습니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똑같이 바라는 것이 있지요.

굳이 2천 년이 아닌 3천 년 전이라도 세 가지는 같을 겁니다.

첫째, 병에 걸리지 않은 것. 둘째, 병이 낫는 것, 마지막 세 번째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해결된 것이 있나요?

지금도 병에 걸리죠. 어쩌면 병의 종류가 더 많아졌어요.

두 번째, 이것은 훨씬 나아졌죠? 예전에는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죠.

평균수명이 40이고, 60이 넘으면 환갑잔치를 해 주었죠.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병에 대해서는 쩔쩔맵니다.

세 번째 오래 사는 문제도 좀 나아졌습니다.

이렇게 이 세 가지 문제를 보면 발전한 것 같지만, 결국 영원히 병에 안 걸릴 수도 없고, 또 여전히 못 고치는 병도 많습니다.

요즘은 100세 넘기시는 분들이 있다 해도, 위의 세 문제는 정복될 수 없는 겁니다.

이 기본적인 세 가지 욕망은 인간이 원하는 대로 완전히 채워질 수 없죠.

 

그런데 2천 년 전에, 이 세 가지 기본적인 소망을 예수님이라는 분이 나타나 해결해주십니다.

마르코 1장 33절에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라고 나옵니다.

오늘 연중 제5주일 나해 복음은 평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복음과 같습니다.

그날 했던 앞부분에 나오는 베드로 장모님 치유 이야기는 오늘은 안 하겠습니다.

제 강론 유튜브 ‘2021년 연중 제1주간 수요일, 합심 기도가 기적을 낳는다’를 참고하십시오.

아무튼 병을 낫게 하고 죽은 자도 살리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보통 일이 아니죠.

온 고을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32절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고 나옵니다.

 

지금도 말입니다. 누가 병 낫게 해 준다면 갈까요, 안 갈까요?

벌떼처럼 몰려갑니다.

사이비들은 그것을 이용하지요.

‘아, 거기 뒤에 앉으신 분, 심장이 좋지 않네.’ ‘아이고, 어떻게 아셨어요?’

‘세 번째 줄 자매님, 자궁에 암이 있구먼.’

박수 치고 울고불고 난리 납니다. 모두 각본이죠.

아무튼 지금도 누가 병을 고쳐준다고 하면, 천주교 신자이든 개신교 신자이든

그 사람이 사이비인지 아닌지 확인도 안 하고 달려갑니다.

그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거죠.

누구나 그 상황에서 자기는 안 그럴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죠.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이것을 한순간에 해결해줬다 이겁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죠.

 

병들지 않고 살다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이가 들어 노쇠해질수록, 육신이 정신을 이깁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파집니다.

무릎이 아파 못 일어나면 마음도 자꾸 꺾이려고 합니다.

정신이 육신에 자꾸 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중요한 키워드는 3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구마를 포함한 치유를 하셨습니다.

두 번째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다 하셨죠?

기도가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세 번째 ‘자, 다른 고을도 가야 한다.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하십니다.

이 세 가지를 짧은 미사 중 강론으로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치유와 구마도 많이 강론했기에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만, 오늘은 정리하는 의미로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조금 특별한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틈만 나면 치유해 주고 마귀 쫓아주었는데,

그분이 돌아가실 때 은혜받았던 인간들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죠. 오히려 침 뱉고 돌을 던졌죠.

그것을 ‘망은’이라 합니다.

 

지난 금요일 강론에서 말씀드렸죠.(2021년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벌벌 떠는 헤로데 참고)

4 복음서에 중복되는 것은 하나로 생각하면, 기적이 총 30편이 나오는데,

그중 치유 사화가 14개, 소생 사화가 3개, 구마 사화 5개, 자연을 대상으로 한 기적이 8개라고 하면서 하나하나 설명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적의 수혜자였고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위급할 때 그 앞을 가로막은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왜 예수님은 이것에 대한 방비를 안 해놓으셨을까?

처음부터 배신당할 것을 알고 치유해 주셨을까?

예수님도 인간인데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망은’에 대한 묵상은 저를 맴돌게 합니다.

 

‘치유한다.’ 할 때 치유에는 영적 치유와 육적 치유,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가끔 물었죠. 영적 치유가 중요할까요, 육적 치유가 중요할까요?

대부분 열이면 아홉은 영적 치유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면, 영의 치유를 청하는 것보다 몸을 낫게 해달라는 것이 앞서요.

현실적으로 몸이 아프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이 이야기하신 대로 육의 치유보다 영의 치유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이 치유되면 다는 아니어도 병이 낫는 분도 저는 보았어요.

 

사실 육신의 치유는 한계가 있고 불확실합니다.

육의 치유를 받았다고 해서 그 후 죽을 때까지 다른 병 안 걸립니까?

부활한 나자로가 안 죽었어요?

성경에서 치유 받았던 사람들,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 치유 받은 여인, 하혈 멈춘 후 몇십 년은 더 살았겠죠?

하지만 결국 반드시 죽었어요.

육신의 치유를 우리는 인간적으로 간절히 원하나, 그 치유가 주는 보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의 치유는 영생을 보장합니다.

 

어느 형제분이 제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신부님, 그럼 영의 치유가 무엇입니까?’

신학적, 철학적인 것을 뛰어넘어 제가 ‘예수님이 영의 치유를 하셨다.

성령께서 영을 치유하신다’라고 할 때, ‘영’은 우리들이 보통 생각하는 3가지를 포함합니다.

첫째, 말 그대로 영혼(Soul), 두 번째, 정신(spirit), 세 번째 마음(mind), 이 세 가지가 같이 있는 것이 바로 영입니다.

하나씩 잠시 살펴봅시다.

영혼은 종교영역에서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심리학 서적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원리’라고 합니다. ‘저 사람 영혼이 망가졌어.’

정신(spirit)은 많은 철학자가 이야기합니다.

성령을 Holy spirit이라 하는데, 거룩한 정신이 성령이냐? 그것은 아니죠.

정신은 쉽게 말하면 지적이고, 다소 차원이 높은 원리를 의미합니다.

누군가가 정신이 좋다는 말은 기억력이나 지능이 높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세 번째로 마음(mind)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듯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영은 영혼, 정신, 마음을 모두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제가 ‘영의 치유’라 말할 때는 ‘영혼의 치유’뿐 아니라 ‘마음의 치유’, ‘정신의 치유’도 의미합니다.

내 영혼 안에 있는 상처가 있고, 정신 안에 있는 상처가 있고, 마음 안에 있는 상처가 있습니다.

영의 치유는 영생을 보장합니다.

 

제가 아까 묵상 거리를 이야기하면서

‘왜 예수님에게 치유 받고 다시 돌아와 감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까?’ 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을 치유해 주셨지만,

그냥 뛰어나가기 바빴지, 감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어요.

그리고 아까도 얘기했듯이, 예수님이 처절한 고통을 당할 때 대신 십자가 지겠다는 사람도

군중에게서나 제자들에게서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을 알고도 치유해 주신 것일까?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님은 영의 치유보다는 육의 치유를 먼저 해 주신 것으로 나옵니다.

아파 죽겠다는 사람 붙들고 치유 받을 자격 있는지 심사하고 면담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하나하나 면담할 시간도 필요도 없었던 겁니다.

‘지금 이 아픈 사람에게 내가 메시아라는 것, 하느님이라는 것은 상관없어!’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자식이 아프다고 할 때, 부모가 왜 아픈지, 어디가 아픈지 따지지 않아요.

자식의 고통이 본인의 고통으로 느껴지거든요.

예수님도 아픈 사람 앞에 놓고, 하느님이 어떻고 천국이 어떻고 네 믿음이 어떤지 따지지 않으시고

먼저 육신의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다 보니, 치유 받은 다음 누가 날 치유해 주었는지는 관심 없었어요.

‘아이고, 이제 살 것 같아, 육신의 족쇄가 풀렸네’

예수님은 분명히 그것을 알고 하셨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분은 어떤 치유든 조건을 붙이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은 영의 치유 없이 육신을 치유해 주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미리 아셨다는 거죠.

 

그러면 영 치유의 출발은 무엇인가?

영의 치유는 말씀으로 시작이 됩니다.

다행히 치유 받은 중에서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말씀 듣고 영의 치유가 된 다음 육의 치유가 된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좀 전에 말했듯이 예수님은 일단 아픈 사람, 그 사람의 믿음의 깊이를 확인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무조건 치유해 주시고 무조건 마귀를 떼어내 주셨어요.

그리고 그것에 대한 어두운 결과가 훗날 당신에게 어떻게 온다는 것도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치유 받은 사람들 대부분 영이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육신의 치유부터 받았기에,

망은의 인간들이 되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실 때, 침을 뱉고 돌을 던졌던 거죠.

예수님만큼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망은을 겪으신 분이 있을까?

 

그래서 치유는 말씀을 들으면서 치유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합니다.

제가 강론을 시작하면서 오늘 주님께서 사제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이 치유되길 바란다는 축복기도를 했죠.

바로 그거예요.

사제들은 강론 준비와 강론 할 때, 2천 년 전 말씀으로 영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입이라는 책임감을 느끼며 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치유될 때 치유 성가 같은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저는 정말 힘들었지만, 은총의 밤에 정말 온 정성과 온 힘을 다해 치유 성가를 불러드렸어요.

굳이 안수해야만 치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들으며 영의 치유가 이루어지고, 치유 성가를 들으며 마음의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손을 대신해서 하는 사제의 안수를 통해서도 치유가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제의 손보다 더 큰 은혜가 내려오는 것은 바로 성체를 영할 때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마다 예수님은 내 안에 오시어 내 머리 꼭대기부터 발가락까지 다 치유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이런 마음으로 영해야 합니다.

 

정리하면, 말씀을 통해 회개하여 영의 치유가 이루어지고,

그다음 육신의 치유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육신의 치유를 받으면,

반드시 그 사람은 돌아와서 감사하지만,

말씀 없이 회개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오로지 육신의 치유만을 청하면 망은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예수님 몸 아파 죽겠어요. 내 몸 낫게 해 주세요.’ 하기 전에 영의 치유를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의 치유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시작됩니다.

 

시편 81장 10절(성경 81장 11절)에 ‘다만 입을 크게 벌려라, 내가 채워주리라.’ 하셨습니다.

적어도 여러분은 입은 벌려야 합니다.

입이 다물어져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주님께서 채워 주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사제 강론을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의 입을 열어야 합니다.

귀를 닫아놓고, 입을 닫아놓고, 여러분의 모든 세포를 닫아놓았을 때

예수님이 이 자리에 나타나시어 말씀으로 여러분을 치유해 주시려 해도 절대 치유되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은 망은의 결과를 아시면서도 그냥 측은함 때문에 아파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말씀을 주시기도 전에 먼저 치유해 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도 예수님은 받아들이셨습니다.

돌에 맞아 피가 흘러 고개를 들어 돌 던지는 사람을 보니, 세상에! 내가 치유해 준 나병환자!

 

예수님은 우리의 영이 치유되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리고 육의 치유도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것으로 우리에 대한 그분의 계획이 끝이 아니라, 마귀도 떨어져 나가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던 베드로 장모가 치유되자 즉시 일어나서 시중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치유 받은 자의 첫 번째 모습은 봉사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치유를 받고 오늘 이 시간까지 살아가고 있다는 것 아시죠?

왜 나는 치유가 안 될까?

예수님이 그 소리 들으시면 얼마나 서운하실까요.

'이천 년 전만이 아니라 지금도 그런 인간들이 이렇게 많구나.

어떻게 은혜를 주어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다 자기가 잘나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구나.'

우리 절대 망은의 인간이 되지 말고, 주님이 주신 작은 은혜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는 인간이 됩시다.

아멘

 

♣2021년 연중 제5주일 (02/07)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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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릭스1254 (2021/02/23 10: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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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백발 (2021/02/23 11:5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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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멘,김웅열(토마스 아퀴나스)신부님, 강론말씀감사합니다, 신부님, 영육간에건강하시고 하느님의은총이 충만하시기를기도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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