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만남과 따름

글쓴이 :  하늘호수♡님이 2021-02-12 23:06:38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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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1,14–20

 

+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한번 성경 구절 따라 해 보시겠어요?

야고보서 1장 22절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저 말씀을 듣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만 듣지 말고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지요?

이 말은 모든 크리스천 백성에게 하시는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이에요.

사제도 마찬가지고 수도자도 마찬가지고 주교님도 마찬가지지요.

아무리 좋은 소리 들어봐야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열매가 맺어지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지식으로밖에 남지 않는다는 거죠.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교리적인 하느님이 계시고 체험적인 하느님이 계시죠.

교리적인 하느님이 바탕이 되어있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체험만 강조하면 잘못하면 기복이 되기 쉬워요.

반대로 교리적인 하느님만 강조하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없으면 그야말로 드라이해요, 민숭민숭.

수십 년을 다녀도 뜨거운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마지 못해 껍데기만 천주교 신자지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본 적도 없고, 체험해 본 적도 없다는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교리적인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생활의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체험적인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우리 신자들이 사제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저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하고

다른 사람 앞에 가서 지식 자랑하는 재료로 쓰는 것을 절대 원치 않습니다. 뭔가 변화되기를 바래요.

그래서 변화되게끔 하기 위해 제 강론 스타일은, 물론 저도 끊임없이 묵상해서 새로운 묵상을 여러분들에게 안내해 드리지만,

그 묵상에 정말 큰 뿌리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릴 만하면 다시 이야기해드리고 또 이야기해드립니다.

묵상도 보면 잔가지가 있고 뿌리가 있어요.

뿌리를 잊어버린 채 잔가지만 묵상하면 성장이 잘 안 됩니다.

우리 신자들이 그저 듣기만 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완급 조절을 사제들은 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은 ‘또 저 얘기하시네,’ 할 정도로 뿌리가 확 박히게 해 줘야 합니다.

지나치게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복음은 끝없이 해야 합니다.

 

금요일에 평일 강론이 뭐였습니까? 혹시 기억하시는 분 계십니까?

12 사도 임명하는 이야기가 나왔죠? 똑같은 마르코 복음이고 3장이었죠.

그런데 오늘은 1장이고 제자 선택하시는 것이 나옵니다. 뭐가 다른가요?

오늘 복음에는 어부 두 형제를 갈릴래아 호수에서 선택해요.

지난 금요일 마르코 복음 3장에 서는 산에서 내려오시자 당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부르셨다고 나오죠.

마치 몰려있던 사람 중에서 뽑은 것처럼 묘사돼요.

또 지난 마르코 복음 1장에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4명을 선택했는데,

3장에서는 마치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한꺼번에 열둘을 다 뽑은 것처럼 보이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 복음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뽑을 때를 설명하는 것이고, 마르코 3장은 이미 다 뽑힌 사람을 정리하는 말투였죠.

그래서 모순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 성경에 열두 제자를 어떻게 선택했는지 12번이 다 나오지 않습니다.

제일 핵심적인 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부였던 형제 두 쌍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도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십니다.

이 말에 이미 복선이 깔려 있어요.

‘사람 낚는 어부’, 뭔가 어부를 선택하시려나 하는 생각이 들죠?

아니나 다를까, 어부들 두 형제를 부르시지 않습니까?

 

지난 금요일에 선택은 다른 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과 같다고 했습니다.

부르심을 받고 앞으로 그분에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열두 제자는 만납니다.

 

언젠가 이야기했듯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과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우리 개인의 역사, 우리 가정의 역사, 우리 공동체의 역사가 쓰입니다.

그래서 만남이 참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바뀝니다.

어두운 사람을 만나면 어두워질 수밖에 없고 희망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희망으로 바뀝니다.

정말 사람 만나는 것 참 중요합니다.

모든 만남 중에서 제일 고차원의 만남을 우리는 신과의 만남이라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적인 용어로 하면 하느님과의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하느님과의 만남을 하느님 입장에서는 ‘부르심’이라고 표현하고 우리 입장에서는 ‘따름’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이 부르시고 우리가 따를 때 만들어지는 작품이 만남입니다.

아무리 부르셔도 우리가 따르지 않으면 그분과의 만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미사 때 사제의 입을 통하여 하느님이 목이 터져라 ‘내 오늘 너를 만나러 왔다’하고 부르셔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 만남은 불발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따름입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에 삶으로,

행동으로 보이라고 했는데 그 행동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적어도 뭘 각오하고 따라야 하느냐.

그리고 하느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하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그 상황이 오면 당황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아 이 순간이 주님을 따르는 순간이구나. 나는 준비돼있는 사람이야.

나는 말씀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옛날 어느 신부님이 가르쳐줬기 때문에 나는 무서워하지 않아.

그리고 얼마든지 극복하면서 주님 계속 따라갈 수 있어.’ 이렇게 돼야 하지 않겠는가.

 

따름에 대한 묵상은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한평생을 주님을 따르는 방법이, 또 따라야 하는 각오가 수도 없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단추를 잘 채우면 옷매무새가 분명히 이뻐질 것이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그다음부터는 아무리 잘 끼워도 앞에서 보면 웃깁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따를 때 첫 단추가 무엇인가?

저는 으뜸으로 첫 번째 단추를 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름은 포기를 뜻합니다.

행복은 포기하는 것만큼 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말이 아직도 포기할 게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기적은 포기하는 만큼 구체화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실 때 시몬과 안드레아는 오늘 복음에 뭘 포기한 걸로 나옵니까?

그물을 포기합니다.

그물은 다른 말로 재산을 모으는 도구입니다. 물질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이제껏 나를 살렸던 그물, 그 안에 고기가 들어오면  팔아서 저축도 하고 땅도 사고했던 그물을 포기하고 따라나섭니다.

단순히 고기 잡는 도구로서 그물만을 뜻하지는 않지요?

그리고 조금 더 가다가 야고보와 요한 어부 형제를 만났을 때 ‘따라오너라’ 하시니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을 포기합니다.

같은 어부라 하더라도 시몬 형제에게 포기하라고 하신 내용과 야고보와 요한에게 포기하라고 한 내용이 다릅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포기해야 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김웅열 신부가 사제로 하느님 따라가면서 포기해야 하는 것이 다르고, 여러분 각자가 포기해야 할 내용이 다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포기할 것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비의 집’, 이 3가지를 포기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떠나서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75세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브라함에게 돈이나 재산 포기하라는 말은 안 하셨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아브라함은 양들을 데리고 말과 소 같은 재산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찾아갑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재물을 포기하라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피붙이를 포기하라 하고, 이렇게 포기하라는 내용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에게 재산 포기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을까요?

아브라함은 재산을 갖고 있어도 그 재산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절대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포기하라는 것을 보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부자라도 참 착한 부자, 욕심 없어요, 얼마나 통이 크고 가난한 사람들 잘 도와주는지 몰라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 재물이 우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부자의 수천 분의 일밖에 안 되는 작은 재물이지만, 그렇게 인색하게 살아요.

자기가 다른 이에게 도움받았던 것은 다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다른 이들 도와야 할 때는 움켜쥐고 안 내놓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이들에게는 가족을, 어떤 이들에게는 재산을, 어떤 이들에게는 십대 독자를,

어떤 이들에게는 건강을 포기하게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포기 요구를 받을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모질게 하시나?

 

재산의 우상에 사로잡혀 살던 어느 기업가가 돈 잘 벌었죠.

돈 잘 버니 당연히 주일 지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고. 그러다 IMF를 맞았습니다. 쫄딱 거지가 됐지요.

부인과도 이혼하고 아이들도 다 흩어지고, 벤츠 굴리며 살던 사장님이 그야말로 노숙자 신세가 됐습니다.

어느 날 명동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두 발이 성당을 향해 올라갑니다.

십몇 년 냉담하던 그는 성당 구석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합니다.

그 사람은 재산을 잃고 난 다음에 재산보다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을 되찾은 겁니다.

눈앞에서 우상이 사라지고, 대신 하느님이 자기의 보물로 나타난 것이죠.

 

하느님에게 손주, 손녀 뺏겼다고 신학교, 수녀원 앞에서 데모하던 할아버지가 후에 의젓한 사제, 수녀가 됐을 때,

‘아, 내가 내 핏줄을 뺏긴 게 아니었구나’ 하며 하느님을 다시 찾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자식들을 키우려 할 때, 효도도 보고 내 사랑의 한 부분이 되듯이 말입니다.

건강염려의 한 조각까지 포기할 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오래전 군종신부할 때 잘못 수혈받아서 정말 20년 가까이 C형 간염 보균자로 살았습니다.

의료진에 대한 분노. 아무 이유 없이 수혈 한번 잘못 받았다는 그것으로 늘 내 마음속에는 화가 있었습니다.

그때 함께 수혈받았던 분들은 벌써 오래전에 다 돌아가셨죠. 나도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내 몸 안에 있는 수백만 마리의 바이러스와 화해했습니다.

‘그래, 오늘 이 순간부터 너를 내 몸의 일부로 인정하마.’

그때부터 얼마나 마음이 편해지는지.

물론 지금은 몇 년 전에 신약이 나와서 이제는 정말 기적처럼 치유되었습니다.

내 몸 안의 암 덩어리 낫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기보다 그냥 그것까지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은 일하실 수 있습니다.

기적은 내가 애착하는 마지막 하나까지 포기할 때 일어납니다.

마치 어둠의 맨 마지막 한 조각이 사라질 때 한 줄기 빛이 들어오듯이 말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자들의 첫 번째 덕은 포기입니다.

저도 한평생을 이 포기와 싸움을 하고 살아갑니다.

포기했다 싶으면 또 살아나는 게 있고, 오래전에 포기한 줄 알고 맞설 이유가 없겠다 싶으면 또 되살아나서

나에게 또 덤빌 때가 있고. 하느님을 따르는 것은 포기의 삶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을 따른다는 것은 고통을 전제로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나는 고통 없이 주님을 따르고 싶어’ 절대 못 그럽니다.

제 경험을 봐도 그렇고 우리 교회의 역사를 봐도 그렇고 여러분들이 살아온 각자의 삶을 뒤돌아봐도

고통 없이는 주님께 한 발자국 못 나갑니다. 그냥 껍데기만 왔다 갔다 하죠.

그러나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죽음의 밑바닥까지 체험한 사람은 하느님을 압니다.

그리고 나를 살려주신 그 인격적인 하느님을, 또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압니다.

 

루카 복음 9장 23절에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베드로 전서 4장 12절에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시험하려는 것이니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호들갑 떨지 마십시오'

 

구약의 예언자들, 신약의 사도들, 수많은 성인 성녀들, 그리고 세례받은 모든 이들은 주님을 따르려면 고통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12 사도 중 11분이 처참한 순교 당했다고 했죠?

유일하게 육신의 순교를 안 한 사도 요한도 초대 교회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얼마나 영적인 순교를 한 분인지 모릅니다.

‘아이고 주님, 왜 빨리 안 데려가셔서 이런 꼴을 보게 하십니까’

사도 요한은 95세까지 교회의 어른으로서 교회를 지키다 돌아가셨습니다.

유배도 여러 군데를 다니셨고, 무엇보다도 성모님 다치게 할까 봐, 성모님한테 해가 될까 봐 사도 요한은 성모님을 목숨을 걸고 지켰습니다.

성모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그 옆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자리에서도, 성모님이 돌아가시는 자리에서는 사도 요한은 성모님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11 사도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전 세계를 다니면서 세속 말로 곱게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톱으로 몸뚱아리가 잘려 죽는 사도가 있고, 돌에 맞아 죽은 사도도 있고, 베드로 사도처럼 거꾸로 죽은 사람도 있죠.

그 광경을 보고 당시에 누가 저 사람 복 있는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아이고 저 사람 예수 믿다가 홀라당 망했네, 뭐 저리 흉악하게 죽어. 뭐 팔자가 저래?’

지난 금요일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선택받은 사람의 최후 목표는 순교입니다.

영적인 순교든 육적인 순교든 오늘 말씀처럼 고통을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바오로 사도의 신학은 그의 스승, 당대의 유명한 가말리엘이라는 랍비에게 배운 신학이 아닙니다.

바오로 신학의 밑바닥에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의 동일화를 이뤘던 것이죠.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알다시피 불치병이 있다고 그랬지요?

의학자들은 조심스럽게 간질병이었을 거라 합니다.

설교하다가 발작이 일어납니다.

거품을 물고 뒹굴고 깨어났을 때 얼마나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성경에 바오로 사도는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간절히 가시를 뽑아달라고 예수님께 애원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가시를 뽑아주시지 않았습니다.

코린토 2서 12장 9절에 말씀을 대신 주셨죠.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바오로야, 진복팔단에서 말하지 않았니? 내 권능은 건강한 자가 아니라, 가진 자가 아니라, 힘 있는 자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 안에서 드러난다. 너 간질병 발작할 때마다 창피하지? 그거 극복해야 해.

나는 십자가에 매달릴 때 너보다 훨씬 더 쪽팔리고 창피했어. 하느님의 아들이 팬티 한 장 걸치고,

너 그렇게 나처럼 죽어본 적 있어? 너 몸 아픈 것으로 질질 짜지 마.’

이 이야기를 듣고 바오로 사도는 고통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그리고 답을 드리지요.

'이제부터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이제까지는 간질병 환자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까 봐 간질 발작이 일어난 동네는 절대 간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제가 간질병 환자라는 것 자랑하고 다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제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입니다.

그러면서 갈라티아서 2장 20절에 그 위대한 말은 바오로 사도는 하셨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스도와의 동일화가 이뤄진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티아서 6장 14절에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합니다.

여러분들, 고통스러우시면 하느님에게 봉헌하십시오. 그리고 자랑하십시오.

 

우리가 존경하고 따르는 중세 시대를 정화 시킨 위대한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 말년에 완전히 눈이 멉니다.

그때냐 비로소 프란치스코 성인은 인간의 마지막 축복인 빛의 축복마저 뺏기고 난 그때,

비로소 하느님과 지복직관의 경지에 이르십니다.

시력을 잃고 난 뒤에야 하느님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소경이 되고 난 다음에야 하느님을 보고 너무너무 기뻐서 만든 시가 바로 태양의 찬가 아니겠습니까?

‘오 아름다워라’ 그 태양의 찬가는 고통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환희의 시였습니다.

태양의 찬가를 보면 어둠을 향하여 형제라고 하고 죽음을 향하여 누이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은 최후에는 알몸으로 맨 흙바닥에 엎드려 숨을 거둡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디 ‘포기와 고통’, 두 가지뿐이겠습니까? 시간이 지금 안 되기 때문에 제목만 말씀드립니다.

하느님을 따르려면 투쟁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것은 종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 포기와 고통만 가슴에 새깁시다.

 

주님이 부르시고 우리는 따릅니다.

그런데 잘못 따르면 엉뚱한 곳으로 갑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예수님이 사셨던 것을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첫 번째 포기입니다.

두 번째는 고통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십자가를 끌어안을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냥 평탄하게 살던 평범한 사람, 4명이 선택받습니다.

선택받는 그 순간 그들이 인간의 삶으로서 마지막이 온몸이 찢겨 죽는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순교라는 것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야 이 양반 재주가 많은 사람인데? 쫓아다니면 나중에 그래도 돈도 많이 벌고 한자리할 거야’ 그때는 그랬던 거죠.

그런데 그들이 어느 때 바뀌었다고 했습니까?

다락방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성령이 내려왔을 때.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했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성령이 함께할 때 어떤 순교든지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하지 않을 때는 손에 가시 하나 찔려도 하느님이 작은 가시 하나 박아줘도 하느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만나러 이 거룩한 성전에 왔고, 말씀을 통해서도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주님이 들어가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체를 통해서도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십니다’ 하는 그 역사가 오늘도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아멘

 

 

 

 

♣2021년 연중 제3주일 (01/24)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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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샤모바일에서 올림 (2021/02/13 02:01:53)
 이 댓글이 좋아요 싫어요
아멘
제 카스로 담아가려는데 링크가 보이질 않네요
  
  펠릭스1254 (2021/02/13 11:48:52)
 이 댓글이 좋아요 싫어요
† 아~멘~
  
  백발 (2021/02/16 10:5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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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멘, 김웅열(토마스 아퀴나스)신부님, 강론말씀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영육간에건강하시고 하느님의은총이 충만하시긱를기도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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