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하쿠나 마타타! 뽈레 뽈레!

글쓴이 :  하늘호수♡님이 2020-06-26 21:06:19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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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어제 순례 온 본당에 같이 아프리카에서 온 젊은 신부님이 한 분 있었어요.

정말 까매~ 미사 후 제의실에서 20여분 정도 얘기를 나누는데, 좀 놀랬어요. 왜 놀랬느냐?

이제껏 만난 외국 신부님 중에 제일 해맑았어. 영이 정말 맑았어요.

성모님 램프를 주었더니, 이것을 들고 제의실에서 어깨를 들썩이면서 춤을 추는 거예요.

‘너만 그렇게 밝으냐?’ 물으니, 딴 사람들도 다 밝대요. 자기들은 덩실덩실 춤도 추고.

어제 강론준비를 하면서 아프리카 사제의 춤, 그리고 함께 나눈 대화도 계속 생각났어요.

아들 뻘 되는 젊은 신부지만 참 예수님이 사랑하실 그런 영혼이다.

아직은 낙후된 아프리카, 그렇지만 가끔 언론에 등장하는 그들의 행복지수는 우리나 유럽 사람들 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오죠.

그 이유가 뭘까? 행복지수의 비밀을 언어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어요.

자주 쓰는 언어가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기에 체감하는 행복지수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들이 많아요.

 

지금 가르쳐 드리는 아프리카 말은 아프리카 신부가 알려준 말 이예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두 개있는데, ‘뽈레뽈레’와 ‘하쿠나 마타타’

‘뽈레뽈레’는 ‘천천히 천천히’ 라는 뜻이고, ‘하쿠나 마타타’는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자기는 어릴 때부터 ‘싫어’ ‘못해요’ ‘빨리빨리 나와라’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대요.

오히려 아이들이 서두르면 ‘뽈레뽈레’, 그리고 힘들 때 부모님들은 ‘하쿠나 마타타’

 

아까도 말했죠? 자주 쓰는 언어가 의식을 지배하고 나중에는 행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조급하게란 말에는 – 빨리빨리 라든지 – 부정적이고 불안한 심리가 분명히 숨겨져 있어요. 

 그리고 느긋한 말에는 긍정적이고 평화로운 심리 상태가 분명히 담겨져 있어요.

매일 아침, 또 힘들고 지칠 때는 주문처럼 외우세요. ‘하쿠나 마타타.’

이 아프리카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듣는 단어는 굉장히 정적인 단어죠? 그렇죠?

그런데 잘 사는 나라일수록 ‘빨리빨리’. 총알처럼, 톱니바퀴에 물려 돌아가는 것 같은 모습.

자주 쓰는 언어가 의식과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을 그 사제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강하게 느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인간들은 과연 어떤 것의 지배를 받아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로

고착화되었는가 하는 것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는 굉장히 험한 길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m, 예리고는 해면보다 400m가 낮아서 그 차이가 1,100m.

거기다 30km나 되는 먼 거리에, 좁고 돌도 많았기 때문에 강도들의 기습이 잦았어요.

한 여행자가 그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다 죽게 되었고, 그 곁에 세 종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보인 모습은 분명히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모습이 아니겠지요?

 

첫 번째는 누구였습니까? 사제, 제사장입니다.

이 첫 번째 사제의 모습은 형식주의형 인간이라고 표현합니다.

강도를 만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봤을 때 동정심은 당연히 일어났겠죠?

그런데 도와주려고 하니 갑자기 어떤 성서 구절이 떠올랐느냐? 민수기 19장 11절!

<시체에 몸이 닿은 사람은 7일간 부정하다. 그리고 죽은 자를 만지면 성전에서 차례로 돌아온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

이 제사장은 자기가 제일 귀하게 여기는 ‘제사장이라는 가치’를 잃어버릴 위험 때문에 지나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웃 사랑에 대한 요구보다 의식상의 요구를 더 먼저 따르는 유형입니다.

 

성당에서는 지극히 모범 신자지만 집에서는 0점짜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워있는 시어머니 머리에 서캐가 허옇게 끼고 목욕을 못해 냄새가 나지만,

자신은 기도방에 앉아 열심히 15기도, 9일기도 묵주를 돌려댑니다.

병든 부모는 어디다 맡겨 놓고 ‘난 내 의무 다해.’ 자기합리화하며 늘 찾아뵙기가 싫습니다.

눈금도 맞지 않는 자신의 잣대로 하느님을 재고 이웃을 재고...

그런 삶이 결코 편하지 않을 겁니다. 평화와 기쁨이 없습니다.

 

두 번째, 누가 그냥 지나갑니까? 레위. 레위는 안전제일 지향형의 인간이다.

당시 실질적으로 도적들이 속임수를 쓰는 수가 가끔 있었습니다.

부상당한 척하고 살려달라고 해서 누군가 접근하면 칼을 들이대서 물건을 빼앗는 등.

이런 일들이 종종 있다 보니깐 이 레위인도 마음속에서는 ‘진짜일까? 가짜일까?’

‘어휴, 가야지. 만일 저러다가 해코지 하면 어떡해?.’

마음속으로 도울 생각은 없었던 겁니다.

 

요즘 옆집에서 ‘도둑이야’하고 창문을 통해 소리가 나면 어떻습니까?

몽둥이를 들고 도둑 잡으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집 문부터 먼저 걸어 잠급니다.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가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것을 봐도 반응은 둘입니다.

창밖을 내다보든지, 갑자기 자든지.

명동 한 가운데에서 깡패 수십 명이 한 사람을 폭행해도 그냥 지나갑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어느 자매가 남편 만나러 서울역 앞에 있는 대우빌딩 들어가서 남편 만난 건 까지는

 확인됐는데, 그 다음부터 6개월 동안 행방불명이 됬었습니다.

남편을 만나고 서울역의 지하도를 올라와서 차를 타려고 서울역 광장을 지나는데

갑자기 웬 남자가 오더니 따귀를 때리며, “너 바람피우고 도망치면 못 잡을 것 같았어?”

“아저씨, 왜 이러세요?” “너 남편을 보고, 아저씨?”

그리고 바로 멱살을 잡고 봉고차에 집어 넣어버렸대요. 청량리 가서 팔아 넘겨졌던 거죠.

잡혀가 살다가 6개월쯤 지나서 죽기각오하고 빠져나와서 경찰서에 신고합니다.

지금은 연락이 끊어졌지만 그 자매 15여년 정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요.

자기는 자기를 창녀촌에 팔아넘긴 그 놈들도 죽이고 싶지만 더 죽이고 싶은 사람은 누구냐?

자기가 끌려갈 때 그렇게 소리쳐도 불구경하듯 한 그 사람들이래요. 그 증오와 분노.

그 서울역 광장에 수백 명이 쳐다봤대요. 전경들도 쳐다봤대요.

 

안전위주형 인간은 이기주의를 낳고 나아가서는 무관심을 낳습니다.

무관심의 죄가 얼마나 큰 지는 예수님은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를 통해서,

 또 성서 곳곳에서 지옥에 갈만큼 큰 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성화를 위하여 우리는 실천형, 다른 말로 열매형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마 그 사마리아 사람은 먼 곳을 규칙적으로 방문해서 장사하는 행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신념과 여관 주인의 그를 믿은 모습을 보면 그렇습니다.

물론 그는 유대인들이 볼 때는 사마리아인으로 지옥의 땔감으로도 쓸 자격이 없는 아주 하층.

같은 유대인의 피가 섞였지만 갈라져 있는, 타 인종과 여러 번 섞인, 아주 원수 같은 계층.

예수님도 사마리아인 동네는 ‘가지 마라’ 할 정도. 괜히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이었겠죠.

하지만 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의 정통적인 규칙대로 살지 못하는 이단자일지는 몰라도 분명히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줍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그의 마음에 깃들여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알고 규칙을 알면서도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면서,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십니다.

즉, ‘형식적으로 살지 말고 안전 위주로만 살지 말고 무관심하지 말고 열매 맺어라!’

 

우리 주변에는 익명의 사마리아인. 삶 자체가 교회를 향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도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보편적인 구원의 역사 안에 들어갑니다.

사실 개신교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자기 봉고차에다가 쓰고 다닙니다. 너무 너무 창피하죠.

불교신자들은 다 지옥에 갑니까? 우리 조상들을 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천만에 말씀! 하느님이 그런 하느님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함부로 그런 것을 전교라고 착각을 하고 다닙니다.

이웃 사랑은 단순히 동정을 느끼는 데 그치는 것이 안 되고, 실제적이어야 됩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상처 입고 죽어가는 사람에 대해서 틀림없이 동정은 느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완성이 됩니다.

우리는 미사에 와서 거룩한 성체를 영하고 나가서 달라져야 됩니다.

예수님이 진정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오늘 알려주셨어요.

‘너도 그 사람처럼 되라.’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사람에게 영향을 준 것은 아마 많이 있을 겁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오면 자주 쓰는 말이 그 사람의 의식과 행동을 좌우한다.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희망적인 언어를 자주 쓰면 얼굴도 마음도 밝고 저절로 사마리아인처럼..

그러나 부정적이고 과거지향적이고 어둠의 표현을 많이 쓰는 사람은 얼굴, 하는 말이 굳어져있습니다.

따라서 행동 자체도 이 자리에서 즉시 해야 될 그런 순간에는 늘 많은 손익 계산을 합니다.

 

 

 

그러기 위한 첫 번째 단추. 첫 번째는 ‘뽈레뽈레’, 두번째는 ‘하쿠나 마타타.’

그 신부가 제게 말했어요.

“신부님, 저희 아프리카 사람들은 굶어 죽는 사람도 많고 전쟁도 많지만.

사실 그런 것만 없으면 정말 너무 너무 행복하게 살아요.

아무 것도 없어도 춤이 저절로 추고, 옷에 뭐 반지 하나 안 껴도 세상에서 제일 부자.

땅을 파서 뭐 하나 나오면 먹으면서 항상 기쁘게 살아요.”

 

그 힘이 뭐냐? 자기는 어릴 때부터 두 가지를 말을 듣고 살았대요.

그 두 가지 말에서 하느님은 성소를 주셨대요.

‘뽈레뽈레’ ‘하쿠나 마타타♪♩’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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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릭스1254 (2020/06/27 11: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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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백발 (2020/06/30 09: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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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멘, 신부님, 강론말씀감사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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