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말씀 듣고 빵을 먹고 나니 예수님이 보이네!

글쓴이 :  하늘호수♡님이 2020-05-03 21:00:13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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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전국적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 드리는 교구도 있지요?

우리교구는 화요일부터 교우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오늘 들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를 언제 또 들었는지 기억하세요?

지난 국회의원선거,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에도 이 복음이 나왔습니다.

그 때 제가 25절까지만 묵상을 안내해 드리면서 나머지는 나중에 해드리겠다 했었죠.

지금 성경이 있으신 분은 펴시고 31절부터 피정하는 마음으로 묵상합시다.

 

지난 번 25절. ‘참 어리석기도 하구나’ 풀이해 드렸고, 31절에는 어떤 말이 나옵니까?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제 서야 무엇이 열렸다고요?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빨간 펜 있으신 분들은 본인 성서 책에 쫙 줄을 치십시오. 눈이 열려

 

눈에는 육신의 눈이 있고 영적인 눈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얘기하는 이 ‘눈이 열려’ 할 때 육신의 눈은 아닐 겁니다.

아무리 육의 시력 좋아도 영적으로 닫혀있으면 하느님에 관한 것은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을 열리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저는 세 가지를 얘기 드리는데 첫 번째는 고통입니다.

고통은 다른 말로 십자가입니다.

철학적으로 고통 그 자체는 악이고 어둠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들은 고통을 당하면 외롭고 고독해집니다.

즉, 절대고독의 수치가 올라갈수록 우리의 영의 눈은 열리고 육신의 눈은 닫힙니다.

고통은 양면성이 있다고 합니다.

고통이 왔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고 어제 강론에 말했죠.

고통과 고난 앞에 주저앉아 우울증에 빠져 자기 목숨까지 끊는 어둠의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 고통을 비료와 거름으로 삼아 하느님을 바라보는 새로운 삶으로 부활할 것인가?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교황님은 십자가가 없었겠습니까?

십자가가 가장 큰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에 비하면 우리의 십자가는 십자가도 아닙니다.

하지만 넘어지기는 할지언정 무거워서 다시 못 일어날 만큼은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의 영안을 만드는 첫 번째 재료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철학적인 의미는 어둠입니다. 어떻게 선이고 축복입니까?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럽고 고독해집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줄이 하나하나 끊어지는 걸 느끼면서, 세상천지 사막 한 가운데,

절벽꼭대기에 나 혼자만 남은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비바람 몰아치는 시나이 산꼭대기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면서 사십 주야를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께 울부짖으며 응답을 구했을 때 야훼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고통의 밑바닥에는 지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만난 후 세상 것 뿐 아니라 천상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완덕으로 한 발자국 더 나가서게 된 걸 겁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눈을 열리게 하는 것 두 번째는 영적포기입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기쁨이 옵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기적이 옵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행복해집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영의 눈이 열립니다.

지금 기쁨과 행복이 없고 영적 눈이 안 열렸다면, 아직도 애착하는 것을 못 버리고 있다는 겁니다.

기적은 내가 애착하는 것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포기해야 일어납니다.

대충 포기해서는 기적이 안 일어나지요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킨 그 어린 소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몽땅 포기한 겁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어린 소년은 엄마가 같이 안 왔을 겁니다,

엄마가 같이 있었다면 엄마가 절대 내어줄리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은 순진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 포기를 통해 그 소년의 이름은 모르나 이 세상 끝 날까지 성인 아닌 성인으로 추앙받고, 

 그 모범을 따라 봉헌이 무엇인지 2천 년간 우리들은 묵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열리게 하는 두 번째는 영적 포기라고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께  포기하는 것을 약속하십시오.

그것이 자식일 수도 있고, 재산 일수도 있고, 아픈 몸일 수도 있습니다.

또, 내 영혼에 아무 도움 되지 않는 미움과 분노와 상처덩어리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 포기하겠습니다. 기쁨을 주십시오. 행복을 주십시오. 영안을 주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강론 들으며 바로 하느님에게 얘기 하십시오

 

세 번째로 우리의 눈을 열리게 하는 것은 성체입니다.

 

이 미사, 개신교 신자들도 많이 참석하고 있다는 것 압니다.

개신교에는 성체성사가 없어 참 안타깝습니다.

피정 지도 할 때, 하루 종일 하더라도 반드시 끝에 파견미사가 있어야 저는 갑니다.

경험으로 볼 때 하루 종일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더라도 마지막 파견미사에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그 말씀의 의미를 모릅니다. 살아나지를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파견미사 없는 피정은 고무줄 없는 빤스요,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서서히 치유 되다가 성체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 되고, 완전한 영육의 치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30리 길을 가면 성서를 설명해도 못 알아들어,

오죽하면 ‘어리석다’라고 한 그 제자들도 어느 순간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요?

빵을 떼어 주실 때!

 

그래서 성체 영할 때 우리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단 한마디면 됩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성체와 성혈을 축성할 때 이 제단 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집니다.

저는 사제 생활하면서 몇 번 그 얘기를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들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 미사 후 내 수단자락을 잡고 ‘신부님, 신부님도 봤어요?’

‘신부님이 예수님 몸과 피 만들 때, 신부님 머리 위로 천사가 날아다녔어요.

그리고 성모님이 두 팔로 신부님을 이렇게 끌어안았어요.’ 하며 성모님 옷 색깔을 설명하려 애썼습니다.

맞습니다.

사제가 성체성혈 축성할 때, 천사들은 날아다니며 성체를 지키십니다.

성모님은 사제를 지키시려고 안고계시고, 성체가 축성되면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렇게 축성된 성체가 죄인인 우리 몸 안에 오시는데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는가!

신앙생활에 점수를 매겨 80점 이상만 성체를 영할 수 있는 자격을 준다면, 과연 누가 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성체를 영할 때 긴 말 필요 없습니다.

‘주님,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라사이와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가 그날 의인으로 인정받고 간 사람은 세리였죠.

 

성체 영한 후에 자리에 와서 성가 부를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손이 예수님의 손으로 바뀌었으니, 그 손으로 스스로 치유기도하십시오.

마음의 상처가 있을 때는 ‘저의 역사 안에 오시어 OO에게 받은 상처 치유해주세요.’

또 몸이 아픈 사람들은 아픈 곳에 손을 대고,

‘주님, 2000년 전 환자들 치유하신 손이 바로 제 손으로 되심을 믿습니다. 치유해주십시오.’

성체를 영한 직후에는 그리스도 비슷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동일화가 이루어집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심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의 믿음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두 제자는 하루 종일 예수님을 몰라보다가 빵을 먹을 때 알아보고 뭐라 했죠?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주실 때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다시 말하면 성체를 영 한 후에야 말씀을 완전히 해석하고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성체를 정성껏 배령하는 사람에게는 말씀을 깨닫는 은혜가 내린다고 하는 영적인 공식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문맹인 어느 할머니가 성체를 영할 때마다 마지막 성체라는 마음으로 영했답니다.

그렇게 매일 성체를 영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글자가 하나하나 깨우쳐지더랍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전교왕이 되었습니다.

또, 성서를 많이 외워 주교님께 암기왕 상도 받았다고 합니다.

길에서 장사하는 할머니도 영안이 있으면 국회의원을 끌고 예비자 교리반에 갑니다.

호떡 굽는 할아버지도 영안이 열리면 대학교수를 입교시킬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여러분들 오늘 다른 거 다 잊어버려도 한 가지 기억하십시오.

‘성체를 정성껏 잘 배령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말씀을 깨닫는 은혜도 동시에 내린다.’

 

33절로 갑시다.

‘그들은 곧바로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큰 두 가지 체험을 이미 한 상태입니다.

첫 번째는 말씀체험, 두 번째는 예수님체험. 한 마디로 성령체험을 했습니다.

성령체험을 한 사람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가 아니라 ‘천천히’가 없습니다.

즉시 곧바로 열매를 맺으려 죽을힘을 다하여 애쓴다는 겁니다.

 

루카 복음 4장 38절에 베드로 장모 치유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베드로가 아니라, 동네사람들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합심 기도를 합니다.

한문에 합(合)은 ‘지붕 밑에 입이 하나’ 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기도가 하나고 마음이 하나고 행동이 하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장모 입장에서 볼 때 베드로는 제대로 된 사위는 아니었을 겁니다.

사위가 처자식 내팽겨 치고, 딸아이는 과부 아닌 과부로 살아가니, 그렇게 만든 예수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절대로 장모의 입장에서는 예수가 환영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장모의 입에서는 나 고쳐 달라는 말 못합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고쳐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손을 잡고 열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장모는 치유를 받자마자 영안이 생깁니다.

우리집안 망친 방랑 스승으로 알고 있던 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동시에 몸을 추스르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고 나옵니다.

말씀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에게 ‘천천히’ ‘나중에’ ‘시간되면’ ‘몸 회복되면’

이런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체험, 성령체험한 사람은 즉시 바로 그 자리에서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님 체험한 사람들 치유를 체험한 사람들은 즉시 행동이 따릅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그 밤중에 30리 길을 다시 달려갑니다.

30리 길이면 남자걸음으로 4시간 거리이지요.

예수님 체험이 얼마나 강렬하고 그 말씀이 얼마나 다시 살아났으면, 그 어두운 길을 되돌아갑니까?

그들이 간 목적은 뭡니까?

주님 부활 알리려고 간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예수님에게도 ‘죽었는데 부활 했다더라’ ‘~카더라.’

남의 이야기 하듯 합니다. 3인칭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주님 부활했다하더라’가 ‘주님 부활 했습니다’로 바뀝니다.

이제는 자신 있게 확신에 차서 부활을 전합니다.

 

이 제자나 우리나 처음에는 부활을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에,

성체를 통해서 오시는 그 분의 체험을 하지 않았을 때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더라’ 하고 전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도 강론하는 사제도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하면 강론에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하시더라 하고 끝납니다.

‘했다더라’에서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합니다.

 

두 제자와 예루살렘 제자들은 만나서 부활체험을 확실하기 공유하게 됩니다.

이래서 교회가 생겨난 겁니다.

바로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 교회입니다

예수님 살아있을 땐 교회가 아니라, 그냥 함께 다니는 무리였습니다.

머릿속에는 이 양반 왕 되면 한 자리 해 먹어야 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세례를 받고 신자로 살아간 횟수가 거의 다를 겁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말씀체험, 예수님체험, 다른 말로 성령체험을 하지 못해,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부활 하셨다’가 아니라

‘예수님은 부활했고 좋은 분이 시고, 그분 따라다니면 좋은 일만 생긴다더라.’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직 종교인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변하게 했던 그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2020년 부활 제3주일(4/26)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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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릭스1254 (2020/05/04 10: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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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백발 (2020/05/04 10: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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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멘, 김웅열(토마스 아퀴나스)신부님, 강론말씀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영육간에건강하시고 하느님의은총이 충만하시기를기도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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