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들으면서 기다리는 때 대림

글쓴이 :  하늘호수♡님이 2019-12-01 20:11:38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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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제가 피정할 때나 강론할 때 즐겨 인용하는 라틴어 격언이 몇 개 있습니다.

첫째가 “하느님의 계산방법과 인간의 계산방법은 다르다.”

두 번째 “인간이 계획하면 하느님은 부수신다.”

세 번째 “인간의 가장 지혜로움보다 하느님은 늘 한 발 앞서가신다.”

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지만 이 세 가지는 오늘 말씀에 맞는 것이기에 이야기 드립니다.

 

아마도 하느님 앞에서는 늘 겸손해져야한다는 뜻일 겁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점을 이야기해봅시다.

둘은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인생관, 세계관이 다르고 삶의 태도가 분명히 다릅니다.

겉으로 봐서는 누가 종교인인지 신앙인이지 모릅니다.

다른 나라 말고 한국, 개신교 말고 우리 천주교에는 과연 종교인이 많을까? 신앙인이 많을까?

통계결과를 보면 신앙인이 극히 드뭅니다.

어느 성당이든지 60%가 냉담자입니다.

영세 후 1년 안에 쉬는 신자가 70%가 넘어섰고 교적의 20.8%만 주일을 지킵니다.

성당을 다니면서도 실지로 점집이나 철학관을 다녀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38%를 넘어섰습니다.

몸만 안 갔지 답답할 때 점집 가 볼까하는 마음을 먹은 사람까지 합치면 38%뿐이겠는가?

아무튼 여러모로 볼 때 한국 천주교회는 신앙인 보기가 힘들고 종교인들만 많습니다.

종교인들은 늘 폭탄을 몇 개씩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구체적으로 종교인의 삶을 보면 반대쪽 신앙인의 삶이 보이기에 따로 이야기하지 않으렵니다.

 

종교인은 첫 번째 겉은 하느님의 옷을 입은 듯 보이지만, 속은 여전히 인간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내 삶의 중심에 주님이 계셔야하는데, 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사람입니다.

이 말은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순서는 분명히 있다는 뜻입니다.

제일 첫자리에 하느님이 계신가? 아니면 사람, 물질, 자기의 교만인가?

마음속에는 하느님은 절대 첫 자리에 안계시다가 급할 때만 하느님이 첫째자리에 계십니다.

그 분이 하시는 중요한 임무는 뭐냐? 해결사입니다.

힘든 것 해결되지 않는 것, 해결해 주는 것.

어찌 보면 자판기입니다. 원하는 것을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것을 내놓는..

자기가 원하는 때에 딱 맞게 떨어지면 ‘아이구, 역시 응답하시는 하느님’

하지만 자기 입맛대로 안 되면 ‘하느님이 어디 계셔?’

 

두 번째 종교인의 특징은 철저하게 자기 계산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늘 자기의 생각이 자기의 계획이 하느님의 계획보다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획을 세우고 하느님에게 봉헌하기보다는, 그리고 기도 중에 분별과 지혜를 청하기보다는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습니다.

종교인의 세 번째 특징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당에만 오면 헌금 내라하고 건축기금 내라하고..난 하느님에게 받은 것 없어요.

 내가 올 일 년 고생해서 먹고 살았지, 그 분이 나대신 일을 해주었습니까? 밥을 주었습니까?’

네 번째 특징은 신앙과 은총을 계산합니다.

 

이런 특징을 가진 종교인들은 기쁨이 없고 늘 외롭고 세월이 갈수록 혼자입니다.

주일미사는 억지로 나와 강론시가엔 뇌사상태로 있다가 조금만 강론이 길어지면 궁시렁 됩니다.

“드럽게 길게 하네. 미사 끝나고 골프약속도 있고 점심 약속도 있는데..”

그렇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가지고 있다가 뭔가 건수가 생기면 “나 이제 안 나가”

냉담합니다. 안 나오면 되지요. 냉담이 유세떠는 겁니까? 누구 때문에 신앙 갖는 겁니까?

마음에 안 드는 신부, 교우 때문에 냉담을 합니다.

아까 그랬잖아요? 마음에 사람을 품고 살다가 상처를 받으면 하느님 버립니다.

 

종교인에서 신앙인으로 변화되기 위한 제일 첫 번째 자세는 들어야합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행동하는 때가 아니라 들어야하는 때입니다.

겸손하게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주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야합니다.

마르타처럼 음식준비로 바쁜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들어야 될 때입니다.

이제부터는 기다림의 자세로 성탄을 준비합시다.

누군가를 가슴 조리며 기다리고 있고 또 준비를 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오늘 성서가 전하고 있는 제일 중요한 키워드, 핵심단어는 ‘때(time)’입니다.

뭐라구요? 목욕탕에서 나오는 그 때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계획하시는 그 때를 오늘 바오로사도와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잘 듣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나 사이의 주파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양심입니다.

양심을 통해서 끝없이 얘기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양심도 변질이 되어 색깔이 바뀌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을 늘 갈고 닦아야 합니다.

교회의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가 자기 주관적으로 변해가는 교우들의 양심을 바로 하느님의 양심으로 외쳐줘야 됩니다.

두 번째,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정확한 주파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어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 번째, 하느님은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강하게 얘기 하십니다.

사건을 보면 좋은 사건도 있지만 힘든 사건도 많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좋은 사건이든, 마음 아픈 사건이든- 분명히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마지막 네 번째, 하느님을 목소리를 듣는 주파수는 십자가라고 하는 고통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양심, 말씀, 사건, 십자가라는 고통에 하나 더한다면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성사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분명히 듣습니다.

 

전도서 3장에 보면 세상만사가 때가 있다고 나옵니다.

공부도 그렇고 삶의 여러 부분이 때를 잘 봐야 됩니다.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중요한 때를 희랍말로 카이로스(καιλος)라고 부릅니다.

이 카이로스라고 하는 말은 꽉찬 시간, 충분히 충만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유명한 얘기를 하십니다.

깨어나야 할 때가 왔다고 바오로 사도는 외칩니다.

오늘 여러분이 들은 제 2독서 로마서 13장 13절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변하게 한 구절입니다.

마니교에 빠져서 행복의 기준은 쾌락에 있다고 하면서 온갖 파격적인 생활을 다 했었던 성인은

그런 세상에 빠질수록 더 허전하고 삶은 메마르게 되었었습니다.

많은 몸부림 끝에 우연히 환청이 들립니다. ‘집어서 읽어라’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방으로 뛰어 들어가 성서를 들어서 펼치고 로마서 13장 13절이 나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대목에서 너무나 큰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찾던 것을 찾았고 만나고자 하는 분을 만나게 되었던 겁니다.

실로 구원의 때를 만났던 겁니다.

중세를 개혁했던 빈자의 아버지라고 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은 한 평생 하느님을 위하여 정말 청빈하게 살았지만.

그가 하느님을 만났던 때는 성자로 살 때가 아니라 마지막 죽음을 준비하던 시기에 만났다고 그러죠.

성인은 말년에 두 눈이 실명이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안 보이니 주님만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 기쁨에 넘쳐서 만든 것이 그 유명한 태양의 찬가입니다. 아시죠? 오 아름다워라!

물리학자요, 철학자요, 신앙가였던 파스칼은 하느님을 만났던 그 때를 잊지 못해서,

혹시라도 정신이 흐러져 하느님이 만났던 때를 잊어버릴까봐 늘 주머니 안쪽에,

양복 안단에다가 양피지 하나를 늘 붙이고 다녔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그리고 나 파스칼의 하느님을 나는 몇 년 몇 월 몇 시에 만났노라.’

 

이렇게 우리는 어느 땐가 하느님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피정을 통해서 혹은 누가 우연히 준 어떤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삶을 변화시키고,

어떤 분들은 평화방송에서 나오는 소리를 차에서 우연히 듣다가 눈물콧물 흘리면서 회개할 때도 있는 겁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이 김신부는 물론 수도 없이 많은 고비를 넘기면서 살았습니다.

다른 사제들보다 분명히 평범한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앞으로 세상 떠날 때까지 주님께서 또 얼마나 많은 십자가를 준비해 놓으셨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적어도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왜? 주님은 내 앞길 선하게 예비하고 계심을 제가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김신부의 고통 언제라도 들이 닫쳐오더라도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떤 상황이라하더라도 돌아온 탕자가 된다하더라고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우리가 보낸 지난 1년을 반성하면서 보다 성숙하고 새롭게 변화되는 시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림절은 성장의 시기요 또한 회개의 시기 입니다.

서두에 제가 교우들에게 즐겨 알려 드리는 라틴어 격언을 몇 개를 이야기 했었습니다.

맞습니다. 하느님의 계산과 우리의 계산은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 앞에서 대차대조표를 만들고 손익계산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리석고 무식한 겁니다.

내가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놓아도 하느님은 부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직접 목수가 돼서 기초부터 튼튼하게 당신이 직접망치를 들고 모래에 지은 집을 다 허물어내시고

 반석 위에 지어 주실 때가 있습니다.

제가 만든 그 집이 허물어질 때는 이해가 안 됩니다.

하느님이 원망스럽지만 그러나 그 뒤에 하느님의 계획이 어떻다는 것을 미리 당겨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원하는 때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불쑥 찾아오십니다.

따라서 늘 단정한 몸과 마음으로 깨어 준비해야 되는 시기가 대림절임을 명심하고

대림절 첫 주일미사를 거룩한 성지에서 봉헌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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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릭스1254 (2019/12/02 11: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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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백발 (2019/12/02 11: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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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토마스 아퀴나스)신부님, 강론말씀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영육간에건강하시고 하느님의은총이 충만하시기를기도드립니다, 아   멘~~~
  
  lovega (2019/12/02 13: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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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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