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하늘호수♡님 2019-09-14 21:25 ... 조회(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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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찬미예수님!      

어제 베다니 쉼터, 또 근방에서 주무셨던 분들,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그전에 노래하는 그룹, ‘사랑과 평화’라고 하는 그룹이 있었어요. 기억하세요?

처음에 텔레비전에서 사랑과 평화라는 그룹이라고 소개하는데, 깜짝 놀랐어요?.

사랑과 평화가 예수님의 삶을 요약한 두 마디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주야장천 강조하신 게 사랑이에요.

부활하신 후에 다락방에서부터 늘 만난 사람에게 하신 말이 평화에요.

예수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Peace be with you)!

 

오늘도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어느 집에 가든지 제일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하라 하십니다.

신자들 가운데서 철저하게 그렇게 하시는 분들 알아요.

가정 방문을 같이 다니면 사제 앞에서 서서 ‘평화를 빕니다. 신부님 오셨습니다.’

그러면 나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어요.

그런데 그 자매님은 나와 다닐 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입에 배어 있어,

‘평화를 빕니다.’라고 해놓고 나서 그 집에 들어가서 더러운 말이 나오겠습니까?

들어가는 순간 내 입이 축성 됐고 그 평화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이 축성 되었는데,

그 공동체 분위기는 평화일 것에요. 없는 사람 욕하는 분위기는 결코 아닐 겁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통계에 의하면 놀랍게도 사랑과 평화래요.

사람이 한평생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사랑, 그 다음에 평화래요.

어쩌면 이것은 그렇게 살기 너무너무 어렵기 때문일 것에요.

너무 귀한 가치이고 실현하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이지만,

열매를 맺기 가장 어려운 말이 사랑과 평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하신 말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어느 집에 가든지 첫 번째 말이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 평화는 사람만 원하는 것 같습니까? 짐승과 식물들도 평화를 원하겠죠?

이 복사들보다도 내가 더 어렸을 때 우리 뒷집에 나를 잘 따르는 강아지가 있었어요.

내가 계속 가서 밥을 먹였어요.

엄마한테 혼나면서도 일부러 밥을 남겨서라도 개한테 줄 밥을 모았어요.

그것을 가지고 뒷집에 가요.

그런데 그 뒷집에 있는 아저씨는 개를 안 돌봐. 생전 뭘 안 줘요.

그 어린 나이에도 그 집 아저씨는 개를 기를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어요.

 

어느 날 학교 갔다 돌아오는 데 오토바이 위에 개장이 있고, 세상에!

어릴 때부터 밥 주던 개가 그 안에 이미 끌려온 다른 여러 마리 개와 같이 있었어요.

그 개의 얼굴이 살려달라고 우는 것에요. 그 공포스러운 얼굴.

나는 뒤에서 그 오토바이를 붙잡았어요. ‘우리 개 내어줘요.’

나를 발로 차고서는 부르릉하고 가버렸어요.

그 공포에 질려 평화가 다 깨져버린 개의 모습을 지금도 난 잊을 수 없어요.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이나 식물도 평화를 갈구해요.

 

주인이 버린 동네에 떠돌아다니는 유기견의 눈에서 평화를 봤습니까?

동네 고양이 눈에서 평화를 봤습니까? 눈 보면 다 살벌해요.

왜? 적자생존이야.

뭐라도 잡아서 먹어야 하고 내 구역에 다른 고양이가 들어오면 막아야 해요.

귀도 뜯기고 꼬리도 없는 것들도 많고 사고로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살아야 되거든.

 

성당 나가서 왼쪽으로 가다보면 막창집이 있어요.

길을 가는데 예쁜 고양이 세 마리가 막창집에서 나는 냄새에 쳐다보고 있었어요.

열심히 밥을 갖다 줬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한 마리가 차에 치여 얼굴이 박살나며 죽어 성당화단에 묻어줬죠.

또 어느 날 나가니 한 마리가 안 보여.

막창 주인한테 물어보니 동네 큰 수고양이가 물어 죽이는 것을 봤대요.

암놈을 차지하려고 수놈을 제거하는 거죠.

마지막으로 하얀 예쁜 고양이한테 열심히 밥을 가져다주었더니

막창집 주인 딸이 ‘신부님 이제 제가 관리할 테니 일부러 저녁마다 오지 마세요.’

막창집 딸이 고양이집도 만들고 그 안에 깨끗하게 밥그릇, 물그릇도 두고.

지나갈 때마다 보면 하얀 고양이가 먹어요.

그런데 한 달 전 밥그릇이 없어졌기에 ‘죽었구나’했는데, 그제는 다시 그릇이 보어요.

오늘 미사 끝나고 가서 막창집에 물어보려구요.

 

생전 물을 안줘 말라 죽어가는 화초의 모습에서 우리는 평화를 찾아볼 수 없어요.

물은 살아있다는 유명한 책이 있었죠.

물의 결정체를 보면 좋은 물과 나쁜 물의 결정체가 달라요.

그리고 내가 사랑을 주는 물은 결정체가 변하는데, 욕을 하면 결정체가 깨진 대요.

그런 물은 사람 안에 들어오면 바늘이 들어오는 것처럼 해롭데요.

그 책을 보고 난 다음에 호기심에 실험을 해 봤어요.

방 두 개에다가 난초를 놓았어요.

이쪽 방에 있는 난초한테는 정말 칭찬을 많이 했어요.

‘참, 잘 자란다. 이렇게 때깔이 좋네.’

어떻게 잘 자라던지 꽃이 필 때가 아닌데도 계속 꽃을 피웠어요.

다른 쪽 방에 있는 난한테는 볼 때마다 ‘이 벼락 맞아 죽을 놈아. 썩어 문드러져라.’

그 난이 욕을 얻어먹더니 3일 만에 비실비실하더니 죽어버려요.

충격을 받았죠.

난도 사랑받으면 꽃을 피우지만, 미움을 받으면 그 미움에 짓눌려 뿌리째 말라버려요.

 

여러분 12사도 나무 얘기 아시잖아요?

어느 열심한 신자가 자기네 마당에 나무 12그루를 심고 이름을 써 붙였데요.

12나무 가운데 유다스 나무도 있었겠죠?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11나무는 잘 자라는데, 유다스 나무는 비쩍 말라 죽더래요.

왜? 지나가는 사람마다 차고 침 뱉고 욕을 하니 나무는 견디지 못하고 죽더래요.

 

짐승과 식물들도 평화를 갈구하거늘 인간이야말로 평화가 없으면 죽어요.

평화가 없으면 살아있어도 그것은 송장이고. 어떤 자리에 있든지 지옥입니다.

견디다 못해 목숨까지 끊어버리죠.

이렇게 평화를 얻기도 쉽지 않지만 그 평화를 유지하기도 어렵습니다.

평화는 마치 유리 같아요. 조그만 충격이 와도 와장창하고 깨져요.

‘평화롭다.’ 생각한 지 5분도 안되어 기분 나쁜 전화 한 통에도 와장창 깨져버려요.

 

여러분 평화가 깨지려고 할 때 징조가 있는 것 아시죠?

그 징조를 알면 우리는 미리 대비할 수 있어요.

 

평화가 깨지려고 할 때 첫 번째 분노가 와요.

그리고 화가 치밀어요. 그 다음에는 반드시 평화가 깨져버리죠.

그래서 그 화를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분노가 올 때 그 분노를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만 그 분노가 평화를 죽이지 않아요.

 

또 어떤 싸인? 욕심이 가득 차 올 때가 있어요.

물건에 대한 욕심, 사람에 대한 집착.

‘요즘 내가 이상하게 욕심이 차오른다. 포기를 못 한다,’ 그것도 싸인이에요.

이건 평화에 도전하는 사인이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포기할 줄 알아야 해요.

 

평화를 깨는 세 번째 싸인은 우상숭배에요.

우상숭배는 점집에 가서 비는 것만 우상숭배가 아니죠.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은 다 우상이에요.

여러분들의 마음속을 정말 솔직히 여러분 스스로만 쳐다보세요.

‘첫 번째 자리에 하느님이 계신가?’ 아닐 거요.

첫 번째 자리에 부모들은, 특히 자매들은 자식들이 있어요.

자매님들의 첫째 자리에 당연히 남편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저는 놀랐어요.

‘신부님 장가 안 가서 모르세요. 단물 빠진 지가 언제인데. 평생 원수예요.’

‘하느님보다 자식이 윗자리에 있겠네요?’ 물으니 솔직히 말해서 맞대요.

하루 종일 자식 걱정은 해도 하느님 걱정은 해본 적이 없대요.

하느님 혼자서 잘 사시는데 왜 걱정을 하네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기도 해요.

‘내가 첫자리에 하느님을 밀어내고 자꾸 올라오려고 하고 있구나!’

평화가 깨지려고 하는 아주 강한 징조입니다. 알아들으셨죠?

 

평화가 깨지려고 하는 네 번째 싸인은 지나친 기대감이에요.

상대가 나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데도 자꾸 기대치를 높이고 충족 안 되면 폭발해.

기대가 커질수록 상대는 부담스럽고,

‘너 왜 이 따위야? 너한테 이럴 수 있어? 네가 나를 어떻게 배반을 해?’

사람은 믿는 존재가 아니고 신뢰의 존재 그랬죠?

그 신뢰는 분별이라는 나사로 잘 채워져 있어야 된다.

분별의 나사가 풀어져 있을 때는 사람의 관계, 신의의 다리는 무너진다고 그랬어요.

물질에 대한 기대감, 사람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느님은 밀려날 겁니다.

그 결과는 평화가 깨집니다.

 

반대로 평화를 유지시키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신앙’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평화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믿음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은 저 계곡의 밑바닥에 떨어져도 웃을 수 있지만

기도하지 않는 자는 푸른 목초지에서 살아도 늘 불안해요.

기도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평화를 유지 못합니다.

 

평화를 유지시키는 두 번째 가치는 ‘거룩한 침묵’입니다.

거룩한 침묵. 늘 눈만 뜨면 나불거리는 사람은 절대 평화를 유지할 수 없어.

그런 라틴어 격언이 있죠.

‘하느님은 사람이 입을 벌릴 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할 때 들어오신다.’

그 침묵은 평화의 접착제라 그랬어요.

 

평화를 유지시키는 세 번째 가치는 ‘건강’이에요.

건강하지 않는데 평화를 유지시킬 수 없잖아요?

많은 경우 본인이 아끼지 못해서 건강을 해치는 수도 있어요.

술을 너무 먹거나 담배를 너무 많이 피거나 아무튼 몸에 해로운 것.

가족력이라는 것도 있지만 본인의 무절제한 생활로 몸에 병이 생길 때가 있어요.

 

네 번째로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부연 설명이 없죠?

 

평화를 유지시키는 다섯 번째 가치는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입니다.

억지로라도 하려고 해야 해요.

TV드라마를 보더라도 우울하게 하는 드라마 말고 밝고 긍정적인 것을 보세요.

시간이 되면 숲을 가고 산책을 가는 것도 평화를 유지시키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평화를 유지시키는 가치는 ‘다른 이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것’에요.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빌어줄 때는 내 평화가 유지돼요.

내 안에 평화가 없는데 어찌 다른 이에게 평화를 빌어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나 이제 평화를 강물처럼 예루살렘에 끌어들이리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이 주셨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노름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가 성령 세미나 받고서 새사람이 되고,

마귀 얼굴로 수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다녔는데 이제는 얼마나 온유한 얼굴로 교회에 봉사합니다.

이전에는 그 사람 보면 두려움이 생겼는데, 이제 하느님을 만나 새롭게 바뀐 그 사람을 보면 평화를 느낍니다.

술 마귀, 음란 마귀, 폭력 마귀는 항상 같이 몰려다니는 마귀 삼형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겉으로 볼 때 평화로운 적이 있었을까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태중에 있을 때도, 태어나셨을 때도, 공생활 3년도 불안과 초조와 공포의 연속이었죠.

평화 자체이신 그분이 결코 평화롭지 못한 이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예수님은 평화를 위하여 세상의 불안을 다 걷어가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평화를 얻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돈이나 식량 자루, 옷 등에 집착하지 마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돈이나 식량 자루, 옷은 거짓 평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사 중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마음에 우러나오는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그리고 건성인사가 아니라 눈을 바라보면서 인사를 나누십시오.

이제부터 어느 집을 방문하든 종교가 뭐든 두려워말고 마음껏 평화를 빌어주십시오.

‘평화가 이 집에 있기를 빕니다.’ 하면 불교 신자는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하겠죠.

평화를 빌어주는데 욕할 사람은 없습니다.

 

평화를 빌어야 될 제일 첫 번째 사람은 본인 자신입니다.

아침에 눈 뜨면, ‘마리아야, 너에게 평화를 빈단다. 오늘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는 강해질 수 있어.

오늘 여러 번 평화를 깨려는 것들이 나타날지 모르지만 너는 당당히 맞서서 도망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내가 너 좋아하는 것 아니니? 너에게 평화를 빈단다.’

이웃에게 평화를 빌기 전에 내 영혼에게 평화를 빌어주세요.

그리고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거룩한 신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아멘.

 

♣2019년 연중 제14주일(7/7)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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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릭스1254 (2019/09/15 09:4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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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백발 (2019/09/16 08: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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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멘, 김웅열(토마스아퀴나스)신부님, 강론말씀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영육간에건강하시고 하느님의은총이 충만하시기를기도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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