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겸손의 삶

글쓴이 :  하늘호수♡님이 2018-07-18 16:33:31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991)
첨부파일1 :   untitled_6.bmp (1.468 MB)
    이 게시글이 좋아요(3) 싫어요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photo by - 소나무 신부님

 

 

 

+찬미예수님!

 

1958년도에 청주교구가 설립이 되어서 환갑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내덕동 성당에서 사제단이 함께 하느님께 감사의 미사를 봉헌했었습니다.

오늘 교구 내 모든 성당은 교중 미사를 하느님께 감사의 의미로 봉헌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주에서 제일 오래된 성당인 우리 서운동 순례지 성당의 날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대축일입니다.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는 오늘, 우리들은 세례자 요한의 삶을 통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곧게 사는 것인지를 묵상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설교를 했다는 장소에서 하루를 머물다 왔습니다.

그리고 머리로 그려봤습니다.

성서에 보면 ‘많은 사람이 요르단 강으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설교를 들으려 모여들었다.’

나중에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까지도 세례자 요한 앞에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무엇이, 어떤 매력이 사람들을 구름처럼 모이게 하고 열광케 했을까?

세례자 요한의 설교가 어떠했기에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고 세례 받게 했을까?

 

세례자 요한의 설교가 당시 사람들에게 굉장히 큰 힘과 효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그의 말을 경청했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성서에 나오는 그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을 따를 수 있게 했던 힘은 뭔가?

그때 당시에도 세례자 요한보다 말 더 잘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유독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고 세례자 요한을 보러 모였던 힘은 뭔가?

 

첫째는 세례자 요한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말한 그 메시지를 스스로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그거에 대한 증거로 그가 살던 장소가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살았다고 나옵니다.

 

‘광야’라고 하는 것은 성서에서 많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인간이 살기 힘든 곳입니다.

일교차가 심하고 물이 부족하고 전갈이라든지 해충들밖에 살 수 없는 열악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곳에서 인간들은 하느님을 쉽게 만납니다.

놀랍게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도원들이 광야에 있습니다.

몸은 견디기 힘들어도 광야는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은 행위의 원천이요, 행위는 마음의 반영이다.’

마음은 행위의 원천이 되고 내가 하는 행동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그런 말이겠죠.

무릎이 꿇어지면 마음도 꿇어지고 영도 꿇어집니다.

예수님의 처음 만난 나병환자가 했던 첫 번째는 ‘주님!’ 이라고 부릅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하지 않았지만 나병환자는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

손이 모아지면 마음이 모아집니다.

팔짱을 끼고 미사를 하면 마음이 꼬여지는 겁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반드시 하느님을 만나는 광야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결코 그 광야는 푹신푹신한 침대 위가 아닙니다.

 

요한의 설교가 힘이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그는 세상의 안락함을 추구하고 산 것이 아니라

모두 피하고 거절하고 싶은 광야라고 하는 거친 장소에서 살았다는 것이

그때 사람들한테는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가 입고 있던 옷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단옷을 두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죽으로 아래를 가리고 몸에는 낙타 털옷을 걸친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사치를 버린 예언자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큰 감동으로 와 닿았던 겁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대사제, 율법학자, 바리사이는 온 몸을 비싼 옷으로 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입고 있었던 옷은 마음의 옷, 하느님을 향하는 겸손한 옷이었습니다.

정결의 예복, 겸손의 예복을 입고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동을 받은 겁니다.

 

세 번째로 세례자 요한이 먹은 음식도 그 당신의 백성에게는 감동이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나옵니다.

누군가 웰빙 음식만 잡수셨다 말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영의 단식을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영의 단식을 위해서는 우리는 가끔 자기 몸을 불편하게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밥을 잔뜩 먹고 묵주를 들어 보십시오.

묵주기도가 됩니까? 트림만 하다가 잠 듭니다.

성모님께서도 이 환란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첫 번째 영적 무기로 단식을 얘기하십니다.

교우들이 모두는 나름대로 하느님의 광야에서 살면서 영의 단식, 육의 단식을 해야 합니다.

 

단식의 목적은 살 빼는 게 아닙니다. 영적분별입니다.

육신이 배고프면 몸은 힘들지만 위로 갈 피들이 머리로 가기에 머리가 맑아집니다.

짐승들도 다치면 굴속에 들어가서 몸이 나을 때까지 단식합니다.

단식은 치유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거친 음식이 맛있어 먹은 것이 아니라 영을 맑게 하게 위해 먹었습니다.

이 모습이 그때 당시 신자들한테는 감동이었습니다.

 

살던 장소, 입었던 옷, 먹고 살았던 음식이 별거 아니지만

사람들에게는 깊은 감동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통로가 되고 수단이 되었던 겁니다.

세례자 요한에 열광했던 첫 번째 이유는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는 겁니다.

 

둘째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요한이 준 메시지의 내용이었습니다.

요한이 준 메시지는 그 당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것의 핵심을 찔렀던 말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유대 나라가 엉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강하게 끌어주고 회개시켜 주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300년 동안 예언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고 있었고, 또 예언자들의 입술을 통하여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없었기에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사람들에게 강하게 와 닿았던 겁니다.

정말로 회개하고 싶었는데, 누군가가 회개의 불을 질러주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불을 지른 겁니다.

한마디로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설교는 국민회개운동이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다른 나라 국민을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구요? 지금 이 나라가 동방예의지국입니까?

뉴스를 보면 부모가 자식 때려죽이고 자식이 부모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옛날에는 그런 기사 나오면, ‘아이고, 세상에’ 하며 가슴이 아팠지만 이제는 무감각해졌어요.

살벌한 얘기가 텔레비전에 떠도 ‘그런가보다.’ 해요.

길가다가 이유 없이 맞아 죽습니다.

진정 대한민국 국민은 회개를 해야 될 백성들입니다.

이러한 국민회개운동의 시작은 분명 개인의 회개운동에서도 출발해야 될 겁니다.

 

가톨릭은 오래 전에 ‘내 탓이요.’하는 운동을 했습니다. 기억나시죠?

빨간 ‘내 탓이요.’라고 적힌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정말 웃긴 것은 그 스티커를 차 뒤에 붙인다는 겁니다.

그것은 뒤차에 있는 사람한테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자기 운전대 앞에 ‘내 탓이요.’ 스티커를 붙여야죠.

개인 회개운동을 통해 가정, 본당 회개운동이 일어나 국민회개운동으로 퍼질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 내용은 회개였습니다.

타락하고 쓰러져 가는, ‘야훼 하느님’ 없이 살려고 하는 백성들에게 주는,

불을 지르는 회개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속이 다 시원했던 겁니다.

 

마지막 셋째 이유는 겸손한 요한의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노예 직분에도 적합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저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도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노예보다도 훨씬 밑이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큰 겸손입니까!

 

사실 요한은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 예수님을 무시하고

본인이 메시아 행세를 해도 사람들은 다 인정했을 겁니다.

비록 친척형뻘이었고 스타였지만, 예수님과 자신과 차이가 큰 것을 겸손하게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따랐던 제자들에게 ‘봐라, 하느님의 양이 저기 가신다.’고 말합니다.

내 제자라고 여겼던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차선의 자리로 내려간다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일단 올라가면 떨어지기 싫은 게 인간의 속성입니다.

쉬운 말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 정리합시다.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던 그 이유 세 가지,

첫 번째로 말과 행동이 일치되어 열매를 맺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말은 누구라도 그럴싸하게 할 수 있지만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들도 열매를 맺도록 합시다.

 

두 번째로 세례자 요한은 말씀을 통하여

일단 내가 변화되고, 가족이 변화되고, 공동체가 변화되는 회개운동을 벌렸습니다.

우리들도 시간이 날 때마다 말씀을 들읍시다.

집에 있는 성서 책은 장식용이 아닙니다.

성서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분명히 심판거리일 것입니다.

 

‘열 번 듣는 것 보다는 한 번 읽는 것이 은혜롭고,

열 번 읽는 것 보다는 한 번 쓰는 것이 더 은혜롭다‘

 

여러분들이 살아생전에 단 한 사람도 전교시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봉사하고 싶어도 몸뚱이가 아파서 봉사를 못했다 하더라도,

하다못해 신약성서만이라도 스스로 필사를 했다면 나중에 죽은 다음에 그것 들고 갈 겁니다.

예수님이 ‘너 뭐하고 살았느냐?’ 하시면,

‘주님 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뒤돌아보니까 게을러서 주변에 성당 갈 사람도 많은데 가자고 말 한 번 한 적도 없고요.

그리고 여기저기서 봉사할 기회가 많아도 항상 제 생각만 하고 봉사 안 하고 살았습니다.’

 ‘너 참 시원찮게 살았구나. 그런데 또 다른 것 한 것 없냐?’

‘수십 번 포기하려고 하면서도 신약 한 번은 썼어요. .’

‘산 것을 봐서는 지옥이지만 그래도 하느님 말씀을 이렇게 기를 쓰고 적어왔으니,

이것을 보고 천국으로 보낼 테니까 가서 구약까지 마저 써라.’

이렇게 얘기하실 수 있다는 거죠.

 

세 번째로 세례자 요한은 늘 자신을 정직하게 보는 겸손의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교만은 자기 우상이라고 그랬습니다.

영성은 자기에 대한 관상과 하느님에 대한 관상이라는 두 가지의 축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보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관상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보면 비참한 마음이 듭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바로 이 때 주시는 선물이 겸손입니다.

머리를 숙인다고 겸손이 아니고 목소리를 나긋나긋하게 한다고 해서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보고 하느님 앞에 작고 초라한 자기 한계를 고백할 때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자기에 대한 관상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관상부터 먼저 하려고 합니다.

저녁기도도 안하면서 향심기도, 이냐시오 영성, 어렵고 어려운 영성을 하려고 합니다.

저녁기도라도 제대로 하십시오!

일상적인 기도도 제대도 안 하면서 무슨 그런 고차원적이고 어려운 기도를 하려고 하는지...

 

자기에 대한 관상을 하면 비참함을 깨닫고 한계를 느끼면서 겸손해집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관상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희망이 생깁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우리 주님은 사랑하고 계시구나, 그러면서 기쁨이 솟습니다.

기쁨은 ‘기뻐, 기뻐’하고 수천 번을 외친다고 기뻐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기쁨, 하느님에 대한 관상. 다시 말하면 희망의 상태가 될 때,

‘나 같은 죄인도 주님이 사랑하고 계시구나! 주님의 작은 도구가 될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될 때 내 머리 끝부터 발가락까지 기쁨으로 가득 찰 겁니다.

어떤 봉사를 해도 지치지 않을 겁니다.

어떤 칭찬의 말을 들어도 교만에 빠지지 않을 겁니다.

어떤 기도를 해도 늘 부족하다고 느끼게 될 겁니다.

 

세례자 요한이 당시 사람들을 모으고 뜨겁게 한 것은 바로 이 세 가지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첫 번째, 말과 행동의 일치,

두 번째 말씀 안에 힘이 있었다는 것,

세 번째 너무 너무 겸손하게 사셨다는 것.

자기의 위치와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자기의 꼴을 알았다고 하는 것.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마지막 성인이셨던 세례자 요한은 신약의 인간을 위하여

이렇게 큰 메시지를 전하고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들도 내 주변에서,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성당 안에서 예수님이 되려 하지 말고

예수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삶을 본받도록 합시다.

 

♣2018년 성 요한 세례자 탄생대축일 (6/24)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카카오스토리에서 공유하기 페이스북에서 공유하기 네이버 밴드에서 공유하기 트위터에서 공유하기 구글+에서 공유하기 Blogger에서 공유하기 싸이월드에서 공유하기

백발 (2018/07/19 09:30:14)
 이 댓글이 좋아요(1) 싫어요
김웅열(토마스 아퀴나스)신부님, 강론말씀감사합니다, 신부님, 영육간에건강하시고 하느님의은총이 충만하시기를기도드립니다, 아   멘~~~
  
정경화 이사도라 (2018/10/02 00:21:45)
 이 댓글이 좋아요 싫어요
아멘, 감사합니다
  

   
  댓글 쓰기

 
로그인 하셔야 댓글쓰기가 가능합니다. 여기를 눌러 로그인하세요.
 

이전 글 글쓰기  목록보기 다음 글

본 게시물에 대한 . . . [   불량글 신고 및 관리자 조치 요청   |   저작권자의 조치요청   ]
마리아사랑넷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메일추출방지정책 | 사용안내 | FAQ | 질문과 답변 | 관리자 연락 | 이메일 연락
Copyright (c) 2000~2018 mariasarang.net , All rights reserved.
가톨릭 가족공간 - 마리아사랑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