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짝사랑은 안 돼, 안돼요!

글쓴이 :  하늘호수♡님이 2020-07-07 21:36:08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1,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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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느티신부님

 

 

일주일 동안 편히 지내셨어요?

짝사랑해 본 적 있으세요?

내가 언젠가 한번 말을 한 것 같은데 짝사랑의 3대 장점이 있다고 했죠?

첫 번째, 선택이 자유롭다.

상대가 누구든 얼마든지 가능하죠.

두 번째, 돈이 안 든다.

뭔가 바치기 시작하면 돈이 들지만, 순수한 짝사랑은 돈이 안 들죠,

마지막 세 번째, 이것이 제일 큰 장점인데 퇴짜맞을 일이 없다.

 

저는 짝사랑을 해본 적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교우들: 있어요)

하하, 어떻게 그렇게 제 사생활을 잘 아세요?

맞아요, 딱 한 번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고3 연상의 여인을 사랑했어요.

그 여학생은 고무신 집 둘째 딸이었죠.

아무튼, 선택은 자유로웠죠.

그리고 한동안은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으니 돈이 안 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돈이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멀쩡한 신발을 찢고 엄마에게 신발값 달라 해서 한 번 더 가는 거죠.

그런데 용기를 내서 이야기하고,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어요.

고3짜리가 중3을 볼 때 얼마나 웃기겠어요?

‘얘, 공부해. 나도 대학 입시 공부하느냐 바빠, 너도 고등학교 가야지.’

그때 상처가 커서 짝사랑은 안 하리라 했더니, 이렇게 신부를 만들어 주셨네요.

 

그런데 이 세월 살면서 뒤돌아볼 때, 그 짝사랑했던 시절은 참 소중한 것 같아요.

생각하고 혼자 웃어요.

이렇게 짝사랑은 당시에는 몹시 아프고 열병을 앓지만, 세월이 흐른 후엔 추억이죠.

 

제가 왜 짝사랑 이야기를 강론 서두에 꺼냈을까요?

여러분, 하느님은 절대로 짝사랑의 대상이 되서는 안 됩니다.

 

인간끼리의 짝사랑의 좋은 점 첫 번째는 선택이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사랑하는데 양다리를 걸칠 수 없어요.

돈도 사랑하고, 하느님도 일주일에 한 번씩 사랑하고, 기도할 때만 하느님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하느님을 늘 첫째 자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선택의 대상이 아니에요.

내 머릿속에서 하느님을 지운다고 해서 그 하느님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 지금 머릿속으로 여러분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 5가지를 그려보세요.

그 첫 자리에 늘 하느님이 계신가요?

천만에!

자매님에게 물으면 10명 가운데 8명은 머뭇거리지 않고 자식이래요.

그리고 성당도 자식 잘되게 해 달라고 나온대요.

굉장히 모순입니다.

그 자식에게 복을 주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느님 아버지인데, 그분을 자식 밑으로 내려놓고 복을 달라고 하다니!

비는 위에서 밑으로 내리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비는 없습니다.

나의 마음에 자식보다, 내 아픈 몸뚱이보다, 돈보다 윗자리에 하느님이 계실 때,

하느님은 그 자리에서 은총의 비를 뿌려주십니다. 아멘

하느님이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순서입니다.

우상이 뭐라고 했지요?

따라 해보세요.

하느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을 우상이라 합니다.

이제 여러분, 나중에 죽어 심판받을 때, 우상숭배 했느냐는 질문에

우상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분이 없어서 몰랐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교만이 하느님을 밀어내요. 교만이 우상이죠.

어떤 이들은 분노와 화, 상처가 하느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버티고 있어요.

 

하느님은 우리가 선택하고 말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늘 첫째 자리에 좌정하고 앉아계시기를 우리에게 강력히 원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로 인간끼리의 짝사랑의 좋은 점은 돈이 안 든다 했죠?

그러나 하느님 사랑하는 데는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뿐인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도 있고, 7대 8대 독자가 신학교 간다고 하면 아들을 빼앗길 때도 있고,

외동딸이 수녀원 간다고 하면 하느님에게 딸을 뺏기죠.

돈 몇 푼 뺏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죠.

주일 헌금, 교무금, 가끔 바치는 꽃, 이것은 들어가는 것도 아니죠.

 

지금 우리는 박해가 없는 좋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어디 이런 성당이 있었습니까,

성호를 긋습니까?

천주교 신자는 무조건 잡아 죽였지요.

돈이 드는 것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생명까지도 내 모든 것을 봉헌해야 할 때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 인간끼리의 짝사랑은 퇴짜맞을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에게 퇴짜맞는 정도로 끝난다면, 귀싸대기 한 대 맞는 정도로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잘못하면 영원한 불 속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벌 안 받는다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즉결심판을 하신다면 지금 성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남 험담할 때마다 이빨을 하나씩 뽑으셨다면 모두 틀니를 하고 있을 겁니다.

또, 나쁜 일 할 때마다 발목을 꺾어버렸다면 남은 몸이 없겠죠?

그러면 하느님의 눈이 어두워서, 치매가 오셔서 우리의 죄를 못 보시는 것인가요?

기다리시는 겁니다.

네가 지금은 죄인이지만 언젠가 너도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아시지요?

농부가 처음부터 가라지씨를 뿌렸겠습니까?

밀씨만 뿌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가라지싹이 같이 올라와요.

그런데 가라지싹과 밀싹이 처음엔 비슷해서 밀싹도 뽑을까 봐 농부는 안 뽑아요.

그냥 자라게 둡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커서 가라지줄기와 밀줄기가 확실히 구분돼도 농부는 안 뽑아요.

왜? 경험적으로 이 땅속의 모양을 알아요.

가라지란 놈이 얼마나 독한지, 밀뿌리를 칭칭 감고 있어요.

‘나 뽑으려면 뽑아봐, 혼자서는 절대 안 죽는다. 이놈도 끌고 나간다.’

농부는 그것을 알기에 그냥 자라게 둡니다.

그러다가 추수 때가 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그냥 뽑아 쫙쫙 찢어 밀은 곡간에 쌓아놓고,

가라지는 불 속에 던진다고 나옵니다.

 

어찌 보면 세상은 못된 사람이 더 잘살고, 착하면 이용만 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공의로운 하느님께서 몰라서가 아니죠.

지금은 가라지지만 언젠가 너도 밀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식물의 세계에서는 수백 년이 지나도 가라지가 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가라지가 밀이 될 수 있고, 죄인이 성인이 될 수 있지요.

 

우리 천주교가 죄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 아닙니까?

우리보다 먼저 사셨던 성인·성녀 중 죄인이 아니셨던 분이 어디 있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노, 프란치스코 성인, 바오로 사도 모두 죄인이었죠.

천주교는 죄인이 들어와 의인이 되려고 애쓰는 종교입니다.

처음부터 의인만 뽑은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교회 울타리 안에 살아도 가라지의 마음을 갖고 살 때가 있습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 살아도 가라지처럼 다른 이에게 손가락질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당장 나에게 벌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여, 당장 퇴짜맞지 않는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은 100년을 못 넘습니다.

하지만 죽고 난 다음에 세상을 100년과 비교하겠습니까?

우리가 살다가는 이 세상은 태평양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 보다도 작은 겁니다.

영원한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 하느님 앞에 퇴짜 맞을 일 없어야 합니다.

개인 심판하실 때는 분명히 냉정하고 무섭고 엄하다고 했습니다.

양과 염소를 왼쪽 오른쪽으로 갈라놓는다고 하셨습니다.

불길의 고통속의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소리칩니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아브라함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 그쪽으로 갈 수 없다 하죠.

그러면 못되게 사는 내 형제에게 라자로를 보내서 회개시켜 달라 부탁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예언자의 말씀을 믿지 않은 자는 죽었던 사람이 가도 안 믿는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에 ‘너희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라 하십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짝사랑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선택해서 살아야 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때도 있고, 심판대에서 퇴짜맞을

두려움을 미리 생각하면서 입에 달아도 뱉을 것이 있고 써도 삼켜야 할 것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짝사랑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짝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절에 다니는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하도 권해 성당에 처음 와보고 집에 가서 하는 말,

‘네가 믿는 그 예수를 보니 만정이 다 떨어지더라. 발가벗긴 채 온몸이 피투성이고,

자기 몸도 하나 가누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빌어보아야 무슨 복이 나오겠느냐?’

그러면서 ‘절에 가볼래? 부처님이 얼마나 의젓하게 앉아계시고, 살은 통통하고,

금 옷을 입으시고 복스럽게 생겼는데. 그런 분께 빌어야 복이 막 쏟아져 나오지 않겠니?’

 

맞는 얘기지요.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형수입니다.

석가모니는 왕궁의 살던 왕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십자가상의 달린 사형수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형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어려운 겁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 어떤 말이 나옵니까?

예수님의 입에서 모진 말이 나옵니다.

‘부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자식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숨까지 내놔야 한다.’

예수님을 짝사랑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을 하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온전한 사랑을 바치려고 애를 쓰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확실한 상을 주신다는 걸 믿도록 합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어야 사는 자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짝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라도 표현하십시오.

가까이도 못 가고 말도 못 거는 게 아니라, 시간 날 때마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입으로 표현하십시오.

하느님은 그 소리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짝사랑에서 자유로워질 때 주님과 가까이 되어있음을 우리는 믿게 됩니다.

 

오늘 이 미사중에 강한 성령의 힘으로 여러분들이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서

예수님께 온전한 사랑을 봉헌할 수 있는 거룩한 신자들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아멘

 

♣2020년 연중 제13주일(06/28)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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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발 (2020/07/08 10: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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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멘, 김웅열(토마스 아퀴나스)신부님, 강론말씀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영육간에건강하시고 하느님의은총이 충만하시기를기도드립니다, 아  멘~~~
  
  펠릭스1254 (2020/07/08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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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요셉 (2020/07/08 22: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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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부님 감사합니다.
  
  세실리아99 (2020/07/09 17:2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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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예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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