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축복을 밀어낸 동네

글쓴이 :  하늘호수♡님이 2021-07-10 08:44:36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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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6, 1 - 6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어제 은총의 밤이 갑자기 취소되었지요?

혹시 은밤 때문에 주변 숙소에 예약해서 주무시고 미사에 오신 분 있으세요?

잠자리는 편하셨습니까?

매우 아쉬웠지만, 정말 어려운 결심을 한 것입니다.

내가 서운해할까 봐 비는 어찌 그리 많이 내리는지. 아무튼 8월 한 번 남았는데 기도 많이 해주세요.

 

여러분들은 본인이 편견이 많은 편이라 생각하세요, 아니면 적은 편이라 생각하세요?

편견도 사람에 대한 편견도 있고, 세상 이치에 대한 편견도 있겠죠?

편견은 간단히 말해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편견이 많은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쉽게 사랑할 수 없죠.

반대로 오만한 사람이 있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 못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만한 사람 곁에는 갈 수가 없죠.

‘편견과 오만’이라 하는 영국의 유명한 소설이 있지 않습니까?

편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대부분 오만하고, 오만한 사람 반대쪽에는 편견이 가득 차 있죠.

동전의 앞뒷면 같아서 늘 붙어 다녀요.

 

오늘 예수님은 고향에 갔다 고향 사람들의 편견과 오만 때문에 시쳇말로 개작살이 났지요.

모욕도 그런 모욕을 당하신 적이 없으셨죠.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이 사건 이후에 다시는 고향을 안 가십니까?

여러분은 ‘고향’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푸근하고 가보고 싶은, 물론 마음속의 고향은 분명히 우리에게 좋은 생각을 심어줍니다.

하지만, ‘고향’하면 떠오르는 것 중에 어두운 부분도 분명히 있지요.

아마, 고향에 안 가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나에 대한 가족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것이지요.

아무리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아지고, 국회의원, 장관이 되었다 해도, 고향 어른들 눈에는 발가벗고 뛰어다니던 우리 뒷집 아이죠.

‘저 아이 아빠 우리 집 머슴이었는데.’. ‘저 집안에는 자살하는 사람이 참 많았는데, 저 아이는 용 됐네?’ 등등.

 

저는 처음에는 의문점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런 일을 당할 것을 알고 계셨을 텐데,

나자렛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실 수도 있었음에도 왜 고향에 가서 이런 수모를 당하고 계셨을까?’

그 해답은 무엇으로 찾았나?

예수님은 고향 사람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랍비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랍비는 스승이죠?

이 랍비로 찾아왔다는 것에 동네가 더 뒤집힌 거죠.

왜?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거든요.

초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사람, 정규 교육뿐 아니라 유명한 스승을 둔 사람도 아니었죠.

더군다나 직업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요.

아버지 요셉, 목수, 목수 중에서도 큰 집을 짓는 대목도 아니고, 그냥 동네 닭장 고쳐주고 문 고치는 그냥 목수였어요.

그 당시 사회적으로 볼 때도 목수는 급이 높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머릿속에 아버지가 요셉이고 어머니가 마리아고 친척이 누구인지 선명하게 남아있는 예수라는 청년이

어느 날 회당에 나타난 겁니다. 사실 그 당시 30이면 청년도 아니죠.

 

맨 앞쪽에 앉은 사람부터 뒷줄에 앉은 사람까지, 처음에는 그분이 예수라는 것을 몰랐죠.

그냥 이야기만 듣고, ‘와, 이분 정말 끝내준다. 귀에 쏙쏙 들어와, 어쩜 이렇게 강론을 잘해?’ 했죠.

그러다 어떤 한 사람이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예수님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을 거예요.

‘누구 닮지 않았어?’ 옆에 사람을 찌르죠.

그러자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열강하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 알아챕니다.

‘세상에, 맞네, 저 사람 목수네.’ 순식간에 그 말은 뒤로 뒤로 전달되었습니다.

앉아있던 사람들은 일어서서 쳐다보고, 어떤 사람은 앞에까지 나와 확인하려 합니다.

목수의 아들 예수였습니다.

그때부터 완전히 분위기가 살벌해졌지요.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는 ‘권위 있게 가르치네, 못 듣던 말이야.’ 하며 존경하는 마음으로 들었다가,

예수님의 신원이 들통이 난 후 사람들은 분개했습니다.

저런 배경의 인간이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에 참을 수가 없었던 거지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한 이유로 두 가지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가 첫 번째 이유입니다.

목수는 나무로 일하는 기술자, 즉 노동자. 일반인이었고 평민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멸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이런 이유로 다른 사람을 멸시한 적은 없는가.

또 이런 유혹을 받아 그 사람의 정체를 안 다음부터 갑자기 ‘저거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네.’ 하며

건방져지고 오만해지지는 않는지.

우리는 항상 출생이나 외적인 것에 의해 그 사람을 평가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즉, 편견에 노예로 바뀝니다.

 

두 번째로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나옵니다.

마리아의 아들로 불렸다는 사실로 볼 때, 이미 요셉은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왜 30살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미루셨을까 하는 이유도 간접적으로 드러나죠.

아마도 요셉 성인은 병 등으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그때부터 예수님은 마리아를 모셨죠.

오늘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것은 ‘과부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뜻입니다.

과부의 아들은 자랑스러운 위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첫째는 직업이 목수라고, 둘째는 과부의 아들, 아비 없이 자랐다고 예수님을 무시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지 않고, 동네 어른에게 인사만 하고 이렇게 무시당하지 않았겠죠.

‘출신을 뻔히 알고, 누구의 아들이고 직업이 뭔지 뻔히 아는 놈이 감히 우리에게 뭐라 가르쳐?’

그야말로 편견과 오만에 똘똘 뭉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이 예수님을 대하는 이 모습은 분명히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또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힘 있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분위기가 나쁘면 행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제가 군종신부를 여러 해 있었습니다.

보통 본당신부는 80 프로가 교인이고 외인이 20 프로인데, 군종신부는 반대예요.

어떻게 보면 진정한 의미의 선교사가 군종 사제죠.

연병장에 수백 명의 사병을 모아놓고, 상사가 고함칩니다. ‘자, 오늘은 신부님 훈화 시간이다, 졸지 말고 잘 들어.’

나에게 1시간이 주어지는데, 첫마디에 ‘하느님’ 하면 외인들은 안 듣죠.

여러분에게는 ‘하느님’ 한마디만 해도 세 마디 이상을 알아듣지만, 그들에게는 어렵죠.

대부분은 시간을 보내러 나온 거라 빨리 끝나기만 바랍니다. 참 어려운 거죠.

 

언젠가 공군 군종신부님이 장교들을 위한 강의 한 시간을 부탁하신 적이 있어요.

얼마나 힘이 들던지 저는 그날 속옷까지 다 젖었어요.

장교들이 모두 졸고 있는 거예요.

‘내 강의가 이렇게 재미가 없나?’

아마 예수님이 이런 마음이셨을 거라는 거죠.

받아들일 자세가 전혀 안 되어 있는 곳에서는 어떤 은혜로운 마음이 나올 수 없어요.

 

또, 제가 수인 사목도 했었죠. 교도소도 인격 지도 시간이 있습니다.

교도소 다녀오신 분은 알겠지만, 교도소는 들어가면, 소독약 냄새부터 냄새가 아주 묘해요.

강당에 푸른 죄수들이 죽 앉아있고, 교도관들은 뒤에 있죠.

한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요.

이 자리에는 조폭부터 전과 20범도 있는데, ‘착한 사람 되세요.’ 하면 통하겠어요?

그런데 한 번은 200여 명이 있는 강당이었는데, 중간에 한 사람이 일어나니 40여 명이 벌떡 일어나서

동시에 그 사람 쪽을 향해 서서 90도 각도로 고개를 숙이는 거예요.

조폭 두목이었던 거죠.

교도관들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완전히 그곳은 그 사람 왕국이었죠.

어휴, 완전 제가 쫄아서 그다음 말이 나오지도 않는 거예요.

하지만, 내 조직도 얼마나 센 데요. 제 조직 이름은 그 유명한 ‘비둘기파’, ‘성령파’ 입니다.

 

대개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강의가 안 돼요.

오늘 예수님 마음을 제가 알겠어요.

얼마나 기도하고 정성스레 준비하고 고향에 가셨겠어요.

처음에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을 때는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 쫙쫙 전달되었죠.

그런데 한 순간부터 험악해진 거죠. ‘저놈, 건방 떠네.’

 

분위기가 나쁘면 예수님이라도 하실 수 없는 것이 3가지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는 하느님이 하고 싶어도 포기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해요.

첫 번째 치유를 못 시켜요.

본인이 병 낫기를 거부하면 아무리 명의라도 고쳐줄 수 없습니다.

살려 하는 의지가 없는 환자를 도울 수 있는 의사는 없다는 것이죠.

영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의지를 우리는 신앙이라고 얘기합니다.

거부하는 의지까지 예수님은 어떻게 못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손을 얹어 몇 사람만 고쳐주시고 다른 기적은 행하지 않으셨다 나와요.

그냥 가셨어요.

마귀를 떼어 주신 적도 없어요.

그리고 얼마나 속이 상하셨으면 아예 다시 찾아가지도 않으셨어요.

편견과 오만에 똘똘 뭉쳐진 인간 앞에서 예수님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어요.

자유 의지!

우리를 만든 하느님을 인정할 수도 있고 배반할 수도 있고,

나에게 축복을 날마다 주시는 하느님을 향해 삿대질을 할 수도 있고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자유 의지입니다.

거부하는 의지까지 예수님은 어떻게 못 하십니다.

 

두 번째는 말씀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쁜 분위기에서는 설교할 수 없습니다.

신부님, 예수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정말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살아서 그 사람의 심령을 쪼개지만,

처음부터 눈과 귀와 마음을 닫고 받아드리려 하지 않는 분위기에서는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은총으로 바뀔 수 없습니다.

비판적이고 냉랭하고 무관심한 분위기에서는 어떤 박력에 찬 설교도 생명 없이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세 번째로 평화를 줄 수가 없습니다

나자렛이라고 하는 곳을 내 마음, 내 가정, 내 교회라 생각해봅시다.

서로 미워하고 이해하기 거부하는 곳에 예수님은 서 계실 장소가 없습니다.

나자렛에 머물고 싶어도 머물 수 없습니다.

 

나자렛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문을 열어드릴 수도 있고,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요한묵시록 3장 20절에 그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문밖에 서 계신다고 했어요. 그냥 열고 들어가시면 되지 왜 두드리실까?

두드리는 이유가 있어요.

바깥에서는 문을 열 수가 없고, 안에서만 열어주는 그런 문입니다.

안에서만 열어주는 문이기 때문에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면 예수님이 들어갈 수 있지만, 안 열면 못 들어가는 겁니다.

옛날 이발소에 예수님이 문밖에 서 계신 그림이 많이 걸려있었어요.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성화를 그린 화가는 산에서  몇 년간 기도 후 은사를 받았다 해요.

그 그림이 바로 묵시록 3장 20절을 표현한 것인데, 자세히 보아도 밖에는 문고리가 없어요.

 

예수님은 오늘 말씀의 모습으로, 또 잠시 후에는 성체의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셔도 치유를 거부하고말씀을 거부하고평화를 거부한다면 예수님은 하실 일이 없습니다.

 

나자렛에서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치유도, 말씀도, 평화도 못 주셨던 겁니다.

나이 30세까지 살았던 정들었던 마을에서 예수님은 깊은 상처를 받으신 겁니다.

그런 상처를 주는 나자렛 마을 같은 마음은 절대 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을 찾아와서 오히려 상처를 받고 돌아가신다면, 다시 찾아오고 싶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을 잘 영접해 드려서,

‘마리아, 베드로, 내가 시간 날 때마다 내가 너 자주 찾아올게난 네게만 오면 참 마음에 편해.’ 하셔야겠죠.

우리는 예수님을 쫓는 나자렛이 아니라예수님이 머물고 싶어 하는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이 되도록 애씁시다.

아멘

 

2021년 연중 제14주일 (07/04)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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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릭스1254 (2021/07/10 14:3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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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백발 (2021/07/15 08: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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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멘,김웅열(토마스 아퀴나스)신부님, 강론말씀감사합니다, 신부님, 영육간에건강하시고 하느님의은총이 충만하시기를기도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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