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무엇을 믿을까요?

글쓴이 :  하늘호수♡님이 2021-03-25 20:43:04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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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3.14–21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의 제일 중요한 단어인 ‘믿는다’가 5번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사십니까? 하느님 믿으시죠? 하느님만 믿나요, 또 다른 것은? 여러분들 갖고 계신 돈도 믿으시나요? 믿고 있지 않으세요? 믿는 것의 내용이 중요하지요. 우리가 믿는 것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불행해지기 위하여? 아니죠. 행복해지기 위해서 믿어요. 그런데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집니다. 돈을 믿으면 행복할 것 같아서 돈을 믿어요. 그래서 돈을 모으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읍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다 날아갈 수 있거든요.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삶의 질과 행복, 색깔이 바뀐다는 거죠.

 

우리 믿는 자들, 우리 신앙인들이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을 사도신경 어떻게 시작이 되죠?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우리 신자들이 믿어야 할 첫 번째가 바로 창조주를 믿어야 해요.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창조주가 우리를 만들 때 장난삼아서 만드셨습니까? 아니죠. 온갖 정성을 다하여 만드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세상 것을 다 만든 후에 인간을 만듭니다. 인간을 만들 때 진흙으로 빚었습니다. 진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눈, 코, 입을 만들어 놓고 귀를 뚫어놓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진흙 인형이에요. 그런데 그 진흙 인형을 사람으로 변화하기 위하여 창조주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숨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다른 짐승들을 만들 때는 숨을 불어 넣어주었다는 말이 없어요. 그런데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숨을 불어넣어 주시니까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숨을 불어넣어 주실 때 땅바닥에 눕혀 있는 진흙을 일으켜서 그냥 ‘후후’ 하시지 않았을 거예요. 하느님이 무릎을 꿇으셨어요. 무릎을 꿇으시면서 당신의 입을 그 진흙의 코에 가깝게 가져다 대면서 후후하셨습니다. 그때 눈이 떠지고 진흙이 사람의 살로 바뀌고 혈관에 피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만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창조주 하느님께서 무릎을 꿇으시면서까지 만드신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나를 지어주신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크리스천의 첫 번째 믿을 거리입니다. 우리는 곤충이나 살려고 버둥대는 짐승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모상을 닮았습니다. 그분의 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내쉬는 숨은 하느님의 숨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숨의 내용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새로운 것을 창조합니다. 그러나 미움은 파괴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첫 번째 믿음의 내용입니다.

 

두 번째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아무런 조건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조건을 붙이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사랑은 안 그런다고 하지만 늘 조건이 붙습니다. ‘너를 사랑하는 것만큼 나도 너에게 사랑받고 싶다.’ ‘내가 주는 것만큼 되돌려다오, 내가 주니 나도 받아야 하지 않느냐.’ 주고받아야겠다는 기브 앤 리시브(give and receive). 어떻게 보면 이것이 인간들의 사랑의 절대적인 조건일지도 모릅니다. 부부지간에 왜 상처가 생깁니까. 고부지간에 왜 상처가 생깁니까. 본당 신부와 신자들 사이에 왜 상처가 생깁니까. 주교님과 사제들 사이에 왜 상처가 생깁니까? 인간들끼리 생기는 상처의 원인의 90% 이상은 주면서 받으려고 해서 그래요.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만큼 절대 안 돌아옵니다. 다섯을 주면서 저게 인간이라면 적어도 둘은 되돌려주겠지 생각하지만, 여러분들 둘 되돌려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안 와요. 시어머니가 며느리는 ‘저 아이가 인성이 바른 아이라면 내가 열을 베풀면 적어도 나에게 셋은 되돌려줄 거야.’ 하면서 베풉니다. 하지만 안 돌아와요. 이렇게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것에 단절이 생기다 보면 내 마음 안에 씨앗이 떨어져요. 그 씨앗의 이름은 서운한 씨앗이에요. 그런데 이 서운한 씨앗은 비료와 물을 주지 않아도 싹이 나와요. 그 싹의 이름은 미움의 싹이에요. 이 미움의 싹이 나와서 줄기를 쭉쭉 뻗게 되면 분노의 줄기로 바뀌어요. 그리고 분노의 줄기 끝에서 이파리가 열리고 나중에 열매가 맺어지는데, 무관심이라고 하는 독이 잔뜩 들어가 있는 열매가 맺어지죠. 무관심은 성서에서는 영적 죽음을 나타냅니다. 더 나아가서는 영적 살인을 뜻합니다. 같은 집에 살지만 이미 마음은 남남이 된 지 오래다 이겁니다. 우리가 영어에서 물건을 지칭할 때 you가 아니라 this, that 하듯이, 배우자에게 ‘저거 또 들어왔네’ 하면서 살벌해집니다. 이렇게 둘 사이가 죽음의 상태로 가기까지의 시작은 미미했습니다. 무슨 씨앗이 시작이었다고 했죠? 서운한 씨앗. 서운한 씨앗을 제때 죽이지 못하면 안 됩니다. 서운한 씨앗에서 미움의 싹이 나오기 전에 제초제를 써서라도 해결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는 영적 죽음의 상태인 무관심으로까지 갑니다.

그러면 서운한 씨앗을 죽이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미 답을 알려 드렸습니다. 줄 때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창조주 하느님이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셨듯이 무조건 주라는 것입니다.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않으면 못 받아도 서운한 마음이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받는 것은 없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그 빈자리를 기쁨이라고 하는 선물로 채워주시리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하느님의 이런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불가능한 일은 아닐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할 수 있습니다. 자식 구하려고 불 속에 뛰어드는 부모는 자기 몸에 화상을 얼마나 입을까 생각지 않죠. 무조건, 조건 없이 뛰어듭니다. 기찻길에서 뛰어놀고 있던 아이를 구하고 죽은 그 엄마는 기차가 내 몸뚱아리를 밟고 지나갈 때 얼마나 아플까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기찻길로 뛰어듭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신부님, 그런데 그건 자기 새끼니까 피붙이니까 그럴 수 있죠,’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피도 살도 안 섞인 사람들 이야기를 해 봅시다.

 

오대 독자인 아들을 길에서 어깨 부딪혔다고 조폭이 그 자리에서 칼로 찔러 죽였어요. 그리고 무기징역을 받습니다. 그런데 몇 개월 지나서 그 죽은 아이 엄마가 날 찾아와서 다리를 놔 달래요. 그 살인범을 수양아들 삼고 싶대요. ‘자매님 미쳤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아들을 죽인 원수를 수양아들로 삼고 싶습니까?’ ‘신부님 저 장난삼아 온 것 아니에요. 6개월 동안 피눈물 흘리면서 기도했어요. 무조건 좀 만나게 해주세요.’ 만나고 싶다면 만납니까? 상대편이 만나지 않는다는데 어떻게 해요. 그 살인범을 설득하는 데에만 5개월이 걸렸어요. 간수들이 있는 자리에서 두 사람을 대면을 시켰는데 저도 조마조마했지요. 서로 첫마디를 어떻게 할까. 살인범은 의자에 앉아서 고개도 못 들고 땅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일어나더니 팔을 뻗어서 살인범의 손을 잡으며 첫마디로 ‘아들, 오늘부터 내 아들이야.’ 했습니다. 그 차갑기 이를 데 없는 살인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피도 살도 안 섞였을 뿐만 아니라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식으로 여기며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옥바라지를 하던지. 겨울만 되면 손수 뜨개질을 해서 양말을 만들어 오고 영치금을 넣고 이랬습니다. 그러면서 무기징역에서 모범수가 되고 감형되어 십몇 년 만에 출소했죠. 그 동네에서는 살기가 어려우니 지방으로 내려가서 슈퍼마켓을 하는데, 지금도 둘이서 하면서 얼마나 성당에 열심히 다니며 잘 사는지 몰라요.

 

창조주 하느님이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 그 사랑을, 하느님 모상을 닮은 우리도 분명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에만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피붙이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믿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조건 붙이지 않고, 따지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대차대조표 만들지 않고, 손익계산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절로 가능합니까? 아니죠. 얼마나 많은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으로 변하기까지 피눈물 나는 기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피눈물 나는 희생이 있어야 그야말로 사람 대할 때 이렇게 가격을 매기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해도 좋을 사람인가 아닌지 가치를 따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우리를 늘 돌보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약한 인간은 항상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삽니다. 병에 대한 공포, 외로움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 때문에 두려움을 가지고 삽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단어를 풀이하면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로 믿음의 내용입니다. 신앙이란, 믿음이란,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눈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눈을 맞추는 사람은 두려움이 훨씬 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렸을 때 구리 뱀을 바라본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물 위를 거닐던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보던 그 시선을 다른 것으로 돌렸기 때문에 물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베드로가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면서 다시 주님을 쳐다보자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바라보지 않으면 죽습니다. 주님과 등을 돌리면 분명히 죽습니다. 비록 인생살이가 고달프고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때로는 죄악에 빠져 허덕인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바라보면 삽니다. 부끄럽다고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는 당신을 잘 쳐다볼 수 있게 집안의 높은 곳에 모십니다. 그분은 높은 데에서 우리와 눈을 맞추기 위해 보고 계십니다.

 

사순절은 현재 내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는 기간입니다. 내 눈이 땅바닥만 보고 살아가는지, 돈만 보고 살아가는지, 미움만 보고 살아가는지. 그 잘난 교만으로 똘똘 뭉쳐있지는 않은지. 현재 나의 눈은 누굴 쳐다보고 있는지를 반성하는 주간이 사순절입니다. 내가 주님을 제대로 쳐다보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을 쳐다보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주님을 쳐다보면 평화가 충만합니다. 주님을 쳐다보면 사랑이 충만해집니다. 주님을 쳐다보면 행복해짐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하루에 집에 계신 예수님을 몇 번이나 쳐다보십니까? 예수님은 편안하게 계신 것도 아니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그분 손에는 여전히 못이 박혀 있고, 발등에도 못이 박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자세로 손발이 묶여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주님 힘드시지요, 위로해 드려야죠.

 

예수님과 눈을 마주치십시오.

그리고 지금까지 얘기했던 세 가지를 반드시 믿기 바랍니다.

첫 번째,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하느님께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나를 만드셨는데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든 내가 함부로 살면 안 되지, 이 거룩한 몸, 거룩한 영혼인데.’ 이런 생각으로 우리는 마음가짐을 다잡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은 절대로 조건을 붙이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늘 돌보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제가 수십 번 이야기 했죠. 이 김웅열 신부가 신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죽는 순간까지도 내가 붙들고 있는 기둥 세 개가 있다고 그랬어요.

첫 번째 기둥은 하느님을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두 번째 기둥은 하느님은 나의 어려움을 반드시 해결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기둥은 하느님께서 나의 앞길을 선하게 예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세 가지 기둥을 놓치면 우리는 고아처럼 됩니다. 노숙인처럼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면서 사순절 동안 우리의 눈을 십자가를 마주치면서 부활을 준비하도록 합시다.

아멘

 

 

♣2021년 사순 제4주일 (03/14)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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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릭스1254 (2021/03/26 10: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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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멘~
  
  백발 (2021/03/26 10: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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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멘, 김웅열(토마스 아퀴나스)신부님,강론말씀감사합니다, 신부님, 영육간에건강하시고 하느님의은총이 충만하시기를기도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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