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최양업 신부님 시복 현양 강론

글쓴이 :  하늘호수♡님이 2021-03-18 20:56:53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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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9, 2 - 10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최양업 신부님 시복, 더 나아가서는 시성 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봉헌하는 현양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1821년 3월 1일 지금부터 200여 년 전에 최양업 신부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셨죠.

저는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지인 배티 성지에서 7년 동안을 신부님의 삶을 묵상하고, 성지를 개발하고, 찾아오는 분들에게 최양업 신부님의 영성을 소개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최양업 신부님에 대한 전문가입니다. 이 짧은 시간에 최양업 신부님에 대해 전부 이야기해드릴 수는 없겠지만, 오늘은 전국에서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위한 현양 미사를 드리는 날이기 때문에 최양업 신부님의 일생에 대해서 깊지는 않으나 전체적인 이야기를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양업 신부님, 그리고 순교자분들을 생각하다 보면 믿음이라는 단어에 부딪히게 됩니다. 과연 믿음이 무엇이길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요? 지금 그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면 그분들처럼 믿음과 내 목숨을 바꿀 수 있을까요? 제가 여러분께 믿음이라는 것을 요약했었습니다. 물론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책으로 여러 권을 써도 모자라지만, 밤껍질을 까서 반질반질한 알이 나오듯이 군더더기를 다 떼어버린 핵심이 무엇이냐, 아시죠?

 

믿음이라는 것은 죽기까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이다.

 

딱 한 줄입니다. 글자를 세어봐도 30자 이내입니다.

죽기까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 손가락 하나 잘라내기까지, 발목 하나 끊어내기까지가 아니라 죽기까지. 누구를? 하느님을. 자식이나 돈, 출세, 쾌락이 아니라 하느님을 죽기까지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입니다. 세례받았지만 여러분들 하느님을 10위 권 안에나 모시고 있으세요? 솔직히 여러분들 내 삶의 제일 중요한 첫째 자리에 주님이 계십니까? 몇 번이나 모시고 사셨습니까? 물론 모실 때 있겠죠. 병들면 저절로 하느님께서 첫째 자리로 올라가죠. 집 안에 뭔가 해결할 일이 생기고 앞이 캄캄하면 저절로 하느님께서 첫째 자리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절대 첫째 자리에 안 올라가 계십니다. 대부분 자식이, 돈이, 세상이 첫째 자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죽을 때까지 외워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아침기도 바치고 난 다음에 외우셔야 합니다. 믿음이란 죽기까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입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이 날, 어떠한 우상도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게끔 내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리라는 결심으로 하루를 보내셔야 합니다.

 

죽기까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신다는 것을 조금 더 풀이하면, 죽기까지 하느님을 사랑으로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하느님에 대한 충성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하느님에 대한 순명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순도 100%짜리 24k 순금 신앙을 만들어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군인이 구호를 외치듯이 오로지 예수님께 대한 사랑, 오로지 예수님께 대한 충성, 오로지 예수님께 대한 순명을 외쳐야 합니다.

 

이렇게 죽기까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사시는 분들이 미신만 들끓던 조선 땅에 200년 전에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사제도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승훈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오면서 처음에는 학문으로 연구되었었죠. 천주학이라 했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보니까 주교도 있고, 신부도 있고, 수녀도 있는데 그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몰랐죠. 그러니 ‘이씨가 신부 한번 해봐,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주교 할게.’ 하는 식으로 가성직자 제도로 운영되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을 그렇게 해오다가 그것이 잘못된 것을 알고 싹싹 빌었고, 교회도 용서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국 천주교회는 세상 어떤 천주교회가 뿌리내리는 것보다도 하느님의 섭리가 오묘하게 작용했습니다. 선교사가 들어가서 하느님을 접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하느님께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학자들에 의하여 퍼지기 시작하던 것이 민초들 사이에서도 천주교가 퍼집니다. 그런데 전국 여기저기에 신자들이 모여 살다가 박해를 겪습니다. 소위 4대 박해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이 박해를 통해 만오천 명 이상의 우리 신자들이 참수를 당합니다. 이 중에서도 특별히 신유박해가 계기가 됩니다. 1801년의 신유박해에 이르러서는 박해가 조직적,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그전까지는 박해만 받고 죽지는 않았지만, 이때부터는 대역죄인이라는 죄명을 받아 재산을 압수당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우리 신자들은 숨어듭니다. 움막을 짓고 약초를 캐고 나무를 캐면서 연명을 했지만, 절대로 신앙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산 여기저기에 움막이 있었지만. 서로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포졸의 끄나풀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서로서로 숨기고 살았지요. 그러다가 쉬는 시간에 빙 둘러앉아 있다가, 해가 머리 꼭대기에 뜨면 몇 사람이 슬그머니 마치 오줌이라도 누는 듯이 숲속으로 들어갔다 나와요.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니까 ‘혹시 저 사람도 삼종기도 하러 들어갔다 나온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중에 한 사람이 용기를 내서 먼 산 보는 척하면서 땅바닥에 십자가를 그어보고 반응을 살핍니다. 둘러앉아 있던 사람이 한쪽 눈으로 십자가를 보면서 손가락으로 자기 밑에다가 십자가를 그립니다. 세상에! 다 천주교 신자들이었던 것이지요. 그제야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눕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평택에 살던 김 베드로올시다.’ ‘천안에 살던 아무개올시다.’’ 서로 붙들고 안으면서 이렇게 배티에 천주교 교우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배티는 소백산맥의 줄기입니다. 동네 야산이 아닙니다. 아주 깊은 산입니다. 그래서 포졸들이 올 수가 없었죠.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땅바닥에 십자가를 긋는 것으로부터 배티 교우촌이 만들어졌고, 전국에서 소식을 듣고 교우들이 모여들면서 배티 근방, 진천 근방에 15개의 교우촌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배티에 있는 15개의 교우촌을 옛날부터 동양의 카타콤, 조선의 카타콤이라고 불렀습니다. 카타콤이 무엇입니까? 지하 교회입니다. 로마에는 박해를 피해 땅속을 두더지가 파고 지나간 것처럼 수십 km가 되는 어마어마한 동굴이 있습니다. 거기에 숨어서 신자들은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유럽에는 로마의 카타콤이 있듯이, 동양에는 배티에 한국의 카타콤이 있었습니다. 이 배티의 15개의 교우촌은 윤의병 바오로 신부님께서 집필하신 박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은화」라는 소설에도 소개가 됩니다. 한국에 첫 번째, 가장 많은 교우촌이 모여 있던 곳이 배티입니다. 이제까지 배티에 대한 배경 없이는 최 신부님의 이야기를 할 수 없기에, 배티 이야기를 간단히 했습니다.

 

그다음에 알아야 할 것은 신부님 가족입니다. 아버지는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 어머니는 복녀 이성례 마리아이십니다. 두 분의 장남인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1821년 3월 1일,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 탄생하십니다. 동생이 5명이 있어서 총 6 형제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어려서부터 똘똘했기 때문에 일찍이 서양에서 온 신부님의 눈에 띄었습니다. 눈에 총기가 있고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을 아는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첫 번째 신학생으로 선발됩니다. 사제는 두 번째지만 한국의 최초의 신학생은 김대건 신부님이 아니라 최양업 신부님이었습니다.

조금 더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해드리자면, 이분들의 고향은 충남 청양 다락골입니다. 다락골에서 어린 시절부터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박해를 받고 여러 곳을 전전합니다. 처음에는 한양으로, 강원도에 금성, 경기도 부천까지 갔다가 나중에서는 경기도 과천의 수리산에 뿌리를 내립니다. 최양업 소년이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은 경기도 부천에 인천 근방, 청라라는 곳입니다. 이 동네에서 공소회장을 하실 때에 최양업 신부님이 선발됩니다. 그런데 1839년 7월 31일 수리산에 있는 교우촌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이 체포됩니다.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아들을 신학교에 보냈다는 죄명으로 태형 340대, 곤장 110대, 그리고 치도곤 25대를 맞습니다. 목이 잘리는 순교를 원하셨지만, 온몸에 독이 올라서 감옥에서 35세로 죽습니다.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3살짜리 젖먹이 최 스테파노와 아들들 넷을 데리고 여자 감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가 국법에 명시되지 않은 죄인이기 때문에, 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다가 열댓 명 있는 곳에 손으로 뭉친 밥 하나 굴러주면 어른들을 못 먹고 아이들만 먹었습니다. 원래 국법에 따르면 아이들은 감옥에 가둘 수 없는데, 형이 신부가 되려고 유학 갔다는 죄 때문에 동생들도 엄마와 같이 끌려갔던 것입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남편이 매 맞아 죽은 소식을 간수를 통해 듣습니다. 그래도 배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진 고문을 당해 살이 너덜너덜해지고 뼈는 부러졌는데, 세 살짜리 젖먹이는 젖을 달라고 보채고, 빈 젖을 아무리 빨려도 나오지 않죠. 결국 최 스테파노는 엄마의 빈 젖을 문 채 굶어 죽습니다. 그래서 최 스테파노 아기가 옥사한 한국의 첫 번째 아이가 됩니다. 아이가 품에서 굶어 죽자 이성례 마리아는 실성합니다. 배교할 테니 내보내 달라, 내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야겠다고 하자 풀어줍니다. 축 늘어진 스테파노를 가슴에 안고 나와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리고 아이들 넷을 데리고 거지처럼 떠돌다가 또 체포됩니다. 포도청 대장이 바뀌자마자 큰아들이 마카오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잡아들입니다. 처음에는 배교했고, 그런 후 다시 끌려갑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자신의 입으로 배교를 취소하겠다고 말하기 힘들었지만, 다시 잡아갔으니 이제 어떤 일이 있어도 배교하지 않겠다며 좋아합니다. 이들은 그때 다시 끌려 들어오지 않았지요.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만 끌려 들어온 것입니다. 아이들 넷은 엄마가 갇혀 있는 옥에 가서 엄마를 부르지만, 이성례 마리아는 등을 보이고 돌려 앉습니다. 아이들은 보면 마음이 약해질까, 또다시 배교할까 봐 두려웠죠. 또 배교하면 큰아들이 나중에 사제가 되어 돌아왔을 때 배교한 엄마를 수치스러워할까 봐, 이를 악물고 뒤에서 부르는 자식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매를 맞아 온몸이 터져나가도 배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거지가 되어 떠돌면서 엄마의 옥바라지를 합니다. 동네마다 다니면서 인절미를 얻어 가슴에 품고, 밥을 얻어서 간수에게 사정해서 엄마에게 밥을 먹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매 맞아 죽고 하나밖에 없는 엄마였습니다. 그 당시 제일 큰 아이 희정 야고보가 16살, 그 밑으로 12살, 9살, 4살, 이렇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성례 마리아에게 참수형이 내려집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참수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엽전과 쌀을 힘들게 얻어 엄마를 죽일 망나니의 집을 찾아갑니다. 망나니 앞에 아이들이 쌀을 내려놓고 ‘아저씨, 오늘 밤새 칼을 잘 듣게 갈아서, 내일 아침 우리 엄마 목자를 때 안 아프게 한 번에 잘라지게 도와주세요,’ 하니, 망나니는 감동합니다. 사람 목을 자르는 망나니지만 자기도 자식을 기르는 아버지이지요. 망나니는 어느 때보다도 칼을 날카롭게 갑니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이성례 마리아는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죽더라도 천주님과 성모님을 배반하지 말고, 큰형 토마스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만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리거라. 어떤 일이 하느님을 배반하지 말아라. 그리고 내일 절대로 형장에 나오지 말아라.’ 이성례 마리아는 다음날 5명의 다른 천주교인들과 함께 목이 잘릴 형장으로 나갑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오지 말라고 했지만, 어찌 안 갈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은 사람들 틈새에 숨어서 엄마를 쳐다봅니다. 머리를 풀어 헤친 이성례 마리아가 아이가 오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봅니다. 어찌 어미가 자식의 울음소리를 구분하지 못하겠습니까? 고개를 들어보니 제일 막내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둘째 아이가 입을 틀어막고 있었어요. 망나니는 그 모습을 보고, 미루면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칼춤을 멈추고 망나니는 이성례 마리에게 한마디를 합니다. ‘칼 들어가오, 칼 받으시오.’ 햇빛에 번득이는 칼날이 이성례 마리아의 목을 훑고 지나갑니다. 피를 뿜는 이성례 마리아의 목은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자식에게로 갑니다. 사람들은 잘린 목이 굴러들어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즉시 포졸들은 이성례 마리아의 머리채를 잡고 다시 가져다 놓습니다. 그때 당고개에서 6명이 죽었는데 그 죽은 시신들은 그냥 산 밑으로 굴려버렸습니다. 그래서 당고개 아래에 있는 언덕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썩은 시신이 하도 쌓여 있어서, 나중에 아이들을 엄마 시신을 찾아낼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최양업 신부님의 다섯 동생 중 막내는 최 신부님이 마카오로 유학 가고 난 뒤에 태어나 신부님께서 보지도 못했는데 옥에서 굶어 죽고, 나머지 넷은 거지가 되어 떠돌고 있고, 아버지는 매 맞아 죽고, 어머니는 목이 잘려 죽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신부님은 유학 중에 듣습니다. 공부가 되었을까요? ‘나 하나 때문에 이렇게 집안이 망했구나, 내가 사제가 되는 것이 이렇게 큰 죄란 말인가, 사제가 되기 위해 유학 온 것이 온 가족을 이렇게 죽어야 하는 죄라는 말인가.’ 한탄합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가족들의 비보를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서품을 받습니다. 그리고 차구 성당에서 7개월 동안 사목하다가 여섯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그리던 조국으로 들어옵니다. 15살에 조국을 떠나서 26살의 청년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거지가 되어 떠돌고 있는 가족을 찾아나 섭니다. 동생을 만나 보니 못 알아볼 정도로 컸는데 온몸은 뼈와 가죽만 남았고, 영양실조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일가친척들에게 맡깁니다. 페레올 주교님을 만나고 한국에 유일하게 있는 사제로서 (당시 이미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돌아가신 후)교우촌 사목 순방을 하십니다. 그러다가 1853년에 배티에 있는 조선의 첫 신학교와 신학교 겸 근방에 있는 교우촌을 사목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배티에 계시면서 최양업 신부님은 11년 6개월, 만 12년 동안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여기에 더해 있는 126개의 교우촌을 혼자서 사목하십니다. 대낮에는 다닐 수가 없기에 밤에만 다니고 낮에는 잡니다. 한 달에 3일을 주무시면서 1년에 7천 리씩을 걸어 다니셨다고 합니다. 7천 리가 얼마나 먼 거리인지 아시죠?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천 리입니다. 7천 리,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왕복 3번 반이 되는 거리를 짚신을 신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다닌 것입니다. 12년 동안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땀의 순교자, 길의 순교자, 백색 순교자이십니다. 그분이 12년 동안 걸어 다닌 거리가 무려 9만 리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문에 ‘구만리 고달픈 길’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장마로 길이 끊기는 칠 팔월에는 배티 사제관에서 저술에 몰두하셨습니다. 당시 글을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여러 편의 천주가사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한글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지었고, 한글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을 지으셨습니다. 결국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장티푸스와 과로로 주교님께 사목 보고를 하러 가다가 쓰러져서 돌아가십니다. 그분은 의식이 꺼져 가는 가운데 ‘예수 마리아’라는 거룩한 이름을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1861년 6월 15일 만 40세로 선종하십니다. 이후에 그분의 시신은 진천 공소에 가매장 되었다가 같은 해 11월에 베론으로 옮겨져, 현재까지도 베론 성지에 무덤이 그대로 있습니다.

 

선교지에서는 순교하면 성인 성녀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선교지에서는 증거자들은 성인 성녀가 되기 참 힘듭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목이 잘린 순교자는 아니셨지요. 증거자이십니다. 백색 순교자, 땀의 순교자이십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사제 서품을 받고 일 년도 못 살다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 년 동안 미사를 몇 번이나 했고, 영세를 몇 명이나 주었겠습니까? 똑같이 비교되지는 않겠지만 최양업 신부님보다 김대건 신부님은 산 햇수가 짧았습니다. 그런데도 김대건 신부님이 최양업 신부님보다 일찍이 성인이 되신 것은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한국의 첫 번째 사제라’는 점입니다. 특히 우리 조선은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1등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목이 잘렸다’라는 것입니다. 선교지에서는 순교한 사람에게는 기적 심사가 면제됩니다. 그러나 증거자들이 성인이 되려면 그분에게 전구하여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제가 배티에 처음 왔던 2010년에는 최양업 신부님은 가경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종이었습니다. 저는 7년 동안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해 노력했고 떠날 때 가경자까지는 만들어드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복자와 성인 품입니다. 바라건대 시복을 거치지 않고 바로 성인이 되시길 지금도 원합니다. 배티에서도 저는 하느님의 종에서 바로 성인, 성녀가 되기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오늘 최양업 신부님 시복 현양 미사를 봉헌하면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 한번 다시 새겨봅시다. 죽기까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이지요. 그런 믿음을 갖고 사셨던 분들이 모였던 동양의 카타콤, 배티에서 사목하셨던 최양업 신부님. 양들을 위하여 양들의 구원을 위하여 한 달에 3일을 자고 일 년에 7천리씩 걸어 9만 리를 걸었다가 길에서 선종하신, 땀의 순교자, 길의 순교자, 백색 순교자이신 최양업 신부님 이야기는 앞으로 많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가경자에서 시복이 되려면 기적 심사가 남았습니다. 지금 1건이 로마로 올라가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께 기도해서 눈이 안 보였던 분이 눈이 보입니다. 제가 배티에 있을 때도 최양업 신부님에게 전구하고 정말 많은 분이 와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어느 성인에게 전구할 때에는 근거가 반드시 남아야 합니다. 의사들의 증언서부터 아주 복잡합니다. 하루빨리 기적 심사가 통과되어 최양업 신부님이 시복의 영광에 이를 수 있도록 바랍니다. 우리 제단 밑에 뼈가 있는 오반지 바오로 복자님께서는 15개의 교우촌 중 하나인 동골에 있다가 잡혀가신 분으로 최양업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신 분입니다. 최양업 신부님 미사를 같이 했던 증인입니다. 이러한 성인들에게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위하여 전구를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2021년 사순 제2주일 (02/28)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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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발 (2021/03/19 08: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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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멘, 김웅열(토마스 아퀴나스)신부님, 강론말씀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영육간에건강하시고 하느님의은총이 충만하시기를기도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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