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마당에 화분이 여러 개 있습니다. 전 신부님이 작은 텃밭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거기에다가 몇 가지 야채들을 심었습니다. 상추, 치커리, 브로콜리, 부추, 그리고 보리 등을 심었습니다. 슈퍼에서 파는 씨앗을 사다가 심었는데, 심으면서 ‘이게 싹을 틔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비가 시원하게 오고 하루 이틀 지나니까, 작은 새싹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보리는 얼마나 힘이 센지 흙덩이들을 밀치고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 놀라워서 볼 때마다 ‘와~’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새싹을 틔운 이후에도 자라고 성장하는 야채들의 모습을 보면 너무 신기한 것 같습니다.
땅 속의 씨앗과 땅 위의 나무, 그 두 가지 그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많은 변화가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내 생각 그 이상의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오늘 아침 기도하면서 그 부분이 신기하고 또 신비로운 느낌이 들어서 한참 머물러 있었습니다.
씨앗의 상태와 나무의 모습. 땅 속 세상과 땅 위의 세상을 생각하는데, 문득 세례자 요한의 말도 생각이 났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나보다 크다..’ 는 말이 ‘씨앗과 아주 작은 나무’를 비교하는 그림을 생각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럼 씨앗은 나무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씨앗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은 나무가 있음을.. 우리 생각 그 이상의 것이 있음을 생각하게 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씨앗은 그것을 알고 죽을 수 있을까요? 어떤 씨앗은 땅 속의 세상이 만족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어둡고, 갇혀 있는 그 느낌이 안전과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그러한 느낌이 있을 수 있죠. 내 몸, 생각, 의지, 명성, 그리고 세상이 편안함을 주고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름답고 최고인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그 너머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너머를 생각할 수 있는 그의 행동이 ‘싹을 틔우는 씨앗을 볼 때 자아내는 감탄’을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 몸과 생각과 의지와 명성과 세상에 죽고 그 너머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모습이 주님에게 가장 큰 기쁨이고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실 모습인지도 모르겠죠.
그럼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죽고 있을까요? 죽어야 할 목록을 적어보다가 ‘명성’ 이라는 단어가 꽤 오래 제 안에 살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년에 피정을 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굉장히 불편하게 여겨지는 주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며 그분의 성공을 이야기하시는데 뭔가 불편했습니다. 왜 불편할까.. 라는 생각을 하며 반복해서 기도를 하는데, 문득 제 머리 속에 지나간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생각하는 성공은 그런 성공이 아니었던 겁니다. 더 중요한 자리에서 더 많은 일을 하고, 여러 본당을 다니고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따라다니는 그런 모습이 성공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성공을 바라보았습니다. ‘십자가 죽음, 그리고 그 곁에 선 제자 한 사람과 어머니. 그것이 성공이라면..’ 하는데,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성공의 모습이 힘을 잃고, 그분이 보여주시는 성공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쓰시는 대로..’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오늘 내 삶 안에 어떤 죽음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 너머의 세계로 가는 죽음이 내 삶 안에서 조금씩 이루어진다면, 그분의 감탄과 함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 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욕쟁이 할머니가 평소에는 반말로 욕을 하다가,
화가 나면 오히려 존댓말을 쓴다.
-아내는 화가 나면 남편의 성을 붙이며 이름을 부른다.
“김기현 나하고 얘기 좀 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