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단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비본질적인 것과의 결별!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2025/06/17 오후 11:50 (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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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단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비본질적인 것과의 결별!

유다 사회 안에서 가장 위선적인 사람들로 손꼽히는 부류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많이 배운 사람들, 고위층 인사들,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사제들!

같은 사제로서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 앉습니다. 사제들의 삶이란 것, 쉽게 위선자로, 이중 인격자로 전락하기 쉬운 삶인 듯합니다. 항상 강론대에 서야 하고, 뭔가 좋은 말을 해야 하는데, 구체적인 삶을 따라가지 못하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들도 처음에는 하느님 말씀의 성실한 전달자들이었으며 충실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성전 가까이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백성들을 가르쳤던 지식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가장 가까이 살았던 그들이 점점 하느님과 가장 멀어진 삶을 살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이 점점 타성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보다 중요한 핵심은 외면한 채,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인 하느님과의 만남이나 정신이나 신앙의 성장, 쇄신 작업은 뒤로 한 채, 형식적이고 외적인 것들에만 혈안이 되었기에,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살았지만, 실제로는 가장 하느님과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유다의 한 랍비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위선적인 것 중의 십 분의 구가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는 강한 율법주의를 바탕으로 한 형식주의가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로서 백성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상처를 감싸주고 어루만져 주었어야 할 제관들과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나 자선, 기도, 금식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한 질타에 대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한 번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종교에 헌신하고 있는 이들이 종교의 본질적인 면을 꿰뚫고 있으면서 영적인 삶과 세상에로의 투신을 통해 세상을 정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지 않고 비본질적인 것들에 몰두하게 될 때,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질타하시는 형식주의자들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위선의 극복, 그것은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노력입니다. 위선을 극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진지하게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본래의 나약함과 한계를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다시금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삶의 치명적인 결함인 위선과 이중성, 언행의 불일치를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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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준 안셀모 📱 (2025/06/1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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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신앙의 본질을 잃지 않기 위해 반성과 성찰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urlssigu 📱 (2025/06/2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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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기를 잃은 나뭇잎처럼,
신앙도 때로는 부서진 채 바람에 실려 흩어집니다.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이름들이
가장 멀리 서 있는 순간,
그 틈에 저는 오래도록 멈춰 서 있었습니다.

양승국 신부님의 묵상은
마치 깊은 우물 속으로 비추는
작은 빛 같았습니다.
비치는 것보다,
드러내지 못한 어둠을 더 또렷이 보여주는 빛.

부드러운 말보다 무거운 고백이 먼저였습니다.
가장 많은 것을 말해야 할 자들이
가장 먼저 침묵해야 했음을.
가장 빛나는 옷을 입은 이들이
가장 먼저 벗어야 했음을.

하느님 가까이에 머물며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어쩌다 가장 멀어졌을까요.
기도는 식었고,
형식은 남았으며,
눈물은 메말랐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단정하십니다.
“그들은 타성의 늪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신앙은 단단한 것 같지만
조금만 방심해도 가벼워집니다.
형식은 남고,
본질은 흩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저의 심장을 한 번 더 더듬어봅니다.
이 안에 믿음이 살아 있는지.
사람을 향한 연민이 남아 있는지.
제가 드리는 기도가
하느님 앞에 닿는 것이 아니라
내 얼굴을 가리는 가면은 아닌지.

위선을 극복하는 길은 멀지만,
출발은 오히려 단순합니다.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응시하는 일.

그리하여 언젠가,
말과 삶이 하나로 묶이는 날이 온다면
그건 대단한 깨달음 때문이 아니라
부단한 성찰과 조용한 결별,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는
그 고요한 선택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불완전한 나를 온전히 껴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의 문장 앞에서 다시 무릎을 꿇으며.
“하느님, 저를 가르쳐주십시오.
무너진 것 위에 다시 사랑을 놓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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