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당신의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를 열어보이신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2025/06/14 오후 11:39 (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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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당신의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를 열어보이신 하느님!

로마서를 통한 바오로 사도의 신앙 고백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 3-5)

환난도 자랑으로 여긴 바오로 사도의 비결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묵상해봅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내면 안에 성삼위께서 항상, 굳건히 현존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삼위가 하나되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이레네우스 교부의 말씀입니다. “모든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며,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됩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두 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의 말씀입니다.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聖父)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聖子)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는데, 그 아들은 성부께 도달하는 길이자 성부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아들에 이어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한 협조자(聖靈)를 우리 가운데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시는 최고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성삼위는 완벽하게 하나로 일치되고 통합되어 상호 긴밀하게 협조하는 한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성삼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성부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구체화된 자비와 연민의 성자와 감미로움과 은은함과 섬세함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온전히 한 몸이 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렵고 알쏭달쏭합니다. 박준양 신부님께서 쓰신 ‘삼위일체론 그 사랑의 신비에 관하여’ 라는 소책자가 큰 도움을 줍니다.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신비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하지만,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삼위일체 신비를 몸으로 살아나갈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 성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함께 하시어 내주(內住)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삼위일체적 삶’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한 아이가 저희 집에 왔을 때였습니다. 한창 먹을 때라 맛갈진 음식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주실 손길이 필요했습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라 따뜻하게 보듬어줄 어머니 사랑도 필요했습니다. 아이에게 기쁨을 선물할 재미있는 형도 필요했습니다. 어느 정도 교정도 필요했기에 너그럽지만 단호한 아버지 손길도 필요했습니다. 한 아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존재와 손길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일치되어 아이를 사랑해야 그 사랑이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성삼위께서는 상호 온전히 하나로 결속되어, 완벽한 일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소통하시고 상호 증여하시며 한마음 한 몸이 어떤 것인지를 모델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자기 본위의 자세를 탈피해서 서로 낮추시고 서로 순명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통합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이리 갈라지고 저리 찢겨 지고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 자주 바라볼 순간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 사이, 우리 공동체 사이, 국가와 민족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장벽을 당장 허물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나와 너무 다른 그를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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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카엘라 📱 (2025/06/1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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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감사합니다.
 
urlssigu 📱 (2025/06/15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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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을 자랑한다는 말이
처음엔 낯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 말이 아주 오래된 상처를 스치듯
조용히 이해되었습니다.

내 안에서 인내는 어느덧 체온처럼 익숙했고
수양은 침묵의 골짜기에서 자라났으며
희망은, 아주 작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가장 어두운 곳에서 피어났으니까요.

성부께서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은 다시
성령을 우리에게 머물게 하셨습니다.
이 단순한 흐름 속에,
인간의 언어로는 가닿을 수 없는 깊이가 있었습니다.

성부는 낳으시고
성자는 나시며
성령은 발(發)하신다는 말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습니다.

그 문장들은 낯설고, 아름다웠습니다.
차가운 돌을 만지듯
조심스레, 천천히 마음에 얹었습니다.

가끔은, 사랑이 너무 커서
한 존재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셋이셨고
그 셋은 하나가 되셨습니다.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사랑 자체로 오신 분.

말로 설명되지 않는 일치,
서로를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고
서로에게 순명하시는 사랑.

그 사랑은 오늘,
한 아이를 위해 어머니로, 아버지로, 형으로,
또는 조용한 부엌의 손길로
우리 곁에 다가오고 계셨습니다.

삶은 때때로 너무 조각나 있었습니다.
가정도, 공동체도,
우리 마음도.

그 틈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오십니다.
깊은 상처와 균열 사이를 지나
우리를 하나로 잇는 사랑으로
천천히 걸어오십니다.

분열된 오늘 앞에서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라.”
“다름을 두려워하지 말라.”
“사랑이란 결국
너의 중심을 비우는 일이다.”

사랑은 고요하게,
그 고요 속에 가장 큰 울림으로
우리에게 도달합니다.

지금 우리가 다 헤아릴 수는 없어도
사랑의 방식으로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아가는 삶일지도 모릅니다.

한 줄의 이해보다
한 순간의 사랑이
하느님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닿을 수 있다면,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저는 조용히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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