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女 이영덕 막달레나(1811-1839),동정,참수형(28세로 1839년 12월 29일 순교)
성녀 이영덕 막달레나는 1840년 1월에 순교한 성녀 이인덕(마리아)의 언니로, 1811년(순조 1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모친 조 바르바라는 열성적인 교우였던 반면에 부친은 고집스로운 외교인으로 이 모녀들의 신심생활에 많을 고난을 안겨 주었다.
교황청 조서에 의하면 이 막달레나는 명문의 집안이었다고는 하나, 그 가족의 내력은 자세히 나타있지 않으며, 더우기 당시에는 곤궁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점잖고 성품이 매우 온화하였으며, 외할머니로부터 천주교의 진리를 배워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신앙을 얻었다. 그러나 천주교를 몹시 꺼리던 아버지 때문에 모든 것이 아주 비밀리에 행해져야만 하였다.
교리를 가르쳐주던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틈을 타서 막달레나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몰래 성세를 받았다. 이로 인하여 아버지는 더욱더 천주교를 싫어하고 반대하였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많을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막달레나가 나이 스무살이 되자 혼기를 놓칠세라 아버지는 비신자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녀는 이런 결혼에 동의할 마음도 없었으며 오래 전부터 동정을 지키려고 하였기 때문에 꾀병을 부려 시집갈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버지는 이 핑계에 넘어가지 않고 엄하게 다루면 복종하리라 생각하여 딸을 매우 학대하였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서 아버지의 완고함을 껸어 보려고 하였으나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막달레나와 아버지의 갈등은 거의 10여년이나 계속되어 마침내 그녀는 이 혼인을 모면할 아무런 방법도 발견하지 못하게 되자 앵베르 범 주교에게 집을 떠난 허락을 청하였다.
앵베르 범 주교의 대답은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요. 집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좋겠소. 하지만 아버지가 권하는 혼인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범 주교의 권고대로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집을 볼 래 빠져나와 친한 신자집으로 피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앵베르 범 주교는 아직 조선 풍속을 잘 몰랐기 때문에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양반집 부인과 처녀들이 도망을 쳤다가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이러한 실정을 주교에게 자세히 말씀드리고 다른 방법을 구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주교는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준 후, 회장들에게 부탁하여 그 일을 될 수 있는 한 잘 해결하도록 하였다.
막달레나는 이제 동생과 함께 모친을 모시고 자신의 뜻대로 살수가 있었다. 회장들이 마련하여 준 조그마한 집에서 그들의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마음 놓고 신심생활을 하면서 곤궁과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막달레나는 주님께 감사하며 어려움 가운데서도 동정을 지키며 날로 신덕을 두터이하고 살았는데 기해년 7월경에 그가 살던 집에서 잡히게 되었다.
포청으로 압송된 이 막달레나는 주리를 틀리고,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시달렸으며 옥중의 모든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또한 자기와 같은 옥에서 고초를 당하는 어머니를 돌보아 드렸으나 결국 염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어머니를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까지 받아야 했다. 포도청에서 형조로 옮겨가서는 다리에 여러 차례 곤장을 맞았으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는 변함이 없었다.
드디어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바라던 순교의 복된 영광의 날이 다가오자 이 막달레나는 옥에 있을 때 가졌던 안온하고 화평한 마음으로 순교의 마당으로 나아가 칼을 받으니 28세로 순결을 주님게 바쳤다.
<교훈>
이 막달레나는 순결하고 고귀한 생명을 기꺼이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무엇이 생명보다 더 좋았기에?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까? 그녀에게는 신앙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보다 귀하고 가치있는 생명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녀 이영덕 막달레나는 1840년 1월에 순교한 성녀 이인덕(마리아)의 언니로, 1811년(순조 1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모친 조 바르바라는 열성적인 교우였던 반면에 부친은 고집스로운 외교인으로 이 모녀들의 신심생활에 많을 고난을 안겨 주었다.
교황청 조서에 의하면 이 막달레나는 명문의 집안이었다고는 하나, 그 가족의 내력은 자세히 나타있지 않으며, 더우기 당시에는 곤궁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점잖고 성품이 매우 온화하였으며, 외할머니로부터 천주교의 진리를 배워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신앙을 얻었다. 그러나 천주교를 몹시 꺼리던 아버지 때문에 모든 것이 아주 비밀리에 행해져야만 하였다.
교리를 가르쳐주던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틈을 타서 막달레나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몰래 성세를 받았다. 이로 인하여 아버지는 더욱더 천주교를 싫어하고 반대하였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많을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막달레나가 나이 스무살이 되자 혼기를 놓칠세라 아버지는 비신자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녀는 이런 결혼에 동의할 마음도 없었으며 오래 전부터 동정을 지키려고 하였기 때문에 꾀병을 부려 시집갈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버지는 이 핑계에 넘어가지 않고 엄하게 다루면 복종하리라 생각하여 딸을 매우 학대하였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서 아버지의 완고함을 껸어 보려고 하였으나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막달레나와 아버지의 갈등은 거의 10여년이나 계속되어 마침내 그녀는 이 혼인을 모면할 아무런 방법도 발견하지 못하게 되자 앵베르 범 주교에게 집을 떠난 허락을 청하였다.
앵베르 범 주교의 대답은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요. 집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좋겠소. 하지만 아버지가 권하는 혼인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범 주교의 권고대로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집을 볼 래 빠져나와 친한 신자집으로 피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앵베르 범 주교는 아직 조선 풍속을 잘 몰랐기 때문에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양반집 부인과 처녀들이 도망을 쳤다가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이러한 실정을 주교에게 자세히 말씀드리고 다른 방법을 구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주교는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준 후, 회장들에게 부탁하여 그 일을 될 수 있는 한 잘 해결하도록 하였다.
막달레나는 이제 동생과 함께 모친을 모시고 자신의 뜻대로 살수가 있었다. 회장들이 마련하여 준 조그마한 집에서 그들의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마음 놓고 신심생활을 하면서 곤궁과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막달레나는 주님께 감사하며 어려움 가운데서도 동정을 지키며 날로 신덕을 두터이하고 살았는데 기해년 7월경에 그가 살던 집에서 잡히게 되었다.
포청으로 압송된 이 막달레나는 주리를 틀리고,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시달렸으며 옥중의 모든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또한 자기와 같은 옥에서 고초를 당하는 어머니를 돌보아 드렸으나 결국 염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어머니를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까지 받아야 했다. 포도청에서 형조로 옮겨가서는 다리에 여러 차례 곤장을 맞았으나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는 변함이 없었다.
드디어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바라던 순교의 복된 영광의 날이 다가오자 이 막달레나는 옥에 있을 때 가졌던 안온하고 화평한 마음으로 순교의 마당으로 나아가 칼을 받으니 28세로 순결을 주님게 바쳤다.
<교훈>
이 막달레나는 순결하고 고귀한 생명을 기꺼이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무엇이 생명보다 더 좋았기에?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까? 그녀에게는 신앙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보다 귀하고 가치있는 생명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