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女 이매임 데레사(1787-1839), 부인, 참수형(52세로 1839년 7월 20일 순교)
이매임 데레사와 김 장금은 훌륭한 신심과 용기를 가지고 순교하였지만 그녀들의 기록이 충분하지 못하여 개개인의 순교전을 자세히 소개할 수 없음을 안타까운 일이다.
이매임 데레사는 1788년(정조 12년)에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기해년 7월 20일에 순교한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와 9월 3일에 순교한 이정희 바르바라 자매의 고모이며, 성녀 이매임 데레사의 올케로서, 그들 자매가 외교인이었던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여 서울로 피해온 조카들을 보호해주었으며 또한 갈 곳 없는 열심한 신자들을 그녀의 집에 머물게 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것으로 볼 때, 데레사는 성교를 안 후부터 이미 교우였던 남편과 함께 열심히 신자생활을 하였던 것이며, 또 가난한 교우들의 부모 노릇을 하다.
기해년에 이르러 박해가 시작되고 남명혁(다미아노), 이광헌(아우구스티노) 등 교회지도자들의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데레사의 집에는 그녀가 박애심으로 받아들인 열심한 여교구 2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김성임 마르타요, 또 한사람은 김루시아였다. 그리고 조카 딸 2명과 그들의 어머니이며 데레사의 올케인 허계임 막달레나 등도 있었다. 이 여섯 명의 여교우들은 어느 날 교회에 대한 박해, 순교자들의 용맹, 천국의 행복 등을 이야기하다가 거룩한 생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원의가 간절하여 자수하기로 결심하고 4월 11일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졸들은 기가막혀 그녀와 함께 온 신자들을 체포하려 들지 않자 천주교를 믿는 다는 증거로 묵주를 내 보이며 졸라서 마침내 포도청으로 끌려갈 수 있게 되었다.
포도대장은 이 데레사와 다른 여신자의 자수에 놀라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였다. 버릴 생각이라면 우리가 스스소 자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포장도 화가 나서 매를 배로 때리게 하였으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이 데레사와 다른 신자들은 자진하여 형벌을 받으려 하였고 모든 고문을 기쁘게 참아받았다.
이 데레사와 다른 신자들은 옥에 갇혀 있다가 5일 후에 다시 포도청으로 끌려나갔는데 포도대장이 "이제는 옥살이가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맛을 보았으니 생각을 바로 들렸으냐?"고 하자 "포도대장님 앞에서 저희들이 어떻게 오늘은 이렇게 하고 내일은 저렇게 말하겠습니까? 저희들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으니 나라의 법대로 죽여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그 뒤 형조로 옮아가서도 포도청에서와 같은 문초를 당하였다. 재판관이 "너희들은 아직도 천주교가 옳은 교라고 믿고 있느냐?" 고 묻자 "저희들은 천주교를 옳은 교로 믿고 천주를 공경하며 그를 위하여 피를 흘릴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재판관은 이들이 자수한 것을 벌하기 위하여 다른 신자들보다 더 혹독한 때리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그들의 백절불굴의 용기를 꺾지 못하겠으므로 마침내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 데레사는 52세를 일기로 서소문 밖에서 침수 당하였다.
김장금 안나는 1789(정조 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녀의 집안이 천주교 신자들이었는지라 어려서부터 교리를 열심히 행할 수가 있었다.
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출가하였으나 얼마 후에 남편을 잃고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살았데,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여 극진히 모시었다.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그녀의 모친은 나이가 많았으나 성사를 타당히 받고 선종하였다. 일생 동안 자기 처지에 알맞는 덕을 닦으며 극심한 가난을 참을성있게 견디어 나갔다.
안나가 살던 집은 이광렬(요한)의 집과 이웃하여 있었는데, 두 집안의 화목하기가 한 집안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기해년 4월 8일, 안나는 이 광렬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에 이르러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 후 형조로 옮겨저 사형선고를 받고, 옥에 있는 지 석 달만인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다른 7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 치명하니, 그 떼 그녀의 나이 51세였다.
<교훈>
우리 교회사에는 열심한 여신자들의 눈부신 업적이 많이 있다. 그분들은 성서에 나오는 착한 여인들처럼 진실하였고 주님의 참된 행복을 맛들였던 분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참다운 여성의 역할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신앙을 떠난 허영심에서 우러난 활동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여성 역할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뒷 바라지한 성모님처럼 겸손과 인내와 희생의 숨은 역할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매임 데레사와 김 장금은 훌륭한 신심과 용기를 가지고 순교하였지만 그녀들의 기록이 충분하지 못하여 개개인의 순교전을 자세히 소개할 수 없음을 안타까운 일이다.
이매임 데레사는 1788년(정조 12년)에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기해년 7월 20일에 순교한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와 9월 3일에 순교한 이정희 바르바라 자매의 고모이며, 성녀 이매임 데레사의 올케로서, 그들 자매가 외교인이었던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여 서울로 피해온 조카들을 보호해주었으며 또한 갈 곳 없는 열심한 신자들을 그녀의 집에 머물게 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것으로 볼 때, 데레사는 성교를 안 후부터 이미 교우였던 남편과 함께 열심히 신자생활을 하였던 것이며, 또 가난한 교우들의 부모 노릇을 하다.
기해년에 이르러 박해가 시작되고 남명혁(다미아노), 이광헌(아우구스티노) 등 교회지도자들의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데레사의 집에는 그녀가 박애심으로 받아들인 열심한 여교구 2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김성임 마르타요, 또 한사람은 김루시아였다. 그리고 조카 딸 2명과 그들의 어머니이며 데레사의 올케인 허계임 막달레나 등도 있었다. 이 여섯 명의 여교우들은 어느 날 교회에 대한 박해, 순교자들의 용맹, 천국의 행복 등을 이야기하다가 거룩한 생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원의가 간절하여 자수하기로 결심하고 4월 11일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졸들은 기가막혀 그녀와 함께 온 신자들을 체포하려 들지 않자 천주교를 믿는 다는 증거로 묵주를 내 보이며 졸라서 마침내 포도청으로 끌려갈 수 있게 되었다.
포도대장은 이 데레사와 다른 여신자의 자수에 놀라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였다. 버릴 생각이라면 우리가 스스소 자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포장도 화가 나서 매를 배로 때리게 하였으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이 데레사와 다른 신자들은 자진하여 형벌을 받으려 하였고 모든 고문을 기쁘게 참아받았다.
이 데레사와 다른 신자들은 옥에 갇혀 있다가 5일 후에 다시 포도청으로 끌려나갔는데 포도대장이 "이제는 옥살이가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맛을 보았으니 생각을 바로 들렸으냐?"고 하자 "포도대장님 앞에서 저희들이 어떻게 오늘은 이렇게 하고 내일은 저렇게 말하겠습니까? 저희들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으니 나라의 법대로 죽여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그 뒤 형조로 옮아가서도 포도청에서와 같은 문초를 당하였다. 재판관이 "너희들은 아직도 천주교가 옳은 교라고 믿고 있느냐?" 고 묻자 "저희들은 천주교를 옳은 교로 믿고 천주를 공경하며 그를 위하여 피를 흘릴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재판관은 이들이 자수한 것을 벌하기 위하여 다른 신자들보다 더 혹독한 때리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그들의 백절불굴의 용기를 꺾지 못하겠으므로 마침내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 데레사는 52세를 일기로 서소문 밖에서 침수 당하였다.
김장금 안나는 1789(정조 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녀의 집안이 천주교 신자들이었는지라 어려서부터 교리를 열심히 행할 수가 있었다.
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출가하였으나 얼마 후에 남편을 잃고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살았데,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여 극진히 모시었다.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그녀의 모친은 나이가 많았으나 성사를 타당히 받고 선종하였다. 일생 동안 자기 처지에 알맞는 덕을 닦으며 극심한 가난을 참을성있게 견디어 나갔다.
안나가 살던 집은 이광렬(요한)의 집과 이웃하여 있었는데, 두 집안의 화목하기가 한 집안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기해년 4월 8일, 안나는 이 광렬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에 이르러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 후 형조로 옮겨저 사형선고를 받고, 옥에 있는 지 석 달만인 7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다른 7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 치명하니, 그 떼 그녀의 나이 51세였다.
<교훈>
우리 교회사에는 열심한 여신자들의 눈부신 업적이 많이 있다. 그분들은 성서에 나오는 착한 여인들처럼 진실하였고 주님의 참된 행복을 맛들였던 분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참다운 여성의 역할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신앙을 떠난 허영심에서 우러난 활동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여성 역할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뒷 바라지한 성모님처럼 겸손과 인내와 희생의 숨은 역할이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