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 운동과 자발적인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정약종 순교자와 정하상 성인의 생애와 신앙
차기진(루가) /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순교자현양회 분과 위원장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름아닌 순교(殉敎) 전통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고대 로마 교회는 네로 황제 시대(54~68년)의 베드로․바오로 순교 이후 200여 년간의 카타콤브 시대를 통해 순교자들의 피로써 지탱되었고, 그 순교자들의 피가 곧 복음의 씨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한국 천주교회 또한 100여 년간의 박해 시대를 통해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였고, 이것이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었으며,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사실 복음이 끊이지 않는 생명력을 지녔다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현재의 교회 안에서도 언제나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 후손들인 우리는 과연 얼마나 신앙 선조들에 대하여, 그들의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특히 순교자들의 신앙 생애에 대해 알고 있는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신앙 선조들이나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과 현양 운동이 물결친 적은 여러 차례 있었다. 1925년의 기해(1839년)․병오박해(1846년) 순교자 79의 시복식 때, 1968년의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 24위의 시복식 때, 그리고 103위 복자의 시성을 위해 힘쓸 때였다. 그러다가 1791년의 신해박해 이후 1801년의 신유박해 때까지, 즉 교회 창설 초기에 순교한 신앙 선조들의 시복 시성 운동이 움트기 시작하고, 1996년의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순교 150주년과 2001년의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자발적인 현양 운동의 기운이 일고 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 위원회에서 마련한 이 번의 성지 순례도 그 일환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순교자나 성인을 내세워 자랑하고만 다닐 것이 아니라 직접 그분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종’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 장소,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 가운데 한 곳을 직접 순례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그분들의 신심을 이어받기 위해 노력하자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이에 맞추어 여기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주보 성인인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 1795~1839)과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1797~1839) 남매, 그 모친 유조이(柳召史, 체칠리아 : 1761~1839) 성녀의 신앙에 대해 서로 알아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다. 아울러 아직 시복되지 못한 정하상 성인의 부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 1760~1801)과 맏형 정철상(丁哲祥, 가롤로 : ?~1801)이 앞으로 시복․시성될 수 있도록 여러 신자들의 관심이 지속되기를 기원하고자 한다.
1. 복음을 수용한 정씨 가문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여러 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집안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토마스) 신부를 들 수 있지만, 초기 교회사에서는 오히려 순교자가 탄생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집안에서 친척 교우들을 박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박해 시대에 성가정(聖家庭)을 이루기란 쉽지 않았다.
이제 설명할 정하상(바오로)의 집안은 그 당시에 있어서 대표적인 성가정이었다. 따라서 그 집안은 복음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가문의 명성을 잃게 되었고, 부친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순교한 뒤에는 인척들로부터 천대를 받기도 하였다. 아니 오히려 그 집안은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순교를 각오한 뒤부터는 이 모든 것을 이미 감수고 있었다.
<정하상 바오로의 가계도>
(남보, 나주정씨족보, 해남윤씨족보, 안동권씨족보, 한국계행보 등을 참조)
이벽(요한)의 누이
정재원약현 + 이부만 딸2남 : 학수, 학순
+ 1녀 + 황사영(알렉시오)
의령 남씨 약전 + 김서구 딸2남 : 학초, 학무
해남 윤씨 약종(아우구스티노) + 이수정 딸1남 : 철상(가롤로)
+ 유조이(체칠리아)1남 1녀 : 하상(바오로)
정혜(엘리사벳)
약용(요한) + 홍화보 딸2남(학연, 학유)
약광․서 1녀
딸 + 이승훈(베드로)
딸 + 채홍근(채제공의 자)
윤경지충(바오로)
+ 지헌(프란치스코)
안동 권씨권상연(야고보)의 고모
누이 + 정재원
정하상의 집안 가운데서 가장 먼저 천주교를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삼촌인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丁若鏞, 요한)이었다. 그들은 영조 임금 때 경기도 광주 땅의 “마재”(광주군 草阜面 馬峴里, 현 남양주시 瓦阜邑 陵內里), 즉 일명 “소내”[苕川]라고 불리는 마을에 자리잡은 나주정씨(羅州丁氏, 즉 押海丁氏) 집안에서 탄생하여 그곳에서 성장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남인 가문에 속한 정씨 일가가 낙향하여 광주 땅에 자리잡게 된 것은 1701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된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 넷째인 정약용은 훗날 조선 500년사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로 성장하였으며, 셋째인 정약전 또한 학문으로 이름이 있게 되었다(훗날 유배지 흑산도에서 유명한 어류 도감인 자산어보를 지음). 이들 형제는 이미 1776~1777년 무렵부터 천주교 서적을 접하게 되는데, 당시 정약용의 나이는 약관 15~16세였다.
그 후 정약용 형제는 친척인 이벽(李檗, 요한)과 노닐면서 천진암, 광주, 마재, 서울 등지에서 만나 학문을 닦기 시작하였으며, 정약전은 1779년 겨울에 천진암 이웃인 주어사(走魚寺)에서 열린 강학회에서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리고 정약용은 21세 때인 1782년에 이런 시를 남기게 된다.
슬프구나 우리나라 사람들, 비유하니 주머니 속에 사는 것과 같네.
성현(聖賢)은 만리 밖에 있으니, 누가 이 몽매함을 열어 줄 것인가?
이들이 본격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때는 1784년이었다. 즉 이해 봄,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 이벽이 그로부터 교회 서적을 얻어 연구하게 되었는데, 여름에 이벽이 정약용 형제와 함께 마재 앞 한강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가다가 천주교 교리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 준 것이었다. 그리고 1784년 겨울, 수표교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 세례식, 즉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식에 그들 형제가 참석하여 정약용이 ‘요한’이란 세례명을 받게 되었다. 다만 정약전은 직접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으려는 생각에서 이때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마재의 나주 정씨 집안에 비로소 완전한 복음의 씨가 뿌려지게 되었다. 이후 그들 형제는 초기 교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되었고, 정약전은 아우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정약종은 1786년 3월에 세례를 받았고, 어린 장남인 정철상(丁哲祥, 가롤로)과 둘째 부인인 유조이(체칠리아)에게 교리를 전함으로써 성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2. 정약종의 신앙과 순교
1) 복음 수용과 영세 입교
1760년 경기도 광주 땅 마재에서 태어난 정약종은, 어릴 때부터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착실하게 성현들의 학문과 조선의 습속을 몸에 익혔다. 그리고 성장한 뒤에는 이씨 집안의 딸과 혼인하여 장남 정철상(가롤로)을 얻었다. 한편 정약종의 호를 ‘선암’(選菴)이라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선암이 과연 그의 호인지는 더 연구해 보아야 한다.
정약종은 학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차츰 전통 유학이나 성리학만으로는 조선의 현실을 극복해 나갈 수 없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망각한 채 양반층만을 중시하는 신분 사회를 타파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그는 일찍부터 유학을 배워 과거의 길로 나아가려는 생각을 버리고, 한때는 도교(道敎)에 심취하여 장생(長生)․구원의 길로 나갈 방도를 찾기도 하였다. 이처럼 학문․사상적으로 방황하던 그에게 찬란한 빛을 던져 준 것이 바로 천주교 신앙이었다.
27세 때인 1786년 3월 중형인 정약전의 가르침을 통해서 천주교 교리에 접하게 된 정약종은 즉시 도교를 버리고 천주교 신앙에 잠심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오랫동안 갈구해 오던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진리가 이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이나 도술, 옥황상제라는 말은 허망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주교요지 상편 중에서).
정약종은 천지 창조, 삼위 일체, 강생 구속, 천당 지옥 등 4대 교리를 비롯하여 주요 교리를 이해한 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대부로 정하고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다. 이 무렵에 이미 부친 정재원은 자식들이 천주교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약종이 입교한 다음해인 1787년과 1788년에는 아우 정약용이 반촌(泮村, 성균관이 있는 마을)에서 동료들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읽다가 밀고되고, 이로 인해 ‘반회사건’(泮會事件)이 일어나자 ‘자식들이 집안을 망치겠다’고 생각하여 천주교 신봉을 더욱 엄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약종의 신앙열은 더욱 불타 올랐다. 입교 이후 그는 아내와 아들 정철상에게 신자로서의 모든 본분을 가르치면서 오로지 교리 연구에만 몰두하였고, 한편으로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입교가 순수한 신앙심의 발로였던 만큼 교리 연구 또한 순수하고 깊이 있게 진행되었다. 훗날 조카 황사영(알렉시오)은 이러한 열심에 대해 “조그마한 이치라도 밝히지 못한 것이 있으면 먹고 자는 것에 흥미를 잃고 전심 전력으로 그 이치를 생각하여 반드시 완전히 꿰뚫은 뒤에서야 그쳤으며, 여러 해 동안 깊이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아주 습성이 될 정도였다”(황사영의 <백서> 중에서)고 기록하였다.
정약종은 이 무렵 첫 번째 부인을 잃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의 관습대로 가족들은 두 번째 부인을 얻으라고 권유하였고, 이에 못이겨 그는 유조이(체칠리아)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교회사에서는 이러한 정약종의 가정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약종은 집안 식구들의 간청에 못 이겨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한 지 얼마 후에 두 번째 부인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내와는 금욕을 하면서 살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때 교우들이 그를 말려 정하상(바오로)과 정정혜(엘리사벳) 등 여러 자식을 두게 되었다(샤를르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중에서).
아마도 정약종이 아내와 금욕을 지키면서 살려고 한 것은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즉 당시에는 “사람의 정덕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동정(童貞)을 지키는 것이 상층이요, 홀아비나 과부가 되어 독신의 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다음이며, 배필의 정을 지키는 사람이 그 다음이다. 성현들께서는 동정을 금에 비교하고, 나머지를 각각 은과 구리에 비유하였다.”(성경직해광익 중에서)고 가르쳤다. 정약종은 이 중에서 두 번째인 ‘독신의 정’을 지키려 했던 것 같다.
1791년에는 정약종의 외사촌인 윤지충(바오로)이 인척인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제사를 폐지한 뒤 함께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이 진산사건(珍山事件)이 널리 알려진 후 부친 정재원의 금령은 더욱 엄해지게 되었다. 중형 정약전은 이후 천주교 신앙과 완전히 단절하였으며, 아우인 정약용도 교회와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유일한 절대자로 알고 그 가르침을 진리라고 믿는 정약종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2) 교회 활동과 명도회
부친의 금령이 더욱 엄해지면서 집안에서는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정약종은 집안으로부터 제사에 참여하도록 강요를 받게 되었다. 이에 그는 식솔들을 데리고 한강 건너편에 있는 양근의 분원(分院, 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오로지 신앙 생활에 힘쓰면서 자유롭게 양근․여주․광주에 거주하던 교우들과 자주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정하상 성인은 1795년에, 정정혜 성녀는 1797년에 바로 이곳 분원에서 탄생하였다.
정약종의 활동 폭은 점차 넓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울의 지도층 신자들과 왕래하면서 1794년 무렵부터는 그들과 함께 ‘동학 공동체’(同學共同體, 즉 교리 연구 모임)를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족들은 물론 머슴 임대인(토마스), 행랑 아범 김한빈(베드로), 홍주의 천민 출신 최기인, 백정 출신 황일광(알렉시오) 등을 집으로 맞이해 들여 함께 생활하면서 교리를 가르쳤다.
1797~1798년 무렵부터 정약종의 교회 활동은 점차 빛을 발하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는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은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비밀리에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거나 중국으로 밀사를 보내 북경의 구베아 주교와 긴밀하게 연락하던 시기였다. 이제 정약종은 홍낙민(루가), 이국승(바오로), 홍익만(안토니오), 최필공(토마스), 윤지헌(프란치스코), 강완숙(골롬바), 홍필주(필립보),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으로부터 교리에 정통한 지도자로 대접을 받게 되었으니, 총회장 최창현(요한)은 “정약종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본가에서는 계속하여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제사에 동참하도록 강요하였으며, 친척 어른들은 장남 정철상(가롤로)을 송곳으로 찌르며 주 신부를 밀고하도록 탄압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열심한 교우들끼리 자발적으로 이루어 온 동학 공동체 중에서도 열심한 공동체는 주문모 신부의 방문을 받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주 신부는 이들을 방문하여 ‘첨례’ 즉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이로써 그 동학 공동체는 ‘첨례 공동체’(瞻禮共同體, 즉 지금의 공소 모임격)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소공동체 운동”은 이러한 동학 공동체 내지는 첨례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그 무렵 주문모 신부는 열심히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교회 일을 돌보던 정약종을 눈여겨보기 시작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를 구성하고 이를 중심으로 여러 소공동체 모임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조직화․체계화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체포된 후라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조선의 복음화를 추진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1799년 초에 주문모 신부가 설립한 것이 중국 교회의 평신도 단체를 모방하여 만든 “명도회”(明道會)였고, 이때 주 신부가 초대 명도회장으로 임명한 인물이 바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었다.
정약종은 당시의 나이(40세)로 보나, 출신으로 보나, 그 동안의 교회 활동으로 보나, 교리 지식과 신심으로 보나 명도회장으로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후 정약종 회장은 교리 연구 모임을 주도하거나 회원들의 전교 활동을 지도해 나갔으며, 회원들의 묵상 성과 등을 신부에게 보고하는 등 교회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 신부의 명으로 북경에 보내는 서한을 작성하여 전달한 적도 있었다.
명도회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교리 연구와 강습, 복음 전파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특히 서울에는 각처의 중심지에 첨례를 볼 수 있는 공동체를 차례로 선정하였는데, 이러한 첨례 공동체는 1801년까지 모두 여섯 곳이 되었으므로 ‘육회’(六會)라고 하였다. 실제로 이 육회의 활동은 지금의 구역․반 중심의 소공동체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후 명도회는 박해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신자들의 신심 함양과 복음 전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주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직후인 1794~1795년의 총 신자수가 4천 명이던 것이 1800~1801년에 1만 명 이상으로 증가한 것은, 신자들의 자발적인 소공동체 활동과 명도회의 역할에 힘입은 바 컸다.
3) 정약종의 신앙과 주교요지
명도회장 정약종의 신앙은, 첫째 교리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지적인 태도, 둘째 이를 바탕으로 한 교우들과의 강론과 교리 전수 활동, 셋째 끊임없는 묵상 공부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특히 황사영은 숙부인 정약종의 교리 지식에 대해 기록하기를 “사람들이 별별 교리를 물어보아도 주머니 안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과 같이 술술 풀려 나와 끊이지 않았으며, 되풀이하여 어려운 문제를 하나하나 구분하여 설명함으로써 조금도 막히지 않았다”(황사영의 <백서> 중에서)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교 초기에는 그에게도 허점이 있었던 것일까? 훗날 박해자들이 발견한 정약종 일기에는 “임금과 부친이 천주교 신봉을 금지하였으므로 그들을 원수와 같이 보게 되었다”는 불효․불충한 말이 있었다고 한다. “나라에 큰 원수가 있으니 임금이고, 집안에 큰 원수가 있으니 아버지이다”(國有大仇君也 家有大仇父也, 이기경의 벽위편 중에서)라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약종도 이에 대해 문초를 받게 되자, “제 자신이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있으며, 지금은 그 말을 뉘우치고 있다”고 진술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우리는 그 해답을 주교요지(主敎要旨)에 담긴 그의 신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주교요지는 정약종이 하층민과 부녀자 교우들을 위해 쉬운 한글 즉 언문체(諺文體)로 저술한 상․하 2권의 교리서인데, 주문모 신부는 그 내용을 읽은 뒤 ‘꼴과 땔나무보다도 더 요긴하다’고 극찬하였다. 이후 주교요지는 신자들 사이에서 필사되어 비밀리에 전파되면서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박해가 끝난 뒤 교회의 공인을 받아 목판본과 활판본으로 간행되면서 지하에서 벗어나 밝은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정약종은 그때 이 책을 저술하고 나서 다시 성교전서(聖敎全書)라는 책을 저술하고자 하였지만 신유박해 때문에 완성할 수 없었다.
주교요지의 상편에는 천주의 존재 증명, 천주의 속성, 세속론․도교․불교․민간 신앙에 대한 비판, 상선 벌악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하편에는 성서에 바탕을 둔 계시와 구속에 대한 설명 즉 천지 창조, 강생 구속, 천주교 봉행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주교요지는 대중 교리서이면서 일종의 신학서였다. 정약종은 이 책을 통해 신앙심이 약한 신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동시에 확고한 신앙 태도를 갖출 수 있도록 해주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호교론(護敎論)의 차원에서는 조선 사회에 만연되는 있는 천주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불식될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실제로 주교요지 안에는 4대 교리는 물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유일한 창조주요 주재자로 믿으며, 천지의 대군대부(大君大父)요 전능하고 지엄(至嚴)․지공(至公)․지의(至義)한 절대자로 믿는 정약종의 순수한 신앙 교리가 담겨 있다. 그것은 불효․불충이 아닌 효․충(孝忠)를 바탕으로 한 구원 사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일찍부터 하층민 신자들과 함께 동료로 생활하면서 교리를 연구한 것은, 교리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 평등사상의 발로요 조선의 신분제를 극복하는 혁신적인 사상의 표현이었다. 그의 일생은 이러한 신앙과 영성의 요소들을 자신의 마음과 생활 안에서 용해시켜 나가는 과정과 같았다.
주교요지의 신앙은 이후 차남 정하상 성인의 <상재상서>(上宰相書)로 이어졌으며, 박해가 끝난 뒤인 1885년에 목판으로, 1887년에는 활판으로 간행된다. 물론 교우들 사이에서 전해져 온 필사본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리고 1897년 열아홉의 나이로 영세 입교하게 되는 신앙인이자 애국자인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의사 또한 주교요지와 정하상 성인의 <상재상서>로 이어지는 정씨 집안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훗날 안 의사가 옥중에서 지은 자서전 안응칠 역사 안의 교리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자료 하나 없이 기억나는 대로 기술한 자서전. 머리 속에 간직되어 온 교리 내용. 안중근 의사는 주교요지의 내용을 그때까지 고스란히 외우고 있었다.
주교요지, <상재상서>, 안응칠 역사 : 만일 사람이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것이 있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유복자(遺腹子)가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고 해서 아버지가 있는 것을 믿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 소경이 하늘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하늘에 해가 있는 것을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또 화려한 집을 보고서 그 집을 지을 때 직접 보지 못했다고 하여 그 집을 지은 목수가 있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4) 정약종의 순교와 빛나는 용덕
이제는 감히 정약종의 순교 신심을 설명할 차례가 되었다.
양근 분원의 집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던 정약종은 1800년 5월 이후 분원을 떠나 서울로 이주해야만 하였다. 그 해 4월과 5월, 여주와 양근에서 박해가 일어나 모든 상황이 위급해졌기 때문이다. 서울로 이주한 그는 우선 청석동에 있는 문영인(비비안나)의 집을 빌려 살다가 아우인 정약용의 도움으로 남대문 안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나 정약종의 서울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1801년 1월 10일(양력 2월 22일) 신앙을 증오하는 무리들에게 굴복한 조정에서 천주교 배척의 윤음을 반포하면서 공식적으로 신유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그 직후 조정에 이름이 알려진 신자들이 먼저 체포되었으며, 2월 11일에는 정약종도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이에 앞서 1월 19일에 박해자들은 정약종이 교회 문서와 서한들을 넣어둔 궤짝을 압수하였는데, 그 안에 바로 정약종 일기가 들어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정약종의 책롱(冊籠) 사건’이다.
2월 12일부터 정약종에 대한 신문과 형벌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약종은 그 엄한 문초 과정 내내 조금도 마음이 약해진 적이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순교하는 날까지 시종일관 호교론을 펴면서 굳은 신앙을 드러냈다.
천주교 교리는 대단히 공정하고 지극히 올바르며 아주 진실된 것이므로 이에 대한 믿음을 바꿀 수는 없으며, 비록 형벌 아래 만 번을 죽더라도 조금도 뉘우칠 생각이 없습니다.
천주를 높이 받들고[對越] 밝히 섬기는 일[昭事]은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천지의 주재자는 형상(形象)이 없으므로 천주 화상을 만드는 것이고, 7일마다 첨례를 봄으로써 그분께 의탁하는 정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천주는 천지의 대군대부(大君大父)입니다. 천주를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천지의 죄인이며,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정약종의 공술 중에서).
이처럼 정약종은 시경에 나오는 “상제를 밝히 섬김으로써 마침내 많은 복을 얻게 되었다”(昭事上帝 律悔多福)는 내용과 “하늘에 계신 분을 높이 받들며 바삐 묘당을 돌아다닌다”(對越在天 駿奔走在廟)는 내용을 인용하여 자신의 천주 신앙을 설명하였다. 단지 천주교 교리만을 이야기해서는 전통 유학에 젖어 있는 관리들을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유학의 가르침을 인용한, 아주 적절한 비유였다. 아울러 천주교는 서양에서 들어온 사악한 학문이 아니라 유교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도 진리임이 분명하다는 호교론이었다.
그 무서운 형벌 앞에서 어떻게 하면 이보다 더 분명하게 신앙 고백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실로 진정한 “순교의 용덕(勇德)”을 드러낸 말이었다. 그러자 그를 신문하던 관리들은 할 수 없이 정약종의 일기 안에 있는 문서를 들추어내어 억지로 불효․불충의 말을 짜 맞추게 된 것이다. 그런 다음 정약종을 ‘범상부도(犯上不道)의 죄인’(임금을 거역하는 부도를 저지른 죄인)으로 몰았고, “한없이 흉악하여 하루라도 하늘과 땅 사이에 놓아둘 수 없다”는 미명 아래 1801년 2월 26일(양력 4월 8일)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당일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나이 42세였다. 순교 후 그의 가산과 노비는 몰수되었다.
정약종의 순교 장면은 다시 한 번 그의 용덕을 잘 설명해 준다.
정약종은 옥에서 끌려나와 형장으로 가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의 울음은 진정한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고, 당신들의 즐거운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니, 당신들은 서로 웃지 마시오.’ 처형당할 때가 되자 정약종은 관중들에게 다시 말하기를, ‘당신들은 두려워 마시오. 이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이후로 반드시 본받아서 행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칼로 한 번 내려친 후 머리와 목이 반쯤 잘리자 벌떡 일어나 앉아 크게 손을 벌려 성호를 긋고는 다시 편안한 얼굴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무토막에 목을 드리웠다가 몸을 돌려 하늘을 보고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더 좋다’고 한 뒤 칼을 받았습니다(황사영의 <백서> 및 조선 신자들의 <신미년 서한> 중에서).
정약종은 이와 같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칼날을 받았다. 자부적(慈父的)인 사랑의 극치를 보여 주신 대군대부 하느님께 대해 인간이 드릴 수 있는 대효(大孝)를 실천한 것이다. 이것은 확고한 천주관과 그리스도관, 대신덕으로서의 신․망․애 삼덕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그의 구원 사상은 순교의 용덕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실현하는 결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말해도 될 것 같다.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회의 초대 교부요, 대신덕과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추구하는 순교 신심을 지녔던 가장 위대한 신앙인이었다”고.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진 것은 그분이 하루 빨리 복자․성인품에 오를 수 있도록 자발적으로 기도와 현양 운동에 동참하는 일이다. 이 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된 것은 그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3. 정하상의 영광된 삶과 순교
1) 밀사로 자란 순교자의 후예
정약종이 순교한 뒤 맏아들 정철상(가롤로)도 체포되어 4월 2일(양력 5월 1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칼날 아래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정약종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 인근의 배알미리(拜謁尾里, 지금의 하남시 배알미동으로 팔당댐과 마재의 맞은편) 선산에 안장하였는데, 1959년 4월에는 후손들에 의해 반월의 사사리(沙士里)로 이장되었다가 1973년 5월 선산이 매각되면서 근처의 가족 묘지로 다시 이장되었으며, 1981년 11월 1일 천진암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유조이(체칠리아)와 어린 자식인 정하상(바오로), 정정혜(엘리사벳), 그리고 정철상의 아내와 어린 자식(이들은 얼마 뒤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뿐이었다. 그때 정하상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 정정혜는 다섯 살에 지나지 않았으며, 모친과 함께 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된 후 정철상의 가족들과 함께 마재로 돌아가 살게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로 인해 풍지박산이 난 정씨 집안에서는 그들을 달갑게 보지 않았고, 따라서 모두가 어렵게 생활해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여전히 신자의 본분을 지키는 것을 알게 된 집안에서는 그들을 천주교로부터 떼어놓으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정하상과 정정혜는 고신극기(苦身克己)하는 마음으로 일상의 고난을 이겨냈고, 모친으로부터 입으로 교리를 배우며 나날이 하느님의 진실한 종으로 자라게 되었다. 그러면서 정하상은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교우들을 찾아나서서 몇 명과 연락을 할 수 있었다. 이에 그는 집안 때문에 신앙 생활을 온전히 할 수 없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마음 아픈 일이지만 모친과 누이를 당분간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놓은 채 교우 집으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제 정하상은 결혼 같은 세속 일보다는 더 높은 것을 지향하는 고귀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도량이 넓고 재능과 덕이 있는 청년 교우로서 한국 교회에 성직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는 자신이 반드시 이 어려운 일을 성취하고, 그럼으로써 자신과 교우들의 영혼을 구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문과 교리를 더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여 함경도 무산(茂山)으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양근 땅의 유명한 학자 출신인 조동섬은 신유박해 때 배교하여 유배된 후 다시 회두하여 유배지 인근에 신앙을 전하는 데 열심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산까지는 천 리가 넘었고, 짐승이 우글거리는 아주 험한 길을 가야만 하였다. 게다가 정하상에게는 친구도, 노자도, 안내자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침내 무산까지 가서 여러 달 동안 학문과 교리를 배우고, 북경에 가서 성직자를 모셔 온다는 계획에 대하여 격려를 받은 뒤 서울로 돌아와 교우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북경까지 왕래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그의 호소는 교우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고, 마침내는 조선 교회의 밀사(密使)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사실 초기의 밀사들에게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일을 맡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감수해야만 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1816년 겨울, 마침내 22살의 청년 정하상은 북경으로 가는 사신 일행에 낄 수 있었다. 그것만이 중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 그는 돈을 주고서 사신 행차의 마부 자리 하나를 겨우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북경까지(서울-평양-의주․압록강-봉황성․책문-낭자산-산해관-북경)는 3천 리가 넘는 아주 먼 거리이다. 그리고 그곳까지 걸리는 기간은 45일에서 55일간으로, 체류 기간을 합해 약 4~5달이 소요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지만, 마부라는 하인들에게는 숙소가 없었기 때문에 만주 벌판에서 장막을 치고 불을 피우면서 노숙을 해야만 하였으며, 이때 병에 걸리는 것은 물론 얼어죽는 경우도 많았다.
정하상은 초대 밀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로지 주님의 보호하심을 굳게 믿었고, 이후에도 그 어려운 길을 여러 차례 왕래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뜻이기도 하였지만, 결국 주님의 섭리요 안배하심이었다.
2) 마침내 맺게 된 결실(성직자 영입)
청년 정하상이 북경 천주당을 찾았을 때, 그곳에 있던 선교사들은 용감하고 젊은 조선의 밀사를 보고 다시 한 번 조선 교우들의 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811년과 1813년 경에 이여진(요한)이 북경을 다녀간 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당시 북경교구를 관리하고 있던 사람은 라자리스트인 리베이로(Ribeiro) 신부였다. 왜냐하면 조선 포교지를 담당하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가 1808년에 사망한 뒤 그의 뒤를 이어 북경 주교로 임명된 수자 사라이바(Souza-Sariva) 주교가 북경에 올 수 없었으므로 마카오에 머물러 있으면서 리베이로 신부를 관리자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베이로 신부가 정하상을 만나 성사를 주었고, 그 소식을 마카오에 있는 주교에게 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사라이바 주교는 조선의 불쌍한 양들을 위해 1817년 초에 남경(南京)에 있던 두 명의 선교사를 선발하여 파견하였으나 모두 조선 땅을 밟지는 못하였다.
그 무렵 정하상을 도와 주던 교우 중에는 동정 부부로 유명한 조숙(趙淑, 베드로)과 권(權) 데레사가 있었다. 그들은 정하상을 자신의 집에 거처하도록 하였고, 북경에 가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짜증 한 번 내는 일 없이 도맡아 했었다. 그리고 정하상이 북경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도착한다고 기별한 하루 전날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819년에 순교하였다.
사실 정하상은 예정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탓에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우리의 밀사를 보호하려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신 행차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조선 교회의 실정을 설명하고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조선에는 교회를 이끌어갈 만한 지도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정하상은 교회 일을 도맡다시피 하였는데, 순교자의 후손인 이경언(李景彦, 바오로 : 1790~1827),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 1797~1846) 등이 국내에서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1824년, 나이 서른 살 때 정하상은 아주 훌륭한 동행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조정의 역관(譯官, 즉 통역관) 출신으로 사신 행차에 들어가기가 용이했던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 1791~1839)이었다. 바로 그 전해에 영세 입교한 유진길은 정하상을 만나자마자 의기 투합하여 함께 북경의 선교사들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그 해 말에 교황에게 올리는 편지를 작성하였다. 이것이 조선 교우들이 두 번째(첫 번째 편지는 1811년에 작성됨)로 교황께 보낸 편지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께서 순교하신 뒤 조선에서는 끊임없이 박해가 자행되어 약 1천 명에 이르는 교우들이 숨어서 교리를 봉행하면서 비밀리에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교우들은 삶에 지치고 비탄 속에 잠겨 있어 슬픔과 고뇌가 점점 가슴을 억누릅니다. 북경 주교님께서는 여러 차례 저희들의 청원을 들으셨지만,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성직자를 보내 주지 못하셨습니다. 아아! 이러한 불행은 저희 죄인들이 얻은 것인 만큼 다른 이들을 원망해서는 안되고, 저희 스스로를 책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되이 청하오니 먼저 성직자를 파견해 주시고, 아울러 이 비참하고 불쌍한 교회의 장래를 영신적(靈神的)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때 북경에 있던 총대리 리베이로 신부는 조선 교우들의 열성에 응답하고자 다시 한 번 선교사를 조선에 들여보내기 위해 1826년에 조선 신자들과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니 조선 교우들의 실망과 슬픔은 어떠했겠는가! 반면에 정하상과 유진길은 바로 이 해에 유능한 동료 한 명을 얻게 되었으니, 그는 곧 북경을 왕래하면서 알게 된 하급 마부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 1795~1839)이었다. 이후 정하상․유진길․조신철은 순교하는 날까지 함께 교회의 밀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 교우들이 1824년에 두 번째로 교황께 올린 편지는 마카오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된 뒤 1827년에 로마(교황 레오 12세) 포교성(布敎省, 지금의 인류복음화성)에 전달되었다. 포교성에서 조선 포교지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편지를 받아본 포교성 장관 카펠라리(Cappellari) 추기경은 그 내용에 감동되어 크게 마음이 움직였고, 조선의 불쌍한 양들을 위해 어떤 조치라도 취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포교지를 담당할 전교회를 물색하기 시작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1831년 2월 카펠라리 추기경 자신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 선출되자 1831년 9월 9일, 조선 포교지를 독립 교구로 설정함과 동시에 태국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M.E.P) 소속 선교사인 브뤼기에르(Bruguière, 蘇) 주교를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정하상과 그의 동료들은 그 동안에도 여러 차례 북경을 왕래하였으며, 1830년 10월에는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선교사가 입국할 수 있는 경로를 자세히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훨씬 뒤였다. 한편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7월에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태국을 출발하여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한 뒤 광대한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갔다. 포교성에서는 이에 앞서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 중국 이름은 余恒德)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여 주교를 맞이해 들일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1833년 겨울(양력 1834년 1월), 유진길과 조신철은 국경에서 유방제 신부를 맞이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즉시 조선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는 1834년 10월 내몽고인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에 도착하여 머무르다가 조선 교우들의 연락을 받고 1년 만인 1835년 10월에 그곳을 출발하였으나 11월 21일에 내몽고 땅 마가자(馬架子, 일명 뻴리구)라는 교우촌에서 병사하고 말았다(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1931년에 용산 성직자 무덤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서양 선교사는 프랑스인 모방(Maubant, 羅) 신부였다.
3) <상재상서>에 담은 순교 신앙
정하상은 그 동안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의 밀사를 통해서 준 돈으로 서울에 집 한 채를 마련하고 그곳으로 가서 성직자를 맞이해 들일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1835년 11월 23일(양력 1836년 1월 12일), 유진길․조신철․이광렬(李光烈, 요한) 등과 함께 봉황성 책문(일명 고려문)으로 가서 모방 신부를 만나 이튿날 밤에 의주 성문을 통과하여 서울에 있던 자신의 집으로 모셨다. 그리고 그 해 말에는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를 데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중국으로 안내하였고, 동시에 샤스탕(Chastant, 鄭) 신부를 이 땅에 영입하였으며, 1837년 11월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 주교를 모셔 들이고 그의 복사로 활동하였다.
이때까지 그는 21년간을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나이는 사십을 넘어 43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모든 청춘을 가난한 교회에 바친 것이었다. 그러니 그의 신심과 이 기간 동안 그가 겪은 고초를 어떻게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당시 앵베르 주교가 이 늙은 노총각을 신학생으로 간택하여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으니, 이 사실로 그의 깊은 신앙심을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하상의 신학생 생활은 얼마 가지 못하고 중지되어야만 하였다. 1839년 초부터 전국적으로 대박해가 휘몰아쳤고, 앵베르 주교와 2명의 신부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가장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기해박해(己亥迫害)였다. 이때 주교가 화성군의 송교리 갯마을(즉 제부도 앞에 있는 마을)로 피신한 뒤에도 정하상은 주교댁을 지키며 그곳에 있었다. 그는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고, 따라서 포졸들이 들이닥칠 것을 예상했으면서도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몇몇 교우들과 협의하여 박해자들에게 제출할 호교론(護敎論)을 직접 작성하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상재상서>(上宰相書, 필사본으로 전해져 오다가 1887년에 홍콩에서 간행되었다)였다.
3,400여 자로 된 장문의 <상재상서>는 말 그대로 ‘박해자들 가운데 최고 관리인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다. 주님의 충실한 종인 정하상은 이를 통해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천주교 탄압이 부당함을 주장하려 하였으니, 그것은 곧 부친 정약종이 주교요지를 통해 교리를 설명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세상 만물이 있음은 창조주가 있음이니, 어느 누구도 이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천주교는 바로 이와 같은 자연의 이치에 맞는 올바른 종교입니다. 또 천주 십계에는 부모께 공경하고 효도하라는 가르침이 있으니, 누가 이 종교를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상을 존경하는 것 또한 주님의 가르침에서 어긋나지 않지만, 제사와 신주는 허례와 허식으로 가득차 있으므로 거부하는 것일 뿐입니다. 조정에서 천주교를 금하는 것은 바로 진리로 향하는 길을 막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임금이라도 이처럼 진리에 닿으려는 욕구를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사도 성 바오로께서 “나는 약해졌을 때 오히려 강하게 됩니다.”(고린도 II, 12 : 10)라고 하신 것과 같이 누구나 두려워하는 형리들 앞에서 당당하게 천주교를 변호하였다. 그리고는 여러 차례 형벌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으며, 주교․신부들과 대질 신문을 받는 중에도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1839년 8월 15일(양력 9월 22일) 의금부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뒤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나가 망나니의 칼을 받았으니, 그 장소는 바로 38년 전에 부친과 형이 혈세를 받고 하느님 곁으로 간 곳이었다.
우리의 동정 순교자가 이렇게 주님의 피로써 목욕한 뒤 얼마 되지 아니하여 모친 유조이(체칠리아)도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79세의 고령이던 체칠리아는 포도대장 앞으로 끌려가 230대의 곤장을 받으면서도 아들처럼 칼날 아래 순교하겠다고 간청하였으나, 끝내 법으로 허락되지 않자 살점과 뼈가 드러난 몸으로 옥중에서 신음하다가 순교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씨 가문의 또 다른 순교자인 정정혜(엘리사벳)는 은총의 샘물로 목욕한 것을 항상 기쁘게 생각하며 일찍부터 동정을 지키며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된 후에는 320대의 곤장을 맞으면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4일(양력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84년이 지난 1925년 7월 5일, 이들 세 명의 순교자는 복자품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에는 성인으로 시성되어 전 세계의 교우들로부터 공경을 받게 되었다. 또 그 중에서 정하상 성인의 시신은 고향 앞산인 배알미리에 묻혔다가 1981년 10월 산 주인에 의해 파묘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은 뒤 남은 유해가 거두어져 신장 성당에 안치되었고, 그 해 12월 31일 천진암 ‘교회 창설자 묘역’으로 다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처럼 정씨 집안에서 탄생시킨 성인과 순교자들의 신앙은 마재에서 싹트고, 서울․북경으로 이어졌으며, 다시 마재 배알미리와 천진암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니 이곳 마재는 복음의 뿌리가 된 장소요 더 나아가서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가 되는 셈이다. 어찌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신앙을 이어받으려는 우리 후손들의 태도이다. 성인을 공경하고 순례와 기도를 통해 자발적으로 순교자를 현양하는 일, 그분들의 순교 사적을 세밀하게 조사하고 시복을 위해 힘쓰는 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후손에게 전해 주는 일은 모두 우리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