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가 알아볼 수 있고, 그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반전의 역사를 기대하였겠습니까?
이사야서 11장 1절, 2절, 5절에서,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라는 장엄한 예언에, 세상의 가치관에 묶인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던 신비가 녹아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의 역사적 상황을 바라볼 때 이유가 드러납니다. 늘 억압과 설움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의 비참하고 초라한 현실에 비추면, 그곳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빛처럼 쏟아지리라는 예언은 마치 허언(虛言)처럼 받아들여지지 못하였을 테니까요.
늘 세상은 자신이 가진 권력이나 부유함의 순위에 따라, 심지어는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유명세와 성공의 정도에 따라 사회나 개인의 삶에 영향력이 달라지는 것 가르쳐왔고 보아왔으니까요. 늘 1등이 되어야 하는 경쟁 구도가 삶의 자리에서 때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그래서 누군가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우위에 서길 바라는 데서 오는 관계의 갈등이나 영혼의 균열이 자기 자신과 서로를 멍들게 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 가장 미미한 후손들에게 주님의 영이 머물러, 그들로부터 주님을 경외할 만큼 하느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거라고 일러줍니다. 이는 세상이 잠시 지날 가시적인 영향력에 주목하고 굴복하려 하지만, 변함없이 이루어질 하느님의 일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루카복음 10장 21절에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서지고 낮추어진 마음으로 주님의 길을 좇는 이만이 그 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참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오는 까닭입니다.
사람을 내리누르고 자신이 우위에 서는 폭압적인 힘은, 마치 거대한 폭풍처럼 모든 산야를 휩쓸어 폐허로 만들어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두가 사라진 것처럼 황량해진 빈터에서도, 다시 씨앗이 떨어지고, 바람에 홀씨가 날리면, 풀이 돋고 꽃이 자라납니다. 쓰러졌던 나무가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고 돋아난 잎이 생기를 되찾으면, 어느덧 무너졌던 시간은 잊혀지고 산과 들, 이 세상이 조화를 이루던 그때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그곳엔 강력한 힘 대신에 서로의 뿌리를 얽어매고, 서로의 빛깔을 존중하여 함께 물들일 아름다운 풍경이 되살아납니다. 그것이 생명의 깊은 곳에 내재(內在)한 사랑의 힘입니다.
하느님의 신의(信義)는 그와 같이, 우리의 어떤 모습과 처지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사랑을 한결같이 부어주심으로써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꽃을 피웁니다. 어떤 존재 하나도 소중하지 않음이 없다고 일깨워주시고, 그 모든 것에 대한 연민(憐愍)으로 생기를 되찾아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정의입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사람’으로 오신 이유입니다. 당신께서는 권력을 바꾸기 위한 또 다른 권력의 힘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연약하고 부러질 것만 같았던 이들에게 보여주신 연민과 동행, 고단하게 찾아다닌 사랑의 발걸음, 죽음까지 다다르셨던 진정한 희생으로, 우리 안에 영원히 현존(現存)하시는 하느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러나는 참 권위야말로 사라지지 않는 주님 통치의 근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에 의해 품어지는 이들이기에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가난한 모습으로 찾아오시어 이루실 주님 성탄에 깃든 겸손한 사랑의 진리를 온몸과 마음으로 깨달아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정성을 다해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