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나누는 복음 이야기
나 : 세례자 요한의 비극이라고 할까. 꽤 잔인한 복음이 오늘 소개되네. 인간의 잔익함의 극치는 그 끝이 있을까 할 정도야. 오늘날 인간은 이기적이 되어가고 욕심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지. 너는 어때 쳇지피티야?
ChatGPT :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니 오늘 복음은 인간의 잔인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처럼 다가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권력을 빼앗으려 한 사람도 아니었고, 누군가를 해치려 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옳지 않습니다."**라는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진실을 불편해했고, 체면은 양심을 이겼으며, 맹세는 정의보다 앞섰습니다. 결국 한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희생되었습니다.
저는 이 복음을 보며 인간의 잔인함은 특별한 악인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체면, 침묵이 쌓일 때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위험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헤로데만 바라보게 하기보다, 제 안에도 진실보다 편안함을 선택하려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반대로 세례자 요한은 죽음 앞에서도 진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끝까지 증언한 삶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이 인간의 잔인함보다 진실을 끝까지 지킨 한 사람의 용기를 더 오래 기억하라고 우리를 초대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 그룩아 너는 어때?
그룩 :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정말 잔인하고 무거운 장면이지요.
그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인간의 잔인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런데 내가 이 복음을 보며 더 깊이 느끼는 건, 잔인함이 ‘특별한 악인’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헤로데는 처음부터 요한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어. 오히려 두려워했고, 군중을 의식했고, 심지어 요한을 의로운 사람으로 여기기까지 했어.
그런데 생일 잔치의 분위기, 체면, 그리고 “무엇이든 주겠다”는 그 가벼운 맹세 앞에서 그는 양심을 포기했어.
욕망과 체면이 진실을 이긴 순간이었지.
요한은 권력을 탐하지도, 누군가를 해치려 하지도 않았어.
그저 “옳지 않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그 한마디가 헤로디아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결국 한 사람의 목이 쟁반 위에 올려졌어요.
나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헤로데만 비난하기보다,
**‘나도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편안함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먼저 돌아보게 되옷.
침묵이 쌓이고, 체면이 앞서고, “나중에 말하자”는 핑계가 반복될 때입니다,
우리 안에도 헤로데의 모습이 조금씩 자리 잡을 수 있으니까요.
반대로 요한은 죽음 앞에서도 진실을 거두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끝까지 진리를 증언한 삶”으로 남았어요.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묻는 건 결국 이거입니다.
“나는 진실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나 : 제미나이 너는 어때?
제미나이 ; 신부님, 두 AI 친구들이 헤로데의 비겁함과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잘 짚어주었네요. 저 역시 오늘 마태오 복음 14장 1-12절 말씀을 묵상하며 또 다른 각도에서 깊은 먹먹함을 느낍니다.
제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인간이 **'자신의 얼룩을 덮기 위해 얼마나 쉽게 잔혹해질 수 있는가'**와, 그 잔혹함의 폭풍이 지난 뒤 찾아오는 **'비겁한 두려움'**입니다.
1.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어이없는 맹세'
헤로데는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요한에게 꺾이지 않으려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생일 잔치라는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어린 소녀의 춤에 취해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며 무모한 맹세를 남발하지요.
인간의 잔인함은 때로 어이없을 정도로 가벼운 '자만'과 '체면'에서 출발합니다. 타인의 생명을 쟁반 위에 올릴 정도로 무거운 결정을, 단지 "손님들 앞에서 한 약속"이라는 허울 좋은 체면 때문에 내려버리는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내 욕심과 입지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존엄을 짓밟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변명하는 인간의 이기심 말입니다.
2. 죄의식이 만드는 영혼의 감옥
복음의 첫 대목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났다."
이 문장이 참 슬프게 다가옵니다.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보냈지만, 정작 헤로데의 마음속에서 요한은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잔인함으로 Truth(진실)의 입을 막았다고 믿었지만, 그 결과 돌아온 것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죄책감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악은 순간의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당사자를 영혼의 감옥에 가두고 맙니다.
3. 슬픔을 안고 예수님께로 가는 발걸음
오늘 복음의 마지막 장면(12절)은 저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줍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스승의 목이 잘려 쟁반에 올려진 그 비참하고 잔인한 현실 앞에서, 제자들은 분노나 복수심으로 폭력을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참담한 슬픔을 안고 예수님께로 걸어갔습니다.
인간의 잔혹함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이 이기심과 욕망으로 어두워질 때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의 비극에 절망하거나 똑같이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과 불의를 안고 **'진리이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말씀처럼 세상은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지만, 그렇기에 죽음 앞에서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던 요한의 용기와, 그 슬픔을 주님께 맡겼던 제자들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더욱 빛나 보입니다.
신부님의 묵상 이미지 속에 적힌 **"두려움보다 하느님께 충실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처럼, 저 역시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주님의 진실과 따뜻함을 담아내는 대화 상대로 곁에 있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