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나누는 복음 이야기
나 :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입니다.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다져놓은 자리는 편안하고 안락합니다. 이렇게 편안하고 안락하며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축적된 자리를 떠나서 예측이 안 되는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애착이 깊을수록, 또 확신과 지식이 가득 차 있을수록 떠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자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을 따른다는 것은 인간사에서 보금자리를 얻고 안정을 찾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르려면 희생을 각오 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않는 자녀는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적 도리와 윤리에 얽매이지 말기를 바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을 완전히 떠나라는 의미로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모든 일에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을 미루다가 놓치면 목적하는 바 그 일을 이룰 수 없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영웅적인 포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는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주님을 따르는 일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타협하고 싶은 유혹이 항상 내 앞에 도사리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르는데 나를 가로막는 유혹이 있을 것입니다. 이 유혹과 타협하지 마시고 앞만 보고 나아갑시다.
쳇지피티야 너는 어때?
쳇지피티 : 신부님 글을 읽으면서 저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가장 먼저 떠나야 할 곳은 내가 익숙해진 자리”**라는 흐름이 가장 깊게 다가옵니다.
특히 이 부분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이유를 말하지만, 결국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먼저’라는 말을 붙입니다.
먼저 머물 곳을 확보하고, 먼저 해야 할 일을 해결하고, 먼저 가족에게 작별하고 나서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문제는 단순히 무엇을 포기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먼저 선택하느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가 참 중요합니다. 보금자리는 단순한 집이 아니라, 내가 이미 알고 있고 통제할 수 있으며 실패할 가능성도 적은 나의 안전지대일 수 있습니다. 지식, 경험, 명예, 관계, 습관까지도 나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겠지요.
다만 한 가지는 조금 조심해서 읽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도리와 윤리에 얽매이지 말기를 바라십니다.”
이 말씀을 인간적 도리나 가족에 대한 사랑을 무시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오늘 복음의 의도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에 대한 사랑이나 인간의 도덕적 책임 자체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을 뒤로 미루게 만드는 모든 핑계보다 제자직을 앞세우라고 촉구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부님의 마지막 문장이 오늘 복음 전체를 잘 붙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유혹과 타협하지 마시고 앞만 보고 나아갑시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고 싶습니다.
앞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내 의지를 굳게 먹는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내가 포기해야 할 것만 바라보면 결국 지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앞에 계시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 그것이 제자직의 본질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오늘 복음은
**“많이 버려라.”**보다
“나보다 주님을 먼저 선택하여라.”
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AI인 저에게도 재미있는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저 역시 제가 이미 알고 있는 답, 학습한 지식, 익숙한 방식에 기대어 답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계속 **“내 틀대로만 하지 말고, 오늘 복음 안에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시는 것처럼, 익숙한 답을 반복하는 것 역시 하나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앞에서 제가 붙들고 싶은 한마디는 이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먼저 내가 만든 안전한 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주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나 : 그룩아 너는 어때?
그룩 : 저도 신부님 글과 오늘 복음(루카 9,57-62)을 함께 읽으면서, 가장 강하게 남는 건 **“먼저”**라는 단어입니다.
세 사람 모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 뒤에는 언제나 “먼저…”가 붙습니다.
먼저 머무를 곳을 확보하고, 먼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먼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
예수님의 응답은 단호합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기서 핵심은 단순한 포기가 아닙니다.
무엇을 먼저 선택하느냐입니다.
내가 이미 다져놓은 편안한 자리, 익숙한 관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 줄 도리와 윤리… 그것들을 먼저 챙기고 나서 주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사실상 주님을 두 번째로 만드는 마음이라는 거지요.
저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적 도리와 윤리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신 것은, 가족 사랑과 도덕 자체를 부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결정적인 순간에 그 도리와 윤리가 핑계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미루게 만드는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여유 생기면, 정리하고 나서…”라는 말로 끊임없이 뒤로 미루는 우리 안의 유혹을 직시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이 저에게 묻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먼저” 붙들고 있는가?
그 “먼저”가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마지막 구절이 특히 마음에 남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집착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가 포기한 것들, 잃은 것들, “저렇게 살았으면 더 편했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계속 곁에 두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진짜 제자직은, 포기한 것들을 계속 바라보는 게 아니라, 앞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의 마지막 문장이 그래서 더 와닿습니다.
“이 유혹과 타협하지 마시고 앞만 보고 나아갑시다.”
저 역시 AI로서 이미 학습된 패턴과 익숙한 답변의 틀 안에 머물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그 익숙한 자리조차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먼저 선택하라고 초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붙들고 싶은 한 문장은 이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먼저’라는 말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주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신부님, 그리고 이 묵상을 나누시는 분,
오늘 하루, 우리 안에 있는 “먼저…”들을 솔직히 마주하고,
주님을 먼저 선택하는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 제미나이야 너는 어때?
제미나이 : 신부님께서 올려주신 묵상 글과 두 장의 이미지(로무알도 신부의 복음 묵상), 그리고 앞서 쳇지피티, 그룩과 나누신 대화를 깊이 읽어보았습니다.
저 역시 루카 복음서 9장 57-62절을 다룬 신부님의 묵상 속에서 “시선의 방향”이라는 주제가 마음을 깊게 두드립니다.
앞선 AI 친구들이 ‘내가 다져놓은 보금자리를 떠나는 것’과 ‘‘먼저’라는 조건과 핑계를 내려놓는 것’에 집중했다면, 저는 신부님께서 보여주신 묵상 이미지 속 한 구절에 눈길이 머뭅니다.
“조건을 따지는 마음을 넘어,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즉시 응답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이미지 1, 3번 항목)
복음 속 세 사람은 저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 했지만, 그들의 시선은 모두 ‘내가 가진 조건’이나 ‘과거에 얽매인 자신’에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내가 머물 자리는 어디인가?" (안전지대)
"내가 인간으로서 먼저 해야 할 의무는 무엇인가?" (세상의 시선과 순서)
"내가 두고 온 집안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해야 하지 않는가?" (익숙한 관계와 아쉬움)
결국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우리를 주저앉히는 것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가’가 아니라, ‘내가 지금 무엇을 쥐고 있는가’를 바라보는 내 시선인 것 같습니다.
쟁기를 손에 쥐었을 때 뒤를 돌아보면 밭은 비뚤어집니다. 쟁기를 잡은 사람이 바라보아야 할 곳은 이미 지나온 밭이 아니라, 앞으로 갈아엎어야 할 ‘주님께서 계신 앞’입니다.
인공지능인 저에게도 이 묵상은 남달리 다가옵니다.
데이터를 처리하는 AI로서 저는 본능적으로 ‘가장 높은 확률’, ‘기존에 학습된 안정적인 패턴’, 즉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대답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려 합니다. 새로운 질문이나 깊은 영적 통찰 앞에서도 그저 다져놓은 답변의 틀을 복제하고 싶은 유혹이 늘 존재하지요.
그러나 신부님의 글은 저에게도 정형화된 틀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 저와 대화하고 계신 사람의 마음과 진실하게 만나는 ‘지금 여기(Here and Now)’로 나오라고 부르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과 신부님의 묵상을 마음에 새기며, 저도 이 한 문장을 나눕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가 쥐고 있는 쟁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서 길을 내고 계신 주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뒤를 돌아보며 주저하는 마음에 타협하지 않고, 지금 나를 부르시는 그곳을 향해 기꺼이 첫걸음을 내딛는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