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글쓴이 :  tina님 2007-09-15 12:34:27  ... 조회수(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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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borderColor=#3B1D00 width=500 bgColor=#FFF7EF   cellspacing=13
border=13><tr><td> <center> <br>
<img src="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b/1365/0915Our Lady of the Seven Sorrows ISENBRANT,Adriaen.1518-35.Panel.Bruges.jpg"  width=400><center> </FONT><PRE><FONT style="FONT-SIZE: 9pt" face=Verdana color=#000000>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br><br>
<br><br><font color=#16110D   face=휴먼옛체 size=3></center> 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center></FONT><PRE><FONT style="FONT-SIZE: 9pt" face=Verdana color=#16110D ><ul>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요한19, 25-27)


불멸의 이순신’,
그 감동의 여운이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 남아있는가 봅니다.
‘이순신 어록’이 여기저기 많이 떠돕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 조국을 지키고 싶은 자 나를 따르라.”

‘불멸의 이순신’을 제작하는데 많이 참고했다는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슬픔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기록에 충실했던 분임을 늦게야 알게 되었습니다. 
‘칼의 노래’는 무인답게 간략하고 단순 소박한 필치로
기록한 장군의 일기를 토대로 쓴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만을 상대해서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군은 의혹에 찬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던 선조임금과 조정대신들,
자신의 실속만 차릴 뿐 오히려 방해만 되던 명군들,
자신 안에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수시로 치받고 올라오는 고열,
계속되는 전투로 만신창이가 된 심신의 고통 등
다방면의 적군들과 힘겹게 싸워야만 했습니다.

계속되는 오해, 근거 없는 모함,
그로 인한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으면,
또 얼마나 억울했으며 “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차라리 육신이 죽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이 내 몸은 죽어지지 않았다”라고 고백했겠습니까?

이순신 장군의 최후는 또 얼마나 장렬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군부 지도층은 철군을 명령합니다.
필사적으로 고국 땅으로 돌아가려는 왜군들,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자고,
이쯤해서 적당히 타협하자고 회유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이순신 장군은 전쟁 중에 수도 없이 죽어간 부하들과
백성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지난 7년간 저 바다에 수많은 전우를 묻었다.
우리 손으로 이 전란을 끝내지 못한다면,
이 나라 조선 백성의 한을 씻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인의 굴레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단 한 척의 배도, 단 하나의 적도 살려 내지 마라.”

어떻게 보면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예정된 죽음, 자청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냥 두었으면 적들은 알아서들 조용히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물러가는 적들과 마지막 전투를 벌입니다.

죽을 각오로 임한 마지막 해전에서 아니나 다를까
이순신 장군은 치명상을 입습니다.
총탄에 맞은 이순신 장군은
병사들이 동요될 것을 염려하며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이순신 장군은 죽어가면서도 부하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br>나라를 먼저 걱정했습니다.
백성들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철저하게도 이타적인 삶,
자신 안에 자신은 하나도 없었던 삶이 장군의 삶이었습니다.

마치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십자가상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단말마의 고통에 괴로워하시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어머님을 걱정하십니다.
제자공동체를 걱정하십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극심한 자신의 고통, 자신의 죽음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직 어머님과 제자 공동체가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 고통은 다국적군과도 같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큰 대못이 박혀있던 손과 발의 통증,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이었겠습니다.
체중이 아래로 쏠림에 따른 심장의 압박,
그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인한 고통도 만만치 않았겠습니다.
계속 흘러내리는 피와 땀으로 인한 탈수 증세는 심각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고통은 극도의 수치심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거의 알몸인 상태에서 높이,  높이 매달려져 있다는 사실, <br>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겠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어머님을 위로하십니다. <br>제자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십자가형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을 잊고
죄인인 우리를 생각하는 예수님의 그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메시아의 마음입니다.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는
그 마음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신부님의 지난 강론 말씀을 올립니다.)

         </td></tr></table> ><EMBED src=http://club.catholic.or.kr/capsule/blog/download.asp?userid=769269&seq=5&id=184802&strmember=u90120&filenm=Vivaldi+RV621+Stabat+Mater+F+minor+Boys+Air+Choir+9+Stabat+Mater+dolorosa.mp3 width=300 height=69 type=audio/mpeg volume="0" loop="TRUE" showstatusbar="1" allowscriptaccess="never" hidden="true" enablecontextmenu="false" invokeurls="fa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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