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무릎으로 기어서 / 성 프란치스코 드 살 기념일

글쓴이 :  tina님 2007-01-24 12:50:02   ... 조회수(206)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살레시오) 기념일

 
     무릎으로 기어서  

글 :  양승국 신부님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장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에 돌아오시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마르코 3장 20-21절) 


살레시오 회원으로 살아가면서도 주보성인인 
프란치스코 드 살(혹은 살레시오) 성인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던 
제 자신을 깊이 반성하며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앙리 코위아니에 저, 안응렬 역, 
돈보스코 미디어, 2001)를 서고에서 꺼내들었습니다. 

책을 펴드는 순간,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책의 분량에 기가 많이 꺾였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돈보스코께서 왜 그리도 이 성인을 존경했었고, 
또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의 주보성인으로까지 모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을 읽던 저는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 드 살의 
생애 각 단계마다 널려있었던 숱한 걸림돌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더 저를 놀라게 한 것은 그런 좌절과 낙담의 순간에도 꾸준히 희망했고,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그의 낙천성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낙천성은 돈보스코에 이르러 예방교육의 
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의 온유와 겸손, 성공적인 사도직, 
그 이면에는 무엇보다도 그의 낙천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비록 고통스럽고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하느님의 도움으로 잘 되어 나가리라고 믿는 
그의 낙천성은 후에 돈보스코의 생애 안에 철저히 재현됩니다. 

1593년, 26세 되던 해 프란치스코 드 살은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네시의 사제로 서품됩니다. 
안네시의 수석사제로 열심히 활동하던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이 들어오는데, 
샤블레 지방의 선교책임자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샤블레 지방은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칼빈교도들의 땅이 된 곳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지역에 대한 교세 회복을 위해 
여러 번 유능한 사제들을 파견하곤 했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철수하곤 했습니다. 

이 위험한 지역의 적임자를 물색 중이던 주교의 눈에 
프란치스코 드 살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갓 서품된 젊은 사제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그리고 이 젊은 사제를 애지중지하며 챙기던 부모의 얼굴을 떠올리던 순간, 
주교는 도저히 그 말을 입 밖으로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교는 자신의 교구 사제들을 한자리에 모아 상황을 설명합니다. 
샤블레 지방의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시급한 일인지? 
또 왕이 얼마나 이 일을 절실히 원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며 
"혹시 지원할 사람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 순간 지체 없이 일어났던 한 신부가 있었는데, 
바로 프란치스코 드 살이었습니다. 
"주교님, 제가 그 일을 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셔서 
제게 명령을 내려주시면 얼마든지 순종할 용의가 있고 기꺼이 가겠습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의 아버지 브와지씨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벌써 아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즉시 주교관으로 달려가 따지기 시작합니다. 

"주교님, 제가 아들을 주교님께 맡긴 것은 신부를 만들라고 한 것이지 
순교자를 만들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대목을 읽고 묵상하던 저는 프란치스코 드 살의 
낙천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샤블레 지방 상황의 위험성과 선교사 파견의 시기상조, 
무모함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비관론을 제기하는 아버지 앞에 
프란치스코 드 살은 투철한 낙관론으로 대응합니다. 
인간적인 시각과 상황 분석을 토대로 한 비관론 앞에 
프란치스코 드 살은 하느님의 섭리와 손길을 바탕으로 한 낙관론을 제시합니다. 

샤블레에 도착한 프란치스코 드 살 앞에 펼쳐진 상황은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오래 전 이 지역은 칼빈교도들에 의해 접수되었고, 
전체 인구 3만여 명 가운데 가톨릭 신자 수는 백 명도 채 못 되었습니다. 
일부 개신교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 사이에 나타난 그를 
우상숭배자나 거짓 예언자로 몰아세우곤 했습니다. 

이 지역에서의 첫 번째 강론은 어느 예배당에서 
개신교 목사가 일차로 설교를 마치고 나간 뒤에 시작되었는데, 
잔뜩 겁을 집어먹어 힐끔 힐끔 뒤를 돌아보던 몇 명의 천주교 신자들뿐이었고, 
그 뒤로 호기심에 찬 몇 명의 칼빈교도들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모두 합해서 10명도 채 못 되었습니다. 

한겨울에도 프란치스코 드 살은 선교를 위해 
눈이 내린 시골길을 끝없이 돌아다녔습니다. 
동상에 걸린 그의 발은 자주 부어터지곤 했었는데, 
그로 인한 통증이 너무 심해 어떤 날은 
두 손과 무릎으로 기어서 귀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토록 심한 고행을 계속하는 그가 염려가 되어 
주변 사람들이 "신부님, 몸도 좀 생각하십시오. 
계속 이렇게 나가다간 돌아가시겠습니다"하고 충고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천국에 더 빨리 가게 되고 좋지 않느냐?"며 
명랑하게 대답하고는, 
아픈 발을 끌고 기약도 없는 선교의 길을 다시 나서곤 했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코 드 살에게서 돈보스코 낙천주의의 뿌리를 읽습니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피로감과 사람들의 노골적인 냉대와 
급진적인 개신교도들의 위협으로 가득 찬  그 험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그는 희망을 않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샤블레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불가능은 없다고 여기며,  언젠가 자신의 노력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알찬 결실을 맺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에게 있어 낙관주의는 곤란한 상황 앞에서  '더 이상 어쩔 수 없지'하고 포기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린다든지 강론을 통한 선교가 성과가 없자,  그는 즉시 방법을 바꾸어 '찌라시 전법'으로 나갔습니다. 
요즘 가출 청소년들이 많이 하는 찌라시(전단)를  밤낮으로 만들어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부나 되는 전단을 손으로 직접 써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붙이거나,  집집마다 다니면서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많은 효과를 거두어 성공적인 선교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윽고 8년 후에는 샤블레 지역 주민 거의 모두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인간적인 노력을 다한 뒤,  그 이후의 일에 대해 하느님의 손길에 맡기는 것,  그것이 프란치스코 드 살의 낙관주의였습니다.  ≪2004년 1월24일에 쓰신 강론 말씀을 옮긴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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