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돈 보스코 관련 서적 홍보 및 판매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던 날입니다. 제주에서의 긴 여정을 마치고 긴장이 풀린 상태인데다, 책을 나르다가 허리까지 다친 상황이라 안정된 곳인 수도원 공동체로 최대한 빨리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수도원에 잠시 들려 갈아입을 옷을 다시 챙기자마자 대전으로 내려가야 했기에 지체하거나 여유를 부릴 상황도 없었습니다.
지인의 도움으로 여유있게 제주공항에 도착해서 예전에 생체정보인식등록을 한 터라 줄을 서서 신분증 및 탑승권 대조를 하지 않고 간단한 정맥인식절차를 거쳐 탑승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공항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상황판에 다수의 항공사가 출발지연이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탑승해야 할 김포행 모 항공사도 출발지연표시가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제주 지역에 갑작스런 돌풍이 불어 비행기 이착륙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상황을 보니 난감했습니다. 모든 항공편이 출발지연되었습니다. 결항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몰라 막막했습니다. 제주에 도착한 비행기가 다시 승객을 싣고 정해진 목적지로 향하는데, 비행기가 정상적으로 도착을 하지 못하니 자연스레 출발지연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몸도 피곤하고 지친데다 허리까지 다쳐서 그런지 기다리는 시간이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게다가 언제 떠난다는 기약도 없으니 더 힘들었습니다. 또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열차편으로 대전에 내려가야 하는데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봐 조마조마했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출발변경시간이 표시되었고 해당 항공편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시간에 맞춰 탑승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제가 탑승해야 할 김포행 모 항공사에만 변경시간이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제가 탑승할 비행기의 출발 변경시간이 표시되었지만 시간이 되어도 아무런 기별이 없더니 갑자기 변경시간도 없어졌습니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주로 이용하는 항공사가 가는 목적지 출발변경시간만 공란으로 표시되는 것을 보고 더 화가 났습니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더 예민해졌나봅니다. 아무런 공지도 없이 마냥 승객을 기다리게 하는 항공사가 너무나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급한 마음에 대전에 있는 저희 수도회 공동체 원장 신부님에게 전화해서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많이 늦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예매했던 열차표도 반환을 했습니다. 비행기가 언제 떠날지 모르니 다시 열차표를 다시 예매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예정 출발 시간에서 세 시간이 지나서야 탑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습니다.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터질 정도였습니다. 비행기에 탑승을 하고서도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환한 미소로 승객을 맞이하는 승무원을 보고 "다른 항공사 비행기는 진작에 떠난 이 마당에 세 시간동안 아무런 공지없이 공항에서 기다리게 해 놓고 이 상황에서 지금 웃음이 나와요?"라고 할 뻔했습니다.
눈을 감고 오만상 찡그린 채 앉아있다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습니다. 깊은 잠을 자고 나니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습니다. 김포에 도착해서 수도원으로 향하면서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일부러 늦게 출발한 것은 아닐테고... 항공사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했을 것이고, 승객의 안전을 위해 여러 조치를 취하느라 출발 시간이 늦어졌을텐데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괜한 짜증을 낸 것은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제주에 갈 일이 거의 없지만 어쩌다 그곳으로 갈 때마다 애용하는 항공사라 더 큰 실망을 한 것은 아닌지 나름 반성을 하며 공동체로 돌아갔습니다.
비행기표값이 싸고 포인트도 많이 쌓아주는 항공사라 주로 애용했지만, 지연출발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금방 실망을 하고 짜증을 냈던 제 자신을 보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그 항공사의 노고를 익히 알았더라면 적어도 분노하지 않았을텐데 비행기표를 싸게 판다고 좋아할 땐 언제고 막상 어려운 상황에 맞닥들이니 금방 실망을 하는 제 자신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인간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은 상대방의 부족하고 나약한 부분을 맞닥들였을 때 금방 실망을 하게 되고 실증이 납니다. 좋다고 할 땐 언제고 인간적인 실망감이 들 때 쉽게 돌아서는 인간적인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참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거룩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처럼 말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한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인간관계 안에서 맺게 되는 사랑도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이 아닌 거룩한 사랑을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상대방의 좋은 면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보며 사랑해야 합니다. 거룩하고 인격적인 사랑을 100% 실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정신을 언제나 기억하며 하느님을 바라보고 이웃에게 다가설 때 100%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때 나 역시도 진정한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음 제주 갈 기회가 생기면 늘 애용하던 그 항공사를 다시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비록 지연출발을 했지만 안전하고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기에 이제는 감사한 마음을 가집니다. 또 값싼 항공권비에 높은 적립률의 포인트 적립 혜택까지 받을 수 있으니 초심을 잃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나는 모든 분들이 어떤 모습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저의 변함없는 사랑을 전해 주겠습니다. 제가 만나는 분들 모두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거룩한 선물이요 사랑받아 마땅한 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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