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윤 수녀님 성경 여행 스케치
제17회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정경 분류
예언서에서 굉장히 강조되고 있는 주제는 '고발'입니다. 신탁이라는 문제를 가져와서 어떤 메시
지를 전달하느냐 하면 '고발' 그러니까 무엇을 고발하겠습니까? 예언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보여주게 함으로서 니네들이 왜 유배까지 오게 됐는지 이 당시의 불행의 원인을 제시해 주는 거
예요. ...
+ 찬미 예수님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고독이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고독이. 그런데 저
희가 이야기하는 고독은 정말 하느님 안에서 혹은 제가 그분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주변에서 나의
신경을 잡아끄는 여러 가지 것들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거죠. 그래서 외로워서가 아니라 이미
너무 풍요로워서 하느님을 잊어버릴까 봐 이런 것에 대한 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요 유다교와 개신교와 가톨릭의 구원관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유다인
들의 어떤 성공 조건이 무엇이냐? 어떻게 했길에 저 사람들이 저렇게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
런 기가 막힌 업적들을 해 냈느냐? 더군다나 굴지의 그런 재벌들을 쭉 이렇게 한 번 보면서 결
국 율법에 대한 아주 철저한 준수가 굉장히 중요했다라는 거 말씀을 드렸고요.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교에서는 유다교의 어떤 바탕에 근거하면서도 그 율법만을 지키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그러니까 사람과 하느님과의 그 본질적인 관계는 온데간데없고 율법만 지키는
이런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굉장히 파격적인 가르침을 보여주시고 그런 파격성 때문에 또 굉
장히 소위 저희 학계에서는 예수 운동이라고까지 하는데요.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
시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파격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또 어떤 대중의 호응을 얻게 되는 핵폭탄 같은 사람을
빨리 처형할 수밖에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게 그쪽 기득권 측이었고, 예수님의 처형도 그런
사회적인, 정치적인 부분과도 연관이 있다.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 예수님은 '율법이 뭐냐? 율법은 하느님과의 약속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도구)
로서 제시된 것일 뿐이다'라고 설명하셨다.
그러니까 요렇게 요렇게 법을 지키면, 요건 하지 말고 요건 하고 이렇게 율법에서 아주 상세하
게 가리키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레위기나 민수기 이런 거 볼 때는 '도대체 왜 이렇게 법이
많은 거야!' 이런 생각이 드실 수도 있지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만큼 섬세하게 요만큼
도 하느님께서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법으로 가리켜 주셨다라고 보실 수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섬세함, 상세함 이런 것들은 계약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차적으로 주어진 것
인데 관계는 없으면서 율법만 강조하는 이런 율법주의의 어떠한 위선적인 상황이죠. 마음은
없이 겉으로만 뭐 뭐인 척하는 것. 우리 보통 가면을 쓰고 하는 것을 위선자라는 말이 포함하고
있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 예를 들어서
마태오복음 5장 38절에서 48절인데요. 제가 중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겠습니다.
"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
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지고 강요
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그다음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쭉 제시가 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고대 근동의 일반
적인 법 형태는 예전에 제가 하느님 말씀은 당시 사람들 안에서 굉장히 유행이었던 소위 당시
사람들이 가장 필을 받을 수 있는 양식들을 선취해서, 선별해서 하느님의 계시가 전달됐다. 이
렇게 말씀드렸는데, 고대 근동권 안에서 법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세련돼 있었다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함무라비 법전 이런 거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죠.
그런데 그 세련된 고대 근동의 법에 일반적인 원칙이 있다면요 동태복수(同態復讐法)법입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눈을 어떻게 했다 그러면은 저도 눈을 어떻게 할 수 있다. 동태(同態)로 복
수할 수 있다라는 게 기본적인 법이예요. 그리고 그런 스타일이 구약의 계약 안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구약의 율법 안에. 그런데 아시다시피 법은 한 인간을 규제하기 위해서 있다라기 보다
는 이것이 가진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면 보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법이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동태복수 같은 경우는요 저 사람이 눈을 어떻게 해가지고 나한테 상해를 입혔는데
만약에 이 상대가 저보다 훨씬 힘이 쎈 사람이라면 '니가 감히 내 눈을 이렇게 했어!' 이러면서
'나는 눈 두 개 아프게 할 거야.' 이렇게 강자가 복수를 하는데 있어서 더 심하게 복수하는 것,
그래서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복수를 할 때는 동태(同態)로 해라라는 법이
있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그래도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굉장히 세련된 법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 동태(同態)복수법 :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
그런데 이게 구약의 일반적인 율법 형태라면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을 파기하지는 않으시지만
완성하시면서 '그게 아니다. 복수하지 말라'는 거죠. 오히려 한 가지 이렇게 상해를 입혔을 때
그냥 줘버리라는 거죠. 그냥 다 줘버리고 오히려 더 달라고 그러면 더 줘라. 나머지는 하느님이
갚아주신다.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떤 지혜로운 가르침이 굉장히 파격적인 가르침일
수 있지만 삶 안에서 오히려 이렇게 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더 평화롭게 할 수 있는 그런
법으로 제시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율법의 핵심은 '사랑'임을 강조하고 있는 거죠.
* 모든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다.
뭐든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법을 지키는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거. 그런데 이러한 입
장이 바오로에 의해서 굉장히 더 심화되게 됩니다. 워낙 바리사이파였고 율법에 대해서 굉장한
조예를 가지고 있었던 이 바오로는 율법을 굉장히 넘어서 가고 있는데요. 특별히 뭐에 대해서
강조를 하느냐 하면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 즉,
* 바오로 서간의 중요성 :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 즉, 구원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율법에 대한
준수가 아리나 믿음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바오로 서간에서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게 의화는
무엇을 통해서 가능하냐? 율법을 통해서 의화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가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갈라티아서 2장 1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건 무슨 얘기냐 하면요 당시 학자들이 굉장한 어떤 자기네들의 중심 사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을 뒤엎어 버리는 역시 파격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제 이런 게 나오는 게
고 조금 앞에 보시면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제시가 되어 있어요. 다들 아시는 내용이지요. 제가
요걸 조금만 보충 설명을 드린다면 이런 상황입니다.
유다교 안에는 더 이상 예수님이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선포할 수 없게 되자 이방계 공동체로
그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포하는 거죠. 그러면서 케리그마들을 가지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가지고 가면서 그분이야말로 그리스도다. 메시아다. 요걸 강조하는데 그러면서
문제가 되는 건 뭐냐하면, 그러면 예수님도 유다교의 뿌리 안에서 나왔는데 유다교 하면 율법
이 가장 중요하니 이 사람들도 율법을 지켜야 될 거 아닙니까? 이게 유다계 공동체에서 나오는
말들인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냐 하면 이 사람들이 지금 이방관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예를 들어
서 할례를 꼭 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다음에 돼지고기 먹지 못하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또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다 강요를 하는 거
예요. 그렇게 하니까 바오로가 듣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저 사람들 너무하다. 예루살렘에서 온 사
람들이 지나치게 율법의 준수를 강요를 하는데 이거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방계 사람들은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음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거지. 자잘한 율법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러면서 개입이 되게 되죠. 그러면서 도저히 말로는 안 되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가자.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이런 사도들도 원래 예수님의 제자단이었던 유다계 사람들이 회합
을 하게 되는 게 그 유명한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거기에서 항상 겁이 많으시고 좀 좋은 게 좋으신 베드로는 글쎄,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맞는 것 같고 이러시는데, 베드로도 수궁을 하게 되죠. 꿈을 꾸잖아요. 사도행전에서 보면은,
이제 예수님이 어떤 보자기가 쭉 내려오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먹으라고 하죠. 그랬더니 펄
쩍 뛰면서 "어떻게 제가 이런 걸 먹겠습니가? 저는 이런 걸 해가지고 더럽히지 않겠습니다.'라
며 펄쩍 뛰니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죠. '입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라고 얘
기를 하시면서 베드로도 바오로의 입장을 이해를 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 결과는 어떻게 나왔냐 하면은 바오로가 이기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방계 공동체
사람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말자. 그리고 그들에게 돼지고기 이런 거 요구하지 말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이기지 않으셨다면 저희는 어떻게 됐을까요? 이방계 출신인 저희
하고 신자분들은 할례를 다 받으셨어야만 했고요, 저희도 그 맛있는 돼지고기 못 먹습니다. 그래
서 바오로의 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길 참 저희들이 감사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바오로가 하는
얘기가 있어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다. 의인이시잖아요. 아브라함에 대해서 굉장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
는데 아브라함음 모세 이전의 사람이다. 모세 때 율법을 받은 걸로 되어 있는데 물론 그건 모세
오경에서 제시되고 있는 스토리지 사실 이 계약 법전이나 다른 법전들은 유다인 후대의 법전들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 우리 성서에는 모세가 계약을 맺은 다음에 법을 받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이전
이며 율법이 나오기 이전인데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한다는 건 무슨 의도냐? 그러니까 아브
라함이 의화되신 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분이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걸 체계적으로 아주 똑소리나게 이렇게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바오로의 신학에서도
역시 유다교의 어떤 율법 준수만을 강조하는 이런 부분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신학을
굉장히 중시하는 프르테스탄트, 개신교 분들은 특히 이런 것들 많이 강조하시죠. 어쨌든 그리스
도교와 유다교가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쳐 주셨는지 그런
것들을 기억하시면 좋을 거 같고요.
그런데 보통 마르틴 루터 이분이 개혁을 하시면서 슬로건으로 강조하신 게 있는데요. 저희 교재
83페이지인데요. 구원은 특히 개신교에서 강조하는 구원은 무엇을 통해서 가능하냐 하면, '오로
지 성경', '오로지 은총', '오로지 믿음'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슬로건이 있습니다. 'Sola Scrptura,
Sola Gratia, Sola Fide 오직 이것만을 가지고 저희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라고 강조하시는 게
개신교의 구원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인가 제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저희가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해서 가톨릭의 입장에
서는 이걸 하느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다라고 저희는 결론을 내려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저희
성경 목록을 따로 만들고 이런 상황들을 말씀드렸는데요. 그러니까 저희는 이제 루터라는 분이
이렇게 딱 슬로건으로 파격적으로 나오시니까 그제서야 저희들이 허둥지둥 그러면 우리는 구원
관이 뭐냐? 가톨릭에서는 이제서야 가톨릭의 구원관이 정립이 되게 되는데,
우리는 성경뿐만이 아니라, 성경만으로만 강조하셨다면 우리는 성경 뿐만 아니라 성전도, 교회
의 전통도, 교부들의 가르침 이런 부분들을 통해서도 구원의 말씀이 전달되어 있다라고 보는 겁
니다. 그다음에 은총뿐만이 아니라 개신교에 없는 저희가 가지고 있는 굉장히 은혜로운 선물이
있습니다. 성사입니다. 그러니까 성사의 행위를 함으로써 저희 7성사가 있잖아요. 이거를 함으
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라고 보는 거고요.
그다음에 믿음뿐만이 아니라 행위, 그냥 믿습니다. 이것만 가지고 안 된다라는 거에요. 그거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있어야 된다라는 건데요. 야고보서 1장 22절에서 25절을 한 번 보겠
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 1,22-25)
이거 말고도 복음서 안에서도 이 얘기를 하지죠.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지만 뽑히는 자는 적다
는 거예요. 곧 누구나 다 초대됐지만 구체적인 행위로써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라는 거
고, 모두가 나보고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모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표현
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믿는 바를 구체적인 행위로 보여주는 것이여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라고 강조하는 게 저희의 구원관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내용은 교재 84페이지에 도
표에 제시가 되어 있어서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여러분들 구원에 대해서 이제 이런 정식은 아니지만 어떤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느님은 인자하시니까 뭐 이렇게 그 어떤 것들도 다 용서가 되지 않느냐?
이런 얘기들. 그래서 좋은 의도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하시는데 사실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느님의 속성상 저희가 조금 과격하게 표현한다면요 굉장히 중요
한 속성의 하나가 배타성입니다. 즉, 무슨 얘기냐 하면,
* 하느님이 무언가를 용서해 주실 때는요 아무거나 해도 다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전제 (배타적인 조건)가 있다는 거예요. 뭡니까? 돌아옴입니다. 회개
즉 그냥 어떤 분은 아, 그 좋으신 분이시니까 내가 성당 안 다녀도 이해하시겠지, 아니면 내가
오늘 주일 미사 안 가도 괜찮겠지. 그러니까 지독한 율법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또 지나치게
완화된 인간이 스스로 생각한 하느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또 이렇게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거든
요. 그런데 우리가 이해하는 이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 하느님의 어떤 실제적인 속성을 알고 그분과 닮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 식으로 해석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최대한 가까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거죠.
그런데 많은 분들이 뭐라고 얘기하시냐 하면 아, 좋으신 분이니까는 뭐 이 정도 해도 다 이해하
실거야. 뭐 이렇게들 생각을 하세요. 맞는 얘기인데 반만 맞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강의 중에
혹시 했는지 모르겠는데요. '잃었던 아들의 비유' 작은 아들 비유 있잖아요. 그런데서도 보면 용
서에 대한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텍스트라고 볼 수 있는데, 본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거기서도 보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 어떤 표현이냐 하면 이런 부분이예요. 작은 아들
이 먹을 게 없어가지고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잖아요. 먹는데 막 먹다보니까는 거기에 이런 표현
이 나오죠. '그제서야 정신이 든 아들은'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 하느님을 멀리하고 그냥 맘대로 살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보는 거죠. 우리
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고 있기 때문에 그분과 끊임없이 그분과 합일해서 가는 게 정상인데 끊
임없이 돌아가려고 하는, 그러니까 그분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이런 모습은 어쩌면 자기 정
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보면요 마귀들린 분들 이런 분들 이야기를 이렇게 보면요 마귀를 쫓아낸 다
음에는요 자기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몰라요. 그러니까 그냥 의식적으로 막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들어왔을 대 그 힘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얼마나 미친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
예요. 그런데 마귀가 나가고 나면 멀쩡해져서 멍하니 있는 이런 모습들이 보여집니다.
그런데 제정신이 든 그가 돌아오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가 드러나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 아들을 맞이하시는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조건은 반드시 돌아왔기 때문에,
제정신이 들었기 때문에라는 거 보실 수 있고, 또 간음한 여자나 이런 내용에서도 '간음, 할 수
있지. 그거 뭐 괜찮아' 하시는 게 아니라, 간음한 여자에게 분명히 너가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을 시켜주십니다. 그래서 '다시는 죄 짓지 마라'하고 이야기 하시면서 그 조건 안에서 그 여
자를 용서해 주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무한대의 용서는 분명한 사실이나 그 용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타적인 조건
이 있으니 그건 돌아옴이다. 그리고 그 돌아옴은 뭐에 근거하냐 하면 그분과의 계약 관계에 근
거하고 있습니다. 너랑 나랑 이런 관계니까, 우리가 계약을 맺었으니 너가 다른 데 돌아다닐 수
가 없다라는 거죠. 그 계약에 근거한 이런 부분들 보실 수가 있죠.
84페이지부터는 유다교의 정경 분류와 또 저희 그리스도교의 분류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거는
어떤 입문서건 아주 맨 처음에 배우시는 그런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다교에서도 경전으
로 삼고 있고, 저희 그리스도교에서도 경전으로 삼고 있는데, 70인역을 표준성경으로 보고 있는
저희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서 가지고 있지 않은 제2경전들을 가지고 있고 또한 똑같은 어떤 순
서대로 배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배치 순서가 다릅니다. 달라서 그거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일단 유다교는 몇 번 말씀드렸지만 계약은 하나이고 이 계약을 제시하고 있는 우리의 구약성경을
그들은 타나크(TNK)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저희에게 구약성경이지만 자신의 경전인
타나크를 모두 세 부분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T는 토라의 약자로서 모세오경이고. N은
예언서, K는 성문서 즉, 다섯 개의 책과 예언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다 성문서라고 하고
있는데 특별히 유다인들은요 예언서를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기 예언서에 다시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대예언서, 소예언서 이
런 어떤 용어들은 유다교에서 경전을 말할 때 쓰시는 그런 용어라고 보시면 돼요. 예를 들어서
성문서 같은 경우도 제가 저번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교황청립 성서대학원에서도 저희가 70인
역으로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은 유다교의 히브리 말로 되어 있는 원서를 본다고 말
씀을 드렸어요.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바티칸에서도 저희 로마 총본부라고 할 수 있는 그곳의 산하에 있
는 대학원에서도 유다교의 경전을 결코 경시하거나 아니면 외면하지 않고 저희가 그거를 가지
고 공부를 하니까요. 그래서 이 타나크를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 걸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 성문서라는 표현, 아니면은 전기 예언서, 후기 예언서 이런 표현들은 다 유다교에서 주
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내용이 교재 86페이지에 그림으로 설
명이 되어 있습니다. 85페이지의 도표와 86페이지의 그림들을 참조하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여기에서 대, 소예언서의 차이는 분량의 차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요 저희 그리스도
교에서는 여기에 제2경전이 들어가 있고 또한 이 순서를 따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구별을 하느
냐 하면, 모두 네 가지 분류로 구별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오경이죠. 두 번째는 역사서.
세 번째는 시서와 지혜서, 네 번째는 예언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타나크에 등장하지 않은 역사서라는 또 다른 성격의 그룹이 등장하고 잇고, 성문서를
저희는 시서와 지혜서다 이런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서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우리 구약성경에 크게 말해서 역사책이 두 개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하나는 신명기계 역사서,
다른 하나는 역대기계 역사서.
그런데 저희 그리스도교에서 신명기계 역사서라고 부르는 요 책들을 유다교는 뭐라고 부릅니
까? 전기 예언서라고 부릅니다. 전기 예언서라고 불리는 책들이 어떤 책이냐 하면, 오경 다음에
등장하는 책들이죠.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 요 책이거든요. 그런데 요 책을 저희
그리스도교에서는 신명기계 역사서다. 이렇게 부른다라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서 유다교에
서 후기 예언서에 속했던 책들이 저희는 전기, 후기 없이 그냥 예언서 다 이렇게 배치가 되어
있는 거죠.
그러면 여기에서 질문을 가질 수 있을 거 같애요. 왜 그런 책들은 유다교에서는 예언서라고 부
르고 저희는 역사서라고 부르나요? 이렇게 물어보실 수 있을 거 같애요. 일단 유다교의 관점에
서 보실 필요가 있는데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연서의 차이를 본다면요 그 문학 양식의 차이
가 현저하게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 유다교의 전기 예언서에 속한 책들은요 소위 '신탁문체'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보통 예언서 그러면은 무엇을 특별히 예언문학이다. 이렇게 하냐하면 신탁이 들어가야 돼요.
그러니까 '주 야훼가 말한다' 이러고서 쭉 말씀을 하시고, 혹은 쭉 말을 한 다음에 '이는 야훼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말씀이 맡겨지는 혹은 하느님의 뜻이 맡겨지는 이런 형태
가 있어야 되는데 아시다시피 여호수아기나 판관기에는 '누가 이렇게 말한다.' 이러고서는 쭉
나오는 장면이 없습니다. 없고 오히려 저금 더 엄밀하게 본다면 역사에 대한 보도라는 게 맞아요.
왜냐하면 모세가 죽은 다음에 여호수아가 대권을 물려받아서 어떻게 그 땅을 치지하게 됐는지,
차지한 다음에는 어떻게 나라가 등장했는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북이스라엘이 어떻게
망했는지, 남유다가 어떻게 망했는지 그들의 역사를 쭉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저희가 말하는
것처럼 신명기계 역사서다라고 말하는 게 타당하다라는 거죠.
그런데 그 머리 좋은 라삐들이, 유다인 선생님들이 왜 그걸 역사서라고 이름을 넣지 않았을까?
이게 물음으로 올 수 있다라는 겁니다.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요 얘기는
교재에는 없어요.
* 예언서에서 굉장히 강조되고 있는 주제는 '고발'입니다. 신탁이라는 문체를 가져와서 어떤 메
시지를 전달하느냐 하면 '고발' 그러니까 무엇을 고발하겠습니까? 예언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보여주게 함으로써 니네들이 왜 유배까지 오게 됐는지 이 당시의 불행의 원인을 제시해
주는 거에요.
니네들이 지금 굉장히 벌을 받고 있는데 이 벌이 어떻게 온 겁니까 이런 질문에 예언서의 저자
들은 죄를 보여줌으로써 즉 죄를 고발함으로써 이렇게 계약에서 어긋난 짓을 했으니 하느님께
서 땅을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언 문학의 가장 기본
적인 주제가 있다면 '고발'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전기 예언서(여호수아기부터 열왕기)의 내용들을 보면 신탁이라는 문체는 등장하지 않
지만 대부분 이스라엘의 역사를 제시함으로써 그 역사가 보여주는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서를 시간 나니까 역사책 봐야지 이런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사무엘기나 열왕기
같은 경우는 다윗이라든가 솔로몬이라든가 또 열왕기는 왕들을 열거한 책이잖아요. 쭉 그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심지어는 가장 성왕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조차도 죄를 졌다. 그래서 신명기계
역사서 같은 책에서는요 다윗의 죄 중에서 제일 부각되는 유명한 죄가 뭐겠습니까? 바쎄바와의
관계잖아요. 그런데 그 관계가 역대기계에서는 등장하지 않아요.
그런데 전기 예언서에 속하는 신명기계에서는요 바쎄바와의 관계가 있은 다음부터 내리막 길을
걷는 굉장히 비극적인 그런 말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고의 성왕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까지 고발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드러난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있다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전기 예언서는 역사서라는 말이 맞지만 머리 좋은 랍삐들이 왜 예언서라고
했냐하면 '고발'이라는 주제 안에서 예언서라고 볼 수 있다라고 보기 때문에 전기 예언서라고
하는 겁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전기 예언서 안에 보면 유명한 예언자들의 효시라고 할까요? 그런 분이 등장을
해요. 열왕기에 특별히 많이 나오죠.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예언자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분들을 특별히 많이 강조함으로써 역시 역사서 안에 예언자들의
어떤 위상이나 이런 것들을 강조하고 있어서 전기 예언서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렇게 보시
면 되겟습니다.
그리고 제가 또 한가지 말씀드릴 거는 뭐냐하면요 이 오경이라는 거. 오경도 저희가 모세오경
이런 표현을 쓰고 요즘은 또 오경이라고 하자. 왜냐하면 옛날에야 이 책을 모세가 쓰셨습니다
해서 모세오경 이렇게 알았지만, 현재에는 모세의 친저성 이런 거는 민감한 문제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죠. 그래서 클래식한 일반적인 학설을 말씀드리자면,
* 오경은 야훼계, 엘로힘계, 신명기계, 제관계(사제계) 사람들의 작품이다. 이렇게 보고 있죠.
그래서 이제 모세오경이라는 말 대신 그냥 오경만 쓰자. 이런 어떤 의견들이 좀 있습니다. 어쨌
든 이 토라라는 책이 오경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또한 오경이었는지, 사경이었는지, 육경이었
는지, 구경이었는지 또한 굉장히 많은 학설이 있죠. 토라는 있었으나 이 토라가 한 권의 책이었
던 이 책이 그 안에 다섯 권의 책이 들어가 있는 거냐, 네 권의 책이 들어가 있는 거냐? 이거는
역시 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라서 지금 여기에서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쨌든 그 오(5)에 대한 어떤 위상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면서 시편도 저희가 전체 150편
으로 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무슨 얘기냐 하면, 그 이외에도 굉장히 노래가 많았다는 얘
기예요. 그런데 아, 이건 정말 '하느님의 노래다'라고 '하느님의 기도다'라고 간주된 것만 150편
을 선정한 겁니다. 그런데 이 150편 안에서도 구절을 이렇게 분석을 해 보면요 모두 5개의 컬렉
션이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모세에게 다섯 권의 책이 주어진 것이 모세오경이라면 이론적으로 시편은 다윗의 작
품으로 보고 있잖아요. 물론 역시 그것도 가명성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모세의 위상에
맞갖은 것처럼 다윗도 5개의 기도를 지었다라는 어떤 신학화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구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다음에 지혜문학도 '지혜문학 오경'이라고 해요. 어떤 책이 있냐하면,
* 지혜문학 : 욥기, 잠언, 코헬렛, 지혜서, 집회서
이렇게 역시 지혜문학도 '지혜문학 오경' 이렇게 5(오)라는 숫자에서 굉장히 상징적이고 신학적
인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펜타곤이라고 아시죠? 미국의 무시무시한 그
런 곳인데, 펜타라는 뜻이요 그리스 말로 5(오)라는 뜻이예요. 오각형으로 되어 있죠. 역시 미국
의 어떤 정계에 계시는 유다인들의 영향이 좀 있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예언서가 저희 그리스도교에서는 가장 뒤에 등장을 해요. 그런데 원래 이것이 쓰여진
어떤 그런 제작된 순서대로 본다면 사실은 타나크가 맞습니다. 왜냐하면 토라가 기원전 5세기
경에 최종편집되었고, 예언서가 기원전 3세기경에 편집되고, 성문서는 서기 1세기경에 등장하
기 때문에 요게 맞는데, 왜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언서를 제일 뒤에 두고 있는지,
* 그리스도교에서는 왜 예언서가 제일 마지막에 있는지, 이유는 '구약성경 안에 등장하는 예언
서들 안에서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 사상이 바로 신약에 등장하는 바로 '그분'을 가리키는 것
이다'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굉장히 노골적으로, 고의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예언서를 가장
뒤에 배치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언서에 등장하는 메시아 대망사상이 바로 신약성경에서는 바오로 서간이 가장 먼저 쓰였음에
도 불구하고 복음서가 앞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켜 주려고 하는 그런 신학
적 의도가 들어 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89페이지에 나와있는 도표들 반드시 응용해
주시고요. 90페이지로 가면요.
또 제2경전, 외경, 위경 이런 표현들이 나오는데요. 타나크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70인역에
들어가 있었던 특별히 제2경전이라고 하죠. 그런데 유다교에서는 제2경전을 경전으로 보지 않
아요. 그다음에 저희가 외경이라고 부르는 게 있어요. 제2경전까지 성경이라고 보고 그 외의 것
이라는 것을 개신교와 유다교 쪽에서는 뭐라고 한다고요? 위경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교재 91
페이지에 표로 제시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외경이라고 부르는 것과 개신교측에서 외경이라고 부르는 게 책이 다른 거예
요. 이름은 똑같은데 그 내용이 다릅니다. 그이들은 저희의 제2경전 즉 유딧기 이런 책들을 다
외경이라고 하시는 거죠. 저희는 외경이라고 했을 때는 그쪽에서는 거짓위자를 써가지고 하는
위경을 외경이라고 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서요 제가 시작을 할 때 가장 강한 분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조금 말씀을 드렸
는데요. 그런 강함이야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그런 생각을 하는
데요. 제가 룻기를 설명할 때 그 보아즈가 룻을 어떻게 만나냐 하면요 룻이 너무 너무 먹을 것이
없으니까 이삭들 흘리고 간 거 그거를 줏어다가 먹으려고 하며서 가서 일을 하게 되는데,
룻만 와서 일을 했겠습니까? 아니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일을 했겠지만 유독 룻을 만나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어떤 그렇게 하느님 안에서의 고독 속에서 삶의 의지가 굉장히 확고히
서 있는 분들은 한 무리에서 그분을 굉장히 부각시킨다고 보고 있어요. 유독 그 사람을 알아보
게 만든다라는 거죠. 그게 바로 삶을 사는 그래서 강한 분이다 이렇게 말씀드렸는데 거기에 대
한 이야기를 한 게 있어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 생손앓이 中
지독한 상실을 알고 앓고 있는 사람의 내면은 조용하고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견고함과 강인함이 그를 무리에서 구별시켜 놓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보아즈는 그 많은 일꾼들 틈에서 유독 한 여자 룻을 알아본다. 이후로 그는 룻을 외면하거나
모르는 사람처럼 대할 수 없게 되는데 룻의 착하고 맑은 영혼을 이미 보아버린 탓이었다.
시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리고 가난하지만 용기와 자존심만은 잃지 않
겠다는 견실함이 고함치지 않고도 세상을 향해 절규하는 슬픔으로 그를 군중 속에서 유리시켜
놓았던 것이다.
저희가 이렇게 특별한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아도 그분을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
게 하는 것은 오히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하는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모습으로 살아 나가는 나날이 되시기를 빌면서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수녀님 성경여행 스케치 다시보기
http://web.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program_fid%3D3778%26menu_fid%3D3779&program_fid=3778&menu_fid=3779&cid=&yyyy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