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욥기 19장 21~27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적인 모습을 보아주십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는 그가 세리이
고 죄인이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세리의 마음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
정하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이 있음을 보아주십니다.
또 복음에 나오는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에 올라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그를 내려오라고 하신 다음 그의 집에 가셔서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
은 ‘그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군...’ 하고 투덜거리지만, 예수님은 자캐오의 마음 안에
회개하고자 하는 열정과 의지를 보아주십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욥도 사람들이 볼 때는 불행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
을 향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욥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살갗이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이 말씀을 읽고 이지선 씨의 모습이 떠올랐는데요. 이지선 씨는 음주 운전자가 낸 사고로 3
도 화상을 입고 예전의 모습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녀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이년 전에 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등이 아파서 벽에 기대야 했기 때문에
모두 앞으로 나와 기도를 하는 데도 저는 맨 뒷자리에 있었어요.
그러나 내 마음은 주님 제일 가까이,
십자가 바로 밑에 엎드리고 있었답니다.
다들 찬양하는데 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잇몸이 다 내려앉을 것같이 당기는 턱 때문에
도저히 입을 벌려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 누구보다 큰 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지 말아주세요.
너무나 못난 얼굴을 갖게 되었지만,
예전처럼 예쁘게 화장도 못 하지만,
이 마음은 그 누구보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스물네 살 여자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쯧쯧쯧...” 불쌍하다 하지 말아주세요.
누가 봐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불행할 것 같은 모습이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이 행복한 천국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외모가 아닌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주님,
나는 그래서 하느님이 더 좋아요.
내 부족한 외모가 아닌 마음을 보시는 주님,
나는 그래서 하느님이 좋아요.
이지선 씨가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힘을 낼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의 외적인 모습이 아
니라 내적인 모습을 보아주시고, 내적인 변화에 기뻐하시는 하느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
각이 듭니다. 그녀가 힘들 때마다 힘이 되었던 구절도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낙심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
다.”
실제로 이지선 씨는 사고 후에 외적인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말씀대로 내적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졌던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되었고, 가족과 주변
신앙인들의 기도와 관심을 받으며 따뜻한 사랑을 체험합니다.
또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라며 더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되었고, 절망에 빠진 이
들에게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희망을 전하고 그 일에서 하느님의 도구로 쓰였다는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적인 모습에 상관없이 한결 같이 자신을 사랑
해 주시고 돌보아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합니다. 이러한 체험 때문에 그녀는 감사
하고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내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져 봅시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
랑하시는지 일상의 삶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려보고, 내
게 주어진 소명에 응답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체험해 봅시다. 하느님은 우리의 내적
인 변화를 보시고 기뻐하실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추석 때 집 근처에서 친구를 만났다.
어렸을 때부터 성당도 같이 다니고
계속 연락하는 친구인데,
그 친구 옆에 두 살 된 아들이 있었다.
아이는 뭐가 좋은지 근처를 뱅뱅 돌며 뛰고 있었는데
친구가 아들을 멈춰 세우더니
나를 가리키면서 “누구야~ 누구야~” 하고 물었다.
아이가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친구가 이렇게 가르쳐줬다.
‘촌놈 신부님.. 촌놈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