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사랑의 우물가로 나아갈 때
최근에 와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복음 10장 42절)며 기도생활, 관상생활 쪽으로 손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한 동료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바라봅니다.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기도생활과 영적 생활, 특히 깊이 있는 묵상과 관상생활에 맛을 들인 분들은 달라도 뭔가가 크게 다릅니다.
관상(觀想)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던 제게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진정한 의미의 관상은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보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측은지심 가득한 자비의 눈길로 가련하고 죄 많은 나를 바라보는 것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이 관상기도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 특히 내 안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현존하시고, 그분께서 나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며, 순간순간 흘러넘치는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주심을 의식하는 것이 관상이라고 하는 말씀에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관상기도에 맛을 들인 사람은 애써 의식적으로 기도하려고 발버둥치지 않습니다. 순풍에 돛단배처럼 그저 그분 사랑의 손길에 내 온 존재를 내맡깁니다. 그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현존 앞에 머무르며 행복함을 느낍니다. 그분께서 이글거리며 불타는 사랑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에 만족하며 그분만으로 충분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관상의 본질입니다.
그런 관상기도에 맛을 들인 사람은 지나가는 세상 것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습니다. 명예도 높은 자리도, 세상의 부귀영화도 값나가는 보화들도 다 부질없습니다. 그저 주님 현존만으로 충분합니다.
뿐만 아니라 관상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긴밀한 통교의 결과로 동료 인간들과도 잘 지냅니다. 애써 경쟁하려하지 않습니다. 이웃이 잘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예의 바르고 균형 잡힌 소통의 결실로 동료 인간들과 함께 하는 삶이 편안하고 풍요롭습니다. 관상기도가 가져다주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와 반대로 영적생활이나 관상생활로부터 점점 멀어져 아예 담을 쌓고 살아가는 냉담 봉헌생활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영적생활과 기도생활은 그저 해치워야할 의무요 요식행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봉헌생활의 핵심이요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영적생활이 허물어지니 남은 것은 그저 자신의 낡은 육신 그것뿐입니다. 그런 봉헌생활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하느님께 민폐요 모독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한 번 하느님 사랑의 우물가로 나아갈 때입니다. 깊고 맑은 하느님 사랑의 샘 속으로 죄와 냉담함과 갈증으로 얼룩진 내 가난한 두레박을 드리울 때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복음 10장 4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