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5분 복음명상 (김웅태 신부)

글쓴이 :  나눔지기~♡님이 2003-12-13 14:59:16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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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복음명상

김웅태 신부

 

제1단상 : 가정의 아름다움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루가 2, 51-52).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음을 축하하는 성탄 대축일 이후 첫번째 맞이하는 주일을 '성가정 축일'로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뜻 있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이 혼인하여 이룬 가정에서 성령의 뜻으로 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이 이룬 가정의 주인공이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사랑으로 보살피셨고, 요셉 성인은 이 성가정의 가장으로서 목수일을 직업으로 삼아 성모님과 예수님을 부양하셨다. 이 가정은 이 세상의 많은 가정들 가운데 가장 모범이 되고 하느님의 사랑이 감도는 따뜻한 가정이었다. 우리 가정들도 이 '나자렛 성가정'을 본받아 주님의 뜻에 따라 믿음과 평화와 사랑이 감도는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1. 가정의 아름다움

가정의 아름다움에 대한 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화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항상 자기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 한 폭의 그림에 담겠다고 하며 길을 나섰다. 마침 조금 전에 결혼하여 얼굴에 행복이 가득해 보이는 신부(新婦)를 만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신부는 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사랑이지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화가는 크게 실망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낙담했다. 그래서 길을 계속 걸어 가면서 사람들을 만났는데, 군인은 '평화'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했고, 어느 성직자는 '믿음'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자 화가는 "사랑, 평화, 믿음 이렇게 추상적인 것을 어떻게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낙담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바로 자기 집에 이 모든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즉 집으로 돌아오는 자신을 반갑게 맞아 주는 아내의 밝은 얼굴에서 사랑을 느꼈고, 불 켜진 따스한 집안에서 평화를 느꼈으며, 또한 자기에게 달려오는 자녀들에게서 순수한 믿음을 보았다. 그 화가는 자신이 밖에서 애써 찾고자 했던 아름다운 것들, 사랑과 평화와 믿음은 바로 자신의 가정에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화가는 마침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정을 통해 사랑과 평화와 믿음을 그릴 수 있었다.

 

위의 이야기에서 보여 주듯이 가정은 사랑과 평화와 믿음의 보금자리이다. 가정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남편과 아내보다 더 친밀한 관계가 어디 있겠으며, 부모와 자녀 관계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어디 있겠는가? 가정의 구성원들은 서로 피와 살을 나눈 관계이며 사랑과 정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남편은 밖에서 활동하여 돈을 벌어 오고, 아내는 남편이 벌어 온 돈으로 살림을 꾸려 가며,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양육된다. 가정은 참으로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2. 가정 파괴의 실상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 평화스럽고 사랑받아야 할 가정이 여러 가지 이유로 파괴되고 있다. 서로 깊이 사랑해야 할 부부 사이에 사랑이 금이 가고, 자녀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부부간의 성격 차이, 이해 부족, 자기 고집의 정당화 등으로 가정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인격적으로는 완전히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모 아래서 자라는 자녀들은 성격적으로 비뚤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사회에 물의와 큰 사건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반가정적이고 반사회적인 성격으로 성장한 이들은 또한 가정을 파괴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파탄에 이르러 부부간에 이혼하고, 자녀가 가출하고, 혹은 부모가 있으면서도 고아처럼 버려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진정 가정의 평화와 행복이야말로 우리 인간 사회의 큰 바탕이 된다. 여기에 부부는 큰 책임을 느껴야 하며 자녀들을 올바로 교육시키는 일이 인류 사회 평화를 위한 소명임을 깨달아야 한다.

 

3. 나자렛 성가정의 모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성가정을 이루기 위해 '나자렛 가정', 즉 예수 마리아 요셉이 이루신 가정 생활을 본받아야 한다. 나자렛의 성가정에는 그 화가가 찾았던 믿음과 사랑과 평화가 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할 때부터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으며, 모친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믿으셨다. 요셉 성인은 성모님의 입장을 이해하고 묵묵히 가장으로서 자기 책임을 다하여 가정을 평화롭게 이루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육신적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께 순종하셨다. 그리고 이 세 분은 서로 사랑하며 모두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는 소명을 충실히 이행하셨다.

 

우리 가정에서도 이처럼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간직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협력한다면 마침내 가족들이 구원될 뿐 아니라, 그 가족으로 인해 다른 이들도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가정들이 나자렛 성가정을 본받아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간직하고 인류 사회를 평화롭게 할 수 있도록 기도드리자

 

 

제2단상 : 감사할 줄 아는 마음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하시면서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다"(루가, 17-19).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국경 지대를 지나가시는데, 문둥병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사는 마을에서는 살지 못하고 외딴곳에서 살고 있던 나환자들을 만났다. 지금도 나환자들을 멀리하거나 기피하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나병이란 천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가까이하지 않았고 만일 나병 환자와 조금이라도 접촉했으면 부정을 탄 것으로 생각하여 정결례를 했어야 했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뵙고 필사적으로 예수께 구원을 청하였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고 병을 고쳐 주시고, 당시 율법에 명시된 대로 완쾌되었음을 사제에게 신고하고 확인을 받으라고 하셨다(레위 14, 2-3).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치유되었을 때 그 감격은 어떠했겠는가? 우리는 감기 몸살을 앓다가 완쾌되었을 때에도, 이제 건강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운동도 할 수 있고, 그리운 사람도 만날 수 있고, 좋은 음식도 먹을 수 있고 또 때로는 술 담배도 할 수 있다고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천벌을 받은 것으로 여겨 오던 나병 환자들이 치유되어 완쾌되었다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면서도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고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던 나병 환자들이 이제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사람들과 교제하고 모임에도 참석하고 정상적으로 사람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감사하는 태도는 달랐다. 하느님께 감사할 줄 알았던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유다인들이 천대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또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라는 이방인이었다(2열왕5, 14-17). 나병 환자는 육신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까지 받는 이들인데 이들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육신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인 치유와 구원을 받았는데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었다는 것은 은혜에 대해 보답하지 못하는 배은 망덕한 행위라고 보겠다. 예수께서는 어떤 면에서 이러한 행적을 통해 우리에게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다.

 

어떤 면에서 우리 자신도 죄와 허물로 뒤덮인 나환자이다. 우리도 태어날 때 원죄의 물듦 속에 태어났고, 성장하면서 많은 죄를 지었다. 이렇게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세례 성사를 통해 원죄의 사함을 받고 고해 성사를 통해 본죄의 사함을 받았다. 이러한 죄의 용서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께 감사했으며,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죄와 허물로 뒤덮인 정신적인 나환자였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고해 성사로 하느님께 용서받았음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생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사 행위에 대해 루가 복음에 나오는 나병으로부터 치유된 열 사람의 경우처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열 가지 은혜 중에 한 가지만 감사하고 아홉 가지는 잊어버리고 생활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실 무수한 은혜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생명을 받고, 부모님으로부터 양육을 받고,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여러 직종에 종사하는 이웃들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일용품들과 교통 시설, 갖가지 편의 시설의 혜택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기는 고사하고 생명을 해치는 행동, 자연을 파괴하는 행동, 교통 시설과 편의 시설을 파괴하는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진정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배반이며 인간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는 늘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내가 생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여러 이웃들, 우리 나라를 지켜 주는 군인들,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운전 기사들, 우리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농어민들, 우리의 병을 고쳐 주는 의사들, 또 우리 마을을 깨끗하게 해주는 환경 미화원들, 이 모든 이들이 그것을 비록 생업으로 보수를 받고 일한다 해도 우리는 이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조그마한 친절과 봉사를 받을 때마다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정신적 물질적으로 보답하는 생활을 해야 하겠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며, 또한 그것이 이웃에게 보답하는 길이 됨을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기쁨을 갖게 될 것이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데살 5, 16-18)

 

제3단상 : 거룩함에의 소명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 48).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간의 소명을 말해 준다. 하느님께서는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 2) 하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오로는 "사람의 몸은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하느님의 성전이므로 자기 몸뿐 아니라, 이웃의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대해야 한다."(1고린 3, 16-17)라고 권고한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라고 하시며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말씀은 한결같이 인간은 거룩하신 하느님을 본받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간직할 때 인간으로서 참된 자기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사람으로서 완성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성성(聖性)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영광, 최고의 가치 있는 일, 최고의 행복이다.

 

인간의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또 영원한 행복이어야 한다. 인간이 갖고 있는 물질적 부, 권력, 지위는 그 자체만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 영원한 행복과 관련될 때 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진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실천하고 행동할 때 물질적 정신적 재화도 그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것은 그가 지닌 성덕의 거룩함 때문이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갖는 것이다. 하느님은 어떻게 거룩하신가? 하느님은 자비, 용서, 사랑의 근원이시다. 죄인에 대한 한없는 용서, 한결같은 사랑, 편애가 아닌 보편적인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신다. 하느님은 사람이 갖고 있는 재산에 따라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성덕, 변함 없는 충실성, 믿음을 보신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서 나온다.

 

사랑은 무엇인가?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다. 남의 부족하고 아쉬운 면을 채워 주는 것, 그러나 물질적 차원뿐만 아니라 인간적이며 인격적인 공통의 동질성을 느껴야 한다. 지위, 신분, 재산의 차이를 극복하고 같은 인간으로서 공존하고 어울려야 한다. 사랑은 물질적인 도움만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흔히 돈을 청하는 거지에게 돈은 주지만 마음은 주지 않는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돈과 함께 따뜻한 인간성을 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상대방의 인격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까지 들으셨다. 어울려 주는 것이 중요하다. 요즈음 노인들이 소외당하고 있다. 노인의 사랑을 젊은이들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참사랑은 한 인간으로서의 동질성을 느끼는 것이다.

 

제4단상 : 겨자씨의 성장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좋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마르 4, 30-32).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하셨다.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이고 그 내용 또한 쉬운 것이어서 쉽게 이해된다.

 

예수님의 비유의 소재가 된 겨자씨도 우리가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이다. 겨자씨가 무엇인지 잘 알겠지만, 여름철에 시원한 냉면을 먹어 본 사람은 겨자가 무엇인지 더 잘 알 것이다. 겨자는 냉면의 맛을 돋우어 준다. '울며 겨자 먹기'라는 말도 있듯이 냉면에는 겨자가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 겨자는 개자초(芥子草)의 씨를 빻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 개자초는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것이라고 한다. 그 크기가 바늘구멍보다 더 작기 때문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씨앗 중 가장 작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겨자씨가 자라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크게 되어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 겨자씨에 비유하여 설명하셨다. 예수님의 의도를 살펴볼 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아주 미미하고 작게 출발하지만 이 작은 씨가 큰 나무로 성장하듯이 인간들의 추측을 훨씬 능가하는 결과를 낸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온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별 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셨다. 3년 동안이나 하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그 결과 열 두 제자와 몇몇 부인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을 뿐이다. 여인들은 그 당시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도 없었고 이렇다 할 권리도 가지지 못했다. 제자라 불리던 열두 제자도 출신 성분이 대부분 어부들이었고, 당시 동족들에게 외면당했던 세금쟁이까지도 한 사람 끼어 있었다. 그들은 재산이나 권력도 없었다. 또한 예수께서 비유를 써서 말씀하셨는데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은 진정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도 참으로 미미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이들에게서 시작되었다.

 

이토록 아무런 영향력이 없던 자들을 통하여 시작된 교회가 300년도 안 되어 로마 제국의 교회가 되었고, 2000년이 되어 가는 오늘날에는 전 세계의 문화, 종교, 관습, 정치, 윤리 등의 면에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가 되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처럼 아주 작게 시작하시지만, 나중엔 엄청난 일을 이루신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들의 지식을 능가하며, 하느님의 뜻은 인간들의 예측을 불허한다.

 

이 겨자씨의 복음 비유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우리 안에 복음의 씨를 뿌리시고 큰 결과를 얻으려 하시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복음의 씨가 뿌려진 밭이다. 우리에게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겨자씨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복음의 씨앗은 개인과 사회를 위해 큰 성공을 가져오게 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은 정말 하나의 겨자씨에 불과한 지식이며 믿음일 수 있다. 하느님의 신비 앞에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도 왜소하다. 그러나 그 작은 지식과 믿음일지라도 땅속의 씨앗처럼 뿌리 내리고 자라나기 시작하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엔 겨자씨와 같은 활동이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 이미 심어진 복음의 씨가 자랄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밭을 경작해야 한다. 씨가 땅속 깊은 곳에 있거나, 씨가 심어진 곳에 흙이 너무 많이 덮여 있으면, 씨는 아무 성장도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복음의 씨도 인간이 자신의 안일과 이기심에 집착한다면 숨이 막혀 자라지 못한다. 복음의 씨가 자랄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가 듣고 배운 복음에 대한 지식의 양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겨자씨와 같은 작은 것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시는 분이다. 문제는 작은 복음의 씨앗이지만 복음의 진리를 생활 가운데서 얼마나 실천하려고 노력했느냐 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받은 복음의 지식이 작은 겨자씨와 같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꾼다면 큰 성공을 이루어 마치 하늘의 온갖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것이다.

 

제5단상 : 겸손한 마음의 기도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루가 18, 13).

 

기도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어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하신 분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와 뜻에 의해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이며, 하느님의 은혜를 통해 살아간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다. 기도는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온갖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행위이다. 마치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와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과 같다.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와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을 때 부모는 흡족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이같이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다면 하느님께서는 흡족하게 그것을 받아 주실 것이다. 하느님을 흡족하게 해드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기도라면 기도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1. 기도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가?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것이 너무도 많다. 우선 이 세상에 '나'라고 하는 유일 무이한, '인격과 개성'을 지닌 '나'를 존재하게 하신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고 하는 인격은 하느님의 모상을 타고났으며, 이 세상 안에서 '나'라고 하는 독특한 인격을 바람직한 모습으로 완성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주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점에 감사드려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영혼과 육신을 주시어 이 가능성을 이룰 수 있도록 하셨다. 인간은 육신의 오관을 통해 이 세상의 온갖 사물들을 보고(視), 맛보고(味), 듣고(聽), 먹고(食), 냄새 맡고(嗅) 또한 감촉(觸)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오관을 통해 들어온 사물에 대한 정보를 인간의 정신 작용, 즉 이성으로 판단하고 의지로서 뜻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각기 개별 인격으로도 훌륭하지만 가족 공동체, 이웃공동체, 사회 공동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명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에는, 루가 복음(18, 9-14)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처럼 자기 자랑만을 나열해서는 안 될 것이며, 결코 남을 무시하거나 저주하는 내용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점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기도를 통해 드려야 할 것이다.

 

2.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을 흠숭하고 찬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모든 창조물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지만, 특히 인간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당신을 찬미하고 흠숭하기를 원하신다. 자연 사물은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색깔, 소리,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인간은 특히 마음과 정신으로 말을 통하여 하느님을 흠숭하고 찬미드릴 수 있다.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흠숭은 이 자연계 안에서 가장 훌륭한 기도가 될 것이다. 그 내용은 바로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전반부의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3. 우리의 기도는 청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져 있고,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하고, 건전한 영혼의 상태를 유지하여야 한다.

 

인간은 육신이 있기에 그 아름다움이 있다. 그렇지만 그 육신은 또한 온갖 질병과 사고와 불의의 재난에 노출되어 있으며, 또한 죽음으로 끝나 버릴 운명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인간 영혼은 또한 사탄의 유혹과 온갖 형태의 악으로 인해 큰 해를 당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과 육신의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그에 필요한 것을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것은 또한 주님의 기도의 후반부에 잘 제시되어 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매일의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유혹의 극복, 악으로부터의 보호이다.

우리는 루가 복음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영혼과 육신, 자유와 책임과 능력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올바르게 따르지 못한 것을 뉘우쳐야 한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 13) 하고 겸손되이 기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

 

제6단상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요한 1, 23).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요한은 자기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하여 말한다.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오"(요한 1, 23).

 

이 말은 당시 요르단 강가에서 회개의 필요성을 외치며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한 말이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상당히 위대한 인물이었다. 즉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좀 다른 생활을 하였으며, 항상 하느님을 묵상하고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어떻게 하면 잘 실현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인물이었고, 이 일을 연구하기 위해 들판에서 덕을 쌓으며 하느님의 길을 준비해 온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물을 통한 세례 예식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들과의 화해 예식을 실시하였다. 즉 요한은 당시 사람들이 죄에 젖은 생활 속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생활 가운데서 인간의 불행과 비참함을 본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이러한 불행과 비참한 상황에서 구원되는 길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회개하고 화해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생활로부터 이제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의도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회개'이다. 그리고 요한은 이 회개의 표시로 물을 통해 더러운 것을 씻듯이 죄악을 씻는다는 상징적인 예식을 통해 새로운 삶의 모습을 찾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예식을 거행하던 요한을 당시 사람들은 위대한 예언자 혹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훌륭하게 보았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도 아니며 예언자도 아닌, 한낱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자 외치는 한 '소리'일 뿐이라고 말했다. '소리'라는 것은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와 사람들의 귀에 들려졌다가는 그 사명이 끝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위대한 인물로 생각했던 요한에게서 이러한 말을 듣고는 "그러면 왜 무슨 권한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나보다 더 위대한 분이 오시어 물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였다(요한 1, 33). 이렇게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된 태도를 통해 예수님을 메시아, 구세주로 인정하는 첫 증언을 듣게 된다.

 

우리는 교회 전례 안에서 대림절을 지낸다. 대림이라는 것은 '구세주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 대림 기간 중에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다시 듣는다. 즉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회개하여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고 사람의 근본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에 대해 요한 복음의 저자는 "그는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빛을 증언하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믿게 하려 보냄을 받은 분"이라고 증언한다(요한 1, 6-7).

 

예수님도 나중에 세례자 요한에 대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요한보다 위대한 인물은 없었다."(마태 11, 11)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외침이 현대의 우리에게 다시 들려 온다. "주님의 오심을 믿고 그 길을 준비하기 위해 회개해야 한다."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는 일은 무슨 뜻이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과연 어떻게 주님을 맞아들이기에 합당할 수 있느냐 하는 말과 같다. 만일 지금 주님이 이곳에 계시다면, 그분을 어떻게 맞아들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이 이곳에 계실 때,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주님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주님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간이 지은 죄, 죄책감 때문에 주님과 거리감이 생기는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빛을 싫어하게 되어 있고, 더구나 빛이신 그리스도를 가까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서먹서먹한 관계에서 그 거리감을 좁히고 관계 개선하는 길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 자기 잘못을 용서받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 가까이 갈 용기가 생기고, 주님은 그를 측은하게 생각하고 변함 없는 어버이의 사랑을 주신다. 우리의 어버이는 바로 하느님이시고, 예수님은 그분의 아들이시다. 하느님의 아들과의 화해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가까이 가고, 자녀로서의 사랑을 고백하고, 어버이의 사랑을 받는 것,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것이 주님의 길이다. 이 길을 준비하는 것이 바로 '회개하는 것'이며,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 중 하나이며 입문이다. 회개를 통해 이룩되는 보다 완전한 생활의 모습은 주님을 찬미하고 흠숭하는 생활일 것이다. 회개는 인간의 절대자, 창조주,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준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상 곳곳에서 저질러지는 폭력, 미움, 테러, 악, 부조리 등의 죄악의 상태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역시 오늘도 광야에서 들려 오는 소리,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회개하시오." 하는 말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제7단상 : 구세주의 모친이 된 마리아의 탄생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루가 1, 28-32).

 

성모님께서는 인간적으로 볼 때 그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나셨지만 구세주의 모친이 되셨다. 요아킴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신의 준비'라는 뜻이며, 안나라는 말은 '은총'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성모님께서 탄생하신 경위를 살펴보면 진정 그 이름의 뜻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전설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님은 결혼 후 3년간이나 아기를 못 가져 친척들에게 창피를 당하고 괴로워하였다고 한다. 당시 관습으로는 아기를 못 갖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못 받는 것으로 여겨져,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

 

이뚜르비데라고 하는 한 작가가 쓴 '성모의 생애'라는 책을 보면, 성모님의 탄생 주변과 그분의 신심에 대해 잘 말해 주고 있다.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다 함께 신심이 깊었지만, 안나는 자신이 석녀인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웃과의 교제를 피하고 있었고, 요아킴도 남 모르게 마른풀 모양의 물기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요아킴은 깊은 산중에 숨고 싶었고, 아내가 석녀인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아내에게 자식이 생기기를 바라면서 매주 목장에서 우유 두부와 유지 크림을 들고 와서 아내에게 주었다. 요아킴은 그 동안 주위로부터 계속해서 멸시를 받고 있었는데, 한번은 추수절 때에 산 제물을 바치려고 어린 산양을 들고 성전에 들어갔다. 그는 거기에서 이사갈이라는 사제로부터, 거친 말투의 조롱을 당했다. 즉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사람인가?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주제에 제사를 바치냐? 하느님은 너의 자손을 끊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도 걸핏하면 요아킴을 조롱하면서, "법을 위반하지 않고서도 자손을 얻을 수 있다. 너의 자식을 낳아 줄 여자를 찾는 일이다." 하고 핀잔을 주었다. 안나도 이제 아기를 단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기도를 드리며, "우리 남편을 위해 이 집안이 끊어지지 않도록 딸자식을 주십시오." 하고 하느님께 간청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부드러운 목초가 무성한 드넓은 땅이 눈앞에 펼쳐지고, 거기에 무르익은 황금빛 보리밭과 잘 자란 야채밭이 있고, 많은 새들이 지저귀며 따뜻한 햇빛이 즐거움에 가득 찬 그 땅 전체를 밝게 비추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조소를 피하기 위해 목장에서 숨어 지내던 요아킴도 집에 돌아와서 그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 즉 한 마리의 흰 비둘기가 그의 어깨에 앉았는데 그 비둘기가 하느님의 사랑하는 손길같이 느껴지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간절히 원하였다. "주께서 이미 뱀을 정복할 것이라고 선조 아담에게 예언하신 여성의 이름으로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 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요아킴, 너의 간청을 받아들이셨다. 너는 집에 돌아가도 좋을 것이다. 곧 은총이 가득한 여자 아기를 얻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들렸다. 그리하여 이미 부부가 다 나이가 많았지만, 아기 마리아를 얻고 그 후부터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기쁘게 지내고 있지만,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음을 또한 기쁘게 생각해야 한다. 성모님은 장차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을 분이시기 때문이다. 교황 비오 9세가 1854년 12월 8일 장엄하게 선포하였듯이,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 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게 순수하게 보전되었다." 성모님은 구세주의 모친이 되실 분이었으므로 원죄에 물들지 않고 태어나는 은총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황의 성모님께 대한 선포가 있은 지 4년 후에 그것을 성모님 자신이 발현하여 증명해 주신 일이 나타났다. 즉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루르드의 미사비엘 동굴에 당시 14세 된 베르나데트 소녀에게 18회에 걸쳐 발현하신 것이다. 베르나데트의 증언에 대하여 처음엔 아무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베르나데트가 그 부인의 이름을 알아 오라는 본당 신부의 말에 순종하여, 발현하신 부인께 이름을 여쭈어 보았을 때, 그 부인은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분이다(Je suis immaculee conception)."라고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이 말이 그 발현 기적을 믿게 해준 계기가 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원죄에 물들어 태어나지만 성모님만은 하느님의 구원 섭리에 의해 원죄에 물듦이 없이 태어나셨다. 이렇게 태어나신 성모님은 요셉과 결혼하셨지만,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으시고 기르셨으며 사랑을 주시고 일생을 아름답고 착하게 그리고 또한 예수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사신 첫번째 그리스도인이 되셨다. 성모님은 우리 죄인들의 피난처이며,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하느님과 예수께 빌어 주시는 어머니이시다. 우리 교회에서 하느님을 공경하면서도 이러한 사랑과 자애가 가득하신 어머니를 갖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우리가 그른 일에 기울어질 때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성모님은 우리를 위해 빌어 주신다. 성모님은 구원과 하느님의 축복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원천이시다. 성모님을 우러러 받드는 자녀들은 이제 영원히 성모님의 탄생을 축복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사고 청한다.

 

"경사롭다 성스러운 어머니여,

어머님이 되시어 당신은 세세 대대에,

하늘과 땅을 다스리실 왕을 탄생하셨도다.

저주를 쳐부수시고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도다.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내리셨도다. 아멘."

 

제8단상 : 구세주 탄생의 경위와 인간의 협력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마태 1, 20-24).

 

1. 지도자의 탄생

교회의 대림절은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이다. 몇 년 전(1992년)의 대림절은 우리 나라 대통령 선거 운동의 기간과 겹쳐, 5년 동안 우리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선택하여 우리 국민에게 번영과 발전을 가져올 새 지도자를 기다리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한 사람의 지도자가 선출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했고, 또 얼마나 많은 조직과 경비가 들었는지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지도자가 탄생되는 것은 단숨에 일시적으로 선풍을 몰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정치 생활과 개인 생활 면에서 성실히 준비하였는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이 바라는 바를 채워 줄 수 있고 또 그만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세상을 구원하는 지도자의 탄생

우리는 교회의 전례력 안에서 구세주의 오심을 새롭게 기다리는 대림절을 지내며, 한 분의 영도자 탄생을 고대한다. 그분은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온 세계가 기다리는 분이시며, 일시적이며 현세적인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인간에게 선사하실 분이시다.

 

그분은 이사야가 예언하였듯이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 오실 분이시다(이사 11, 1). 그분은 야훼의 영을 가득히 받으신 분으로서,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기의 영을 갖고,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아 겉만 보고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고,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주고, 흙에 묻혀 사는 천민의 시비를 바로 가려 주리라고 했다(이사 11, 2-3). 바로 이분은 이새의 뿌리에서 돋아난 새싹으로서 다윗 왕가의 후손이며, 그가 있는 곳에는 야훼의 영광이 빛나고 모든 민족이 그에게 찾아올 분이다(이사 11, 10).

 

그분은 바로 마태오 복음(1, 18-24)에서 밝혀진 것처럼 '예수'라는 분으로서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분'이시다. 그분은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실 분', 임마누엘이다.

 

3. 하느님 계획을 위한 인간의 협력

그러나 이분이 탄생하시기 위해선 그 부모 되시는 요셉과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과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인간의 협력이 있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계획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전적인 순종과 협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러 온 가브리엘 천사의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기를 낳게 될 것이다."(루가 1, 35)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까?" 하고 반문을 하셨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자 "그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루가 1, 38) 하고 응답하셨다. 당시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유다법에 의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계획에 당신이 협조하시어 마침내 하느님의 아들을 낳게 되셨다.

 

그리고 요셉은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서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한 사람의 젊은이로서 어여쁜 처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행복한 삶을 계획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와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당황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을 겪었겠는가? 그러나 가브리엘 천사가 들려주는 자초지종의 말을 듣고 마침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 마리아를 인간들의 형벌로부터 구하고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게 했다. 요셉의 이 결단은 순간이었지만 하느님 뜻에 대한 협력은 일생을 두고 계속될 것이다. 요셉은 하느님의 아들을 돌볼 책임을 갖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신 마리아를 인간적으로는 자기 아내였지만, 구세주의 모친으로 모셔야 할 입장이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물론 마리아도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동행하시고 십자가 위에 죽으시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까지 예수님의 일생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시고 예수님의 구원 사업을 이어 갈 사도들과 함께 일하시고 그들의 어머니가 되시어 하느님의 계획에 협력하셨다. 우리는 구세주 탄생의 경위와 인간의 협력을 묵상하며 하느님의 계획에 전적으로 순명하시고 자신을 헌신적으로 봉헌하셨던 마리아와 요셉의 신앙을 우리 생활 중에 본받아야 하겠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은 그것을 성실히 따르고 협력하는 이들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고 협력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제9단상 :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다

 

"그 때에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시기를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어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 하고 말씀하셨다. '열려라'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마르 7, 32-35).

 

1. 어느 교통 사고자를 구해 준 목격 증인

얼마 전 저녁 뉴스 시간에 어떤 경찰관이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고 그 날 밤 귀가 길에 사람을 치어 크게 중상을 입히고 마침내 수천만 원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될 딱한 사정에 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보험에 가입한 날은 자정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보험 회사측은 그 사고 시각이 자정이 안 되었다고 하였고, 사고를 일으킨 경찰관은 자정이 넘었다는 엇갈린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듣고 그 사고 현장을 목격한 한 증인이 나와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사고를 일으켰다고 증언해 주어, 그 사고자는 수천만 원의 피해 배상금을 물지 않아도 된 일이 있었다. 그 목격 증인의 한마디 말이 그 사고자를 크게 구제해 주었던 것이다.

 

요즘처럼 자동차를 많이 타고 다니는 시대에 교통 사고와 보험 문제에 대해 많은 시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사고가 났을 때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한다. 자신이 잘못했으면서도 그 사고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며, 그래서 억울한 피해 배상금을 물거나 옥살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위의 사고의 경우 만일 목격 증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큰 조직을 갖고 있는 보험 회사가 승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목격 증인의 증언으로 진실이 밝혀지고 마침내 큰 손해는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목격 증인은 바로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입으로써 증언한 것이다. 이 증언이야말로 바로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사고 당시에,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맹인이나 귀머거리가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고 하면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고, 설사 증언한다 해도 법적 효력을 정상인들만큼 갖지는 못할 것이다. 반대로 정상적인 사람이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진실되이 증언하지 못하면 사정이 거꾸로 변하고 억울한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마음의 솔직함으로 진실되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2. 귀머거리, 벙어리의 가엾은 인간적 처지

마르코 복음(7, 31-37)에는 예수께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 주시는 내용이 나온다. 귀머거리는 인간 사회에서 서로 주고받아야 할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므로 사회성이 결여된 가엾은 사람이다. 눈으로는 볼 수 있기에 느낌은 얼마든지 체험하지만 그것을 속시원히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마치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안타까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 사회에서 다른 정상적인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서 일하지도 못하는 소외된 사람들이다.

 

3. 메시아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치유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렇게 불쌍하고 소외된 사람,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 주시어 세상의 온갖 좋은 소리와 인간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인간의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셨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도 말을 하게 하신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구나." 하고 경탄했다. 바로 이것은 이사야가 예언한 바와 같이 메시아의 구원이다. 즉 다음과 같은 말씀을 예수께서 이루신 것이다.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 35, 5-6).

 

어떤 면에서 인간의 신체적 장애는 인간의 원죄와 본죄에 희생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의 이기심에 근거를 둔 죄와 잘못이 결과적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의 신체마저도 그 질서를 깨뜨리게 한 원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이러한 잘못을 용서하시고, 그 잘못으로 희생된 불행을 없애 주시고, 그 상처를 치유해 주신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명을 받고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의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인 치유를 위해서도 오신 분이다.

 

4. 영신적인 장애자인 우리

한편 생각해 보면, 우리는 신체적으로는 귀머거리도 아니고 벙어리도 아니지만, 영신적인 눈으로 볼 때는 귀먹은 반벙어리가 될 수도 있다. 즉 우리에게 절대로 필요한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또 하느님 말씀을 남에게 전하지도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도 영신적으로 '귀먹은 반벙어리'나 다를 바 없다. 사람이 듣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그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것을 들을 줄 알고, 올바른 것을 말할 줄 알아야만 온전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도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태 13, 9) 하고 말씀하셨고, 야고보 사도는 "혀는 악의 불씨"(야고 3, 1-12)라고 하였다. 즉 혀는 인체에서 가장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이 혀로 인하여 사람들은 많은 잘못을 범한다. 그러므로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몸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완전한 사람이 된다. 우리가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하여 남에게 불쾌감을 주고 마음에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서로 우정을 돈독히 하고 실의와 좌절에 빠진 이들에게 삶의 용기와 위로를 주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말은 큰 위력을 갖고 있다.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말씀으로 인간을 벌하시고 심판하시듯이, 인간의 말도 그러한 능력을 행사한다. 임금의 말이 세상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죽게 하거나 살게 하고, 재판관의 말이 소송 당사자에게 유죄냐 무죄냐를 판단해 주듯이, 우리 인간들도 인간 관계 안에서 같은 인간을 거짓 증언으로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 있으며, 참된 증언으로 남의 진실을 밝혀 주고 손상된 명예를 회복시켜 줄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로 듣고, 올바로 말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귀와 입을 그 목적대로 사용하여 하느님께 찬양과 영광을 가져오는 일에 사용해야 하겠다.

 

우리는 과연 육체적 귀는 열려 있지만 참된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해주는 진정한 충고의 말을 귀담아 듣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진정 들어야만 말을 할 수가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그 말씀을 전달할 수 있다. 성서나 이웃을 통해 들려 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간직하여 그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을 때, 진정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5. 전인적인 인간 구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된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다. 마치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고 있듯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은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이사 43, 8) 현실이 많다. 눈을 가지고 참된 것을 보지 못하고, 시대의 징표를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입이 있어도 참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영신적인 소경이며, 영신적인 귀머거리이며, 영신적인 벙어리인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신체적인 고통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영신적이며 정신적인 모든 면을 포함하는 전인적인 구원을 말한다. 우리 자신이 영신적으로 갖고 있는 단점, 그릇된 경향, 우유 부단한 성격, 타인에 대한 무관심, 남의 불행에 동참하지 않는 태도 등은 예수님의 이러한 치유 기적을 통해 우리도 영신적으로 마음의 치유를 받아야 한다.

 

제10단상 :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루가 9, 62).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따르는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의 제자였던 엘리사는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기 위해, 자기 생활의 도구였던 황소를 잡고, 쟁기를 부숨으로써 그 때까지의 삶을 떠나 예언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1열왕 19, 19-21).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라고 하며, 자유인으로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자유롭게 해야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루가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세 젊은이에게 그들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각각 상이한 답변을 주셨다(루가 9, 51-62).

 

1.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첫번째 젊은이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루가 9, 57) 하고 말했다. 즉 이 젊은이의 마음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완전히 자신을 봉헌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현실적인 말씀이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 58).

 

우리는 모두 자기 집에 조용하고 편안한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자기 집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관없이 온전히 자유스럽게 개인 생활을 할 수 있다. 그 집이 아주 좁은 곳이든, 혹은 다 쓰러져 가는 초막이든 상관없이 그곳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편안하고 아늑한 자리가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은 이곳으로 내일은 저곳으로 돌아다녀야 할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는 어떤 자리에도 편히 머무를 수가 없으며 집안에 조용히 머무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갑자기 새로운 부르심을 받으면 곧 길을 떠나야 하며, 때로는 마음으로 그리고 필요하다면 육신적으로도 모든 것과 발을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집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 안에 있으며 그 휴식처는 미래에만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안정된 생활보다도 불안정된 생활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어야 함을 뜻한다. 예수께서 그 첫번째 젊은이에게 이러한 답을 주신 것은 그 젊은이에게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동고 동락할 수 있는 마음의 다짐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2.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 젊은이는 그가 예수를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나를 따라오너라."(루가 9, 59) 하고 부르셨다. 그러나 젊은이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루가 9, 59) 하고 간청하였다.

 

이 말의 뜻은 꼭 장례를 지낸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집에서 보살펴 드리고 다른 가족도 돌봄으로써 아버지를 편안케 해드리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다 죽으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뜻이다. 언뜻 생각하면 이러한 생각이 옳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는 좀 다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절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부르시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 하느님이 무엇을 요청하시면 인간은 그 요청에 따라야 한다.

 

3. 선생님,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주십시오

세 번째 젊은이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주십시오."(루가 9, 61)라고 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루가 9, 62)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거나 그리스도를 따르기 이전에 자신이 누리던 직책, 직위, 그 모든 것에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봉헌을 요구하신다. 주님과 함께 가고자 하는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불확실한 미래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처럼 믿음 속에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또 때로는 인간이 찾고자 하는 휴식처와 안식처인 가정을 끊어야 하며 그 가정을 떠나야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참된 희생과 봉사와 정신이 요구된다. 그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 그리스도의 길이다. 남을 이롭게 하고 도움을 주기 위한 생활이다. 이러한 길을 가고 있는 분들과 또 이러한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자.

 

제11단상 : 그리스도 왕

 

"진실한 증인이시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한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또 당신의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서 영광과 권세를 영원 무궁토록 누리시기를 빕니다"(묵시 1, 5-6).

 

교회력으로 연중 제34 주일은 마지막 주일이다. 그 다음 주일부터는 크리스마스, 즉 예수님의 탄생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대림절을 지내게 된다. 연중 마지막 주일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이시다. 그리스도는 과거에 왕이셨고 현재에도 왕이시며 또 미래에는 우리를 심판하러 오실 왕이시다. 그리고 그분의 왕권은 영원하고 무궁하고 끝이 없을 것이라고 다니엘서에 나온다(7, 13-14). 즉 그분은 모든 민족을 다스릴 왕이시며, 또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고 왕 중의 왕이시다. 그러나 요한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18, 36).

 

이 세상의 왕들은 백성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하지만 권력을 가지고 백성을 다스린다. 예수님의 나라는 권력이나 힘센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로 다스려진다. 즉 그 나라에서는 가장 많이 사랑하고 가장 많이 봉사하는 분이 제일 높은 분이 된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간을 다 사랑하시고 또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봉사자이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고 그들에게도 이처럼 봉사하라고 하셨다. 또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 주시고 마음이 상하여 울고 있는 사람, 죄를 짓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다.

 

우리는 이처럼 위대하면서도 또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왕을 모시고 있다는 점에 대해 감사드리자. 그리고 왕이신 그리스도께 경배하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자.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받들려는 정신이 있다면, 우리의 삶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다. 옛날에 왕의 지위와 권력은 어떠하였는가? 왕의 말 한마디에 사람의 목숨이 살고 죽고, 부귀 영화가 달려 있었다. 지금도 군주 제도를 택하고 있는 나라, 예를 들면 태국, 영국, 일본 등에서는 왕의 권력이 대단하다. 왕의 명령에 꼼짝 못하고 복종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왕의 명령처럼 충실히 잘 받들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 있다면,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여 섬기고, 서로 충실히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사람들을 다스리고 명령하지만, 그리스도의 왕국은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사랑의 왕국이다. 그리고 진리와 평화가 있는 나라이다. 우리는 이 왕국에 초대받았으며, 이미 이 왕국의 시민이다. 사도 요한은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한 증인이시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시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한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또 당신의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다"(묵시 1, 5-6).

 

그리스도의 왕국은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의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으므로, 이미 이 세상에서 건설되고 있다. 이 세상에서의 하느님 나라 건설은 세상을 부정하여 격리하고 은둔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과 이웃을 위한 봉사와 희생적 삶 속에서 확장되어 간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도록 말씀하셨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마태 6, 33). 우리는 이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이 왕국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올바로 모실 수 있도록 진리와 봉사적인 삶에 가치를 두고 투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제12단상 : 그리스도인의 공동선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2, 4-7).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인간이 만일 혼자서 살아야 한다면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혼자서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로 한 것들,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잘 곳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며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혼자 해결할 수는 없고 상호간의 협력을 통해서만 이 일을 이룰 수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이 필요물들을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를 이루어 왔으며, 공동체의 지도자는 특히 그 구성원들에게 의식주 문제를 잘 해결해 주어야 한다.

 

성서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심판과 자비, 사랑도 인간의 필요물들에 대한 공정한 분배와 나눔 등에 관련된 것이 많다. '부자와 라자로'(루가 16, 19-31)의 비유에서 보듯이, 라자로의 불쌍한 처지를 전혀 돌보지 않는 욕심 많고 이기적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벌, 그리고 반대로 이기적인 이들의 욕심에 의해 희생된 거지 라자로를 위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이러한 점을 본다면 하느님은 항상 욕심 많은 인간의 횡포에 희생당한 이들을 위로해 주시고, 공정한 정의를 베푸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던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공동체 안에 역시 지도자들을 두셨다. 이 지도자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권한과 능력을 가지고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백성들을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야 했다. 그러나 때때로 목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선으로 이끄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사리 사욕을 채우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백성들의 재산을 착취하기도 하고, 공동체의 선을 파괴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 원망하도록 했고 우상을 섬기도록 이끌었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벌을 받고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했다. 이것이 성서가 보여 주는 하나의 역사적 교훈이다. 이것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모든 크고 작은 공동체 안에서 책임을 맡은 지도자와 그 구성원들을 위한 삶의 지표가 된다. 가끔, 우리 주위에서 논의되는 거물급 지도자들의 비행과 의혹에 싸인 거대한 부정 사건들로 인해 국민의 마음은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심보다는 의심과 불신이 팽배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로 말미암아 올바른 마음으로 돈을 벌고 봉사하려는 이들까지도 불신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뢰심이 회복되어야 한다.

 

국민은 지도자를 믿고 그들의 올바른 지도에 잘 따라야 하고, 또 어떤 그룹이든 단체든 크고 작은 공동체를 책임 맡고 있는 사람들은 진정 그 전체 구성원들의 공동선을 위해 일하고, 개인의 사리 사욕과 같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어떤 한 공동체에서 한 개인이 부정으로 획득한 막대한 재산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기본적 삶의 도구를 빼앗은 것이며, 그들을 슬픔에 잠기게 하고 울게 하는 것이다.

 

성서의 하느님은 바로 이러한 부정한 이들에게 벌을 주시고 억울하고 짓눌린 이들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신다. 인간이 서로 나눔의 정신, 존경의 정신, 신뢰의 정신으로 서로 돕고 공동으로 발전하기를 원하고 노력한다면, 현재의 불공평한 현실보다 얼마나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겠는가?

 

우리는 흔히 세상의 불공평과 악의 현상을 보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의심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욕심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다. 인간은 그 생존을 유지하고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 돈과 재산은 사람의 명예를 빛내 주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돈을 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 인품이 나타난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하느님이 주신 물질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물질에 매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가난과 봉사의 정신을 따르고, 또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축복받는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 재화를 지혜롭게 사용하는 데에서 하느님께 기쁨이 되고, 형제 자매들에게 화목과 평화의 길을 베푸는 데에서 그리스도 신자들의 사랑과 자비가 드러난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였듯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고, 그리스도만이 분열과 미움과 이기심 때문에 갈라진 사람들을 화해시킬 수 있고 인류를 새로운 '한 몸'으로 창조할 수 있다(에페 2, 14-22).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류를 한 가족으로 만들고, 한 자녀로서 축복받는 길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가정이나 어떤 공동체에서나 그리스도의 평화와 구원은 사랑과 희생의 정신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 신자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위해 자신의 어려운 성격, 모난 성격을 극복하려 노력하고 한 공동체 안에 평화를 심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 모범을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찾고,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생명과 진리의 길을 따르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마련된 영원한 축복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13단상 :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20, 25).

 

예수 부활은 따뜻한 봄과 함께 온다.

 

추운 겨울이 다 지나가고 따뜻한 봄과 함께 찾아온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류에게 새 생명의 희망을 주고 있다. "만일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을 것이며, 끝없는 죽음만이 계속될 것이다."(1고린 15, 12-28)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사람이 한세상을 살다가 죽음 그 자체로 끝나 버린다면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는가? 그러나 주님의 부활이 있고, 그 부활을 통해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의 삶을 가치 있게 해준다. 부활절에 들려주는 성경 말씀은 모두가 예수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해 주고, 또 그 부활 사건을 믿도록 인도하고 있다.

 

1. 토마 사도의 불신앙

예수 부활에 대한 기사 중 요한 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마음의 평화"를 주셨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 사도만 없었다고 한다(요한 20, 19-31). 사도들은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토마 사도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 25)라고 말했다. 그러나 토마 사도는 그 사실을 믿기가 어려워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 25). 그러자 주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셔서 부활의 사실을 입증시켜 주셨다.

 

우리는 토마 사도를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의 모습을 보게 된다. 여기서 토마 사도는 직접 예수께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니다. 그 동료 사도들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바로 토마 사도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이나 또는 그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을 통해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다. 즉 예수 시대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하는 조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보겠다.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바로 그 제자들의 증언에 우리의 신앙을 걸고 있다.

 

2.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요한 20, 25)라고 자신 있게 말하며,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나가 전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확실성을 찾는다.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교회를 통해 내려오는 신앙 고백 속에 우리의 신앙을 걸고 있다. 예수께서는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요한 20, 19)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미 예수께서는 사도들의 증언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며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간구합니다."(요한 17, 20)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 두고 아버지께로 떠나시면서 그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동시에, 그 제자들의 말을 듣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부활에 대한 신앙도 역시 그 제자들이 전해 준 신앙에 근거한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다.

 

3. 신자와 불신자의 믿음의 공동 기반인 의혹

일찍이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그리스도 신앙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책에서 "믿는 사람이 무(無)와 시련과 의혹의 바다 위에서만 믿을 수 있고 불안한 바다만이 믿음의 유일한 자리로 그에게 주어졌다면, 그 반면에 믿지 않는 사람 역시 단순한 불신자로서만 비변증법적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신자가 끊임없이 불신의 위협을 받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신자에게는 신앙이 그의 폐쇄된 세계를 유혹하고 위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 존재의 딜레마에서 빠져 나갈 길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신앙의 불안에서 도피하려는 사람도 신앙이 진실이 아니라는 단언을 끝내 내릴 수 없는 불신의 불안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 거부에서 비로소 불신의 불가능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는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유다 전설을 소개하며 이 점을 말하고 있다. 하루는 어느 해박한 계몽주의자가 베르디체에베의 명성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평소와 같이 논쟁을 벌여 자기 신앙이 옳다고 내세울 그의 뒤진 논거를 가차없이 갈파할 속셈이었다. 사제는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가 "그렇지만 혹시 옳을지도 모르지." 하였다. 그리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차분한 말로 "이 사람아, 자네와 함께 말씨름을 한 율법 대가들의 말도 자네에게는 모두 허사였네. 자네는 헤어질 때마다 그들의 말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나. 자네에게는 그들도 하느님과 그의 나라를 여기 있소 하고 대령할 수 없었고, 나도 그렇게 할 재간은 없네. 그렇더라도 좀더 생각을 해 보게. 이 사람아, 혹시 옳을지도 모르니까." 하였다. 그러자 계몽주의자는 맞서 보려고 속으로 안간힘을 다해 보았으나 매번 그 '혹시'라는 무서운 말에 부딪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혹시'라는 말은 불신도 회피할 수 없는 시련이며 불신도 이 말 안에서는 신앙 거부의 불가능성을 체험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자기 존재의 진실을 감추지 않는다면 사람은 누구나 제 나름대로의 의혹과 '더불어'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아무도 그 의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그 아무도 믿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신자에게는 의혹을 '무릅쓰고' 믿음이 있으며 불신자에게는 의혹을 '통해서' 그리고 의혹이라는 '형태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자기 현존재의 궁극적 의의를 이렇게 의혹과 믿음, 시련과 확신의 그칠 줄 모르는 대항 가운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 인간 운명의 기본 형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와 불신자 양자를 각각 혼자서 폐쇄되지 못하게 하는 이 회의야말로 아마 상통의 터전이 될 듯하다. 왜냐하면 바로 의혹이 양자를 안으로 아주 오므라들지 못하게 하여 신자는 불신자를 향하고, 불신자는 신자를 향하도록 길을 터 주기 때문이다. 신자에게는 불신자의 운명에 참여하는 길이 되어 주고 불신자에게는 신앙이 회피치 못할 도전이라는 양상을 취하게끔 해주는 것이 회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무한한 섭리, 신비 앞에서 인간은 결코 좁은 사리 판단이나 혹은 합리주의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각자 자신 안에 간직할 수 있는 신앙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14단상 :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0, 26-29).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 외침은 처음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토마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목격하고 말한 신앙 고백이다.

 

복음에는 죽음을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와 위로와 굳센 신앙을 주시는 내용이 나온다(요한 20, 24-29 참조). 예수님을 굳게 믿고 따라다녔던 제자들이었지만, 예수께서 어처구니없게도 유다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자, 그들은 예수께 대한 신앙도 흔들리고 또한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굳게 잠그고 숨어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 문이 잠겨 있는데도 들어오셔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 19) 하고 인사하신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들은 진정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의 인사를 받고, 이제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지 않고 오직 영광의 주님만을 믿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데에서 힘을 얻고 주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 25) 하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도 불구하고 토마 사도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 25)라고 말했다.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서는 예수 부활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토마 사도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가끔 토마 사도의 불신앙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사실 토마 사도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확신하고 우리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을 고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토마 사도의 신앙관

토마 사도의 신앙관에 대해 생각해 보자. 토마 사도는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던 베다니아로 가자고 했을 때 "우리도 주님과 함께 생사를 같이합시다."(요한 11, 16)라고 말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제자들은 망설이고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선생님과 함께 죽으려고 생각할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을 때 토마 사도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토마 사도가 자리에 없던 차에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다는 말을 했을 때 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 주일이 지난 뒤 다시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그 때엔 토마도 자리에 있었다. 예수님은 토마 사도의 마음을 아시고 그에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라고 하신다. 토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손으로 만져 확인한 후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외쳤다. 이것은 대대로 유명한 신앙 고백이 되었다. 이렇게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인 토마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인도 지방에 가서 열심히 전교했다고 한다.

 

2. 토마 행전의 일화

토마 사도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토마 행전'이라는 외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토마 사도의 성격과 태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세상 곳곳으로 나가 복음을 전파하려고 할 때였다. 전교 지방을 정하려고 제비를 뽑아 보니, 토마는 인도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토마는 처음부터 인도에 가기를 거절하였다. 즉 자기는 긴 여행을 할 만큼 굳세거나 강건하지도 못하고 또 히브리 사람으로서 어떻게 인도 사람들 가운데 들어가서 설교를 할 수 있는가 하고 인도에 가는 것을 거절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밤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토마야. 인도로 가서 거기에서 말씀을 전하라. 나의 은총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토마는 그래도 완강히 거절하면서 "당신께서 보내 주시는 곳이라면 어디에라도 보내 주소서. 그러나 인도에만은 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마침 아바네스(Abbanes)라고 하는 인도의 상인이 왕의 명령을 받고 예루살렘에 와서 숙련된 목수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토마는 목수였다. 그 때 예수께서 아바네스에게 와서 "나에게는 목수인 노예가 있는데 그를 팔고 싶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윽고 계약이 성립되고 토마는 팔려 가게 되었다. 계약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목수 요셉의 아들인 나 예수는 이름을 토마라고 하는 나의 노예를 인도의 군다포러스 왕의 상인인 아바네스에게 팔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함." 이 증서를 작성한 후에 예수님은 토마를 찾아서 아바네스에게로 데리고 갔다. 아바네스가 토마에게 "이분이 너의 주인인가?" 하고 묻자 토마는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아바네스가 "내가 이분으로부터 너를 샀다."고 말하자 그 말에 토마는 아무 말도 안했다. 그리고 나서 토마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를 드리고 예수께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이신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에든지 가겠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그 후 토마는 인도에 가서 군다포러스 왕의 궁전을 세우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여 인도에 그리스도교를 가져오게 했다. 이상이 토마 행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토마 사도의 성격과 신앙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토마 사도의 성격은 확신하는 데 더디고 순종하는 데도 더디다. 그러나 한번 확신하고 나면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용기 있고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토마 사도와 같은 신앙은 말뿐만의 신앙 고백보다도 훨씬 더 믿음직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토마 사도가 고백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 28)이란 바로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3. 시련을 극복하는 신앙

사도 바오로도 로마서에서 이렇게 신앙을 고백했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 9).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고백한 것은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과 지배권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는 것이다.

 

오늘날 토마 사도의 신앙 고백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모로 신앙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바가 많다. 우리는 과연 예수께 대한 신앙을 어떻게 갖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분을 진정으로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지? '주님'이란 히브리 말로 '아도나이'(나의 주님)라고 하는데 이것은 종이 주인 앞에 나아가 부르는 표현이다. 바로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는 나의 주인으로서 나의 생사권을 쥐고 계시므로 나를 그분 마음대로 그분 뜻대로 내맡기는 신앙의 태도이다.

 

토마 사도가 처음엔 인도로 가기 싫어했지만 주인인 예수님이 그를 종으로서 인도 상인에게 팔았을 때는 예수께 순종하고 인도로 갔듯이, 우리도 일상 생활 중에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듯이, 하느님께 순종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고 하면서도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나 시련이 닥쳐올 때엔 하느님께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무당을 찾아가 굿을 하고 점을 보러 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도 중요한 사건 때마다 그렇게 한다면, 즉 대학 입시, 혼배, 궁합 등등…. 그리고 우리는 이웃 사람이 교회에 나가니까 아무 뜻도 없이 덩달아서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가는 것은 아닌지. 과연 우리는 토마 사도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고 노력했는지. 우리 신자들 중에는 영세하고 얼마 안 가서 냉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냉담의 이유는 여러 가지로 많겠지만 냉담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영세 이후에 교리에 대해서 더 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저 미사 참례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집에 돌아가서는 더 이상 기도도 안 드리고 교회 서적도 읽지 않는다. 교회에서 출판되는 신심 서적은 고사하고 정기 간행물도 읽지 않고 가톨릭 신문조차 읽지 않는다. 그리고 영세 후에 신심 단체나 교회 활동도 안하고 신자로서의 도리도 안하면서 신앙이 굳세지 못하다고 한탄한다. 신앙이라는 것은 나의 의지 없이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도와 준다고 해도 굳세질 수는 없는 것이다. 열심히 자신이 노력해야 한다.

 

토마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확신하기까지엔 신앙의 시련을 겪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분이 부활하셨는가?",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 보자."는 태도도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는 없지만, 그분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제15단상 : 남을 판단하지 말라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 1-3).

 

우리는 일상 생활 중에 자주 만나고 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자기와 별로 관계없는 사람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는 자주 접촉하고 자기와 인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도 별로 안 되는데 그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기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떤 장소에서 이러저러한 말을 하고 또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서 그 사람을 자기 나름대로 나쁜 사람으로 단정 짓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의 인품이나 진실을 좀더 잘 알려고는 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처지와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러한 처지와 환경에 있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 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은 각자 자라 온 성장 과정이 다르고 교육의 정도도 다르고 또 성격도 다르다. 사람들은 남을 칭찬하기도 하지만 남을 도마 위에 올려 놓고 비교하고 판단하기도 잘한다. 특히 남의 단점이나 결점을 발견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입으로 전하기를 잘한다.

 

그런데 남의 결점이나 단점을 말한다고 해서 자기가 남보다 높아지거나 훌륭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기도 실수할 때가 있고 또 더 큰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똑같은 인간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남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남을 잘못 판단하고 오해하고 모함하는 것이 우리 사회나 공동체를 얼마나 어둡고 싸늘하게 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남을 욕하고 험담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그만큼 판단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남을 비판한 말이 그 당사자에게까지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 인간의 판단은 그르치기가 쉽다.

 

아무도 어떤 사건이나 어떤 사람의 인격을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 재판관들도 여러 가지 증거를 가지고도 오판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우리 자신이 남을 판단할 만큼 온전한 사람은 아니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다.

 

복음을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남을 판단하지 말 것과 또 남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살펴보고 자신의 결점이나 단점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없이 남의 말을 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점을 고치는 데 정신을 차리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또 모든 것을 샅샅이 환히 보시는 하느님께 맡겨 두도록 하자. 하느님만이 모든 역사와 모든 사람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제16단상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 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하시며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루가 24, 37-41).

 

예수께서 역사상 유일 무이하게도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함과 질시와 미움은 끝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선과 진리가 마침내 승리함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루가 복음에는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평화를 주시는' 말씀이 나온다(24, 37).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이 세상의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평화이다. 세상의 주인이신 그분이 평화를 주시는데 그보다 더 큰 위안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평화야말로 우리 모든 인간의 염원이며 삶의 목표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가 있기를 원하신다고 인사하셨다. 우리 각자에게 평화가 있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평화스러운가, 아니면 불안한가? 평화롭지 못하고 불안하다면 왜 그러한가?

 

루가 복음에는 제자들이 주님을 뵙게 되었을 때 불안하여 안절부절못했다는 표현이 있다(24, 38). 왜 그랬을까? 제자들은 주님을 뵙기가 미안했다. 주님이 잡혔을 때 그들은 다 도망 가고 또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에도 스승을 외롭게 죽게 놔두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주님은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제자들에게서조차 십자가의 고통이 절정에 달하여 죽어 가는 순간에 외면당하고 죽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먼저 인사하셨다. "샬롬"(당신들에게 평화를 빕니다.) 예수님의 이 인사말은 제자들의 서먹서먹한 입장을 모면시켜 주었고 주님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에 제자들은 주님의 평화의 인사에 감사드리면서 이제는 진정으로 주님의 모든 말씀을 믿고 주님의 가르치심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이 세상에 나가 목숨까지도 바치기로 결심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평화의 인사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또한 부활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우리는 주님의 이 평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평화를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첫째, 주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음을 진정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 신자들에게 부활 신앙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헛되며 불신과 오해가 싹 트고 마음이 불안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믿으면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마음에 평화를 갖게 된다.

 

둘째, 주님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선 온갖 형태의 거짓과 죄악으로부터 회개해야 한다. 거짓과 죄악은 마음속에 불안을 심어 주고 모든 일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부활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믿고 깨끗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주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셋째, 주님의 평화는 겸손한 자세로 용서하는 마음에서 얻을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공동체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갈 때 갈등도 생기고 경쟁도 생긴다. 또 이 갈등과 경쟁은 남을 모함하고 시기하며 업신여기게 한다. 내가 남을 괴롭히고 고통을 줄 수도 있고, 또 타인이 나에게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이러한 잘못들과 억울함들에 복수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마음의 평화가 깨진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는 인간임을 인정하면서,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주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평화는 기도하는 마음에서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의 현존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인식할 수 있다. 주님의 현존 앞에 있는 인간은 학벌이나, 명예, 지위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성 그대로 주님을 만나게 된다.

 

주님의 현존 안에서 자신의 선한 행동, 악한 행동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주님의 편으로 기울었는지 악의 편으로 기울었는지 자신의 선택이 어떠했는지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주님의 가르침과 그 뜻을 따르려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올바른 습관으로 행할 때 주님의 평화는 올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신앙과 열심이 부족한 우리에게 진정으로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음에 감사하고, 주님의 평화 인사에 기도와 찬미와 친절과 나눔과 봉사로써 보답하여야겠다.

 

제17단상 : 다윗의 죄와 하느님의 용서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 다윗이 이렇게 자기 죄를 고백하자 나단이 말하였다. '야훼께서 분명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임금님께서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2사무 12, 13).

 

1. 죄를 짓는 인간

인간은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형태의 죄를 짓는다.

 

인간이 죄를 범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나약성과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한 것이고, 결국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거절이다. 그것은 이기주의적인 동기에서 나오고, 무지하기 때문에 저지르며, 또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적인 거절에서 나온다.

 

성서는 이러한 인간의 죄에 대해 적나라하게 말해 주고 있으며, 또한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죄로부터 용서와 구원을 얻는 법에 대해서도 말해 준다.

 

2. 다윗 왕의 죄와 용서

다윗 왕은 평소에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온갖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어느 날 다윗 왕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인해 죄를 범했다. 그는 자기의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를 싸움이 치열한 전쟁터로 보내어 죽게 하고 그 부하의 아름다운 아내 바쎄바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았다(2사무 11, 1-27).

 

다윗의 이러한 행동은 하느님을 노하게 했다. 하느님은 나단 예언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어찌하여 너는 나를 얕보며 내 눈에 거슬리는 짓을 했느냐?"(2사무 12, 9) 하고 꾸짖으셨다. 하느님은 다윗이 지은 죄를 보시고 다윗이 하느님 당신을 얕잡아 보았다고 생각하신다. 즉 인간이 죄를 짓지만, 그 인간의 범죄는 인간끼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 연관되고, 하느님을 무시하고 얕잡아 본 것이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를 생각해 보면, 우선 우리는 무엇인가 이기적인 욕심에 의해 어떤 일을 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어떤 일을 하고 싶은데 그 일이 우선 하느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인지 아닌지 속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욕심 때문에 혹은 나약성 때문에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알면서도 죄에 빠지는 것, 그것은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데도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한 일들은 결국 모든 인간의 공동선을 도모하시는 하느님의 정의에 위배되고 또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의식적인 거역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것이 죄이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아담과 하와의 죄를 통해 모든 인류는 '생명의 은총'을 잃었다. 다윗의 죄를 통해 하느님은 "다윗의 집안에는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으리라."(2사무 12, 10)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죄는 인간의 참회와 하느님의 은총과 긴밀히 연결된다.

 

3. 죄 사함의 조건인 회개와 고백

죄는 하느님의 은총을 상실하게 하고 인간을 영적으로 죽게 하지만 그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죄를 고백하고 참회를 하는 것이다. 즉 다윗 왕이 죽을 죄를 지었지만 그가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 13)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자 "하느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죽지 않게 하셨다"(2사무 12, 13).

 

인간이 죄를 지어 죽게 되었을지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그 죄를 고백하면 용서를 받는다. 그것은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은총을 얻는 방법으로 사용되는 고해 성사 제도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고해 성사를 통해, 즉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함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하고 마음의 평화와 용서와 구원을 얻게 된다.

 

우리 인간이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통회하고 뉘우치며 죄를 고백하면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죄를 지은 자녀를 용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서 자녀가 부모님 몰래 주머니에서 돈을 슬쩍했다고 하자. 그 자녀는 그 일로 인해 마음이 괴롭고 아플 것이다. 부모님이 알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은 이미 그 자식이 돈을 가져간 것을 알고 있다. 부모님은 그 자녀가 자기 죄를 뉘우치고 그 죄를 고백하면 그의 모든 잘못을 전적으로 용서해 주고 그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준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자비를 베푸신다. 하느님은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통회함으로써 살기를 원하신다(에제 33, 10).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하늘 나라에서는 더 기뻐한다(루가 15, 7).

 

그러므로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용서에 있어서 그 연결점은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 고백하고 통회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고해 성사를 잘 봄으로써 하느님의 더 큰 은총과 마음의 평화를 누려야 하겠다.

 

제18단상 : 돈과 재물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가 16, 13).

 

아주 오래 전부터 돈은 인간 사회 속에 필수적으로 존재해 왔다. 돈은 물건들의 가치를 측정하고 값을 매기는 데 좋은 매개체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나라마다, 민족마다 그 나름대로 고유한 돈을 만들고, 그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고 팔고 하면서 사회 생활을 해 왔다. 또 사람들은 자기가 힘들여서 만든 상품을 돈과 바꾸고, 그 돈을 가지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사기도 한다.

 

이처럼 돈이란 우리 인간 사회에서 교환의 매개체로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또 여러 가지 종류의 돈 중에서도 시대마다 유력한 힘을 갖고 전 세계적으로 통하는 돈들이 있어 왔는데, 오늘날에는 아마도 '달러(Dollar)'가 제일 유력할 것이다. 즉 '달러'가 있으면 전 세계의 어느 상품이고 다 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외국으로의 수출을 통해 달러를 벌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나라도 '달러'를 많이 가지고 있다면 국제 사회에서 힘 있는 나라로 인정받고 국제적인 지위가 높아질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돈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다 필요한 것이고 또 생존을 위해서나 활동을 위해서나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다.

 

아마도 돈 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돈이 든다. 먹는 데, 자는 데, 입는 데 다 돈이 들어간다. 그리고 자녀를 키우고 교육하는 데, 그 밖에 문화 생활, 사업하는 데 필요한 것이 모두 돈이다. 그러므로 돈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자선, 애긍, 정의를 실천하는 일 등 모든 이야기의 뒤편에는 돈이 결부되어 있다.

 

성서의 가르침 속에는 돈을 결코 부정시하거나 돈을 나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돈은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그것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므로 돈이 모든 사람에게 정의롭게 골고루 분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돈이 부정한 방법에 의해 몇몇 사람에게 편중되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곤란을 끼치는 것을 죄악시하고 있다. 만일 예수께서 돈을 나쁜 것이라고 여기셨다면, 구태여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과 애긍의 행위를 좋게 보시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가난을 미덕으로 여기고,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성서에서 보면, 특히 가난하고 불쌍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고 있다. 또 세리였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방문을 받고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을 때 예수님은 그 행위를 칭찬하셨다. 이처럼 돈 없는 자에게 돈이 가고 돈을 많이 가진 자는 없는 이의 어려움을 이해하여 돈을 나누어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께서는 힘 없고 가난한 자들을 속이고 등쳐 먹는 이들을 책망하신다. 아모스서에서 듣는 바와 같이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의 숨통을 끊는 자, 그리고 되는 작게, 추는 크게 만들고 가짜 저울로 속이며 등겨까지 팔아먹고, 힘 없는 자, 빚돈에 종으로 삼고,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자를 종으로 부려먹는 자들, 이들의 행위에 대해 하느님은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신다(아모 8, 4-7).

 

그러므로 돈은 누구에게나 필수적인 것이고 생존에 관한 것이다. 돈이란 유통에 필요한 것이므로 한 곳에 뭉쳐 있으면 그 사회는 병들게 마련이다. 피가 흐르는데 어느 한 곳이 막혀 있으면 병들게 마련이다. 또 그 돈을 죽을 때 가지고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돈을 벌되 정당하게 노력해서 벌고 그 돈을 유용하게 사용하여 인류의 발전과 하느님 나라 완성에 쓰도록 해야 한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꾼인 그대는 이런 것들을 멀리하고 정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시오"(1디모 6, 8-11).

 

제19단상 : 마음밭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먹었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뜨자 타 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태 13, 3-9).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 이사야 예언자는 "야훼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이사 55, 10-11)라고 하였으며,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받고 있지만, 장차 받을 영광에 비하면 지금 받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로마 8, 18). 그리고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 1-23)를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러 가지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당시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과 징표를 보고서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라고 한탄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 제자들의 눈과 귀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제자들 스스로가 잘나거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란 인간의 능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의 힘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씨 뿌리는 사람

그럼 여기서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이 비유에서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여기에 등장하는 밭들은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예수님은 그 당시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이 비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그 말씀의 씨앗이 우리의 마음밭에 파종되고 있다. 그러나 똑같은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신앙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파종되며 열매도 각각 다름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길바닥과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등 어느 곳이든 다 씨를 뿌리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에게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도록 초대하신 것을 뜻한다. 그런데 길바닥은 씨앗을 잘 받아들이지도 않고 소중히 간직하지도 않아 새들이 와서 쪼아먹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이 내포한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무관심한 마음의 상징이다.

 

2. 돌밭에 떨어진 씨

하느님의 말씀은 돌밭에도 떨어졌는데, 돌밭이란 돌과 흙이 함께 섞여 있어서 씨앗이 잘 자라지 못하는 밭이다. 농부는 농사를 지을 때 밭에서 돌을 가려낸다. 돌이란 씨앗이 자라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역시 우리 마음이 돌과 같이 차고 메마를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긴 하지만 신앙이 깊지 못해서 환난이나 박해가 올 때면 곧 넘어지는 사람의 마음이다.

 

3.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도 씨가 떨어졌다. 그런데 그 가시덤불에는 여러 가지 잡초와 풀이 함께 뒤엉켜 자라고 있어서, 떨어진 씨앗이 질식하여 죽고 말았다. 그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이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자신이 받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키우지 못하고 질식시키는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다.

 

4. 좋은 땅에 떨어진 씨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씨가 떨어졌다. 좋은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여 새 생명을 꽃피우게 한다. 땅이 땅으로서의 존재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마음의 존재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땅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마음을 겸허하게 비워서 말씀의 씨앗이 잘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딱딱한 길바닥과 같은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냥 흘려 보낸다. 돌밭이나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도 그 안에 단단한 돌과 잡초가 있어서 하느님의 은총의 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직 자기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땅과 같은 마음이야말로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총의 비를 흠뻑 받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5. 하늘 나라의 신비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하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즉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구원되기를 원하신다. 씨앗이 좋은 땅뿐만이 아니라,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도 떨어졌다는 것은 모든 인간을 구원에로 초대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하느님께서는 유다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세상의 권력자든 약한 자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렇지만 그 구원에로의 초대에 우리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시지는 않는다. 즉 구원은 이미 우리에게 제시되었지만 우리의 마음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다가온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의 여부는 나의 마음이다.

 

제20단상 : 마음의 성전을 거룩하게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고 꾸짖으셨다"(요한 2, 13-17).

 

요한 복음의 이 대목을 보면 평소의 예수께서 지니셨던 용서와 자비로운 모습과는 달리 예수님이 채찍을 드신 장면이 나온다(요한 2, 13-25). 그것도 다른 장소가 아닌 성전 뜰에서 채찍을 드셨는데, 그것은 남이 준 채찍이 아니라 당신이 손수 만드신 것이다. 채찍은 무엇에 쓰는 것인가? 채찍이란 남을 때리든지, 짐승을 모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채찍을 만드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결심과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예수님은 그 채찍으로 성전 뜰에 즐비하게 서 있던 동물들, 즉 소, 양, 비둘기들을 후려갈기며 내쫓으셨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까지도, 즉 성서에 보면 환금상, 지금으로 말하자면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까지도 내쫓으셨다. 그뿐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들까지도 채찍으로 후려갈기셨다.

 

이 내용은 요한 복음뿐만 아니라 마태오, 마르코, 루가, 즉 네 복음이 다 전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복음 사가들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시고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치는 군중의 환호 소리와 함께 입성하신 내용 다음에 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그렇게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 날 당일에는 이것저것 둘러보셨다가 이미 날이 저물어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아로 가셨고, 그 이튿날 베다니아에서 나오실 때 마침 시장하던 차에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좀 드시려 했다가, 열매가 없어 홧김에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는 내용과 연결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도착하신 뒤 이 채찍 사건이 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호산나 소리와 함께 왕으로 입성하셨을 때엔 성전 안에 이것저것 둘러보시며, 여러 가지 내용들을 눈여겨보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베다니아에서 하루를 지내는 동안 여러 가지 당신의 계획을 세우신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다음날 성전에 도착하자마자 손수 채찍을 만드셨고,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 사건을 해석할 때, 그것은 장차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파스카절의 제물로 바치시어 하느님과 화해의 제물로서 봉헌할 성전을 거룩하게 정화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한다.

 

1. 채찍을 드신 예수님

요한 복음에는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2, 16)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한편, 공관 복음인 마르코, 마태오, 루가 복음에서는 한결같이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마르 11, 17)라고 전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형식적으로 율법만을 지키는 신앙 생활을 받아들이시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성전을 통해 사리 사욕과 이권에 개입되어 참된 신앙을 잃고, 하느님께 대한 존경심마저 잃어버린 사람들로서 상징되는 환금상 그리고 장사를 통해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업가들의 양심을 따끔한 채찍을 통해 일깨워 주신다.

 

2. 정의와 사랑의 성전이 되어야 할 명동 대성당

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이 예배와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었듯이, 대한 민국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시대엔 아마도 명동 성당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명동 성당은 이제 우리 가톨릭 신자들만의 성전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모든 종교인들이 존중하는 상징적인 성소가 되고 있다. 또한 명동 성당은 신자들이 모여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불의하게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빼앗겼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하느님의 정의와 참다운 사랑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신성한 장소가 되고 있다. 그래서 명동 성당에서 사람들이 모여 농성을 할 때면,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관심 있게 들어 보려 하고, 언론 매체들도 그들의 주장을 표현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정부 당국도 명동 성당의 이러한 신성한 역할을 존중하여 함부로 공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대화와 타협으로 좋은 결과를 도출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번 노동법 개정안 변칙 통과를 반대하며 명동 성당에서 노동 관계자들이 농성을 벌인 일이 있다. 이 때 김수환 추기경께서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다. "이곳을 성역으로 생각하여 정당한 주장을 표현하러 오신 여러분! 정부 당국도 감히 이곳에 함부로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으므로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법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농성을 하시는 여러분도 이곳을 성역으로서 존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어떠한 폭력적인 행동이나 혹은 언어의 폭력까지도 자제하며, 갖가지 쓰레기를 버려 이곳을 더럽히는 일 등을 삼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명동 성당이 성역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존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러한 요지의 말씀을 들었을 때 참으로 적절하고 필요한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했다. 명동 성당을 성역으로 생각하여 법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주장을 외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표출하고 싶은 나머지 그곳에서 온갖 폭력적인 언어를 쓴다면 그들 자신이 명동 성당을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기 위해 이용할 뿐이지, 성역으로서의 명동 성당과는 거리가 먼 처신이기 때문이다. 명동 성당이 성역이 된 것은 인간의 법으로 정했다기보다, 우리 사회에서 관례적으로 그렇게 인정한 것이다. 특히 1970년 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우리 나라 민주화의 산실로서 그 역할을 해 왔기에 우리는 이곳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곳이 하느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집은 장사하는 곳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이 원하시는 성전

예수님이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은 무엇이겠는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전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사람들의 무딘 양심을 일깨워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당에 오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또 한 가지 예수께서 원하시는 성전은 바로 우리 각자의 '양심의 궁전'을 깨끗이 하여 언제나 성령의 좋은 뜻이 거하는 신성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하느님께서 주신 마음의 성전을 갖고 있다. 우리 몸이 육체적으로 각각 존재하듯이, 하느님께서 주신 영혼의 거처는 바로 우리의 양심이다. 우리는 이 양심을 언제나 신성하고 깨끗이 가꾸어야 한다. 이 양심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대화하며, 영혼의 양식이 보존된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가진 '자유'를 남용하여 우리 양심 속에 소, 양, 비둘기, 돈 바꾸어 내는 이익 등 이러한 것들만 차 있다면 예수님의 채찍이 한 번 더 필요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장사하는 사람들을 무작정 비판한 것은 아니다. 장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선량한 사람들도 많고, 또 그 장사를 통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고 적당한 이익과 함께 자신도 살고 또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용기와 삶의 의욕을 복돋아 주신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율법학자, 대사제들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대해선 가차없이 비판을 하셨다. 이런 것으로 보면, 삶의 방법을 위해 택한 직업에 대한 비판이 아니고, 양심의 그릇된 모습에 대해 비판하신 것이다.

 

4.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면은 쉽게 보지만 반면에 예수님의 정의와 분노와 심판의 면은 간과하기 쉽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면을 다 갖고 계실 뿐 아니라, 중용과 조화를 이루신다. 만일 예수께서 죄지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만 베푼다면, 이 세상에 정의가 세워지겠는가? 죽은 후에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믿음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를 사랑하신 것은 단지 그 지은 행위와 그 죄인을 옹호하기 위한 것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죄를 미워하셨지만 사람을 미워하신 것은 아니었다. 성서의 죄인들의 모습들 중에는 세상의 부조리와 악인의 횡포로 말미암아 희생된 모습이 많다. 그리고 죄인들이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회개할 때면 예수님은 용서를 베푸신다. 그러나 끝까지 하느님께서 주신 양심을 속이고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거절하는 자에게는 정의와 심판으로 응징하신다.

 

출애급기(20, 1-17)에 보면 양심의 올바른 길, 열 가지 계명이 계시되며 모든 우상 숭배를 거절하고 깨끗한 양심의 길을 가도록 촉구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그 열 가지 계명을 지킬 땐 그 후손 수천대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지만, 그분을 싫어하고 멀리한 자는 그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대에까지 갚는다고 하신다.

 

우리가 자기 양심을 속이고, 올바른 길을 가지 않을 때, 예수님이 거룩한 분노의 채찍을 준비하고 계심을 생각해 보자. 이제 우리 각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의 참된 자세를 찾아보자.

 

제21단상 :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한 14, 27).

 

부활 시기도 거의 다 끝나 가고 성령 강림 주일이 올 때쯤, 우리는 요한 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기에 앞서 제자들을 안심시키고 또 제자들의 신앙을 굳세게 해주시며 '평화'를 남겨 주시는 동시에,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듣게 된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요한 14, 27).

 

우리는 평화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평화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 없는 평온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기도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의로움의 상태이며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 9)라고 하신다. 여기서의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의 뜻이다.

 

우리는 천주교 신자가 되어 성당에 다니고 있는데, 그중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평화를 간직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돈 걱정, 사업 걱정 등 여러 가지 걱정 끝에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고 갈등을 느끼고 산다. 그런데 우리가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잘 지키는 일이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라고 하신다.

 

우리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따른다는 것은 그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께서 우리를 찾아와 우리와 함께 사실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얼마나 복된 상태가 될 것인가?

 

하느님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이 바로 은총의 생활이며 평화를 누리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명을 어길 때, 그 평화로운 상태는 깨지게 되고 갈등과 모순 속에서 불안해 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헤어지는 마당에 계명을 잘 지키도록 명하시고 그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평화를 누리도록 하셨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계명을 성실히 따름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누리도록 하자. 평화를 이룩하는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한 국가의 평화, 세계의 평화도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데 있다.

 

제22단상 : 말은 마음의 표현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루가 6, 45).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말은 참으로 신비스럽다. 만일 인간에게 말이 없다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사회는 제대로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말은 인간의 의사 표현의 수단이며, 자기 자신의 기분과 성향 그리고 자신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매개체이다. 하느님께서도 인간과 통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말을 사용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글로 표현된 것이 성서이며, 구약 성서의 글은 히브리 말로 전해 오다가 그리스 말로 번역되었고, 구약과 신약은 모두 라틴 말, 유럽의 여러 언어들 그리고 마침내 우리말로 전해져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알아듣게 되었다. 집회서에서는 "말은 사람의 마음속을 드러낸다."(27, 6)라고 하였으며, 예수께서는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기 마련이다."(루가 6, 45)라고 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충고이며 좋은 말씀이다. 여기서 잠시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을 생각해 보자. 나의 마음에는 과연 무엇이 가득 차 있는가? 나의 마음의 창고에 들어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말이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속을 드러낸다고 할 때, 우리는 말을 조심하고 좋은 말을 하는 습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말의 유형을 생각해 보자. 말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인간의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인간은 말로써 다른 사람의 기(氣)를 죽이기도 하므로, 억울한 말을 들을 때 인간은 기가 막힌다고 한다. 또 인간의 말은 사람의 기를 살린다. 기분이 좋다는 것은 좋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 사람을 죽이는 말

사람을 죽이는 말에는 저주, 악담, 욕설, 험담, 비방, 분노에 가득 찬 말, 거짓말, 중상 모략, 남을 깎아 내리거나 나쁘게 판단하는 말이 있다. 이런 종류의 말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또 그러한 말을 직접 들은 이들은 몸서리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때때로 이러한 말을 한다면 그 때의 우리 마음의 상태와 우리 모습을 생각해 보자. 그런데 이러한 말들을 우리 주위에서 쉽게 듣는 것이 또한 예사이다. 가까운 친구끼리도 욕설을 퍼붓거나 싸우고 심지어 가정에서도 조심하지 않으면 쉽사리 이러한 나쁜 말들이 나온다. 그리하여 사랑해야 할 부부간에도 언성이 높아지고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며, 부모의 입에서 사랑해야 할 자녀들에게 "죽일 놈, 염병할 놈" 등등의 말이 나온다. 그러할 때, 그 말을 듣는 자녀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거나 기가 죽어 올바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많은 경우 부모들의 욕설이 심한 집안에서 자녀들의 가출도 많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공동체나 단체에서 어떤 사람의 작은 결점이나 허물을 과장하여 나쁘게 악선전하거나 비방하여 선한 사람을 악하게도 만들고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일치를 깨뜨리는 경우도 많다. 이런 행동은 참으로 사악하고 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말로써 어떤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거나 죽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 신자들은 이러한 말들을 삼가야 한다. 어떤 물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분노하여 저주나 욕설, 악담을 퍼부을 때, 그 입에서 나오는 입김을 비닐 봉지에 담아 모은 후 그것을 추출하여 주사기로 쥐에게 주입하면, 그 쥐는 수초 만에 즉사한다고 한다. 이처럼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서 악한 마음을 품고 그것을 입으로 내뱉을 때, 죽음의 물질이 나온다는 것은 물리 화학적으로도 증명이 된다. 그래서 사람이 화낼 때는 독기가 서리거나 살기가 나타나고 사람을 죽이는 죽음의 물질을 품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독설을 들은 사람은 마음의 평온을 잃고 힘과 자신을 잃으며 화병을 앓거나 하여 건강을 해치고 심지어는 죽기까지 한다. 이렇게 될 때 화를 낸 사람이나 욕을 당한 사람 모두 자기 생명이 단축되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도 "일노 일로(一怒一老), 일소 일소(一笑一少)"라는 말이 있다. 즉 "한번 화내면 그만큼 늙어지고, 한번 웃으면 그만큼 젊어진다."는 것이다.

 

2. 사람을 살리는 말

두 번째로 인간의 말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들으면 앓고 있던 사람도 건강해지고, 실망하여 좌절한 사람도 용기를 내어 일어서고, 또 죽어 가는 사람도 힘을 얻어 소생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생명의 말씀들을 하셨다. 이러한 말들은 인간을 살리는 말로서 생명적 힘을 주는 말이다. 이러한 말에는 위로하는 말, 격려하는 말, 용기를 주는 말, 칭찬하는 말,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말, 사랑하는 말, 애정 어린 충고의 말 등이 있다. 인간은 이러한 말을 하거나 들을 때는 참으로 몸에서 생명의 물질인 엔도르핀이 나와 기뻐지고, 생기가 돋고, 자신감을 얻고, 생동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말을 해주는 사람과 같은 마음이 되고 일치하고픈 마음이 들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말을 많이 해야 하겠다. 이왕이면 같은 말이라도 "사람을 살리는 말"을 많이 하자. 좋은 말, 기쁨을 주는 말, 남을 살리는 말을 하는 데 인색하지 말자. 바로 이러한 말이 복음(福音)이다. 우리는 매 미사 끝에 "복음을 전합시다." 하고 파견을 받는데,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인간을 살리고 기쁘게 하는 말을 전하는 것이다.

 

"말은 마음의 표현"이라고 했듯이 우리가 이런 좋은 말을 하기 위해선 우리 마음이 밝아야 하고, 우리 마음이 기뻐야 하며, 우리 마음에 애정과 사랑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도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루가 6, 4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신자들은 좋은 말을 마음속에 가득 담아서, 평화의 사도이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처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슬픔이 있는 곳에 위로를, 그리고 용기 잃고 쓰러진 자에게 희망의 말을 전하여, 사람들에게 기쁨과 친교와 사랑을 주는 평화의 사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3.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

 

마지막으로 인간의 말에는 고차원적인 숭고한 말이 있다. 이것은 영(靈)의 말, 곧 인간의 말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통교하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이미 인간에게 말씀을 건네 오셨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성서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은 응답을 기다리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두 가지 방법으로 전해 주신다. 하나는 당신이 만드신 창조물들의 속성과 질서를 통해서이며, 다른 하나는 계시를 통해서이다. 인간은 대자연 안에서 그리고 만물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적 뜻을 발견했을 때, 하느님의 오묘한 경륜에 탄복하고 마침내 찬미와 감사의 말을 하게 된다. 하느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대한 응답이 바로 기도이며 인간은 이 기도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느님을 감히 대화의 파트너로서 모시고, 하느님의 은혜와 섭리에 대해 감사와 찬미와 흠숭으로써 말씀드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도를 통한 영적인 말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온다."(루가 6, 45)라는 예수님의 교훈적인 말씀을 통해 "말이 자기 인격의 표현"임을 깨닫자.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인간에게 기쁨을 주고 인간을 살리는 말'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미하고 흠숭하는 말을 하여 인간 공동체와 하느님께 유익하고 구원적인 존재가 되도록 하자.

 

제23단상 : 메시아관의 올바른 정립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1. 안드레아의 메시아 발견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우리는 이 짤막한 한마디의 말 속에서 인류의 소망이 극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안드레아다.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으로서 그의 형에 비하면 신약 성서를 통해 그다지 많이 등장하는 편은 아니다.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당시 요르단 강가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요한의 제자였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의 날이 오기를 고대했다. 그래서 요한이 나타났을 때 당시 사람들은 그가 혹시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그에게 물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요한 1, 20), 엘리야도 아니며, 예언자도 아니며 다만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요한 1, 23).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이분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했다(요한 1, 29). 이 말을 듣고 그의 제자였던 안드레아와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 처소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자기 형 베드로에게 전해 주었고 또한 베드로를 예수께로 인도하여 나중엔 둘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안드레아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신지를 확신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서에도 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마도 예수님과 하루를 지내면서 예수님의 인품과 가르침에 큰 감동을 받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안드레아 자신이 올바른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 뵙고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하고 확신에 넘친 말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유다 민족의 메시아 개념

우리도 마찬가지로 메시아에 대해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약 성서에서 '메시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여 그 사명을 완수하도록 기름을 부어 성별한 왕이나 예언자 혹은 사제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메시아라는 말은 왕의 개념과 구세주라는 말로서 그 의미가 부각되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 메시아를 통해서 자기 구원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은 그 주변에 있는 강대국들에 의해 여러 번 침입을 당하였다. 그리고 끝내는 나라까지 망하여 왕이나 귀족들까지도 노예로 끌려가는 처참한 경험을 했다. 그래서 자기 민족을 구해 줄 메시아를 고대해 왔다. 기원전 200년경부터는 묵시 문학이라는 작품의 형태로 메시아를 더욱 고대하며 빨리 오시기를 표현하고 희망해 왔다.

 

3. 예수님 시대의 메시아 대망 사상

예수님 시대엔 이 사상이 더욱 무르익었다. 당시 유다 민족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많은 고통과 서러움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에 저항하여 독립 운동을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오신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있었다. 즉 혁명 당원 시몬이 있었고, 이스카리옷 유다도 이 부류에 속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독립 운동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 메시아를 통해 유다 민족을 로마의 속박에서 구원해 주시리라고 희망했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아에 대해 걸었던 희망은 무너졌다. 즉 정작 메시아로서 오신 예수님은 당시 로마의 압박 속에서 신음하던 유다 민족에게 세속적인 승리와 번영을 가져오신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자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르던 그들도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었다. 즉 성지 주일의 전례에도 나오듯이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찬미받으소서."(마르 11, 10) 하고 외쳤던 그들이 나중에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 23)라고 외쳤던 것이다. 바로 이것은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에 저질러진 과오였다.

 

4. 세속적 메시아와 구원적 메시아

예수님은 세속적인 승리가 아니라 구원의 메시아로 오셨다. 즉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해 깨뜨려졌던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구원의 메시아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죄 대신에 은총을, 죽음 대신에 생명을, 율법 대신에 자유를 주러 오신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 예수님은 수난당하는 메시아로서(야훼의 종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수난당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리고 죽으신 지 사흘 만에 하느님의 권능으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도 부활과 생명을 약속하신 구원과 영광의 메시아이다. 또한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날에 우리의 지상 생활을 사랑의 척도로 심판하러 오실 재림의 메시아이기도 하다.

 

우리의 메시아는 이러한 분이시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그릇된 메시아관을 갖고서 오직 현세적이며 세속적인 메시아만을 기대했다. 사실 지금의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이야말로 구세주요 메시아임을 믿고 확신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진정 자기 시대에 오실지 혹은 누구인지도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역사상 거짓 메시아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때마다 사람들에게 소위 기적도 보여 주고 배고픈 백성에게 빵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또 자기 민족을 세계에서 제일 가는 일등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백성을 감쪽같이 현혹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약속은 통계 숫자의 놀음이지 진정 백성들을 복되고 자유롭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메시아에게 원하는 것도 올바른 것이 아니었고 모두가 헛된 것이며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5. 메시아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그러면 여기서 우리도 진정 메시아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예수께서 우리에게도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마르 10, 36)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아마 우리의 대답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몸이 아픈 환자는 건강을 원할 것이다. 또 대학 입시생은 원하는 대학에 무난하게 들어가기를 바랄 것이다. 또 정치가라면 한번 대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원할 것이다. 그 외에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비추어 자신의 소망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도 어느 모로 가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곧 지나가 버릴 일시적인 소망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중요한 것은 영원하고 변치 않을 것을 바라고 소망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메시아이며 우리의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천지가 변하여도 예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메시아이다.

 

메시아라는 말은 다른 말로 그리스도,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들, 임마누엘, 구세주, 야훼의 종, 인자 등의 여러 용어들과 함께 쓰인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예수께만 적용하는 칭호들이다. 바로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눈앞의 이익만을 약속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진정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과 은총을 주시고자 하는 구원의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분께 진정 올바른 것을 소망해야 한다.

 

예수님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마르 10, 36) 하고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우리는 이 질문에 올바로 대답해야 한다. 즉 우리의 세속적인 욕망이나 충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고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에 구원과 생명을 바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 사이엔 오직 상대방만이 중요하다. 세상의 물건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상대방의 인격을 사랑하는 것이며, 상대방만이 그 희망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뵙고서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기쁨과 확신에 찬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안드레아 자신이 올바른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가끔 영세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영세하고 성당에 나가도 별로 이익되는 것도 없고, 오히려 가끔 불행한 일도 당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것은 잘못된 메시아관이다. 우리가 성당에 나가고 주님을 믿는 것이 고작 물질적인 생활의 윤택함만을 바라기 때문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보다 더 소중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것이 나의 행복이며 기쁨이 되어야지 물질적인 이익을 자신의 행복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 중이나 묵상 중에 혹은 영성체 때에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 뵙고 "내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하고 확신에 찬 말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 새 생명과 구원과 은총을 주신 예수님! 이 예수님이야말로 나의 메시아이시며 구세주이시다. 그러기 위해선 이 메시아와 함께 사는 생활이 얼마나 즐겁고 복된 삶인지 드러내야 한다. 그리하여 메시아를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와서 보시오."(요한 1, 39) 하며 나의 즐겁고 기쁜 생활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찾은 진정한 구원의 메시아인 예수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이웃을 초청해야 한다.

 

제24단상 : 모든 이의 종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지난 1994년 9월 15일 밤 TV 연설을 통해 아이티 군부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최후 통첩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아이티 군사 정부는 지난 1991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국민에게 독재 정치를 하고 있었다. 미국이 남의 나라가 독재 정치를 하든 민주 정치를 하든 왜 이렇게 내정 간섭을 하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미국은 현대 세계의 최강대국으로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그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뜻에서 세계의 경찰 국가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 뜻에서 미국은 지난 몇 년 전에도 파나마의 군사 정부를 축출하기 위해 침공을 했고, 소말리아 등 군사 독재자들의 분쟁이 있는 곳에서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아이티 침공 계획은 역사적으로 군사 독재 정치가 반복되던 아이티에 민주 정부를 다시 복귀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1990년 12월 아이티 최초의 민선 대통령에 가톨릭 신부 출신의 '아리스티드'가 당선되어 현직 신부가 일국의 대통령이 되어 가톨릭 정신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민선 정권이 곧 이어 아이티 특유의 연속되는 군부 쿠데타로 인해 라울 세드라스라는 장군에 의해 그 권좌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미국은 아이티 침공은 이러한 군부 독재 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민의에 의해 당선된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정권 복귀를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내세웠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정치와 권력 투쟁엔 명분과 도덕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는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마르 9, 34) 하는 문제로 자리다툼을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마치 현실적이고 또 권력을 갖게 될 메시아로 생각한 나머지 예수님이 왕이 될 때 모두 한 자리씩 차지 할 것이고 그중에서 누가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냐 하고 자리다툼을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실적인 권력을 쥐고 다스리는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신 자신을 낮춰서 남을 섬기는 봉사적인 메시아로 오신 것이다. 즉 예수님의 길은 겸손과 봉사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영광에로 가는 길인데, 제자들은 권력 투쟁을 통해 제일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으로 예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날 우리 세계에는 권력 투쟁이라든가 또는 제일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자리다툼이 많이 행해지고 있다. 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우고 투쟁하고 남을 죽이고 억누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북한의 주석이었던 김일성은 일인 독재 권좌에 앉아 50여 년을 통치한 세계 유일의 독재 정치 기록 보유자로서 기네스북에 수록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 그는 자기 정권에 도전하는 정적들을 끊임없이 숙청하거나 제거하는 일을 해 왔다.

 

우리 인간 사회 안에도 어느 단체건 간에 가장 높은 자리는 하나밖에 없다. 조그마한 친목 단체에도 회장의 자리는 하나밖에 없고, 학교에도 교장은 한 명이고, 또 기업체의 회장 자리도 하나뿐이다. 그리고 한 국가의 가장 높은 자리도 하나뿐이다.

 

이처럼 가장 높은 자리는 하나뿐인데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은 많기 때문에 늘 투쟁이 있게 되고, 또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뺏기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년)는 인간의 본성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인간은 왜 이렇게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일까!

 

그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면, 명예와 금전과 권력이 보장되기 때문인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장 높은 자리는 또한 가장 불안하고 초조하며 외로운 자리일 수도 있다. 신변에 대한 불안과 또 그 자리를 빼앗기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나 로마 제국의 황제들 역사 안에서 보듯이 왕이나 황제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가족들마저도 처형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중국의 유일 무이한 여황제라고 하는 당나라의 '측천 무후'는 14세 때에 당나라 제2대 황제 태종의 비(후궁)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 선왕의 후궁이었던 자기를 좋아하게 되자 고종의 황후와 그 측근을 쫓아내고 황후가 되었다. 나중엔 병약한 고종을 대신해 스스로 정치를 하게 되고 자신의 아들인 중종과 예종 두 사람을 황제로 앉혔다가 나중엔 그들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에 반대했던 정적들을 숙청하면서 그중 장남(이홍)과 차남(이현)까지도 죽게 했다.

 

또 높은 사람들은 신변의 위협을 많이 당한다. 그래서 그들이 행차할 땐 많은 경호원들이 에워싸고 다닌다. 몇 년 전에 레바논 대통령 당선자가 폭발물에 의해 죽었고, 얼마 전엔 미국 대통령의 관저 백악관에도 새벽에 비행기가 떨어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교황님도 권력의 자리가 아니라 평화의 사도로서의 자리에 앉아 계시지만 저격을 당하셨다. 또 그 밖에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나, 암살당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분명 그 자리는 불안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자리를 앉지 않으려고 한다면 세상의 질서는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앉아 질서를 유지하고 우리 인간들의 유익을 위해 일해 주어야 할 사람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았다는 것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그가 그 높은 자리에 앉아서 어떻게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만일 사람이 어떤 단체의 장이 되어서도 그 단체를 위해 일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인 야심만을 위해 일한다면 그 자리는 언젠가는 빼앗길 것이고 또 불안할 것이다.

 

그러나 그 높은 자리에 앉더라도 그 자리가 요구하는 봉사의 정신으로 일한다면 바로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이 된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너희의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 13-1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도록 하자. 바로 예수님이 걸으신 길은 겸손과 봉사의 길이었지만, 그 길이 인간 사회를 유익하고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예수께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 28)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우리도 그 길을 따르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

 

제25단상 :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고린 10, 31).

 

1. 그리스도만이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 말을 한 사도 바오로는 우리로 하여금 매사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활동하도록 권고한다. 사도 바오로는 자기의 전 생애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분이다. 그는 "그리스도만이 내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 21)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했으며, 자기의 노동을 통해서 전교비를 벌었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하여 마침내 이방인의 사도라고까지 불리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에 가서도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고린토에는 세계에서 가장 최초로 계획되고(BC 6세기) 건설되기 시작한 고린토 운하가 있다. 이 운하는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를 이어 주는 상업적이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는 노예들을 수천 명이나 투입하여 운하 건설을 시작했다가 완성을 보지 못했고, 그 후 일곱 명의 황제도 힘을 기울였으나 완성하는 못했다. 그 후 19세기 말에(1883년) 비로소 완공되었다. 이처럼 고린토는 당시 문화가 발달된 도시였다. 또한 고린토 사람들은 다른 교회보다 믿음도 강하고 열심해서 빨리 발전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고린토 교회 내에 바오로파, 아폴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라는 파벌이 생기고 서로 다투고 논쟁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의 분열과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린토 서간을 썼다. 바오로는 이 서간에서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 주고, 그들을 하느님의 한 자녀로서 일치시키려는 권고를 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활동하는 것도 결국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인생관을 갖고서 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인간의 창조 목적: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사실 인간은 그 생존을 위해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먹고 마셔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먹고 마시는 행위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의 발전과 완성을 도모한다.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인간의 완성이란 새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인간은 자녀로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릴 때, 그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렇게 될 때 인간측에서는 구원이 되며, 하느님께는 영광이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인간의 유익을 위해 주셨다. 따라서 인간은 세상 사물을 이용하고 개발할 의무와 권리를 갖고 있다. 인간은 지성과 자유를 가지고 인간 생활을 유익하고 편리하게 세상 사물을 개발하고 이용한다. 인간의 이러한 창조 활동은 다 인간의 근본 목적에 합치하는 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 사물을 이용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인간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3. 우주 만물은 창조 질서와 조화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한편 우주 만물도 그 자체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창조주의 뜻을 따라 질서와 조화를 이룰 때에 나타난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많은 별들, 그 움직임도 창조주의 뜻을 따라 질서 있게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제 궤도를 이탈했을 때에는 한낱 별똥별로서 떨어지게 된다. 산천 초목도 그 자체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공중에 사는 새들, 바다의 물고기들, 들짐승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이처럼 하느님은 모든 창조물로부터 영광과 찬미를 받고 계신다.

 

4. 성서에 묘사된 하느님의 영광

성서에서 묘사되는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지극히 영광스러운 분으로 나타난다. 반면 인간은 죄인이기에 거룩하신 하느님을 보는 순간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은 황홀하고 신비스럽게 나타나며 인간은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인간을 무한히 초월하는 위엄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사야서에서는 하느님을 모시는 천사들이 밤낮으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6, 3) 하고 외친다. 또 시편에서는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땅은 그 손수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9, 1) 하고 노래한다. 또한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무수한 천사들도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했다. 즉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 14). 그리고 우리도 한편 영광송을 통해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기린다.

 

5. 인간의 자유: 하느님 흠숭과 우상 숭배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들은 그가 갖고 있는 자유 때문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도 하고 혹은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인간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보다는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든지 혹은 그보다 못한 피조물에게 영광을 돌리기도 한다. 해, 달, 별, 바위 등 그 자체에 무엇이 있는 것처럼 찬미하거나 숭배한다. 혹은 자기가 만들어 낸 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만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생겨난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 보이는 것을 찬미하고 그 앞에 엎드려 숭배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행위는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행위를 가장 싫어하시고 질투까지 하신다. 십계명 중에서도 가장 첫째 가는 계명이 바로 우상 숭배를 금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모시지 말라."(출애 20, 3; 신명 5, 7)고 하셨다.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만드신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 인간들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마땅히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어떤 일을 좀 잘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찾고 제 자랑하기 일쑤이다.

 

6.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정말 자랑할 만한 분이 제 자랑하지 않고 자신을 극도로 낮추고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일하신 분이 계시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당신 자신을 낮추어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이 드러나도록 일하신 분이다(필립 2, 6-11).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성서에서도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수천 마리의 소와 양을 가지고 제사를 올리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다(아모 5, 21-25 참조). 그분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또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도 항상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 14, 36) 하고 기도하셨다.

 

하느님의 뜻은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대로, 하느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다. 그러기에 인간은 모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한 자녀로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러한 목적에 부합할 때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차지한다든지 혹은 하느님 외의 것에 영광을 돌린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가 된다. 하느님은 우상 숭배를 가장 싫어하신다.

 

구약을 통해 보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느냐, 혹은 우상에게 영광을 돌리느냐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 신이나 혹은 금송아지와 같은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시고 그래도 말을 안 들을 때에는 전쟁이나, 기근, 전염병을 내리셨다. 이처럼 하느님은 인간들이 당신께만 영광을 돌리기를 요구하신다.

 

7. 현대의 우상인 돈(마몬)

그러면 현대의 우상은 무엇이겠는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데 있어서 방해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도 많이 있지만 현대에는 돈(마몬)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수께서도 "하느님이냐 마몬이냐?"(마태 6, 24) 하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다. 돈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 너무도 많다. 돈 몇 푼 벌기 위해 사람을 속이거나 죽이기까지 한다. 돈 때문에 의(義)가 상하고 오해하고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돈이란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돈이 인간을 지배한다. 현대인은 돈을 섬기고 있다. 요즘같이 물가고에 시달리는 우리로서는 돈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사람을 돈의 가치로 평가하고, 또 돈으로써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은 인간의 필요와 유익을 위해 쓰여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제 돈을 섬기는 데서 벗어나 돈을 지배해야 한다. 돈이 있는 사람은 그 돈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다른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도록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도 그것을 통해서 먹고 마시며 입고 살 집을 마련하고, 또 하느님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소질을 개발하고 완성을 추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돈의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오히려 돈을 지배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자.

 

제26단상 : 모세의 구리뱀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 14-15).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그들은 하느님을 깊게 체험하게 된다. 그들은 야훼 하느님의 유일성과 창조주, 그리고 모든 이의 아버지이며 특히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는 특별한 선택과 은총을 받은 백성이었지만, 40년 동안의 사막 생활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확인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특히 40이라는 숫자가 성서에서 '시련의 기간'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0년의 사막 체험, 그리고 예수님이 사막에서 단식 중 마귀의 유혹을 체험한 40일 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도 역시 40일 동안의 마음의 단련을 통해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이라는 이 구절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가? 사막은 생물이 살지 않는 것처럼 인식되지만, '사막은 살아 있다'고 하는 영화도 있듯이 특히 땅속에는 온갖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사막에는 뱀이 많다고 한다. 또 뱀은 생식력이 강해서 그 숫자가 빨리 늘어난다. 또 이 뱀은 가나안 지방에서 '생식과 번식의 상징적 동물'로서 섬겨 오던 바알 신이라는 신적인 동물이었다.

 

사막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지낼 때 땅속에 우글거리던 뱀에 물려 죽는 일이 많이 있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적인 현실 생활에서 체험되는 사건들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생각했고, 그 의미를 찾으려 한 것 같다. 사실 사막에서의 생활은 괴롭고, 위험하고, 먹을 것도 없는 고통의 생활이다. 민수기(21, 4-9)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보면, 그 당시 가나안 지방은 여러 왕국으로 나뉘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직 '나라'도 형성하지 못하고 사막을 헤매며 유랑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가나안 주민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영토로 다가오고 있다는 어떤 위기 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네겝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채고, 이스라엘을 먼저 쳐서 몇 명을 포로로 잡아간 일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이 생기자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께 "이 백성을 우리 수중에 넘겨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이 도시들을 전멸시키겠습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야훼께서는 그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성읍을 전멸시켰다. 바로 이러한 사건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은 자기 주변의 다른 민족들에게 항상 생존의 위협을 겪어야 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특히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깊어졌다. 이스라엘은 사막의 한 곳에 안주하는 생활이 아니었고, 항상 어떤 곳, 즉 야훼께서 마련해 주신 약속의 땅을 찾을 때까지 돌아다니고 방랑해야 하는 삶이었다.

 

이러한 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민수기에서는 "길을 가는 동안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하느님과 모세께 대들었다. '어쩌자고 우리를 에집트에서 데려 내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이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21, 5)라고 말한다. 그러자 성서는 야훼께서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많이 물어 죽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사건은 어떻게 해결됐느냐 하면, 백성들이 마침내 모세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빌고 모세가 백성을 위해 야훼께 기도드리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고, 뱀에게 물린 사람으로 하여금 쳐다보게 하면 살리라고 하시자, 그대로 하니 뱀에게 물렸어도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민수 21, 6-9).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전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뱀'이란 사막의 동물, 생식과 번식의 동물로서 상징된 가나안 사람들의 바알 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 바알 신을 섬긴다는 것은 그 당시 매일 끊임없이 장소를 이동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 유혹이었다. 그것은 이제 한 곳에 자리 잡고 정착하여 풍요와 번식을 구가하고 싶었던 그들의 삶의 희망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사건을 통해 체험한 것은 구원과 풍요는 인간의 힘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충실과 신뢰 속에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의 신학 사상 속에서 전해지고 있다고 보는데,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구원은 아래로부터 이루어짐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느님의 은총임을 나타낸다. 구원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믿어야 하는 것이며, 믿지 않는 그 자체가 이미 죄인으로 판결되는 것이다.

 

모세의 구리뱀을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인들은 사막에서 지낼 때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충실로써 그 생명을 찾았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 충실함으로써 우리의 구원된 삶을 향해 가는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제27단상 : 밀과 가라지

 

"제자들이 와서 '그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는 세상이 끝나는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아서 묶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끝 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마태 13, 36-40).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말씀하신 일이 있다(마태 13, 24-43).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 이것은 곧 선과 악의 문제를 비유로써 말해 준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러한 상황이 만연되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점을 비유로 풍자한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서 보면 어쩌면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공존하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끝내는 하느님의 심판의 손길이 행사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선(善)과 악(惡)'이라는 주제는 인류 역사의 근본적인 주제 중의 하나이다. 어떤 종교적 가르침이나 문학, 영화 등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착한 사람은 세상의 악 때문에 때때로 고통을 받고 수난을 당하지만, 끝내는 승리한다. 그리고 악한 사람은 선한 사람을 괴롭히며, 때때로 지상의 물질적 부와 권세를 누리기도 하지만, 그들의 종말은 항상 비참하게 끝난다.

 

얼마 전 '목민 심서'(牧民心書, 황인경 저)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된 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다산 정약용을 끝까지 모함하던 목만중, 이기경, 홍낙안이 있었다. 착하고 어진 정약용은 그들의 끊임없는 악의에 찬 모함 때문에 정조 대왕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약용은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수많은 저술 활동을 하여 오히려 우리 나라에 많은 학문적 기여를 하였다. 착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악의 조건 속에서도 선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악을 나쁜 것으로 여길 줄 안다. 그런데도 인간은 왜 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욕심을 부리고 마음을 잘못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이라는 개념 속에는 인간이 바라는 좋은 요소가 들어있고 악이라는 개념 속에는 '좋은 것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신학자는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질서가 파괴될 때 악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여러 요소들, 말씀의 씨앗, 밭, 밀, 가라지, 주인, 일꾼들이 나온다. 말씀의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를 착하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진리라고 볼 수 있다. 하늘 나라와 연결되는 착함이 그 안에 있다. 그리고 원수의 훼방으로 밀밭에 가라지가 뿌려진다. 이 원수가 어떻게 등장했을까?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 능력을 잘못 사용하는 데에서 발생한 것이다. 자유의 남용이다.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유의 선물을, 인간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때는 선이 되지만, 과도한 욕심을 부리고 사리 사욕과 질서와 조화를 깨뜨릴 때는 악이 된다. 그러므로 악에 대한 책임은 악이라는 어떤 세력이 아니라 바로 악을 저지른 인간에게 있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은 선천적으로 따로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황에 따라 그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달려 있다. 인간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 사람들의 공동의 선을 위해 일할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된다. 그러나 마음을 잘못 써서 세상의 조화와 질서를 파괴할 때, 그것은 세상을 슬프게 만들고 그만큼 어지러운 세상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자기 마음을 올바로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악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을 잘못 써서 나오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악의 분위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결정, 결심, 동의는 바로 인간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인간은 그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모든 악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나온다고 하셨다(마르 7, 23).

 

그리스도인은 좋은 마음을 형성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마음에서 선을 꽃피울 수도 있고, 악을 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며, 우리는 항상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여 겸허하고 빈 마음으로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자.

 

제28단상 : 변화가 있는 삶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 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께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7, 1-4).

 

구약의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해방과 새 삶을 향한 출발에 관한 이야기로서 가장 전형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르(Ur)라는 곳에서 살았었다. 얼마 전 고고학자들이 이곳을 발굴했는데 그곳에는 다른 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에는 가뭄 때에 어린이들을 산 채로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지시하시는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길을 떠나 새로운 생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생활로 변화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예수께서도 복음 전파 생활을 잠시 벗어나 세 제자를 데리고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타볼 산에 오르신 적이 있었다(마태 17, 1-9). 이 산 위에서 예수님은 원래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눈부시게 변화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셨다.

 

여기에 나타난 인물들을 살펴본다면, 모세는 자기 백성을 에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이끌어 내어 새 생활로 출발시킨 분이다. 또 엘리야는 위대한 예언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들로부터 이끌어 내어 하느님 야훼만을 섬기는 새 생활로 시작하게 한 분이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께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감동한 제자들은 그 산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신다. 이제 제자들은 산상에서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고 새롭게 변화되어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서의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즉 하느님 말씀을 따르게 되는 것은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끊임없는 변화이다. 그러나 그 변화에는 하느님의 축복이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기가 정들고 친척들이 있던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출발했다. 그가 그곳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은 변화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상 숭배에 빠져 참된 하느님을 섬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그곳을 떠났을 때 그는 하느님의 무한한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명에 순명하여 에집트의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느님을 충실히 따랐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축복받은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었다. 만일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노예살이를 계속했을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했기에 약속된 땅, 축복받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명하면 자신의 삶에 변화가 생기고 그 변화를 잘 적응하고 견디어 내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게으르고 나태했던 생활에서 부지런한 생활로, 자기 중심의 생활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로, 또 하느님을 잊고 돈과 쾌락과 우상을 따르던 생활에서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길을 따르는 생활로 변화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의 생활은 어떠한가? 변화가 필요 없을 정도로 하느님 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변화가 필요하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심리적으로 변화에 대하여 불안감을 갖게 마련이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즉 따뜻하고 안온하며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지내던 부드러운 곳에서 갑자기 세상에 나온다는 것은 큰 변화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기는 변화를 가져야만 새 생명으로 탄생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도 항상 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퇴보하게 된다. 고여 있는 물은 썩게 마련이며 항상 흐르는 물은 깨끗하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신뢰 속에서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의 변화는 축복받은 생활이다. 하느님 중심의 생활은 현재 자신의 처지를 변화 있게 한다. 그것은 축복받는 생활로의 변화이다. 하느님의 축복 속에 양심, 마음의 평화를 간직한 생활을 하자.

 

제29단상 : 복음 전파의 정신

 

"그 뒤에 예수께서는 여러 촌락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다가 열 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그리고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며 신발은 신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분부하셨다"(마르 6, 7-9).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하시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셨다. 그리고 이 구원의 복음을 보다 널리 계속적으로 전파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주셨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신비를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고 또 예수님 곁에서 친히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이렇게 예수님 곁에서 교육받은 제자들은 이제 세상으로 나가서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파견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청빈의 정신이었다. 즉 먹을 것이나 돈이나 자루를 가지고 다니지 말고 오직 지팡이와 신발만을 신고 다니도록 한 것이다(마르 6, 7-13). 복음을 전파하는 데 불필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모두 버리고 오직 간편한 차림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죄와 병고로부터 구원하는 데에만 마음을 쓰라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풍습에는 예언자나 나그네를 잘 돌보아 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언자가 그 마을에 오면 가장 유력한 신자 집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했다. 이것은 예언자가 의식주에 신경을 쓰지 않고 복음 전파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였다. 또 그 예언자로 인해 다른 가난한 사람의 생계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그중에는 거짓 예언자도 있어서 예언자 노릇을 하면서 밥을 빌어먹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사람도 있었다. 바로 한때 아모스 예언자가 그러한 거짓 예언자로 오해받은 적이 있었다(아모 7, 12). 어느 시대에나 참된 예언자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해 온 것은 사실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분부로 그 말씀을 전파하고 사람들의 죄를 뉘우치게 하여 그 잘못을 일깨워 주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 말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도 않고 자기의 잘못을 은폐시킨다거나 혹은 참된 예언자를 거짓 예언자라고 곡해시킨다. 그래서 참된 예언자가 때때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도 그랬고 사도들도 그랬고 예언직을 수행하는 이들도 그 같은 운명을 당해 왔다. 예수님은 유다인들로부터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또 제자들도 복음을 전파하다가 결국은 순교하였다. 역사상으로 볼 때에도 복음을 전파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당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시대마다 그 시대에 알맞은 구원 사업을 위해 계속적으로 사람을 부르시고 이 일을 맡기신다.

 

아모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본시 예언자가 아니다. 예언자 무리에 어울린 적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다. 나는 양 떼를 몰고 다니다가 야훼께 잡힌 사람이다"(아모 7, 14-15). 즉 아모스 예언자는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하느님의 분부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본래는 갈릴래아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 사명을 맡기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이 일을 하기 위해 특수하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도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세례를 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다 하느님의 이러한 계획에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 일에 협력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이용하여 복음 전파와 구원 사업에 힘써야 할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할 때 그 건강을 이용하여 복음 전파와 구원 사업에 협조해야 한다. 건강을 잃으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많이 있을 때 그 돈을 유용하게 사용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돈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머리가 좋은 사람은 그 좋은 머리를 이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잘 전파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여하튼 각자가 갖고 있는 모든 것…, 지위, 학력, 건강, 명예, 권력 등 이러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에 있어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 요구되는 청빈의 정신이라고 보겠다. 즉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한다.

 

재산이나 명예나 지위는 영구한 것이 아니다. 오늘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는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우리는 신문 지상이나 매스컴을 통해서 이러한 일을 체험한다. 과거에 높은 지위와 명예를 누리던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갖고 있을 때 좋은 일을 안하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말로가 얼마나 비참하게 끝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제물과 지위와 명예를 이용하여 좋은 일을 하고 하느님 사업에 헌신한 사람들은 비록 그 높은 지위에서 물러났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사람의 공을 기리고 그 덕을 칭송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건강할 때, 또 남을 도울 수 있는 재산을 갖고 있을 때, 그리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지위와 명예를 누리고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활용하여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어야 한다.

 

제30단상 : 부족한 이들이 받는 하느님의 소명

 

"이것을 본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다. 그의 동료들과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놀랐는데 그들은 다 시몬의 동업자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루가 5, 8-11).

 

성서 전체를 통해 볼 때 구약의 예언자 이사야와 신약의 사도들인 베드로와 바오로 이 세 분은 하느님의 일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큰 일을 한 분들이다. 그러나 그분들은 그들 자신이 인간적으로 잘나고 훌륭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이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또 죄인이기에 더욱더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분들이다.

 

먼저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뵙고 나서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를 뵙게 되다니…."(이사 6, 5) 하면서 자기의 죄와 결점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천사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어 주자 "그의 죄악이 사라지게 되었다"(이사 6, 6-7). 즉 이사야는 하느님을 뵙기 전에는 입으로써 여러 가지 험담을 말하고 욕설하고 죄악을 범하는 사람이었지만 자기 죄를 하느님께 솔직히 고백하자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의 모든 죄악은 사라졌다.

 

둘째로 사도 바오로의 경우에도 역시 자기 자신이 보잘것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숨김 없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팔삭둥이 같은 사람이며, 사도들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교회까지 박해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1고린 15, 8-9). 이렇게 자신의 단점과 부족한 면을 겸손되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기에 자기는 더욱더 하느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필요하며, 하느님 없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다.

 

또 사도 베드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였다. 그는 자기의 전문 분야인 고기잡이만큼은 자신 있게 할 줄 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게 된다"(루가 5, 5). 이 때 예수께서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루가 5, 4)고 말씀하시자 그대로 따라 그물을 던지니, 과연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 들어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다. 이것을 본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루가 5, 8)라고 고백한다. 즉 자신은 부족한 사람이요, 죄인임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더욱 따르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이렇게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을 겸손되이 낮추고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부족한 인간이기에 더욱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으며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겸손한 사람을 택하시어 당신의 위대한 일을 맡기신다. 그들의 약하고 부족한 점을 은총으로 채워 주시고 당신만을 바라고 믿고 살도록 해주신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우리도 역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재주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 활동도 하지 않고 또 어떤 일에도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누구에게나 어떤 사명을 주어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부족하고 또 단점을 지니고 있는 연약한 인간임에 틀림이 없지만 바로 그 부족한 면과 단점을 지니고 있기에 그만큼 하느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고 인간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 살 만큼 완벽한 인간은 없다. 인간 사회는 너와 내가 공존하는 세상이며,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인간 사회에서 각자의 힘을 합쳐야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수년 전 돈암동 본당에서 사목 생활을 하였을 때 "작은 둥지"라고 하는 무의탁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모여 사는 집을 알게 된 적이 있다. 이 집에는 정말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들을 위해 그 집에서 함께 살며 봉사하는 자매들도 여러 명 있었다. 이 자매들은 자기 자신을 바쳐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불쌍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말씀에 입각하여 봉사하고 있었다. 시립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불가능하다고 내쫓긴 사람, 서울 역에 쓰러져 있는 사람, 불구자 등 이런 사람들을 발견하여 "작은 둥지"로 모셔 온다. 그리고 그들의 더러운 몸을 목욕시켜 주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따뜻한 방에서 자게 해준다.

 

당시 돈암동 본당 내에 산꼭대기 움막에서 지내던 조 마오로라는 할머니도 그 자매들의 도움으로 그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가기 싫어하다가 그곳에서 며칠 지내고 나서는 "이제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져 이 "작은 둥지"를 후원하는 교우들이 생기고 매달 첫 목요일에는 그 집에서 후원회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봉사하고 있는 자매들의 말을 들어 보면, 처음에는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 나갈 수 있을까 하고 망설였는데, 하느님만을 믿고 복음의 정신으로 일하게 되니까 각처에서 은인들이 나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즉 하느님께서 매번 어려울 때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와 주고 계시다는 체험담을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도움만 받을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일을 해서 자립해 보려고 힘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그 할머니들이 도라지를 판매하게 된 것이다. 즉 시장에서 도라지를 사다가 잘 다듬어서 판매한 것이다. 비록 여기서 나오는 이익금은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이 일이 그 할머니들에게는 삶의 의욕을 되찾아 주고 있다.

 

사람은 무엇인가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그 일은 이 일을 통해서 서로 모르던 점을 극복하고 서로 돕는 아름다운 작은 둥지를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도 하느님께서 이 집을 어떻게 도와 주실지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잘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자신이 부족하고 미약하다는 점만 깨달을 것이 아니라 그 미약한 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큰일을 맡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작은 둥지에서 일하고 있는 자매들 역시 미약한 여성들이지만 그 미약한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도와 주고, 은인들이 나서는 것이다. 그 작은 둥지를 방문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영성에 감탄하여 영적인 양식을 많이 받아 온다고 한다.

 

끝으로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와 신약의 사도 베드로, 바오로 역시 부족하고 결점 많은 인간이었지만 하느님께서 그 겸손과 열성을 보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생각하자. 그리고 우리 각자도 자기의 처지에서 주님을 위해 적합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제31단상 : 부활: 새 생명의 원리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타는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요한 11, 25-27).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드리기 위해 부활절에 함께 모여 기뻐하며 기도한다.

 

이천 년 전,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 사람들의 몰이해로 감히 '하느님의 아들'인 체한다는 죄목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분은 죽으신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진정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셨다.

 

바로 부활절은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날이며, 우리는 그 날을 기념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1. 예수 부활의 의미

주님의 부활은, 만물이 새 생명으로 약동하는 새봄같이 우리의 굳은 마음을 녹여 주고, 새 마음의 싹을 트게 하여 준다.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은 사실 믿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살고 있다는 현실은 그 현실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죽음보다는 좋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기를 원하며 자기 존재의 보존과 자기 자신의 삶의 상태를 원한다. 자연의 이치를 생각해 볼 때 특히 나무들이 겨울에 나뭇잎을 다 떨어뜨린 채로 죽음의 상태를 지내고 새봄을 맞아 잎을 내고 꽃을 피우듯이, 예수님이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보여 주신 대로 우리 인간들도 일단은 한번 죽음의 문을 통과한 후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본질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도저히 믿기 힘들어 한다. 그러나 한번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가공적인 혹은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분은 우리 인간과 똑같은 구체적인 한 인간이었다.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지금도 그 나라가 존재하는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그 당시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살고 가신 분이다. 또 그분은 실제적으로 이 세상에 한 인간으로 태어나 오셨고 삶을 구체적으로 사셨다. 그리고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신 말씀도 있고, 그분이 행하신 기적과 그분에 대한 증언들도 함께 존재한다. 그런데 만일 그분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 당시 사람들에 의해 그분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한결같은 증언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2. 예수 부활의 증인들

요한 복음 20장에 보면,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3일째 되는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무덤에 가 보았더니 굳게 닫혀 있던 무덤 입구의 큰 돌이 치워져 있고, "빈 무덤"을 발견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8장에 보면, 같은 날 새벽에 여자들이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는데 천사가 발현하여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마르코 복음 16장과 루가 복음 24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부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 41) 하는 구체적인 증언도 있다. 사도들은 만나지도 않았던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위인들이 아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 중에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예수라는 죄인과 연루되지 않으려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겁 많은 사람이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모두 도망 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안식일 아침, 여자들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확인하고서도 그 일을 이상히 여기고 돌아갔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그들이 만일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함께 식사를 했다고 증언하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즉 사도 행전에서 보듯이 예수 부활을 힘 있게 증언하고, 그로 말미암아 당국의 감시와 박해를 받으며,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며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 때문에 매를 맞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사도 5, 41)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사도들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하였기에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 구세주,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하다가 순교를 한, 말하자면 예수 부활의 목격 증인들이다.

 

3. 예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

우리는 바로 이 사도들의 증언에 우리의 믿음과 전 생애의 소망을 걸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의 증언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2000년 역사 중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한 원동력은 바로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으며, 그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는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리스도교 초창기 로마 제국 시대에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아직 공인되지 않았을 때도 그리스도인들은 300년 동안 지하 무덤, 카타콤바라고 하는 땅속 무덤 에 숨어 살면서 그들의 신앙을 지키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그런 신앙의 원동력은 예수 부활 신앙에서 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서도 200여 년 전 천주교가 들어오자마자 100년간 박해를 받았는데 그 때 우리 초대 신자들 2만 명가량이 순교를 하였다. 그들이 생명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굳게 믿고, 하느님의 존재(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강생 구속(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고 부활하셨다는 것), 삼위 일체, 상선 벌악(착한 이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죽으면 죽어서도 다시 살아나고 상을 받고 영생을 누린다는 굳은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존재성을 의심하고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종교,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큰 종교들, 불교, 유교, 이슬람교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에도 이러한 종교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들이 있으니 사람은 아무 종교나 열심히 믿고 착하게 살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에 가끔 젖게 된다. 그리고 종교를 믿지 않아도 인간주의로서 형제를 사랑하고 인류를 위한 좋은 일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갖는 이들도 있다. 바로 이러한 생각들이 오늘날 여러 가지 사상 체계를 갖추고, 종교에 대한 해석과 비판을 시도하고 있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이론적, 합리적 설명에 쉽게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근대주의 사상으로서 하느님 존재에 대한 회의론, 불가지론, 혹은 신이 죽었다고 하는 무신론, 눈에 보이는 것만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실증주의, 혹은 과학 만능주의의 사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내에서 일고 있는 탈신화화 작업과 세속화의 현상이다. 그리스도교 내의 신화적이며 전설적인 이야기를 벗겨 내고 사실적인 것만 믿어 보자는 것이다.

 

4. 부활 신앙의 위기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사상들로 인해 오늘날 그 신앙의 참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과 도전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과 도전 속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과연 예수는 누구신가?" 하는 것이다. 예수는 한 인간에 불과한 것이냐, 혹은 예수는 하느님이었는가? 그 동시대 사람으로서 유다인들 가운데 예수를 박해하던 사람들이 예수를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수께 대해 "네가 사람인 주제에 어떻게 하느님 행세를 할 수 있느냐?"(루가 22, 20-71)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유다 법정에서 죽음 직전 심문을 받으면서 증언하신 그 말씀들에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놓고 있다.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려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인간이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다. 우리의 신앙은 가공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구체적인 증언을 토대로 하고 있다.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신분(Identite)에 대한 증언, 예수님 자신이 진리를 증언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시어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것을 증명해 주셨고, 제자들은 그 사실을 목숨까지 바치며 증언했다는 사실이다. 현대에 만연하고 있는 근대주의의 사상들의 위험 속에서도 우리는 이 부활 사건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신앙을 갖고 있기에, 이 지상 생활 중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를 수 있는 요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 신앙 생활이 우리의 활동에 의미와 가치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그 부활의 믿음과 함께 약속된 사람들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면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선 먼저, 아무 것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요한 14, 27) 그리고 "의심을 버리십시오."(요한 20, 27) 하는 태도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와 신뢰의 말씀에 희망을 가질 때, 우리는 가장 무서운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리고 죽은 후의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의심을 버리고, 예수님 자신의 증언과 제자들의 증언에 토대를 두고, 하느님께 확고한 신뢰의 마음을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의심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 사람이 의심 중에 있을 때만큼 불쌍한 상태는 없다. 의심이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어떤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의 혼동이다. 특히 신앙에 대한 의심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부족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부족할 때,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고,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는 인간적인 힘에 바탕을 두고 세상을 살아가려 한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폐쇄되고, 자신의 힘이 부족함을 느끼며, 마침내 아무도 신뢰하지 못하고, 경계심의 눈초리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과도 격리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신뢰와 믿음을 두는 사람은, 그 어떤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 불확실한 경우에도, 신뢰와 믿음의 태도로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며, 분열보다는 일치와 공동의 선을 도모한다.

 

5. 부활은 새 생명의 원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 특히 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대신 죽으셨다. 온 인류의 죄를 혼자 짊어지고, 무거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싣고, 우리 인간들의 죄, 복수심, 증오심, 미움, 무관심, 이기심의 못에 찔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한 알의 밀알로서 더욱더 많은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은 자신의 부활로써 새 생명의 원리인 사랑과 용서와 기쁨과 평화로 새 생명을 주시며 만물에 가치를 주신다. 부활을 체험하고 믿는 우리가 하는 모든 선한 행동에 가치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만연된 거짓과 분열과 폭력은 일시적인 승리를 하지만, 사랑과 용서와 하느님께 대한 순종은 영원한 승리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진리이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로마 14, 19)라고 외쳤던 초대 교인들의 믿음이 우리의 것이 되고 이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적인 실천을 힘 있게 도와 주는 원동력이 된다. 그것은 또한 죽음과 거짓과 폭력을 이기는 힘이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부정과 폭력과 죄악과 죽음의 권세에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는다. 예수 부활은 우리에게 새 생명의 원리를 주며 우리가 그 원리대로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증거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6. 예수 부활은 그리스도인 윤리의 기본 바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다른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즉 그리스도교 윤리의 특수성의 토대가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부활 사건에 근거한다. 부활, 이 세상에서의 죽음 후에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 속에 우리는 '이미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을 사는 사람들이며,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들의 구원의 길을 부활에 두며, 윤리적 행동의 가치를 세상에서부터 구체화시킨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그러므로 특수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으며, 현재와 미래를 위해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하는 구체적 행동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만일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아니시며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우리의 모든 믿음은 허구이며,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불쌍한 자가 될 것이다(1고린 15, 14-19).

 

7. 하느님께서 예수 부활을 통해 주시는 선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선물과 복을 안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주시는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은 느끼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주는 것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무언가 물질적인 선물을 주고, 해주고…,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랑의 핵심은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이다. 성숙한 사람은 남의 작은 선물일지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줄 알고, 또 그것을 베푸는 사람을 기쁘게 해준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자 한 가장 고귀한 선물, 영생의 선물을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 새 생명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새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결코 허구나 장난이 아니다. 그 신앙은 때로는 피의 요구에 응답해야 하며, 또한 구체적 인간이었던 예수님의 삶과 인생 안에 근거해야 한다. 그분의 일생, 죽음을 넘어 부활로 이어지는 삶 속에서 보여 주셨던 새 인간의 모습 속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예수 부활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우리 각자의 구체적인 인간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자. 또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의 소망, 죽음을 극복하여 영원한 천상 복을 주시고자, 천상 왕국의 시민으로 우리를 불러 주셨다는 믿음을 갖고, 그에 감사드리며, 우리 모두 그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며 영원을 지향하는 '새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제32단상 :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골로 3, 1-4).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에 있어서 그분의 탄생이나 가르침 그리고 그분의 생애와 인격과 수난, 죽음 등이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중에서도 부활은 더욱 놀라게 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부활이라는 것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고 역사상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죽음 그 자체로 이미 생명은 끝났고 더 이상 말이 없고 고요한 무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은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시어 무덤을 빈 무덤으로 만들고 죽음을 이기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실이 너무 획기적이고 놀라운 사건이기에 좀처럼 믿으며 하지 않는다. 예수 부활을 신화나 전설 혹은 제자들이 조작해 낸 것이라 일축하기도 한다. 그리고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생각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 부활이야말로 우리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최고 정수이며 근거가 된다. 이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이며 제자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증거한 것이다.

 

1. 예수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 때에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시오.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 가지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여러분의 손에 넘어간 이 예수를 여러분은 악인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사도 2, 22-24). 즉 사도 베드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살아 계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과 놀라운 일을 하셨다는 것을 증언한 것이다. 또한 그분이 수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묻히셨다는 것 그리고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부활하셨다는 것을 유다인들 앞에서 증언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뒤에 다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도 나타나셨는데 그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 뒤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또 모든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내가 전하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하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그것을 믿었습니다"(1고린 15, 3-11). 즉 사도 바오로는 자기가 전해 받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 당시 교우들에게 전해 주었다.

 

2. 예수 부활은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의 핵심

이같이 예수 부활 사건은 제자들에 의해 계속 전파되었고 세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신앙도 제자들이 전해 준 그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그 신앙은 교회를 통해서 전달된 것이다. 그러므로 2000년 전에 있었던 예수 부활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신앙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제자들이 전파한 그 신앙과 동일한 것이며 지금도 그 신앙의 내용은 전파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1고린 15, 4-5)이다. 지금도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알려 주고 또 이 사실을 믿도록 권유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의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죽어야 할 운명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요 기쁨이 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짓 증인이 되는 셈입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1고린 15, 12-19).

 

3. 예수 부활은 기쁨과 평화의 메시지

우리는 예수 부활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느끼고 체험한 사실을 보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고 한결같이 그 체험을 진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하고 느낀 그 체험을 중요시하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의 체험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안심과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됨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보면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천사가 여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마태 28, 5)고 안심시켜 준다. 그러자 여자들은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쳐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무덤을 떠나 급히 달려갔다"(마태 28, 8).

 

또 예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고 물어 보신 후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켜 주신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신다. 마르코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제자들을 꾸짖으신다. "그 뒤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마음이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신 것을 분명히 본 사람들의 말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 14-15).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기도 한다. 루가 복음을 보면(24, 13-35)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예수의 부활에 대해 미심쩍어 하는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신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길에서 그분이 말씀하실 때나 성서로 설명해 주실 때에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고 그 체험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뜨거운 감동을 느끼고 친교를 이룬다. 우리도 또한 그분을 만나 이렇게 뜨겁게 느껴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요한 복음에서도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주신다(요한 20, 19-23). 이에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요한 20, 20)고 한다. 또한 예수께서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토마 사도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 27)고 하시며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키신다. 그러자 토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 29) 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고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하고 말씀하신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다. 즉 성서에 기록된 대로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체험을 증언한 것을 듣고 그 증언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부활 신앙은 제자들의 신앙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과 같이 우리도 그러한 체험 속에 사는 것이 중요하다. 제자들도 처음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분을 보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지도 못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성서와 성전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그 신앙에 동참한다.

 

성서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나고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을 통해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4.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에 내재된 은총과 축복

끝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 속에는 은총과 축복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요한 21, 1-14).

 

요한 복음 21장의 고기잡이하는 제자들에 관한 대목에서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21, 37) 하고 제의하자 일곱 제자는 따라 나선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으나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 보라고 일러 주시자, 그대로 하니 정말 그 말대로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걸려 들었다.

 

이처럼 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그리스도 없이 하면 아무 일도 못하고 소득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고 그 소득은 예상을 뒤엎을 정도로 나타난다.

 

우리도 어떤 일을 할 때에는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자.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 속에는 많은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육지에 올라왔을 때 거기에 이미 예수께서 식사 준비를 다해 놓고 제자들을 식사에 초대하셨다.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빵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 주시고 또 생선도 집어 주셨다"(요한 21, 12-14).

 

그리스도는 이처럼 다정하시고 자상하시다. 우리는 이처럼 다정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는가?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희망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도움이시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우리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에페 1, 3-5).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생활이며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받는 생활이다. 그리고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도록 부름을 받는 생활이다.

 

우리도 이러한 그리스도를 만나자.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를 당신에게로 초대하고 계신다.

우리도 일상 생활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도록 노력하자.

 

제33단상 : 부활하신 예수,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그 날 밤에는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 이튿날 날이 밝아 올 때 예수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이신 줄을 미처 몰랐다. 예수께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아무 것도 못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잆을 만큼 고기가 많이 걸려 들었다"(요한 21, 3-6).

 

위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주시는 내용이다. 얼마 전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생선 요리가 나왔다. 그 생선의 이름은 '베드로 고기'였다. 고기 크기가 30센티미터쯤 되는데 참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아마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잡게 해주신 고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예수께서는 아주 맛있는 고기를 베드로에게 잡게 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예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식사를 했다. 베드로가 이 고기들을 잡게 된 배경을 생각해 보자.

 

1. 인간 능력의 한계와 하느님의 도우심

제자들은 전에 두 번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지만 아직도 그들의 신앙은 확고하지 못했다. 그들은 티베리아 호숫가에 모였다. 열한 명의 제자 중 일곱 명 이상이나 함께 했던 이 모임에서 자기들의 할 일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별로 할 일도 없어 무료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그 무료한 분위기를 깨고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요한 21, 33)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역시 베드로를 따라 고기를 잡으러 가게 된다.

 

전에는 예수님을 따르려고 그물과 배를 버렸던 그들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자, 그들은 다시 고기잡이를 하러 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는 베드로의 한마디 말 속에 예수님이 없는 것에 대한 제자들의 허탈감이 잘 표현되고 있다고 보겠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껏 고기잡이를 했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다. 고기는 고요한 밤중에 많이 잡히는 법인데도 그들은 날이 샐 때까지 한 마리도 못 잡았다. 바로 이것은 예수님 없이 자기들의 인간적인 힘에만 의지하고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항상 헛수고만 하고 아무런 소득도 열매도 맺을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하고 제 힘을 자랑하려고 하지만 제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 없이 인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고기잡이의 명수들이었던 그 어부들이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2. 세상 구원을 위한 교회의 사명

그러나 위의 요한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실행하면 풍성한 수확과 열매를 맺게 된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자,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은 것이다. 그리고 그 잡힌 고기를 세어 보니까 153마리나 잡혔다고 한다. 이 153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로서 온 세상을 포함하는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는 교부도 있다. 즉 100이라는 숫자는 장차 그리스도에게로 모이는 이방인 전체를 상징하는 수로 이방인들이 가득 찬다는 것이고, 50이라는 숫자는 유다인들의 수, 그리고 3이라는 숫자는 삼위 일체를 가리키는 수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삼위 일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고기가 그토록 많이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무리 많은 나라의 백성이 모이고 들어온다 해도 그 모든 이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하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물을 끌어올렸다고 하는 것은 성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의 사목권을 상징하는 동시에 모든 백성을 모아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시고 "너는 장차 '사람 낚는 어부'(마태 4, 19)가 되리라."고 하셨고, 때때로 베드로의 배에 타시어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와 함께 하는 제자들과 그 교회에 당신의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시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 이어 가게 하시겠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3.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그분과의 관계는 일생을 사랑으로 맺어져 결합된 관계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다인들에게 끌려가 갖은 수난을 당하실 때,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했던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물으신다(요한 21, 15-19). 이 세 번에 걸쳐 반복된 사랑의 확인은 세 번에 걸친 배반으로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던 베드로에게 다시금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 '사랑의 관계'가 유지되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도 교회의 일, 예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설립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각자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예,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에도 "예, 주님, 저는 정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여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는 진실과 헌신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특히 교회에서 일하는 봉사자들은 예수께서 맡겨 주신 양 떼를 돌보아야 한다. 이 양 떼들은 예수님이 온갖 수난과 고통을 겪으시고 마지막엔 당신의 고귀한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음의 희생을 치름으로써 얻은 백성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과 헌신의 마음을 세 번이나 확인하고서 당신의 양 떼를 베드로에게 맡기며 돌보도록 하셨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 떼이며, 그분이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비체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며,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들의 비유처럼, 그리스도와 밀접히 연결되어 그에게서 생명력을 얻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아마 제자들은 이것을 누구보다도 더 진하게 체험하고 깨달았을 것이다. 사도 행전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도 5, 29).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사도 4, 12).

 

4. 인간의 결실을 함께 나누는 예수님

그리고 한편으로는 예수께서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고 당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을 초대하여 영육간에 힘을 북돋아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주님께서는 고기잡이를 한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워 놓고 "와서 아침을 들어라."(요한 21, 12) 하고 다정히 빵과 고기를 집어 주신다. 또 예수님은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요한 21, 10)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노력하여 거두어들인 결실을 함께 나누신다. 방금 잡은 고기를 숯불에 구워 먹을 때 얼마나 맛이 있었겠는가?

 

5. 인간의 수고와 땀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총

이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 속에는 힘들여 일하는 노력과 땀이 있지만, 그 노력과 땀 속에는 주님의 큰 능력이 함께 하시고 또한 기쁨과 힘이 있다.

 

우리도 일상 생활 속에서 스스로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일지라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행동하고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힘과 용기를 얻어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하자.

 

제34단상 : 빵의 기적과 예수님의 피신

 

"그 때 예수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달라는 대로 나누어주시고 다시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하여 나누어주셨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난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조금도 버리지 말고 남은 조각을 다 모아 들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래서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제자들이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고 저마다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요한 6, 11-15).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기적도 행하시고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이 하루 종일 당신을 따라 다니느라고 배가 고픈 것을 아시고 그들을 배부르게 먹여 주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는 데 있어서 당신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필립보와 안드레아 사도의 도움을 받아 하시고, 또 한 어린이가 갖고 있던 약소한 음식을 가지고 빵의 기적을 이루신다.

 

이것을 보면 예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실 때 당신 혼자서도 하실 수 있지만 인간의 협조를 기꺼이 받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우리가 바친 미약한 예물을 이용하여 더 크고 유용하게 쓰신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군중은 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알아채시고 산으로 피해 가신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빵의 기적이 성체 성사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예수께서 혼자서 산으로 피해 가셨다는 것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그분은 혼자서 외로이 산으로 피해 가셨을까?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그분을 현실적인 왕으로만 보느냐, 아니면 영신적인 구원의 메시아로 보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물질적인 소원을 채워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한다면 2000년 전 유다인이나 현대인들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피해 가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단지 우리의 물질적인 욕구나 희망을 채워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참된 의도를 알고 따르도록 해야 한다. 물론 예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그것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배고픈 이들에게는 빵의 기적을 통해 배불리시고 끝내는 당신 자신까지도 생명의 빵으로까지 주셨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 올바른 것을 청하고 올바른 메시아관을 갖고서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자.

 

제35단상 :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 16, 25-27)?

 

마태오 복음(16, 25-27)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역설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돈을 벌고 명예도 얻고 권력의 자리에 앉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러한 것이 목표가 아니라 얼마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가 삶의 목표이며 기준이 된다.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살아 생전에 재산을 얼마나 많이 모아 놓았는지, 혹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권력의 자리에 있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문민 정부의 재산 등록제가 실시된 후에는 재산이 너무 많은 경우가 오히려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부정과 위협의 방법으로 재산을 축재한 사람들이 놀림감이 되었다. 우리 인간이 죽어서 평가받는 것은 재산의 과다나 지위의 고하가 아니라, 진정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고, 동료 인간들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에 따라 평가받는 것이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사람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았는가가 그 기준이 된다.

 

1.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예수님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그 길을 몸소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그 영광을 추구하시지 않고 오직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하느님의 길을 가셨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비울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이 없이 그 길을 온전히 갈 수는 없다. 제자들은 이 진리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을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과 권력의 왕이 되기를 기대하였으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이렇게 그들의 기대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재물과 권력을 통한 세상 통치라고 하는 기대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방법이 진실되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었고, 예수님처럼 그 길을 용기를 가지고 갈 수가 있었다.

 

2. 필리핀에서의 십자가의 길 행사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우리가 과연 각자 자기에게 맞는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가지고 그것을 지고 다니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겠는가? 필리핀에서는 실제로 그러한 일이 매년 이루어지고 있다. 필리핀은 400여 년 전(1521년) 스페인의 마젤란에 의해 발견되어 그리스도교 선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동양에서 유일하게 전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그리스도를 믿는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필리핀에는 도시나 지방 어느 곳을 가든지 아름다운 성당이 있고, 가톨릭 신앙이 민중의 마음속에 뿌리 박고 있으며, 그리스도인 종교 축제가 많은 나라로 알려져 '축제의 나라'로 소개되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사순절이 되기 전에 카니발 행사가 있고 또 성금요일에는 큰 행사가 벌어진다. 즉 매년 성금요일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재현하는 전례 예식이 있는데 실제로 사람이 예수님처럼 못에 박히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예수님과 강도 역할을 할 사람을 선발하는데 그 신청자도 많다고 한다. 세 사람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실제로 예수님처럼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나무 십자가를 지게 한 후 마닐라 시의 일정한 거리를 끌고 가 그 나무에 실제로 못을 박아 매다는 행사이다. 그런데 선발된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고통을 나눈다는 뜻에서 그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여긴다. 그리고 못 박혔던 상처도 신기하게 잘 아물어 여러 번 못 박혔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 행사는 대대적으로 벌어져 여러 나라에서 많은 순례객 내지는 관광객들이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 온다. 필리핀에서는 전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가톨릭을 믿기 때문에 이것을 큰 신앙 행사로 실시하고 있다.

 

3. 예루살렘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의 길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그것에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고통이 있다. 이러한 고통을 똑같은 방법으로 따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러한 인내와 고통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나도 얼마 전(1995년 7월) 이스라엘을 포함한 여러 나라 성지를 순례한 적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탄생과 활동과 죽음의 발자취가 있는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 큰 은혜요, 영광이다. 그러한 성지 중에 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길을 나도 동행했던 순례단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갔었다. 나무 십자가를 20달러에 빌려, 내가 처음 몇 처간을 메고 갔고 교대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중에는 말 그대로 십자가의 길이었다. 물론 예수님의 고통과 수난에는 만 분의 일도 비교될 수 없지만, 예수님의 고통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조용한 성당에서 행하지만, 현재의 예루살렘 십자가의 길은 그렇지 않고 어수선하다. 주위의 상혼에 젖은 아랍 상인들의 무관심과 무표정, 그리고 예수께 대한 우리의 신앙 표현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이슬람 교도들, 그리고 순례객들에게 "원 달러($),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장사꾼들 등 그러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땀 나는 고역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해내야 할 일,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정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을 위한 부모의 책임, 그리고 사회와 국가의 공동선을 위한 공직자들의 역할 등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제36단상 : 사랑의 종교인 그리스도교

 

"소경은 겉옷을 벗어 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마르 10, 50-52).

 

그리스도교를 말할 때,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한다. 이 사랑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여 주신 신적인 사랑과, 그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베풀고 나누는 인간 상호간의 사랑을 말한다.

 

마르코 복음에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랑 중에 예수님을 통해 보여진 하느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앞을 못 보는 한 소경은 예수께 믿음을 갖고 간절히 청한 결과, 빛을 찾아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소경이란 잘 알다시피 눈은 있지만 눈의 중요한 기능인 보는 일을 못한다. 세상의 여러 가지 질병, 불구의 병들도 다 그 나름대로 서글픈 인생의 모습이지만, 이 소경의 신세를 생각해 볼 때, 이처럼 딱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느님께서도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동물들, 즉 날아다니는 새나 땅 위의 온갖 짐승들이나 심지어 물 속의 온갖 물고기들에게까지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그 눈을 통해 사물을 판단하여 위험을 피하고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하느님께서도 눈이 있으시기에 당신이 만드신 온갖 만물을 보시고 '좋다'는 판단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그 중요한 눈의 기능을 상실한 소경의 경우는 정말 어떠한 처지였겠는가? 그는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며, 온갖 색깔에 대한 느낌도 가질 수 없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도, 나무들의 단풍 든 모습도, 푸른 하늘, 맑은 공기 등, 이 모든 모습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상상조차도 못했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는 이러한 딱한 처지에 있던 바르티매오라는 소경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인간 구원에 관한 청을 드린 것이 나온다. 이 소경에게 있어서 구원은 무엇이겠는가? 거짓말하고 남의 물건을 훔친 일 등 이러한 윤리적인 죄에 대한 사함보다는 자기 눈을 뜨는 일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구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각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신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은 특별히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며,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완전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사랑이듯이, 인간도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덕을 갖출 때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품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 과연 그 품위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서글프고, 비뚤어지고 상처받고 으스러진 인간의 현실이 얼마나 많은가? 우선 육신적으로 인간의 제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 즉 귀머거리, 소경, 벙어리, 절름발이 등 온갖 형태의 신체 장애자들이 있다. 그들의 모습들은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저지른 인간의 죄악들에 의해 희생된 동료 인간들의 비참한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전쟁, 고문, 살상, 폭탄, 파괴 등으로 인해 희생된 것이고, 그 배후에는 인간의 욕심과 악에 의한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이들이 또한 얼마나 많은가?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기억력을 상실한 사람, 말 못하는 사람, 그리고 미움과 증오로 인한 화병, 불면증, 비뚤어진 마음을 갖고 사회를 항상 어둡게 보는 병든 마음, 또 사랑에 실패하고 상처받은 마음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인간의 잘못에 의해 질서가 깨지고 상처받은 인간의 모습이라고 보겠다.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들, 비구원 속에 허덕이는 인간들을 하느님의 넓은 사랑으로 치유하고 구원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레미야 예언자는 소경과 절름발이를 고쳐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예언하고 있다(예레 31, 7-9). 비뚤어진 모습을 바로 펴는 일, 하느님이 창조 때 보여 주신 온전한 모습을 되찾아 주는 일, 그럼으로써 창조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하느님과 음식을 나누고 보고 듣고 즐기는 일로 인도하는 일,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목적이다.

 

예수께서는 온갖 인생살이에 지쳐 있는 사람들도 당신에게로 초대하신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마태 11, 28). 마르코 복음에서 앞 못 보는 소경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님, 제 눈을 뜨게 하여 보게 해주십시오."(10, 56) 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찾아가서 우리의 무질서하고 상처 난 마음을 제대로 고칠 수 있는 신앙을 가져 보자. 누구든지 예수께 가는 자는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며 믿고 찾는 자는 반드시 치유되고 구원받을 것이다.

 

제37단상 : 사순절의 유혹과 결심

 

"예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돌아오신 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사십 일이 지났을 때에는 몹시 허기지셨다. 그 때에 악마가 예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 하고 꾀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루가 4, 1-4).

 

1. 사순절의 결심

사순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언가 좋은 결심을 하는 습관이 있다. 즉 담배를 끊는다거나, 술을 삼간다거나 좋은 음식을 삼가고, 그 밖에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 활동도 삼가면서, 예수님의 고통과 수난, 죽음을 묵상하고 그에 일치하려는 노력을 하는 아름다운 습관이 있다. 그런데 이런 결심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잘 지켜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작심 삼일로 끝나 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사순절 초기에 결심을 한 사람과 안한 사람 사이에는 분명히 그 시작부터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적인 사순절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순절은 40일 동안 우리 구원, 인생의 의미에 대해 명상해 보는 좋은 시기이다. 저마다 바쁜 생활 속에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도 잃어 가며 사업에 혹은 공부에 자신을 찾을 여가도 없이, 자신의 인생의 현주소가 어느 곳에 머물러 있는지 생각조차 할 여가도 없이 한 해 두 해를 넘겨 벌써 현재의 나이에 도달했을 것이다. 따라서 한번쯤 조용히 이 사순절 동안 자신을 찾아보는 것은 여러모로 유익한 시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2. 시련의 극복을 통해 오는 인간 성숙

사순절은 인생의 의미 중에 특히 시련과 단련을 통해 자신의 약함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는 한 과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기 위해 40년 동안 사막에서 신앙의 시련을 겪고 준비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아무런 의미 없이 인간에게 시련과 어려움을 주신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시련을 주시는 목적은 오히려 복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속담에서도 "금은 뜨거운 도가니 속에서 제련된다."는 말이 있는데, 금이 되기 위해서는 뜨거운 불 속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순수한 신앙은 성서적 표현대로 "사막의 체험과 시련"을 통해 성숙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막은 인간의 일상 생활과 격리된 고요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 고요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자신과 싸우며, 자신의 선성과 신앙을 시험하는 사탄과 싸우게 된다. 이 고요한 사막에서 그 어려움을 이겨 내는 사람만이 자신과 남을 구원할 수가 있다.

 

이 사막은 바로 예언자들이 하느님과 만난 장소이기도 하다. 모세와 이사야 예언자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이스라엘 백성도 이 사막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받아 하느님의 백성으로 탄생하였다. 또 요한도 사막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고, 예수님도 공생활 시작에 40일간 사막에서 머물며, 사탄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자신과 하느님 왕국을 위한 길을 준비하셨다.

 

이러한 뜻에서 사막의 세계로 표현되는 사순 시기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며 자신과 싸워 영원한 천상 기쁨을 맛보기 위한 은혜의 시기이다. 교회 전례를 통해 사순절은 우리의 눈과 관심을 없어져 버릴 지상적인 것들로부터 영원한 천상적 실재에로 돌리게 해준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천상적인 것들을 동경하면서도, 지상적인 것들의 현실적이고 달콤한 유혹에 빠지기가 쉽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사막에서 자신과 싸울 때, 세 가지 유혹에 빠지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최근 가톨릭계에 물의를 일으켰던, 마르틴 스코르세스가 감독한 영화,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La derniere tentation du Christ)'에서는 예수님의 이 인간적인 고뇌에 대해 표현한 바 있다. 이 영화는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애착과 그리스도, 메시아로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인간적 갈등을 잘 표현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가진 능력으로 많은 재산과 권력과 명예를 쉽게 얻을 수 있고, 그것으로 메시아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유혹을 받으시지만 그 방법을 택하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나 그 영화 감독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그 유혹들도 어려운 것이지만, 가장 큰 마지막 유혹은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 한 가정을 가져 보고자 했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겠다. 가정은 인간 사회의 한 기본 구조로서, 인간의 휴식과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며,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도움과 결합으로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다. 이 영화에서는 예수께서 마들렌(막달레나)을 사랑하고 마들렌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한 인간적인 욕망을 가장 강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유혹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그 순간까지 가장 견디기 힘든 유혹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대한 점은 이러한 유혹을 전혀 느끼지 않는 무감각한 인간이 아니라 그러한 유혹을 하느님께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극복했다는 데에 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라는 것, 이것이 예수께서 당신 스스로 지키고자 하셨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로서 제시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4. 극복해야 할 유혹과 시련

유혹과 시련은 누구에게나 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공통된 것은 예수님이 사막에서 체험하셨던 위의 세 가지 유혹의 범주에 다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 4, 7)고 하셨다. 이 범주에 들어가는 유혹은 무엇이겠는가? 우선 아담과 하와가 받은 유혹이 바로 이것이다. "너희가 이 과일을 먹으면 하느님같이 되리라."(창세 3, 5)고 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또 사람은 빵을 구하기 위해 정상적인 노력과 일을 하기도 하지만, 그 목적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과도하게 저지르고 있는가? 또 하느님을 경배하는 일보다는 권력과 금력에 굽히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절하지 않는가? 물론 인간은 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약하지만, 파스칼의 표현처럼, 인간은 생각할 수 있기에 위대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다면 그 유혹들은 이겨 낼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상급을 주시기 위해 가끔 인간들을 시험에 놓아두시지만, 또한 그 시험들을 이겨 낼 은총까지 아울러 주신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네 곁에 있고, 그 말씀은 또한 너의 입 속에 그리고 너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로마 10, 8).

 

끝으로 사순절을 맞이할 때마다 특별히 일상 생활 중에 각자 자신의 사막과 그 고요한 장소는 어디인지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고요한 사막에서 자신이 당하는 유혹은 무엇인지, 아울러 그 고요함 속에서 내리시는 하느님의 은총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제38단상 : 사순절의 의미

 

"이제라도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라.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어라.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의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라"(요엘 2, 12-13).

 

사순절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 전 40일간을 뜻하며 예수 부활을 잘 맞이하기 위해 참회와 보속으로 준비하는 기간을 말한다.

 

성서에는 이 40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오는데, 40이라는 숫자는 인간이 하느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재를 지키며 준비하는 기간으로 나온다. 이것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 산에서 40일간 재를 지켰고, 엘리야도 40일간 호렙 산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며, 특히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시며 재를 지키신 데서 유래한 것이다.

 

1. 인간의 근본을 생각하게 해주는 사순절

이러한 사순절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머리에 재를 받고 "사람아,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 3, 19)는 말씀을 듣는다. 사순절을 맞이할 때마다 교회 전례에서는 '사람은 흙이며,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평소 일상 생활에서는 별로 느끼지도 못하고 생각하기도 싫어하는 이 진리를 사순절에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주는 것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흙이며,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순절은 사람의 근본적 본성을 알게 하며, 이 현세적 삶을 반성하고 또 이 현세적 삶에 의미를 주는 시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순절은 괴롭고 고된 고행의 시기가 아니라, 인간의 참모습을 발견케 하는 자아 발견의 시기이며 은총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결국엔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임을 생각하고, 이제까지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생활을 해 왔다면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또 생활의 목표를 지상의 것에서만 두지 말고 미래에 긍극적으로 이루어질 천상적 생활로 바꾸어야 함을 일깨워 준다.

 

2. 사순절에 회개하는 이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은총

하느님께서는 사순절 동안 특히 회개하고 참회하는 죄인들에게 당신의 은총과 평화와 용서와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이 주는 현세적이고 일시적인 만족에서 벗어나 참된 하느님께로 돌아오고 당신을 섬기라고 간곡히 말씀하신다. 요엘서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이제라도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라.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어라.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의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라"(2, 12-13). 즉 이제까지 하느님도 잊어버리고 세상 일에만 몰두하고 세속적인 생활만을 해 온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말씀이다. 이러한 참회와 반성의 시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며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이다. "이제라도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라."(요엘 2, 12)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만 할 때에 네 말을 들어 주었고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도와 주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고린 6, 1-2).

 

사순절에 들려주는 하느님의 이러한 말씀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촉구하는 말씀들이다. 그리고 사순절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시간이다.

 

사순 제1주에 들려주는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사탄이 주려 하는 빵과 권세와 기적을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치는 모범을 보여 주신다. 세속적인 세력이 주는 것은 현세적이며 일시적이고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이 있기에 보다 영원한 것에 희망을 둔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사는 것이 참된 삶의 길임을 인생 체험을 통해 느끼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신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이신 하느님만을 섬기고 그분께만 경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각자 사순절을 통해서 참으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의 모든 생활이 하느님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자. 다시 한 번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이제라도 진심으로 뉘우쳐 야훼께 돌아오시오"(요엘 2, 12).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고린 6, 2).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가 4, 8).

 

제39단상 :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루가 20, 38).

 

1. 삶과 죽음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는 늦가을이 되면 우리 신자들은 인생의 황혼과 죽음을 생각하며 11월 위령 성월을 지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죽은 후 하느님의 전능으로 육신이 부활할 것을 믿는다. 인간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불교에서도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말이 있다. 즉 인간이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다. 이러한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윤회라고 하며 이러한 윤회의 과정에서 벗어나 극락 세계에 가는 것을 해탈(니르바나, Nirvana)이라고 한다.

 

과연 인간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가, 그리고 왜 늙어 가며, 왜 살면서 병에 걸려 괴로워하는가,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중요하게 다루는 종교적 문제이며 나름대로 그 이유를 해석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윤회설의 숙명론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생 사고(人生四苦)에서 해방되는 길은 팔정도(八正道)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참된 깨달음으로 부처(Buddha)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에서는 인간이 태어남은 부모와 조상의 은혜이며 죽고 사는 일은 하늘의 뜻에 있다(人命在天)고 믿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이 새로 태어남은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이며, 부모는 하느님 창조 사업의 협력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인류의 첫 조상 원조들의 범죄, 즉 원죄의 결과로 해석한다. 원죄는 인간이 하느님께 순명치 않아 자초된 불행이었다. 불순명은 죄를 낳고 죄는 악을 낳고 악은 고통을 낳으며, 고통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비구원의 상황 속에 빠지게 된 것은 원죄의 상황에 있는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지은 죄의 대가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벌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 내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것은 곧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로서 하느님께 대한 불순명과 교만에서 순명과 겸손의 길을 보여 주신 것이다. 욕심과 이기적인 길에서 헌신과 이타적인 길, 그리고 불신앙과 경쟁보다는 믿음과 사랑의 길, 그리고 절망과 어려움 속에서도 변치 않는 희망과 인내의 길을 보여 주신 것이다.

 

2. 죽음 이후의 부활

루가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비유(한 여자와 일곱 형제의 결혼 생활)를 통한 질문에 대해, 부활의 실재성과 진실성을 가르쳐 주셨다(루가 20, 27-40). 그리고 마카베오서 하권에서는 그리스화된 에집트 지역에서 유다인을 박해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 치하의 유다인들이 용감하게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율법을 지키다가 죽어 가는 장면이 나온다(2마카 7, 1-42).

 

참으로 그 한 어머니와 일곱 형제는 모두 한 사람씩 왕 앞에서 온갖 육신적인 형벌, 즉 혀를 잘리고 손발이 잘리는 등 온갖 고문으로 고통을 받고 자신들도 결국엔 죽음을 당하는 형제들과 아들같이 그러한 잔인한 방법으로 죽어 가게 될 것을 알면서도 의연하게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고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였다. 그 용기는 바로 부활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부활이 없고 저승에서의 정의와 심판이 없다면 이 세상은 힘과 무력으로 그리고 권모 술수와 사기로 정권을 잡고, 도적질로 재산을 모은 이들이 행복하고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행운아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죽은 뒤의 부활이 있고 공정한 심판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당한 이들의 한이 풀어질 것이며, 선과 정의를 실천하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았다 해도 하느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악을 일삼는 자들은 하느님의 심판으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행복 선언의 정신이며, 마태오 복음 25장 16절-41절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의 광경이기도 하다.

 

3.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

하느님은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인간이 죽더라도 다시 살리셔서 선과 악을 만민이 보는 앞에서 심판하시고(公審判),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벌을 주실 분이시다.

 

인간이 죽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실에 따른 상을 받기 위해 다시 살아나고 또 벌을 받기 위해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의 인생,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삶에 준엄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며, 생명을 받은 모든 존재는 죽음의 과정을 겪는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 영원히 살아 있게 된다. 다만 살아 존재하는 모습이 자신의 이 지상 삶의 태도 행실에 따라 영원한 행복과 축복의 상태로 살아 있느냐, 아니면 자신의 악행의 벌로 영원한 불행과 벌을 받는 상태로 살아 있느냐가 다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간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영원한 축복을 주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이 제시하신 길을 성실히 걸어갈 때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한다.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루가 20, 38).

 

제40단상 : 삼위 일체 하느님의 신비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요한 16, 12-15).

 

1. 그리스도교 신앙의 최고 신비인 삼위 일체 교리

삼위 일체 신비는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이 사랑으로 일치하여 한 하느님의 모습으로 보여 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최고 신비이다. 이 교리는 하느님 본질에 관한 것이므로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교리이기도 하다. 다만 성서에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알게 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 삼위 일체 교리이며,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이룬다. 이러한 삼위 일체 교리는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 본질에 관한 것이며, 우리가 믿는 하느님 자신에 대한 신비이기도 하다. 사람의 신비도 알기 어려운데 하느님의 신비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교리사를 보면 이 삼위 일체 신비를 확립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여러 가지 학설들 중에는 특히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점을 강조하여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변장한 모습에 불과하다는 학설도 있었다. 오늘날도 유다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즉 성부만을 유일하게 하느님으로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성부도 유일하신 하느님이며, 예수 그리스도 역시 성부와 같은 본성을 지니신, 참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들, 주님이심을 믿으며, 또한 성령께서도 성부와 성자와 함께 같은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는 참하느님이심을 믿는다. 이러한 신앙의 신비는 4세기경에 당시의 여러 가지 그릇된 교리를 물리치고 확립시킨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신경에 다음과 같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저는 믿나이다. 한 분이신 전능 천주 성부, 하늘과 땅과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께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하느님이시고…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 되시며…,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 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영광을 받으시나이다…'(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이 신경에서 보듯이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같은 흠숭을 받으시는 한 하느님이시다. 그러면서도 구분이 되시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모든 것의 원천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내시고 특히 인간들을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신다. 구분되는 세 위격이 완전한 이해와 사랑으로 한 공동체를 이루시며, 완전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결합된 세 위격이 '한 분'으로 존재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각자 고유한 주체성을 갖고 존재하는 신비로 머무신다.

 

2. 내재적 삼위 일체와 구세 경륜적 삼위 일체

이 삼위 일체 교리를 설명할 때 흔히 내재적 삼위 일체라는 말과 구세 경륜적 삼위 일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내재적 삼위 일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계심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으로부터 본래 계시는 분으로 설명된다.

 

구세 경륜적 삼위 일체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삼위 일체의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다.

 

우선 성부께서는 당신의 흘러 넘치는 사랑으로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나누어주시는 원초적 존재로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된 만물에 생명을 주신 분이시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어 주어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처럼 성부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피조물에게 나누어주시고 그로부터 당신을 찾는 모습으로 계신다. 바로 그 성부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공동체에 당신이 창조하신 온 우주 만물을 초대하는 분이시다. 그리고 성자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고통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성령은 하느님의 영으로서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사랑하시고 이 서로의 사랑이 그 자신 하느님의 본체이시고 또 하느님의 위격이시다. 그러므로 내재적인 삼위 일체와 구세 경륜적인 삼위 일체는 같은 한 하느님을 설명하는 용어이다. 다만 구별되는 점은 성부는 성자를 세상에 파견하시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파견되어 나오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신 것이다. 이러한 삼위 일체의 신비를 묵상하게 될 때, 우리 인간들은 창조의 첫 순간부터 구원의 마지막 순간까지 삼위 일체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보살핌을 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조금이나마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예를 들면, 우리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는데, 이 영혼은 하나이지만 각각 다른 세 가지 기능을 갖고 있는 것에 비유된다. 즉 무엇을 생각하고 알려고 하는 지능 작용, 또 무엇을 하겠다 안하겠다 결정하는 의지 작용, 또 사랑하고 미워하는 정서 작용이 있다. 이렇게 지능, 의지, 정서의 세 작용이 있지만 하나의 영혼이 갖고 있는 능력인 것이다.

 

그 밖에 삼위 일체 교리를 설명할 때, 삼각형이나 클로버, 전기 등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만 설명일 뿐이지 그 자체로 삼위 일체 교리를 깨달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과 같이 훗날 하늘 나라에서 마치 얼굴을 맞대고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을 뵈올 때 하느님을 확실히 알게 되리라 생각된다. 삼위 일체의 교리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중심이다.

 

3. 삼위 일체적인 신앙 생활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성부께서는 우리를 창조해 주셨고, 성자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약속해 주셨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은총을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성부와 성령께로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우리는 이렇게 은혜로운 성삼께 항상 감사드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천주 성삼과 우리의 생활을 생각해 보면, 우선 미사 시작 때 사제는 신자들에게 성삼의 이름으로 인사한다. 즉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면 "또한 사제와 함께." 하고 교우들은 응답하며 서로 인사를 나눈다. 또 우리가 미사 때 외우는 "대영광송"도 창조주 하느님이신 성부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성자와 또 천주 성부의 영광 안에 함께 계신 성령을 찬미하며 영광을 노래하는 것이다. 또한 "영광송"을 통해서도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고 기도한다. 또 우리는 모든 기도의 시작과 끝에도 "성호경"을 외운다. 밥을 먹을 때, 기도할 때, 세례를 베풀 때, 고해 성사 때, 혼인 성사 때, 병자 성사 등 모든 교회 예식과 행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는 성삼의 이름으로 십자 성호를 긋고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빈다.

 

하느님께서 각각 구별되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지만 한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사랑과 은총과 평화의 존재 양식을 묵상해 보면서 우리 인간들의 삶의 존재 방식도 그러한 일치의 삶을 본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계신다. 하느님은 고독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임마누엘). 또한 당신께서 함께 기쁨을 나누시기 위해 삼라 만상을 내시고 우리를 그 사랑의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신다. 이러한 하느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인들은 영화롭고 복되신 성삼위의 사랑을 깨닫고 장차 하느님의 생명에 한몫을 할 수 있도록 초청받은 복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 성삼위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면서 '너'가 있음으로써 '나'가 존재함을 깨닫고, 너와 내가 함께 존재하는 '우리'의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하자. 또 언젠가는 우리도 영화롭고 복되신 하느님의 모습을 뵙게 될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자.

 

제41단상 :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주님

 

"제자들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을 풀 위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 천명 가량 되었다" (마태 14, 17-21).

 

위의 말씀은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보여 주는 마태오 복음이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구약 이사야서에는 야훼 하느님께서 목마른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그리고 인생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시며, 물을 마시고 양식을 얻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 생기를 얻도록 해주시는 내용이 나온다(이사 55, 1-3).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데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일, 먹는 일, 마시는 일, 그리고 영신적인 생명을 바로 하느님 안에서 찾으라는 말이다. 사실 우리 인간들이 활동하고 추구하는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는 근본 목적을 잘못 설정하여 이미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에만 관심을 갖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찾지 않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모든 물질적인 것, 영신적인 것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인간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온갖 먹을 것과 온갖 마실 것과 온갖 따뜻한 위로와 구원이 있다. 하느님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 때, 바위에서 물을 솟아나게 하여 마시게 해주셨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먹을 것이 없게 되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그들을 먹이셨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목마르고 굶주리게 되길 원치 않으시고 그들이 잘 먹고 마시어 생기를 찾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도 세계 도처에는 기아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 우리의 형제 나라인 북한과 소말리아와 같은 나라에서는 쌀 한 톨을 주워 먹는 앙상한 몰골의 사람이 있는 반면, 풍요와 부요함으로 물질을 마음껏 쓰며 낭비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이들을 생각하고 우리의 식생활을 개선하여 낭비하는 음식이 없도록 해야 하겠다. 세상에 굶주리고 배고픈 사람이 많은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을 인간들이 함께 나누지 않고 개인이나 혹은 자기 가족 혹은 집단 이익을 위해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경고하시며 그들이 남을 착취하지 않고 정당히 일해서 자기 몫을 받고, 물질을 함께 나누길 원하신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부자와 권력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가 가해진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함께 잘살게 되길 바라시는 것이며, 모두 하느님께 오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위의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따라온 수많은 군중이 먹을 것이 없는 것을 보시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 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다. 또 그들 사이에 있는 병자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고쳐 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시고 하느님의 참된 말씀을 따르도록 인도해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물질적인 것을 받고 그에 대한 감사함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진실되이 믿으면, 하느님 안에 있는 온갖 복락을 다 누리게 된다. 또 하느님께 가면 물이 있고, 양식이 있고 축복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을 찾지 않고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뺏기고 산다면 그 모든 노력은 헛수고가 될 뿐이다.

 

우리가 숨쉬고 먹고 마시고 자는 일 모두 하느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복들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참된 행복은 바로 하느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생활 중에 어려운 일 답답한 일을 당할 때마다 하느님께 다가가서 진실히 기도하고 하느님 안에서 해결하도록 노력하자!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이사 55, 1-3).

 

제42단상 : 선의 방향으로 인류 역사를 이끄시는 성령

 

"보내시는 당신 얼에 그들은 창조되어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시편 103, 30).

 

1. 기쁜 소식으로서의 성령 강림

성령 강림 대축일은 예수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로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임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로써 교회 전례는 부활 시기를 끝내고 연중 시기로 들어가게 된다. 부활 시기의 마침과 동시에 교회의 새로운 탄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성령 강림절에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 인류에게 오셨음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감사드려야겠다. 삼위 일체로 계시는 신비로우신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다른 모습으로 우리 인간들을 위해 오셨다는 것은 진정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전례적으로 예수께서 우리 인간 세상에 오셨음을 기념하고 경하하는 성탄 대축일을 크게 기뻐하듯이, 하느님의 다른 모습인 성령께서 인간 세상에 임하시는 일도 또한 큰 축제일로 여긴다. 성령 강림절은 교회의 시작일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적 삶이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 승천으로 교회의 기초를 놓으신 후에 성령 강림을 통해 이제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가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성령은 그리스도 신자들 안에 임하시어 교회를 형성하신다

그런데 성령은 이미 구약 성서에 등장하고 있으며 오순절 전에도 예수님과 함께 활동을 한 분이시다. 성령은 구약과 신약에서 불, 구름, 바람 등으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성령 강림날에 성령께서는 불혀 모양으로 바람처럼 내려오시어 사도들 머리 위에 임하셨다고 사도 행전에서는 묘사하고 있다(2, 1-4). 성령은 사도들뿐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임하신다. 그리하여 성령을 모시고 사는 이들이 모여 교회를 형성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령 안에 믿는 이들을 모아 주시고 일치시켜 주신다. 일치와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어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우리 모두가 그분의 자녀로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성령의 역할은 바로 그러한 일을 도와 주시는 데 있다.

 

3. 성령은 교회를 끊임없이 성화시키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인간 사회를 올바르고 신선하게 변혁시키는 이들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세상의 권력과 끊임없는 위협과 도전 가운데에서 많은 어려운 상황들을 겪었다. 그러나 이 교회를 거룩하게 이끌어 오신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뿐 아니라 교회 내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끊임없이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일치시켜 주시고 교회 구성원들을 성화시키는 분도 성령이시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고 그 구성원들 가운데에는 죄인들도 많이 있지만 죄인들로 구성된 이 교회를 거룩하게 유지시키시고 발전시키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속담에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이 다 거룩하지는 못해도 교회는 거룩한 것이다." 하는 말은 바로 성령께서 교회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4. 성령은 인류 사회를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이끄신다

또한 성령은 인간의 역사를 선의 방향으로 이끌어 온 분이시다. 성령의 감도하심을 받은 이들이 하느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기록하였으며, 성령과 일치하여 일하신 분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우리 인류 사회는 아름답게 건설되었다. 우리가 성령을 체험하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성령의 체험이란 바로 성령의 감도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도하심은 하느님의 신비를 깨닫고 알리는 일로서 교회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예술 작품들, 그리고 문학 작품들 안에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 신도들의 정의와 사랑을 위한 예언적 활동 안에 살아 숨쉬는 정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성령은 끊임없이 인류를 아름답고 보다 살기 좋게, 인간다운 사회로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펼쳐지도록 인도하신다. 성령께 일치하는 활동이 인류 역사를 긍정적으로 평화롭게 가꾸어 가는 것이라면 성령을 거스르는 일은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과 이기적인 욕심으로 나타나고, 분열과 미움과 파괴의 행위로 나타난다.

 

5.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 성장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성령의 은혜를 받은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영신적 성장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해야 된다. 그리고 타인의 부족한 면을 이끌어 주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이들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고, 또 그러한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돕지 않거나 무시한다면 자만심에 빠질 유혹이 언제나 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분명히 고유하고 독특한 은사를 주셨다고 생각한다. 남이 갖고 있는 재능만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은사를 깨닫고 봉사하는 데 활용하여 각자 받은 성령의 선물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6. 공동 유익을 위한 성령의 선물

사도 바오로는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시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1고린 12, 4-11). 그 은혜는 지혜,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능력,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능력, 그것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나타나지만 어디까지나 공동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을 받았다는 데 의의를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은총의 선물이 과연 어떻게 열매를 맺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7. 성령의 열매는 개인의 성숙

그 열매는 바로 사도 바오로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듯이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친절과 선행, 진실과 온유 그리고 절제"(5, 22- 23)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 이러한 열매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은사를 활용한 것이 아니며 성령께 충실했다고 볼 수 없다.

 

8. 성령의 도구로서의 그리스도인

우리는 이제 성령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우리 마음 안에 불고 있는 잔잔한 성령의 바람에 우리를 내맡기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바로 성령의 도구가 되는 일로서 주신 은사를 깨닫고 겸손된 마음으로 실천하여 인간 공동체에 유익한 일을 건설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 안에 오신 성령을 통하여 용서하는 마음, 봉사하는 마음, 특히 사랑하는 마음이 새롭게 창조되기를 기도하자.

 

"보내시는 당신 얼에 그들은 창조되어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시편 103, 30).

 

제43단상 : 성모 승천 대축일과 광복절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루가 1, 48-49).

 

성모 승천일은 가톨릭 교회의 4대 축일 중의 하나이다. 이 날은 또한 우리 민족이 자주권을 되찾은 광복절로서 만 35년 동안의 일제 식민 통치에서 해방된 뜻 깊은 날이다. 이 날은 또한 현재 우리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었지만, 남한과 북한이 함께 민족의 통일성을 회복하고 함께 경축해야 할 날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8월 15일이라는 날짜는 우리 민족의 중요한 역사와 성모님의 승천 축일과 겹쳐 있는 특별한 날이다. 성모님의 승천과 우리 민족의 해방은 서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모님에게 있어서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신앙과 순종에 대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인정이었듯이, 우리 민족의 8․15 해방 역시 일제 강압에 의한 수치와 오욕의 식민 통치를 끝내고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은 승리와 해방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생애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연관시켜 되새겨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교회가 8월 15일을 성모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축일로 지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이다. 기묘하게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1945년에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며 그리고 1948년 8월 15일에는 선거를 통한 대한 민국 정부를 수립한 날이다. 같은 해 12월 8일은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일이며 우리 나라가 국제 연합(UN)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은 날이다. 또한 2년 후인 1950년 8월 15일, 대한 민국 광복 5주년이 되는 바로 그 날, 교황 비오 12세는 정식으로 8월 15일을 성모 몽소 승천 대축일로 공포하고 성모 승천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가 지상의 생애를 마친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 영광에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계시된 신앙의 진리이다."라고 선포하였다.

 

이처럼 성모님의 축일에 우리 민족사의 큰일이 겹친 것은 한민족에 대한 성모님의 크신 사랑의 결과라고 보겠다. 이런 연유로 한국 천주교회는 원죄의 물듦 없이 잉태되신 무염 시태 성모님을 주보로 삼고 있다. 명동 대성당도 무염 시태 성모님의 축일을 주보로 삼고 있다. 세계에는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이 많은데, 그중 '노트르담(Notre Dame)'이라는 말이 붙은 성당은 불어로 성모님을 뜻하며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이라는 뜻이다. 또 한 가지 공교로운 것이 있다면, 성모님의 무염 시태 축일인 12월 8일에 시작된 태평양 전쟁이 성모 몽소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에 끝이 남으로써 우리 민족의 해방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의 중대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8월 15일, '성모 몽소 승천 대축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글자 풀이를 해 본다면, 몽소 승천의 몽(蒙)은 '무엇을 덮는다 혹은 입는다'는 뜻이며, 소(召)는 '부르심', 승(昇)은 '올라감', 천(天)은 '하늘 혹은 하느님'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하느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라는 뜻이다. 성모님께서 스스로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의 결과로 하느님께로 불리어 올라가셨다는 뜻이다. 교황 비오 12세의 선언에 의하면 지상 생활을 마친 뒤 마리아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 영광을 받으셨다."라고 표현하였다. 말하자면 마리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장차 얻게 될 신분을 이미 받았다는 뜻이다. 마리아도 아들 예수처럼 죽으셨고 그 얼마간의 시간적 간격이 지난 후 부활하셨다는 의견으로 마리아의 승천을 그리스도의 승천과 같은 차원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승천은 "천상 영광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고 표현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을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다."(승천)라고 표현한 반면에 마리아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광을 받은 것으로서 '몽소 승천'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나자렛의 한 평범한 여인이 구세주의 모친으로서 하느님과 일치하려고 노력하셨던 신앙과 삶의 결실이 가져다 준 은총의 선물이 바로 성모 몽소 승천이다.

 

우리가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성모님의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모범이므로 예수님을 본받고 따르고 믿는 데에 있어서 가장 완전한 귀감을 주셨음을 감사드리고 본받자는 데에 있다.

 

제44단상 : 성지 주일의 환희와 비애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마태 21, 9).

 

성주간의 첫날인 주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당하신 수난을 전례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그리고 '성지 주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고통을 받으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호했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

 

1. 동예루살렘의 골든 게이트

현재의 예루살렘은 동서로 나뉘어 있다. 동예루살렘은 예수 시대의 발자취가 보존되어 있는 구예루살렘이며 현재 아랍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서예루살렘은 현대적인 건축물들로 건설된 예루살렘으로 주로 유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서예루살렘의 현대적 도시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흰색 계통이 많다. 즉 건물들의 외벽은 흰 대리석을 붙여 건축되었는데, 그 이유는 동예루살렘의 돌로 된 건축물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입성하셨던 문은 동예루살렘 성에 있는 여덟 개 문 가운데, 지금은 유일하게 폐쇄되어 사용하지 않는 금문(Golden Gate)이다. 이 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구원 사업을 이루셨고, 이제 다시 재림하시어 이 문으로 들어오실 때까지 굳게 닫혀 있게 된다는 상징적인 뜻을 갖고 있다.

 

이 날부터 부활 주일까지는 교회 전례상 가장 성스러운 주간이라해서 성주간(聖週間)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제자들과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환희가 마음에 가득하나, 한편으로는 곧 당하셔야 할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슬픔을 수난 복음에서 깊이 느끼게 된다.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언급한 것과 같이 예수님은 메시아이시고 영광의 왕이시지만,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바치셨다. 예수님 안에는 환희와 고통, 영광과 수난이 함께 있음을 알 수 있다.

 

2. 성지 주일의 환희와 비애

성지 주일의 예식에는 환희와 비애가 섞여 있다. 그 날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며칠 앞두고 구약 시대의 왕들이 행하던 전통적 형식으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으로써 당신이 메시아이고 왕임을 드러내 보이신다. 그래서 백성들과 아이들은 이 왕을 열렬히 환영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찬미받으소서."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가시는 길에 겉옷을 펴놓고, 나무를 꺾어 그 길 위에 펴 놓았다. 또 군중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바로 며칠 후에는 그 군중이 "호산나, 만세"의 환호성 대신에 예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며 날뛴다. 사람들의 마음은 이처럼 자기 위주로 변하고 자기들의 편의대로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영광은 다시 수난으로 변하게 된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고통을 예견하면서 그 수난당하시는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나의 등을 맡기며…,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이사 50, 6). 또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고 말한다(필립 2, 7-8). 사실 수난 복음은 수난당하시는 메시아 왕의 모습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이리저리 헤로데와 빌라도, 가야파 등에게로 끌려 다니셨고, 또 가장 사랑하였던 베드로에게마저도 배반당하셨다. 또 채찍으로 매를 맞으시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또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바리아 산에 오르시고 또 십자가에 못 박혀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아 죽으셨다. 예수님은 끝내는 하느님에게서마저 버림받은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 27, 46).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처절한 십자가상의 죽음의 외침은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왜 하느님께서는 그토록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을 처참하게 죽게 만드셨을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알 수 없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죄악을 그토록 싫어하시어 인간들로 하여금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당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까지도 속죄의 제물로 내놓으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찬미하고 노래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십자가의 고통도 볼 줄 알아야 한다. 부활의 영광이 있기까지는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제45단상 : 성체 성혈의 성사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눠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건네시자 그들은 잔을 돌려 가며 마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 22-24).

 

1. 예루살렘 시온 산의 다락방

예루살렘에 가 보면 멀리서 높은 탑 세 개를 볼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시온 산 위에 세워져 있는 교회탑이다. 바로 이 탑 아래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셨다는 다락방이 있다. 바로 이 다락방은 가톨릭 교회의 칠성사 중 다섯 가지 성사, 즉 성체 성사, 신품 성사, 견진 성사, 고해 성사, 병자 성사와 관련이 있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현재 프란치스코 수사들이 관리하면서 성지 순례객들을 맞아 최후의 만찬 성체 성혈의 미사를 봉헌한다. 나는 1995년 7월에 이곳을 순례단과 함께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다. 그 때 안 베다 신부님의 강론이 아직까지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은 그리스도께서 성체 성사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흠숭하고 공경하는 날이다. 마태오 복음에는 예수께서 성체 성사를 제정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성체 성사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면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것이며, 또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기념하는 제사이다.

 

우리가 믿는 성체와 성혈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온전히 살아계신 것이다.

 

성체 성사는 칠성사 중에서 가장 존엄하고 모든 성사 중의 성사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성사에서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지만 성체 성사에서는 그 은총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계시기 때문이다. 또 성체 성사의 설정 과정을 볼 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앞둔 최후의 만찬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성사인지를 알 수 있다.

 

2. 성체 성사의 설립

예수께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그 동안 정들었던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주시며 이 성체 성사를 세우셨다. 예수님은 이 중대한 예식을 세우시기 위해 미리부터 준비하셨다. 요한 복음 6장을 보면 예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6, 51)라고 하신 일이 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께서 드실 과월절 음식을 저희가 어디 가서 차렸으면 좋겠습니까?"(14, 12) 하고 묻자, 예수님은 그것을 차릴 방까지 일러 주시며 그 방에다 음식을 차리라고 하셨다. 이제 음식을 먹는 도중에 예수님은 빵을 들고 축복하시면서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14, 22) 하셨고 또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드시고는 "이것은 내 피이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14, 24)라고 하시며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하셨다.

 

바로 이러한 예식을 통해서 오늘날의 성체 성사가 성립된 것인데 이 성체 성사는 우리 가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한 미사 성제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기념하는 최상의 보배이다. 성체 성사의 의미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자.

 

3. 성체 성사는 최상의 제사이다

예수께서는 이 성체 성사를 통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에 "나는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라고 하신 약속대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또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라고 말씀하셨다. 옛날 우리 나라의 심청이도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인당수의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온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인류를 어둠과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당신 생명을 희생하신 것이다. 인당수의 제물로 곡식이나 짐승으로는 부족하여 사람 중에서도 처녀를 요구했듯이, 인간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서도 귀중한 인간의 봉헌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신 것이다.

 

우리는 매 미사 때 성찬 예식을 통해 이러한 사랑의 신비를 체험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최상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는 말과 글로 다할 수 없는 진리가 많다. 예수님은 인류에 대한 당신 사랑을 많은 말대신에 암시적이며 상징적인 만찬 예식을 통해 드러내신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로 구원받았지만, 신약에서 모든 인류는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구원받았다. 즉 예수님은 빵을 들고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시고 또 포도주를 들고 "이것은 내 피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께서 파스카 축제의 어린양으로서 희생될 음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새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렇게 성체 성사는 예수님의 피로써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이다. 그러므로 성체 성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기념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모든 죄악과 죽음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감사드리는 예배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체와 성혈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우리는 이처럼 고귀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올바른 마음으로 모시도록 해야 한다.

 

사도 바오로가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1고린 11, 27)라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대죄를 짓고도 남의 체면 때문에 성체를 모신다든지, 준비도 안하고 장난스럽게 성체를 모셔서는 안 된다. 성체는 바로 예수님의 몸이다. 성당에 들어오면 먼저 성체를 향하여 공경을 표하고, 또 시간을 내어서 성체 조배를 해야 한다. 우리 신자들은 이 성체 안에서 영혼의 양식을 얻고 영적인 힘을 얻는 것이다.

 

제46단상 : 성탄의 기쁜 소식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루가 2, 10-11).

 

1. 거리의 성탄절

매년 성탄절이 되면 거리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캐롤과 여러 가지 그에 얽힌 사연들이 우리의 귀에 들려 온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기쁨에 찬 웃는 표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류가 고대하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세주 탄생에 관한 기쁜 소식을 구두로 혹은 책으로 그리고 복음을 통해 이렇게 듣는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루가 2, 10-11). 이렇게 구세주 탄생에 관한 천사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전해진다. 주님의 성탄을 알리는 소식이야말로 진정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예수께서는 역사상 2000여 년 전에 구체적으로 성모 마리아에게서 혈육을 취하여 우리 인간 세상에 오신 분이지만 그분의 탄생은 지금에도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 구세주의 탄생은 모든 인류로 하여금 참된 삶과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인간답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은 그분이 오신 참뜻을 모르고 단지 크리스마스라 하면 1년 동안 쌓인 스트레스나 풀고, 오락으로만 보내고 결국에 가서는 후회로 맞는 한 해가 반복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구세주의 성탄을 진심으로 갈망하는 우리만이라도 그 참뜻을 알아야 하겠다. 구세주는 우리 인간들에게 오시어 누구보다도 먼저 그 당시 가장 소외받고 천대받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으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주셨다. 이것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 각자는 상하가 없고 평등하다는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이 기쁜 소식이야말로 진리와 정의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는 소식이며, 더욱이 원죄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던 인간들에게는 구원을 선사하는 소식이다. 그러면 구세주 탄생이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보자.

 

2. 어두운 세상 속에 빛을 주러 오시는 구세주의 탄생

우리 인간은 존재하는 순간부터 자신이 자유로워지고 온전히 구원되기를 갈망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될 때에 자유로운 인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간은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느님을 배반함으로써 점차로 죄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 들게 되었다. 마침내 그 죄악은 점점 번성하여 온갖 종류의 죄악이 깊게 뿌리 내려 가장 참되게 성장하여야 할 우리 청소년들마저도 죄를 공공연히 범하게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구약 성서의 창세기를 통해 계시되듯이 아담과 하와의 원죄, 그 후 카인의 첫 살인, 바벨탑의 사건, 노아의 홍수 등으로 이어지는 죄악의 역사는 하느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는 도저히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이러한 원죄의 상태 속에 빠진 우리 인간들에게 구세주를 약속하셨던 것이다. 구세주의 탄생 예언을 전하는 이사야서는 '메시아와 그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해 준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의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이사 9, 1-2. 5-7).

 

3. 평화와 행복의 기쁜 소식

이 예언이 성탄날 밤에 우리에게 실현되고 있다. 즉 죄악이 만연된 이 세상에 구세주께서 오시어 우리를 죄악과 율법과 죽음의 처지에서 해방시키신다. 이렇게 우리가 죄악과 율법과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구원이 된다.

 

그런데 사실 그분은 "평화의 왕"(이사 9, 5)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무력으로 평화를 이룩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써 평화를 이룩하신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듯이 무력과 권력에 의해 위장된 평화는 비참하게 깨어지는 것을 본다. 더구나 무력으로 권력을 누린 자들의 말로는 우리 현실 세계 속에서도 비참하고 더없이 초라하게만 보인다. 왜냐하면 그 위장된 평화 속에는 거짓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부조리가 성하고 불공평한 상태 속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금전 만능주의, 쾌락주의 등 온갖 종류의 무신론에 의해 우리의 자유 의지는 속박당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주체성을 상실한 현대인들, 특히 청소년들은 여러 가지 혼란된 사상에 의해 올바른 판단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구원이 없는 죄의 상황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셨다. 여기에 바로 구세주 성탄의 큰 의미가 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인간의 나약함을 아셨고 온갖 종류의 혼란에 시달린 우리에게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 3)라고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주위에서 재물을 많이 가진 자나 혹은 재물을 못 가진 자나 마음으로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에게 겸허하다는 뜻이다. 인간의 욕망에는 한이 없다. 성경을 통해 볼 때 예수님도 물론 욕망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그 욕망은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욕망이었다.

 

이 시대에 오신 구세주의 탄생은 진정으로 우리 마음에 평화와 행복을 주는 기쁜 소식 그 자체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고 "우리와 함께 계시다(임마누엘)."(마태 1, 23)라는 이 사건이야말로 전무후무한 사건이 될 것이다. 더구나 보잘것없는 말구유에서 탄생하심으로써 가난한 이들과 한 형제가 되셨다는 것에서 더 한층 우리와 가까워진다. 우리는 이러한 구세주 탄생의 의미를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다. 성탄이 우리 마음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구세주를 맞이하는 우리는 진정 '가난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를 맞이하자. 그리하여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누구보다도 먼저 듣게 된 목동들의 순결한 마음과 같이 우리도 가난한 마음으로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며 구유에 태어나실 아기 예수께로 어서 가 경배하자.

 

 

●천사의 찬송(가톨릭 성가 107번)

 

천사 찬송하기를 새로 나신 주님께

찬미 영광 드리세 우리 주님 나셨네.

온 세상의 백성들 기쁜 노래 불러라.

이 세상을 구원할 아기 예수 나셨네.

이 세상을 구원할 아기 예수 나셨네.

 

예수 우리 구세주 탄생함을 보고서

천사 경배하였네 만민 경배하여라.

의로우신 예수는 세상의 빛 되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 왕께 경배드리세.

새 생명을 주시는 왕께 경배드리세.

 

천주 성자 예수는 하느님의 뜻대로

동정녀께 나시어 우리 중에 사셨네.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나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시는 왕께 경배드리세.

부활하게 하시는 왕께 경배드리세

 

제47단상 :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루가 12, 49).

 

1. 구원의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

이 말씀은 예수님이 평소에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루가 24, 37)라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보아 상당히 역설적이며 듣는 이로 하여금 아주 도전적이며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러면 예수님이 타오르기를 바라시는 이 불은 어떤 불길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을 위한 구원의 불길이다. 그 구원의 불은 죄와 온갖 허물을 살라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빛과 열을 발산하는 불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루가 12, 50)라고 하신 것은 이러한 염원을 간절히 표현한 말씀이라고 보겠다. 이 불은 세상의 이익과 권력 그리고 명예를 탐하는 이들에게는 분열이 일어나게 하는 불이다. 그리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진정한 평화를 위하고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선과 악의 싸움은 필연적이다. 선과 악이 싸우고 있지만, 선의 불꽃이 악의 불꽃을 이기는 날 진정한 평화가 시작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이 악을 이길 수 있는 날까지 사랑의 불과 정의의 불을 켜고 평화의 그 날이 오도록 예수님과 함께 가는 사람들이다.

 

2. 불의 유익성과 파괴성

그러면 "불"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성질을 갖고 있을까? "불"은 생활 속에서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불은 먼저 캄캄한 곳에서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된다. 그리고 추울 때는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여 주고 부드럽게 한다. 그리고 불은 음식을 끓여 맛있게 해준다. 그러나 불은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고 모든 것을 파괴하고 인간의 생명까지도 빼앗는 무서운 결과를 낳게 한다. 그 밖에 불은 또한 마음속에서도 타오르는데 남녀간에 애정의 불이 붙으면 뜨거운 사랑의 불꽃이 필 것이며, 또 미워하는 사람들 사이에 붙으면 증오의 불길이 치솟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성전 정화를 위해 채찍을 드신 예수님의 마음에서 거룩한 분노의 불길을 볼 수 있다.

 

타는 불에는 또한 혼이 있는 듯하다. '타워링'이나 '분노의 역류'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불'은 마치 어떤 혼이 있는 듯이, 인간의 잘못으로 저질러진 과오를 엄청난 대가로서 보상받으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만다. 그러나 그 파괴의 불도 생명을 구하려는 사랑의 불 앞에서는 사그라지고 불길이 잡히게 된다.

 

3. 마음을 정화시키는 불

우리 속담에 "좋은 쇠는 불 속에서 단련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불은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놔두지 않고 빛과 열을 내어, 빠른 속도로 다른 모양으로 변화시킨다. 이 단련시키는 불은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타올라 편협주의와 아집을 태우는 불이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 생활 안에서도 악을 태우는 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불"은 심판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시어 하늘 나라를 위한 선택의 길을 제시한 이상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하는 기로에서 갈등을 겪게 한다. 결국 한 가정에서도 분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리스도교 박해 시절 초대 교회 때에 그러한 경우가 많았으며, 또 우리 나라 천주교 도입의 선구자이신 이벽 선생도 바로 이러한 마음의 '불길'로 인해 돌아가셨다. 즉 그의 부친은 이벽이 당시 나라에서 금하던 천주교 사상의 중심 인물임을 알고 방 안에 가두고 절대 못 나가게 했다. 이벽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교리를 전파하고 싶은 마음이 불 같았지만 그렇게 하면 부친이 목을 메어 자살하겠다는 말에, 결국은 방 안에서 답답하게 지내다가 그 '불 같은 마음'을 삭히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다. 만일 이벽 선생이 천주교 활동을 하도록 부친이 허락했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였을까? 하지만 세상은 자기 뜻이 옳다 해도 가족의 반대나 나라의 반대로 인해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벽 선생이 가졌던 하느님 사랑의 불꽃은 오늘날 우리 나라 한국 교회 신앙의 뿌리가 되고 있다.

 

4. 그리스도인이 태워야 할 사랑의 불꽃

이 지구상에는 질량 불변의 법칙이 있다. 모든 물질은 없어지지 않고 다만 다른 형태로 변화된다는 뜻이다. 불이 지금 보이는 것을 태워서 보이지 않는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듯이 우리도 예수께서 원하시는 마음의 불을 지펴 죄와 허물을 태워 버린다면 이제 하느님 말씀으로 빛과 열을 내는 믿음의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의 불 그리고 우리의 온갖 죄와 허물을 태우는 불이 타오르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동참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희망하자.

 

제48단상 : 세상에서 생명의 빵이 되는 봉사와 희생 정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 51).

 

유난히 무더웠던 1994년도 여름은 가뭄과 태풍이 겹쳐 참으로 어려운 때였다. 또한 하늘과 바다와 지상에서도 대형 사고가 있었지만 이러한 사고 중에서 기억에 남는 미담이 있어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다.

 

1. 배 도미니코 신부님의 살신 성인

바다에서의 사고 중 기억 나는 일이 있다. 내가 여름 휴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아버님으로부터 수원 신학교의 학장이신 배문환 신부님이 지난 8월 5일 돌아가시고 8월 8일 당신의 영명 축일인 도미니코 축일에 장례식을 치렀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처음엔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한마음 수련장에서 신학교 교수들의 세미나가 있을 때 건강하신 모습을 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뜻밖에도 바다에서 돌아가시다니, 사람의 목숨이란 한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고, 사람의 운명은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암사동 본당에서도 그 해 여름철에 10명 가까운 노인들이 노환과 질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들이 살아 생전에 노인 대학에 열심히 다니고 선종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과연 삶과 죽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지,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지, 그리고 죽음은 어김없이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인지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수원 신학교 학장이셨던 배문환 신부님은 61세의 연세로 돌아가셨지만 어떤 질병이나 노환으로 돌아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오히려 당신의 생명을 바쳐 죽어 가던 사람들을 살리시고 대신 죽으셨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익사 직전에 있던 세 부인을 차례차례 건지시고 당신은 탈진하여 숨을 거두셨다. 나는 당시 수원 신학교에 일 주일에 한 번 강의를 나가고 있었으므로 그 때마다 신부님의 인자하시고 자상하시던 모습이 생각나 신부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더욱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가장 먼저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신부님은 진정 "사제답게 돌아가셨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신부님의 마지막 처신이 당신의 생명을 바쳐 다른 이의 목숨을 구하신 것이니 이 얼마나 사제다운 죽음을 맞이하신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러한 거룩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배 신부님은 바다에 빠져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세 부인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시고, 자신의 몸을 사리거나 돌봄도 없이 자신을 바다에 던져 거센 파도를 헤치며 부인들을 차례차례로 건져 내셨다. 그러는 중에 당신은 바닷물을 먹고 힘이 탈진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얼마나 멋있는 신부님이신가! 우리는 흔히 우리 사회가 인정이 메말라 가고 각박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러한 사랑의 정신을 가진 사제가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참다운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 산 교훈이었다. 배 신부님의 죽음은 진정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사제적 죽음의 모습이었다. 나의 죽음의 모습도 그러한 사제적 죽음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해 본다.

 

2. 대한 항공 사고 시 156명의 승객을 살린 여승무원의 봉사 정신

그 해에 KAL기 사고가 있었는데 거기엔 승객 156명을 살린 여승무원이 있었다. 그녀는 비행기가 폭발하기 전 5분 동안 민첩하고 지혜롭게 행동하여 150여 명의 생명을 구해 냈다.

 

그녀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한 희생 정신이 수많은 생명을 구해 낸 것이다. 나만 살겠다고 서로들 입구로 몰리다가 입구가 막혔더라면 수많은 사람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질서가 살렸고 또한 승객들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안내를 맡았던 여승무원의 희생 정신과 봉사 정신이 살린 것이다.

 

3. 모든 희생 정신의 기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 51) 하고 말씀하셨다. "이 빵을 먹는 이는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빵은 오늘날 성체 성사 안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성체 성사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은 교회의 직무를 통해 전달된다. 빵은 예수의 살과 피를 이루고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 희생의 대가이다.

 

하느님의 능력에 신뢰하고 감사하는 일인 성체(Eucharistia) 성사는 예수께서 자신을 하느님께, 그리고 모든 인간들에게 온전히 내어 주셨음을 예수님의 행위 안에서 기억하는 일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봉헌할 때 성체 성사는 지속된다. 예수님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교회는 봉사 행위 안에서 그 존재 의의가 나타나며 성체 성사는 생명의 원천이 된다. 교회는 곧 섬김의 공동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재현한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마르 14, 22-23 참조).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요한 13, 14).

 

4. 예수님처럼 변화되어야 할 우리

흔히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영혼을 상대방의 영혼에 심어 주고 싶어한다. 즉 자신의 존재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기를 원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셨기에 우리 인간들의 영혼 속에 자신의 존재를 심어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자신의 살과 피 그리고 자신의 사랑의 정신을 담은 성체 성사의 방법을 택하신 것이다. 성체 성사를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존재 한가운데 현존하신다. 이에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양육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이 일방적인 짝사랑이 되지 않도록 성체 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하겠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정신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예수님의 편이 되는 것이다.

 

성당에서 성체를 영하면서 행동과 마음은 세속적이거나 이기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살과 피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음식인 성체를 영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배문환 신부님과 156명의 생명을 살린 대한 항공 여승무원과 같은 희생 정신을 가져야 하겠다.

 

사람은 평소에 좋은 일을 하고 살아야 그 죽음의 모습도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이 평소에 좋은 일을 하지 않다가 죽을 때 갑자기 희생한다고 하여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분은 평소에 항상 희생과 봉사 정신 그리고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평소와 같은 마음으로 행동한 것이 타인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우리는 성체를 영할 때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노력하자.

 

제49단상 : 세상의 빛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 16).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우리 신자들로 하여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각자는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세상에서 밝게 빛나는 하나의 빛이 되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빛이란 어둠을 밝혀 주고, 진실을 나타나게 한다. 이 세상엔 빛이 있어야 하며 또 빛을 필요로 한다. 이 세상엔 아직도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 많으며,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다.

 

1. 대형 우주 거울의 빛

우리가 비추는 빛은 그리스도의 빛이다. 얼마 전 일간지에 러시아에서 직경 25미터의 대형 거울을 우주선에 부착하여 태양 빛을 우주 공간에서 반사하여 지구를 비추게 하는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우주 거울은 지구의 폭 4킬로미터를 보름달 밝기로 비추어 준다고 한다. 그 빛을 본 사람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또 하나의 인공 보름달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그 인공 보름달이 햇빛을 받아 지구의 어둠을 밝히듯이,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것과 같다. 우리 각자가 자신이 처해 있는 주위를 밝힌다면 그리고 그 빛들이 많아진다면 비록 자기 빛이 강렬하지는 못해도 여럿이 비추면 환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이란 그리스도의 애덕을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세상에 빛을 준 사람들에 의해 살기 좋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지만, 반면에 악을 일삼는 사람에 의해 어둠과 불행의 그림자도 많이 드리워져 있다.

 

2.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것들

어둠의 세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으로서 가야 할 길을 올바로 가지 못하게 하여 그로 인해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다. 하느님의 길을 올바로 가지 못하는 사람이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어둠의 그늘이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간다. 또 굶주림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 또 천재 지변으로 인한 불의의 사고, 그 밖에 부정 부패와 윤리적 타락이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중에서도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요인은 각자가 맡은 자기의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는 데 있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부부로서 가정을 충실히 이끌어 갈 책임이 있고,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맡은 의무가 있으며 기업에서는 기업가와 노동자가 맡은 의무가 있다. 또 국가는 국민을 위해 해야 할 의무가 있고, 또 국민은 국가에 대한 의무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신자들, 더욱이 모든 인간들은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종교적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는 자유(自由)의 한계 내에서 자기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요인은 자기의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고 이기주의적인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괴롭고 어두운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3.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빛이 된다."는 것은 남을 생각해 주는 데서 시작한다. 즉 예수님 말씀처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마태 19, 19)을 가질 때 어두운 세상은 밝아지게 될 것이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다면 이웃의 배고픔이 바로 자기의 배고픔으로 느껴지고, 이웃의 슬픔이 바로 자기의 슬픔처럼 생각되고, 이웃의 고통을 바로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말이나 생각으로써뿐 아니라 실천하는 신앙을 말한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동한다면 이 세상을 밝혀 주는 빛의 행동이 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의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너의 상처는 금시 아물어… 살려 달라고 외치면, '내가 살려 주마.' 하리라. 너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 오리라."(58, 6-8)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에 빛을 비춘다는 것은 자기의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이 되며, 얼굴과 몸에서는 빛이 나고, 그가 거처하는 장소의 분위기에서도 사랑의 향기가 나게 된다.

 

우리 동양 격언에도 "덕불고(德不孤)"라는 말이 있듯이,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결코 외롭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랑의 덕"을 쌓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덕을 본받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 12)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덕, 인류를 구원하시는 빛이신 그리스도의 덕을 따르자. 이웃을 자기 몸처럼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덕성이야말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도 그리스도의 빛을 비출 수 있다. 마치 태양의 빛으로 모든 사물을 비추듯이, 그리스도의 애덕의 빛을 비추는 사람은 사랑이 결핍된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꽃피게 할 것이다.

 

2000년대의 복음화를 준비하는 우리 신자들은 각자 자기의 신분과 위치에서 자기 책임을 다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생각하고 아낌으로써 이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각자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덕을 간직하고 그 빛을 세상에 비추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자.

 

제50단상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요한 1, 30).

 

1.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요한 복음에는 예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 29)이라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나온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미사 때 영성체하기 전에 고백하는 예수께 대한 호칭이자 구원적 말씀이라고 보겠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 또한 사제는 축성된 성체를 높이 들고 영성체 직전에 신자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흠숭하며 받아 모시게 한다.

 

예수님의 칭호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라는 것은 그분의 신분과 신적 사명을 아주 잘 드러내 준다고 보겠다. 이러한 말을 한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서 진정 구세주이심을 증언하는 동시에 그분의 신적 사명을 예비해 준 구세주의 선구자라고 보겠다.

 

성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와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구원의 역사는 죄로부터의 해방의 역사라고 보겠다. 죄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인간을 멸망시키는 것이므로 죄로부터 구원되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며, 평화와 행복이다. 예수께서 물질적 풍요나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없애심으로써 인류에게 참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신다는 것이 중요하다.

 

2. 죄의 역사와 선의 역사

죄의 역사는 인류의 초창기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와 함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역사 또한 인류의 초창기부터 시작되어 계속되고 있다. 구약 시대엔 예언자들과 성자들을 통하여, 그리고 신약 시대엔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그리고 지금 교회 시대엔 교회 내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신도들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신다. 우리 신자들은 세례받았을 때 죄를 끊어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또 세례를 통하여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하느님의 편이 되기로 약속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를 통해 죄의 사함을 받고 은총의 길을 가면서도 때때로 또다시 죄의 유혹에 빠져 허덕이고 괴로움에 빠진다. 어떤 면에서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죄의 세력은 우리 주변의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으면서 우리를 악의 길로 빠지게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악의 세력과 죄의 세력이다. 죄와 악은 개인적으로는 자기 양심을 분열시키고 사회적으로는 공동체의 선을 깨뜨리고, 국가적으로는 전쟁을 일으켜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파괴하며 인류를 불행과 비참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3. 죄의 형태들

우리 나라에 수백만의 사상자를 내고 또 지금까지 1천만이 넘는 이산 가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소식도 전하지 못하게 된, 또한 소련, 중공, 일본 등지에서 소수 민족으로 서러움을 받으며 따로 떨어져 살도록 만든 6․25 전쟁은 김일성의 야심적 교만이 그 원인이 된다. 또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에서는 이미 수백만이 기아와 전쟁으로 죽고, 지금도 기아로 죽어 가고 있는 비참한 현실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런 것도 서로 양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인간의 교만과 뻣뻣한 마음 때문이다. 그것이 자기 국민을 굶어 죽게 하는 것이다. 또 중동의 이라크에서도 서방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이 생겨 그 가족들이 울부짖게 만들었는데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담 후세인이 타협하지 않고 지지 않으려고 또 혼자 그 지역에서 패권을 잡아 보려는 자만심이 그러한 불행을 일으킨 것이다.

 

이렇게 큰 불행과 비참함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죄의 세력은 근원적으로 볼 때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또한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이기적이며 교만한 마음과 함께 나타나 큰 세력이 되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4. 죄악의 일곱 가지 뿌리

인류의 원조이신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처럼 높아지리라." 하는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의 금령을 어기고 인류 전체를 원죄의 사슬 속에서 허덕이게 했다. 그리고 카인은 하느님께서 자기 제사는 안 받아 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아 주셨다는 데서 동생 아벨의 선을 시기한 나머지 살해까지 했다. 역사상 인류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전쟁들과 온갖 형태의 파괴 행위, 보복 행위 그리고 자연 환경 파괴도 역시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악의 뿌리들이 자라나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윤리 신학적으로는 칠죄종이라 하며 일곱 가지 죄의 근원을 말한다. 1) 교오(교만하고 오만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2) 간린(하는 짓이 소심하고 인색한 태도), 3) 미색(성욕의 노예가 되어 사물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는 마음), 4) 분노(분을 삭히지 못하고 몹시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름), 5) 탐도(음식이나 재물을 지나칠 정도로 먹고 마시는 일), 6) 질투(자기보다 우월하고 아름다운 다른 사람의 선을 시기함), 7) 나태(게으르고 성실하지 못하여 일을 그르치는 일)를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 있다가 이기적이며 자신만을 생각할 때 나타나 사람들에게 큰 불행을 주고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하게 한다. 예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 되신 것은 이러한 죄의 근원을 항상 경계하도록 가르치셨고 그것을 선의 무기로서 극복하도록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선의 무기는 곧 성령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하며, 깨끗한 마음으로 정의와 사랑과 일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는 삶을 말한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할 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세상의 죄를 없애고 평화와 행복과 일치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게 될 것이다.

 

5. 죄로부터 구원된 이들의 행복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죄로부터 구원된 이들의 행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하느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두신 사람들은 행복하다. 주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도 행복하다…"(4, 7-8).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5, 6-10).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6, 17). "이제는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여러분은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6, 22-23).

 

제51단상 : 신앙의 걸림돌이 된 예수의 십자가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1고린 1, 22-24).

 

일 년 중 교회에서 성사를 집전하지 않는 날이 있다. 그 날은 미사 성제도 봉헌하지 않고 어떠한 성사도 거행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만을 묵상하며 보내는 바로 성금요일이다. 우리는 성금요일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하신 수난을 듣게 된다.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는 "수난당하는 야훼의 종의 노래"를 부르며 장차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당하실 수난과 또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영광을 예언한다(이사 52, 13-53, 12). 그리고 신약의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수난을 통해서 하느님께 복종하고 마침내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이룩한 대사제라고 말한다(히브 4, 14-16; 5, 7-9). 그리고 요한에 의한 수난기에서는 구약의 예언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 십자가의 역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병든 자를 낫게 해주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며 또 하늘 나라의 신비를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때리고 천대하여 마침내는 십자가형에 처하는 죄악을 범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수난이야말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것이 되었고,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 온 인류가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수난의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다. 산헤드린 재판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하는 물음에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너희가 말하였다."(루가 22, 70)라고 대답하심으로써 당신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확실히 드러내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수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더구나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고 삼 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던 제자들마저도 예수께서 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으셔야만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체포되었을 때 다 도망 가고 또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배반까지 하였다.

 

2. 죽음과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

진정 십자가의 죽음은 그들에게 신앙의 걸림돌이 되었다. 그 당시 십자가형이란 가장 잔인하고 지독한 형벌이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실시한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에 반역한 노예들을 처형시키는 것이었고, 한편 유다인의 율법에서는 간음한 사람이나 신성 모독죄를 범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인 후에 그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그들이 하느님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로마법에 따라 십자가형을 하기 위해선 우선 매질을 했는데 그것은 온몸에 피가 날 때까지 매질하여 그 처형받을 사람이 실제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빨리 죽게 하여 그 고통을 덜어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매질이 끝나면 다음 절차로서 죽을 사람이 처형장까지 십자가 나무를 메고 갔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나무를 메고 골고타 언덕까지 가시는 동안 세 번이나 넘어지셨는데 이것을 보면 그 매질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3. 구원과 축복의 상징인 십자가

그러나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이러한 고통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사뭇 찔리고 우리의 악 때문에 으스러진 것이다. 진정 예수님이야말로 그 수난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를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를 몸소 맡아 지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셨습니다…."(2, 8-9)라고 찬양하고 있다.

 

정말 십자가의 이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고린 1, 22-23)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에게는 그분이 곧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라고 한다. 이렇게 십자가가 갖는 의미는 너무도 크고 깊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 아니라 축복과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자들은 예수님을 모셨던 십자가를 경배한다. 역사상 십자가를 경배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적이었던 리치니우스와의 밀비우스(Milvius) 다리 전투에서 "십자가 표로써 승리(in hoc signo vinces)"를 거둔 이후부터였다. 그와 관련하여 또한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친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의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했는데 이 때부터 십자가 경배가 촉진되었다.

 

이제 십자가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상징이며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진정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영광을 받았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러러보며 우리에게 매일 지워지는 십자가를 지고 따름으로써 십자가의 영광, 곧 부활을 향해 가야 할 것이다.

 

제52단상 : 신앙의 결단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 68).

 

1. 누구를 택할 것인지 오늘 택하시오

신앙에는 믿음이 동반하지만 때로는 의심과 회의가 따른다. 그래서 진정한 신앙에는 의심과 회의를 넘어서는 결단이 요구된다. 일찍이 여호수아는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여호 24, 15) 하고 당시 백성들에게 신앙의 결단을 촉구한 바 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하느님의 인도로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그중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인의 신을 섬겼다. 즉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의 문화보다 더 높은 문화가 있었고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가나안 생활이 주는 물질적인 안락함에 빠져 하느님을 저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을 보고 여호수아는 "이방인의 신을 버리고 야훼만을 섬기자."라고 신앙의 결단을 요구했다.

 

2. 당신들도 떠나가겠습니까?

요한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라왔지만 성체에 관한 교리를 듣고는 믿을 수 없다고 떠나갔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가겠느냐?"(요한 6, 67) 하고 물어 보신다. 이 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 68) 하고 대답한다.

 

3. 의심과 회의를 넘어선 신앙의 결단

이렇게 성서에서는 두 가지 유형의 신앙 결단과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첫째는 물질적 사고 방식을 극복해야 하는 신앙의 결단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믿어도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고 아무런 경제적인 이득이 없다고 해서 다른 종교를 찾거나 미신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오직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는 태도이다. 이것은 참된 신앙의 태도가 아니다.

 

둘째로 천주교의 가르침을 교리상으로 의심하고 회의하다가 신앙을 갖지 못하고 결국은 신앙을 저버리는 경우가 있다. 사실 천주교 교리 중에는 인간의 힘만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교리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의 신비를 결코 다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하느님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미 그 하느님은 하느님의 존재성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파악한 내용도 지식에 불과하지 신앙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는 의심과 회의가 따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결단이 요구된다.

 

우리 현대인들에게도 신앙의 결단이 매순간 요구된다. 오늘날과 같은 물질 만능의 사고 방식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참된 하느님만을 찾아야 한다는 것과 예수께서 계시해 주신 것을 굳게 믿는 신앙의 결단이 요구된다.

 

제53단상 : 신앙의 눈

 

"눈멀었던 사람이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 믿습니다.' 하며 그는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다.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9, 35. 38-39).

 

성서에서는 맹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시력을 되찾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요한 복음에서도 태어날 때부터 아무 것도 못 보는 한 맹인의 눈을 예수께서 뜨게 해주신 일이 나온다(9, 1-41).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일을 안식일에 했다는 이유로 마음이 완고한 유다인들로부터 고발당한다. 예수의 비판자들은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 행위를 보고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참뜻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을 보며, 하느님의 능력을 갖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우리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능력을 갖고 계시며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하겠다.

 

1. 맹인들의 서러움과 한스러운 처지

우리 중에는 어느 누구도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는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많은 맹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러한 능력을 갖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수많은 맹인들의 서러움과 한을 풀어 줄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고, 맹인들은 그 불쌍한 모습으로 존재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고 아프게 한다.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예수께 질문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그러한 의문을 품고 그러한 질문을 안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맹인도 아니고 건강하니까 그런 것에는 신경을 안 쓴다 하며 무관심하기에는 같은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누구든지 맹인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고, 그들도 우리 정상인들처럼 세상의 자연 사물과 물건들, 동물들, 공중의 새들, 하늘, 바다 등 형형 색색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2. 성모 자애 재활원의 맹인들

나는 몇 년 전 '성모 자애 재활원'을 방문하여 몇 차례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집은 노원 본당 옆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몇 동의 연립 주택에서 여러 세대의 맹인 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 재활원에도 성당이 있었다. 마침 맹인들을 위한 미사가 시작되기 전이라 어느 수녀님이 그들에게 성가를 지도하셨다. 그 때 부른 성가가 220번 '생활한 제물'이었다.

 

주 예수께 드리는 생활한 제물

나 어찌 합당하게 마련하오리

인내와 친절 다하여 내 이웃에 봉사하리.

 

주 예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

나 어찌 합당하게 마련하오리

겸손과 온유 다하여 내 이웃과 하나 되리.

 

주 예수께 드리는 사랑의 제물

나 어찌 합당하게 마련하오리

일치와 평화 이루어 내 이웃을 사랑하리.

 

맹인들은 앞은 안 보였지만 그리고 서로를 볼 수 없었지만 열심히 성가를 불렀다. 성가를 지도하는 수녀님의 목소리도 맑았지만 그곳에 참여한 맹인들의 목소리는 정말로 우렁차면서도 맑고 깊은 호소력을 담고 있었다. "하느님, 제발 좀 보게 해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며 부르는 그들의 성가 소리는 하느님께 무조건적이고 애절한 자비심을 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미사 중에 하는 경문을 대부분 외우고 있었고 또 밝고 희망 차게 힘찬 목소리로 응송을 바쳤다. 또 그들 중에서 점자 성서로 제1 독서와 제2 독서를 읽었는데 그 또한 힘차고 밝은 목소리였다. 맹인들과 함께 한 그 때의 미사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간절하고 절실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미사 중에 왜 그들은 앞 못 보는 맹인으로 태어났으며, 한평생을 그 불편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이 뜨여 세상을 본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그런데 세상의 만물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도 그것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고 하느님께 고마움의 표시도 못하는 사람들은 진정 눈은 있어도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정신적 불구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사물을 볼 수는 없지만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마음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그 맹인들은 반대로 신앙의 눈이 열린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3. 신앙의 눈을 뜬 맹인

우리는 맹인들의 신앙을 보면서 그들도 육신의 눈을 가질 수 있도록 교회에서 벌이는 한마음 한몸 운동을 통해 안구 기증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또 모든 아름다운 사물을 볼 수 있는 우리 정상인들은 보다 더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맹인들의 손과 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생각해 보아야겠다.

 

요한 복음(9, 1-11)에서처럼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이 하신 일에 눈멀어 있고, 하느님의 업적을 보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보고 신앙의 눈을 뜬 맹인과는 반대로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예수께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크게 대조를 이룬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앞 못 보는 맹인이 눈을 뜨게 된 것은 기뻐하지 않고 다만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우리도 법이나 제도를 내세워 하느님의 본질적인 사랑 행위에 눈이 어두어져서는 안 되겠다. 하느님의 뜻은 법이나 제도의 엄격한 준수에서가 아니라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제54단상 : 신앙의 신비를 이루는 미사 성제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 48-51).

 

우리는 미사 중에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축성된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데, 이 성체 성사는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칠성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성사이다. 예수님은 이 성체 성사를 세우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하여 알려 주셨다.

 

1. 기적의 빵에서 생명의 빵으로

예수께서는 성체 성사의 신비를 이루시기 위해 사람들을 단계적으로 준비시키셨다.

 

먼저 루가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다(9, 11-17).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빵의 기적을 보이시면서 그 육신적인 빵뿐만이 아니라 장차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영신적인 양식으로 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즉 한번 먹으면 없어지고 마는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양식으로서 당신 자신을 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이러한 빵의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6, 27). 그리고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 35)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6, 53-57) 하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빵, 생명의 양식임을 거듭 강조해서 말씀하셨다.

 

제자들과 그곳에 모인 유다인들은 이 말을 듣고 어떤 이들은 떠나가고 또 믿지도 않았다. 그러자 예수님은 거듭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가겠느냐?"(요한 6, 67) 하고 물어 보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생명의 빵으로 주시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의 말씀이기에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가장 귀한 선물이다. 그리고 일찍이 구약에서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찬양과 제사를 지낸 것처럼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에 빵을 당신의 몸으로 축성하고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축성하여 제자들에게 내어 주셨다.

 

이렇게 기적의 빵을 통해 보여 주신 예수님의 의도는 이 최후의 만찬 때에 가서 생명의 빵으로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체와 성혈의 성사이다.

 

2. 미사 중에 재현되는 성체 성사

오늘날도 우리는 미사 때마다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이루어 나누어 먹고 마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의 몸이며, 영원한 생명의 빵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모심으로써 하느님의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 56). 또한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 57). 우리가 육신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밥을 먹듯이, 하느님 안에서 영신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체를 받아 모셔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마음으로 타당한 준비와 함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에게 영신적인 힘을 주시며 하느님 안에서 참된 생명을 유지시켜 주신다.

 

3. 밀떡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현존하는 성체와 성혈의 신비

우리 눈에는 한낱 밀떡과 포도주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축성된 밀떡과 포도주에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몸과 피라는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다. 그러기에 사제는 미사 중에 밀떡과 포도주 위에 축성 기도를 바치고 성체와 성혈을 이루고 난 다음 신앙의 신비임을 선포한다. 그러면 교우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하고 신앙의 응답을 한다.

 

4. 성체 성사는 교회 신앙의 최대 보화

우리 교회 안에 최대의 보화가 있다면 그리고 현대에 있어서 최대의 기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날도 미사 성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성체 성사라고 볼 수 있다. 이 성체 성사를 통해서 우리 신자들은 하느님 안에 한 자녀로서 일치를 이루게 되며, 악을 멀리하고 하느님 안에서의 신적인 생명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 56)라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며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당신의 몸과 피를 이루어 주신 생명의 양식이다. 우리는 미사 성제를 통해 재현되는 성체께 존경을 표하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드리자.

 

제55단상 : 아가페적인 하느님의 사랑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요한 15, 12-14).

 

1.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 없이 베푸는 헌신적인 사랑이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 상호간의 사랑과 관련된 것이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남녀간의 육체적인 사랑(Eros)도 있고, 또 지식을 사랑하는 철학적인 사랑(Platonic love)도 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사랑은 보편적이며 헌신적이고 봉사적이며 조건 없는 사랑(Agape)이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것도 이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셨고 우리 인간도 이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하느님 사랑의 보편성에 대해서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사도 10, 34-35).

 

2.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또 착한 사람이나 죄인이나 그 모두가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다. 하느님은 우리 중에 어떤 사람도 저버리거나 멸시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다 받아 주신다. 다만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구약 성서에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해 공포감이나 불안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엄격한 재판관으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대죄를 지었는지를 따지시고, 대죄를 지었을 때는 가차없이 처벌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인생의 고통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도피처로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죽은 후의 내세에만 집착하고, 이 현세는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길이라고만 생각하여 현세의 중요성과 현실을 포기하는 경향도 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도덕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하기도 한다. 즉 하느님이 계시니까 사람은 착하게 살고 악을 피할 수 있다는 인생관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들은 부분적으로는 옳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말해 주지는 못한다.

 

3.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 9)라고 말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만이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 또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1요한 4, 7참조).

 

그런데 성서를 통해 볼 때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며 모든 인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헌신적이며 조건 없는 사랑으로 드러난다. 즉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우리 인간들을 위해 내어 주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자신을 비우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고 그 사랑에 바탕을 둔 새 계명을 주셨다. 즉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 17)라고 말씀하신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이웃들간의 사랑이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랑도 또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요한 15, 9).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 12).

 

4.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웃을 위한 희생적 봉사적 사랑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알아야겠다. 물론 그분의 넘치는 사랑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마는 다만 몇 가지로 살펴보면 헌신적이며 봉사적이고 자기 자신을 조건 없이 내어 주는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은 스승이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는 "너희는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봉사적인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다. 또 한편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라고 말씀하셨다. 즉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 밖에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은 많이 있지만, 이러한 봉사적, 희생적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새 계명이다. 이러한 헌신적이고 봉사적이며 조건 없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또 인간적으로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면 가능해진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에 근거해야만 남을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의 자양분을 받아야 한다.

 

5. 우리는 사랑 나무이신 그리스도로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사랑의 많은 열매를 맺는다

마치 포도나무로부터 포도 열매가 탐스럽게 열리듯이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사랑 나무이신 예수께 머물러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 15, 9) 하고 권고하신다.

 

우리는 예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으로 세상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요한 15, 16) 하고 사명을 주신다. 그 썩지 않을 열매는 사랑의 열매를 말한다. 사랑만이 썩지 않고 영원히 남을 수 있다. 온갖 탐욕과 이기심의 열매는 부패하고 썩기 마련이다.

 

6. 사랑의 구체적 표현인 불우 이웃을 위한 사랑의 대바자회

요즈음처럼 사회가 어수선할 때일수록 썩지 않을 사랑의 열매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웃을 위한 사랑이 요구된다.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부모 없이 어린 몸으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소년 소녀 가장들, 여러 형태의 장애인 가정들, 아버지나 어머니의 불화나 사고 혹은 이혼으로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못 받고 자라난 결손 가정의 아이들, 고아들, 은퇴 노인들 그리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는 여러 형태의 불우한 이웃들이 많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들의 처지를 생각하여 무슨 일이든지 사랑의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당에서 실시하는 불우 이웃을 위한 사랑의 대바자회도 진정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본당의 각 단체에서는 각자 맡은 일들을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서로들 귀중한 시간을 내어 봉사하고, 또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던 물건도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내놓으면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또한 이 사랑의 잔치에 귀중한 시간을 내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일도 사랑의 한 표현이 될 것이다.

 

사람은 돈과 재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얼마나 유용하게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된다.

 

제56단상 : 어둠 속에 비치는 큰 빛

 

"예수께서 헤로데 왕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그 때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2, 1-2).

 

교회의 축일 중에 별의 의미가 크게 부각되는 날이 주의 공현 대축일이다. 예수 성탄 때 동방 박사들을 인도했던 큰 별은 또한 상징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별이다.

 

1. 공현의 의미

'공현'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의 신성을 모든 민족들에게 보이셨다는 뜻이다. 성서에서는 세 가지 의미로 그리스도의 '공현'이 나타난다. 1) 예수께서 자신을 동방의 세 박사 이방인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일, 2) 또 하나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자신의 신성을 공적으로 나타내신 일, 3) 다른 하나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당신의 전능을 보이시어 유다인들 앞에서 공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 공현(Epiphania)이라는 말은 바로 임마누엘(Emma- nuel),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말과 연결된다. 이 말은 우리 인간들에게 기쁜 소식, 복음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슬픔에 동참하고, 우리 인간들을 영원한 천상 왕국에로 인도하기 위해 "나타나셨다"는 뜻이다.

 

2. 어둠 속에 비치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

일찍이 이사야서에서는 어둠에 싸여 있는 뭇 민족들의 구원을 위해 야훼의 영광의 빛을 비추는 날이 예언되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야훼께서 너만은 비추신다. 네 위에서만은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이사 60, 1-2).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에서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에 대해 "그 심오한 계획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다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한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에페 3, 6)라고 설명한다.

 

3. 그리스도는 하느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빛이시다

요한 복음 1장에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께 대한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1, 14).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1, 18).

 

이 요한 복음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일찍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신비를 알게 되었고,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뵙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 5)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1-14)라고까지 말씀하신다.

 

4.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큰 빛

주의 공현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당신 자신의 신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이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계시 중 가장 큰 계시이다.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동방의 세 박사는 그 당시에 천문학을 연구하던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별을 관찰하다가 아기 예수의 탄생과 함께 나타난 큰 별을 보고, 그 별빛의 움직임을 따라 여행하다가 마침내 구세주로 나신 아기 예수님을 뵙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런 영광을 뵙기까지엔 쉽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을 인도하는 별을 따라가며 여러 가지 난관을 겪고 헤로데의 유혹도 받았지만 오직 그 별의 인도를 받았음을 생각해야 한다.

 

5. 신앙의 별

그러므로 주의 공현 대축일은 우리 인간 각자의 성소를 생각하는 날이며,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날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그분을 뵙기까지 우리의 신앙의 노정을 생각해 보는 날이다.

 

나는 과연 어떻게 지금까지의 삶 중에서 어떠한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으며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는가? 이러한 신앙의 길 가운데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준 신앙의 별은 상징적으로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지금 그 신앙의 별이 예수께 가고 있는가?

 

우리 각자의 신앙의 상태는 각각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 푸른 창공에 환히 비추는 그 신앙의 별을 따라 예수께 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처음에 얼마 동안은 잘 따라가다가 그만 이것저것 한눈 파는 사이에 그 별을 잃어버리고 그 잃어버린 별을 찾아 헤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도대체 별이 나타났는지 없어졌는지 전혀 생각지도 않고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신앙의 별의 위치를 바라보자. 나는 과연 '신앙의 별'이 인도해 주는 대로 그 별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 또 그 별을 잃어버렸는지 혹은 그 별을 찾으려고 애쓰는지?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신앙의 별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따라 나서야 한다. 각자의 인생 길에 있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그 별을 찾아야 한다.

 

6. 신앙의 별을 따르는 길

그 별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거기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확실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배우고 묵상하는 것이다. 그분의 삶 자체가 우리의 별이 되는 동시에 우리가 가야 할 목표이다.

 

그 다음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길을 걸어갔던 분들의 삶을 따르는 것이다. 이 세상엔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기 위해 일생 동안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수많은 성인들이 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들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찾아 마침내 하느님께로 가고 하느님을 뵙기까지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마치 하느님 나라를 향한 나그네이며, 하느님께로 가고 있는 배와 같다. 교회는 세상 현실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인간의 품위를 되찾아 주려고 노력하며,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등대와 같이 온갖 험난한 풍랑을 헤치며 마침내 그 목적지인 하느님께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제57단상 : 어린양의 혼인 잔치

 

"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를 보고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 2. 11-12).

 

우리는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면 친지들과 친분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거나 약소하게나마 식사를 대접한다. 그것은 그 기쁜 일을 알리고 같이 기뻐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초대를 받고 참석한 사람들은 그 경사를 축하해 주고 기뻐해 준다. 그런데 만일 초대된 사람이 축하는 뒷전으로 미뤄 두고 먹고 마시는 것에만 정신을 판다면 그 잔치는 무례한 분위기로 빠지게 될 것이다. 또는 혼인 잔치에 와서 "누가 신랑이냐?" 하는 예의 없는 경우가 생긴다면 참으로 곤란해질 것이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잔치에서 내쫓으라고 하신다(마태 22, 11-14).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의 비유는 임금이 당신 아들의 혼인 잔치를 준비하고 사방에서 사람들을 초청하였다고 하는 바로 당신의 잔치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마태 22, 1-2 참조). 이 잔치는 일찍이 이사야에 의해 예언되었다.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 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리라.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이사 25, 6-7). 그 잔치는 인간을 위한 구원의 잔치이고 영원한 생명의 잔치이며 그러기에 기쁨의 잔치인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로써 이 잔치를 마련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차려 놓고 우리를 초대하신 이 잔치는 바로 우리와 함께 당신의 기쁨을 나누자는 것이고,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는 바로 이 잔치에 초대받고 참석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마태 22, 9)고 하셨다. 그러나 주님의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 중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내쫓겼다. 그 사람은 잔치에 참석하기에 그리고 주인의 기쁨을 같이 나누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아무런 열성 없이 습관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성당에 나오고 있는 사람, 주일 미사에만 참석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하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못하고 마음으로 예수님과 가까워지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기쁨의 잔치에 사람들을 청해 오는 데 힘쓰지 않는 사람들 역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다.

 

마음으로 또 외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참석한 이들이 과연 이 기쁨의 잔치에서 얼마나 기쁨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겠는가?

 

미사에서 또 신앙 생활을 통하여 기쁨을 못 느끼고 주님의 행복한 시간을 지내지 못한다면 우리를 이곳에 초대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반성하고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한량없이 풍요하신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필립 4, 19-20).

 

제58단상 : 영원한 생명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마르 10, 17).

 

인간은 유한하지만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영원한 삶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는 어떤 청년이 예수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10, 17)라는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히 끝없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참삶을 말하는 것이고, 현세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서 이루어질 삶을 말하는 것이다. 유사 이래로 이 영원한 삶에 대해서는 모든 인류가 추구해 온 것이고,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이 일생을 통해 탐구해 온 주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갖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께 달려와서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 청년은 부자이기 때문에 먹고 살기에 부족한 것이 없었고 또 그 나름대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렸을 때부터 잘 실천해 왔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청년이 계명을 잘 지켜 온 것에 대해서는 대견하게 생각하시고 칭찬하셨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셨다. 즉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라"(마르 10, 21).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현세적인 것에 애착을 갖지 않고 영원한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며,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해답을 들었지만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재물을 갖고 싶어하고 또한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본질적인 욕구가 있다. 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고 또 재물이 영생을 얻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의 행동을 보면서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마르 10, 23)라고 말씀하신다. 또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르 10, 25)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르 10, 26) 하면서 놀랐는데 우리도 이 말씀을 듣고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놀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마르 10, 27).

 

우리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느님 편에서 보면 가능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 인간 구원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의 힘으로 이룩된다. 물론 예수께서는 우리가 먹고 살아갈 일용할 양식까지 버리라고 요구하시지는 않는다. 우리는 먹고 살아가야 할 양식과 또 자녀들의 교육비, 집의 유지비, 또 내일의 삶을 위해서 얼마간 저축할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은, 그 재산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재산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큰 이해 관계를 가지고 그 재산을 관리하고 늘리는 데 마음을 쓰는 나머지 다른 사람의 빈곤한 처지를 외면할 수도 있고, 또 인간적인 의리보다는 돈에 더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물 자체는 오히려 사람을 기만할 위험이 많고 또 구원을 보장해 주지도 못한다.

 

이렇게 될 때 그 재산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이지 결코 물질적인 축복 그 자체를 나쁘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가치를 위해 투신할 것을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르 10, 30).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버림을 통해서 얻는 것이고,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 것이며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난 다음에 공의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심판받고 그 심판의 결과에 따라 영원한 생명이냐 혹은 영원한 벌이냐가 결정된다는 것을 믿고 있다.

 

우리 각자 과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버렸는지 또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또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서 지혜로운 생활을 해야 하겠다.

 

제59단상 :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루가 14, 26-27. 3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스승으로 모시고 제자로서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1. 스승과 제자

인류 역사상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해 왔으며, 문화와 학문, 종교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해 왔다. 스승, 선생님이라는 말은 먼저 진리를 깨친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제자'라는 직분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제자는 스승이 갖고 있는 사상을 전수받아 다음 세대에 스승의 정신을 이어 주고 그 뜻을 펼치게 한다. 예로부터 고매하고 인격이 높은 스승에게는 훌륭한 제자들이 모여 왔는데, 제자로 받아들여지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스승은 아무나 자기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후보자가 과연 자신의 뜻을 잘 따를지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보고 자기의 사상이나 가르침을 소중하게 전수해 주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뜻을 이어 갈 제자가 없으면 그 지혜를 전수하지 않았다.

 

2. 공자의 제자와 예수의 제자

유교의 집대성자인 공자는 인생 삼락(人生三樂)을 얘기할 때, 부모 형제가 무고하고,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고, 천하의 영재를 모아 제자로 삼아 교육하는 일이라 했다. 그래서 공자는 삼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세상에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사명을 이루려고 했다.

 

한편 우리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스승인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열두 제자를 친히 선택하셨다. 나중에는 그들 이외에 일흔 두 명의 제자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에는 신중하게 선택하셨는데 루가 복음에 보면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시고"(6, 12) 몸소 택하셨다고 나온다. 이 열 두 제자는 항상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생활을 함께 하고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웠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혹은 더 넓게는 일흔 두 명의 제자라 하더라도 공자의 제자 삼천 명보다는 수적으로 너무 차이가 난다. 이렇게 수적으로 차이가 나는 이유를 분석해 보면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수와 중국의 백성의 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또 제자가 되는 조건에 있어서도 분명 차이가 있다. 공자의 제자는 그야말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방법으로 수행하여 인간의 3대 현실적 욕망인 부귀와 권력과 공명을 추구하면 그것이 보장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는 공자의 제자와는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면 될수록, 그리고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려 하면 할수록 그만큼 인간의 3대 욕망인 부귀와 권력과 공명을 멀리해야 하며 바라지도 말 것이며 오히려 그것들이 주어진다고 해도 포기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루가 14, 33)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 바로 이 말은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마음의 갈등을 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부귀와 권력과 공명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버리라 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버려야 하는가."를 따질 것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말에 더 이상의 이유를 갖지 말아야 한다.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엄격한 조건이다. 그리고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리는 일에는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루가 14, 26)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 26)고 한다.

 

참으로 너무 엄격하고 어려운 길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 길을 가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은 누구시기에 이렇게까지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는 것일까? 이러한 면에서 그분의 독특하고 독보적이며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요구하는 조건이 너무 비인간적이고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을 따르고 그 뜻을 펼치기 위해 몸소 그러한 모범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 오셨지만 마음을 비우시어 모든 것을 버리시고 자신마저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이러한 길을 가시고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따를 때 마음의 참된 자유를 찾고 평화를 누리고 하느님으로 만족하고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었기에, 바로 그 길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몸소 체험하신 이 길이 진정 인간에게 참 행복을 주는 것이기에 그러한 길을 소신 있게 강조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길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 길은 고통과 수난만 있는 길이 아니다. 이러한 어려운 제자의 길을 겪고 도달하게 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축복된 삶이 있기 때문이다.

 

4. 십자가의 길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로

그리스도께서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를 지나 생명과 축복과 부활의 영광에 도달하셨듯이,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도 결국에는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한편 고통과 포기와 비움의 방법은 다만 하느님의 길을 더 잘 따르기 위한 한 방편에 불과하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승에서 고통과 포기와 비움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저승에서 행복과 만족과 영생으로 채워지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만일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들이 반대하고 방해가 된다면, 인간적인 정을 넘어선 절대적인 가치를 선택해야 함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영광된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들이 방해된다면 그러한 욕망마저도 기꺼이 포기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른 한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조건 부모 형제, 처자들을 미워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였는데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조건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자기의 가진 것을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부모와 처자와 형제 자매들이 나와 함께 하느님께 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고 힘이 된다면 그들을 미워할 이유가 결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무조건 이유도 없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재능과 능력, 세속적 지위와 명예, 그리고 부귀와 권력 혹은 인간 관계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되고 힘이 된다면 그것을 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소유하여 선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고, 또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며, 또 내가 버린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가진 바를 무엇에 활용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웃과의 인간 관계를 끊고 오직 하느님께 대한 개인적인 구원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취하고 있는 인간 관계 안에서 과연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관계로 선용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과 인간 관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하느님께 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과감히 그것을 포기하고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며, 오히려 도움이 된다면 적극 활용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무소유와 고독을 즐기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는 것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종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회개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며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함은 이러한 하늘 나라를 이룩하는 데 전력을 다하도록 초대되었다는 것이며, 세속적인 지위나 인간 관계, 그리고 재물의 가치보다 훨씬 더 초월하는 영적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과연 이러한 정신에 얼마나 가까이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60단상 :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예수께서는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루가 4, 20-22. 24. 28-29).

 

예수님은 자기 고향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보다 외롭게 배척을 받으셨고, 예수님도 고향 사람들을 특별하게 대해 주시지는 않았다. 믿지 않는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 시대의 일을 예로 들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가르쳐 주신다. 즉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는 헤아릴 수 없음을 보여 주신다. 엘리야 예언자 시대에 온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모두가 그 기근으로 고생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민족의 한 과부를 도와 주셨다. 그리고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도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이라는 사람의 문둥병만을 고쳐 주셨다(2열왕 5, 1-15).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 고향 사람들은 분개했다. 즉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야말로 선택된 백성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으로서 당연히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을 고쳐 주시기 위해 이러한 예를 드신 것이다. 물론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택하여 많은 사랑을 베푸셨지만 그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만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계약에는 충실치 못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것은 어떤 혈육의 유대나 혹은 신분이나 지위를 통해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가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그들 중에는 친척들도 있었지만-일지라도 그들이 믿지 않고 실천하지도 않는다면 구원될 수 없다. 그리고 문둥병자 나아만이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쳐 두고, 깨끗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언자의 말을 듣고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서 일곱 번 강물 속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믿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신분이나 격식에 매여 신앙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61단상 :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마르 4, 40-41).

 

예수님이 여행하시다가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시던 중 지쳐 배에서 주무시고 계실 때 갑자기 거센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다. 이 때 예수님은 초주검이 되어 겁을 먹은 제자들의 신앙이 약한 것을 꾸짖으시고, 마침내 바람과 바다에게 명령하시어 바람을 멎게 하시고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일이 있다. 제자들은 거세게 부는 풍랑 앞에서 한순간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당신이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자연의 힘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임을 보여 주셨다.

 

이러한 장면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때때로 닥치게 되는 엄청난 시련 앞에서 과연 예수님을 믿고 잘 대처해 갈 수 있는 믿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시련과 역경은 우리 인생의 길고 긴 항로에서 때때로 당하게 되는 일들이다. 우리가 가는 인생 항로 중에는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배처럼 바람이 잔잔하여 배가 순조로이 항해해 갈 수도 있지만, 때때로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퍼붓고 풍랑이 일어 바다가 광란하여 배가 위험할 때도 있다. 그 때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해 왔는가? 예수님은 풍랑이 거세게 이는 때에도 제자들과 함께 같은 배에 타고 계셨듯이,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역경 중에도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생 항로에서 어려움과 시련을 극복하여 올바로 갈 수 있는 길을 주셨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길이다.

 

1. 믿음의 길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하느님께서 증언하시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성서에 표현되어 있고,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사도 신경에 요약되어 있다. 사도 신경에 나오는 신앙 교의는 우리 교회 공동체 신앙의 요약이라고 보겠다. 우리는 창조주 하느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위로자 성령을 믿으며 성서와 성전을 통해 계시된 내용들을 믿는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구원자로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게 된다.

 

믿음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이 계시하시기 때문에 믿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로 갈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하느님은 인간을 선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그러기에 굳건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든든하고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갈릴래아 호수의 사건에서 보듯이 제자들이 예수께 믿음을 가지지 못했을 때 거세게 부는 바람과 풍랑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거센 풍랑 속에서도 두렵지 않게 된다. 예수님도 거세게 부는 풍랑 속에서 같은 배에 함께 계셨다는 것을 생각하자. 예수님과 함께 같은 배에 탄 우리는 비록 풍랑이 거세게 인다 하여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과 우리는 공동 운명체이며 예수님은 파도의 위협과 바람을 잔잔하게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2. 희망의 길

우리 인간이 자신의 인생 항로에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이 희망의 근거는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가르쳐 주셨고, 우리 인간은 참된 정의와 사랑이 있는 하느님 나라를 동경한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하느님께 기초를 두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희망을 당신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보여 주셨다.

 

우리가 희망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인생 항로에서 때때로 당하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며, 하느님은 진리와 선을 이루신다는 희망이 있기에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3. 사랑의 길

믿음과 희망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고 실천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그것에는 하느님의 뜻이 가장 소중한 것이기에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동경하고 또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다. 라틴어 속담에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시다(Ubi Caritas Deus ibi est)."라는 말이 있다.

 

사랑은 자신을 나눔과 친교와 섬김으로써 이웃에게 주는 행위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인간 공동체를 부드럽게 그리고 아름답게 이룰 수 있다.

 

사랑은 우리의 힘이며 무기이다.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강해지며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약해지고 오합지졸이 되며 비굴해지고 빈 껍데기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개방된 마음을 갖게 해주고 모든 인류를 포용할 수 있게 해준다.

 

4.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결여된 사재기 소동

지난 1994년 6월에는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핵 공격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아 온 국민이 불안한 때를 보냈다. 이 때 국민 가운데 일부가 사재기 소동을 벌인 일이 있다.

 

그 때 라면 박스나 부탄 가스 혹은 건빵을 사다 창고에 재어 놓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불안한 심리는 특히 돈이 많고 부자들이 많이 산다고 하는 강남의 사람들 가운데서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백화점마다 때아닌 호황을 누렸고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큰 소동을 벌였다. 북한이 핵무기로 무장하고 남한을 공격할 것이라는 뜬소문에 불안한 마음이 그렇게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침착하게 행동하고 하느님을 믿고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돈과 재산을 믿는 자는 그럴 때마다 불안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의리와 사랑과 정의를 믿지 못하고 자신만을 믿는 자는 남의 희생과 봉사 정신을 알 수 없기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불안한 자는 바로 믿음이 없는 자들이다. 사재기를 하는 자는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무기로 어려움을 대처해 나가야 한다. 먼저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가져야 한다. 사랑은 가장 큰 무기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국가에 대해 신뢰하고 우리 동포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갖자. 믿음과 희망으로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고 사랑과 선으로써 악을 대적해야 한다.

 

제62단상 : 예수님의 전도 생활

 

"다음날 새벽 예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다. 그 때 시몬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다니다가 만나서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며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 1, 35-39).

 

1.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많은 고통받는 사람들

위의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전도 생활이 묘사된다. 예수님은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온갖 병고로 신음하던 사람들을 고쳐 주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신다. 이 일이 사방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또 그 때까지 고통과 괴로움으로 시달리던 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다. 이들 중에는 악령 들린 사람, 나병 환자, 중풍 병자, 손이 오그라든 사람, 귀머거리, 벙어리, 앉은뱅이, 맹인 등이 있었고, 대부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신체 장애자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어 그들에게 새로운 몸과 새 마음을 가지고 한 인간으로서 온전히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새 삶의 기쁨을 주셨다.

 

성서에서는 감옥에 갇힌 이들이 풀려 나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게 되며, 맹인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하느님의 능력의 표지로 나타난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능력을 가지고 이 일을 행하셨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여러 가지 질병으로 시달렸던 사람들이 몰려왔고 예수님 주위엔 많은 군중으로 들끓었다. 또한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그곳을 지배해 왔던 마귀들의 세력이 꺾였다. 이렇게 마귀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쫓겨났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구원의 시대, 즉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2. 복음은 인간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진정 일생을 불구로 지내야 했던 사람이 온전한 몸으로 다시 살 수 있게 된 것은 하나의 구원 사건이다. 그리고 사회로부터 버림받던 나병 환자가 깨끗한 몸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하나의 구원 사건이다. 이처럼 복음은 병든 자를 낫게 하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며, 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준다. 그리고 죽을 인간을 다시 살리고 묵은 인간을 새 인간으로 바꾸어 주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은 사람을 억압하고 죽이는 소식이 아니라, 인간을 해방시키고 살리는 소식이다. 그렇지만 신체적인 구원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신체적인 치유를 통해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야 하는 믿음과 전적인 투신을 요구한다.

 

사실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고통에 짓눌린 자를 고쳐 주셨다는 사실을 보아도, 고통 그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다. 고통 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면, 예수께서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서로 고통을 주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고통 그 자체가 좋다면 예수께서 온갖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3. 고통의 원인은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고통은 왜 있는 것이며 고통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즐기는 분이신가?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는 모두 아름답고 좋은 것만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죄악은 바로 인간의 잘못으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으로 인한 많은 사망자들과 부상자들, 그리고 원자 폭탄의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자녀들이 기형적으로 생겨났다. 뿐만 아니라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생겨나는 사생아들, 기형아들도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저질러진 고통의 모습이다. 또한 교통 사고나 안전 사고로 인해 당하는 고통 등 이 세상엔 고통이 수없이 많다.

 

이 모든 고통의 모습들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뜻과는 어긋나는 현상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알아서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엔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다.

 

4. 고통을 없애기 위해 당하는 고통은 값진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그 노력하는 과정에서 당하는 고통은 이러한 의미에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은 인간의 이러한 고통을 짊어지시고 고통을 받으셨다. 이사야서 53장에는 예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당하실 고통을 예고한 바 있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이사 53, 3-4).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예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당하시는 고통을 예언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고통은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5. 인간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의 분주한 전도 생활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오셨다. 마르코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대단히 바쁘고 분주하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마르 1, 38)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면서도 당신은 마치, 참새도 집이 있고 제비도 새끼 두는 둥지가 있지만, 당신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으신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병고를 짊어지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며 생활하신 것이다.

 

6. 기도와 묵상을 바탕으로 한 전도 생활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힘들고 바쁜 전도 생활을 하시면서도 깊은 기도 생활을 영위하셨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하루 종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시달리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병자를 고쳐 주셔서 너무나 피곤하신데도 불구하고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서 외딴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마르 1, 35)라고 한다. 즉 예수님의 전도 생활은 깊은 기도 생활 중에 수행하신 것이다. 고요한 새벽에 외딴곳으로 가셔서 인류 구원을 위해 깊은 묵상과 기도를 드리며, 이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참뜻을 발견하시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기도 속에서 새 힘을 얻고 힘차게 전도 생활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이 전한 복음을 믿는 우리도 예수님의 전도 생활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7. 일상 생활 중에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을 갖자

우리는 바쁜 일상 생활 중에도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교회에서 실시하는 피정에 참가한다든지, 혹은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진실되이 기도해야 한다. 이 기도 생활 속에서 우리는 영적인 힘을 얻게 되며, 이 힘으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이 전해 주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나 혹은 복음을 전해 들은 사람이나 다 함께 복음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63단상 :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 17).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짤막한 말씀이지만 인간이 하느님께 가기 위한 구원의 말씀이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빛 없이는 하느님께 그냥 갈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죄악과 어두운 면을 뉘우치는 회개의 눈물 속에서 비로소 하느님을 뵈올 수 있으며, 그리스도와의 새 생활을 시작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천상의 복락인 은총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인간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아이시며 구원자이시다.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한 첫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깊이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야말로, 그리스도와의 새 생활의 시작이며 하늘 나라를 받아들이게 되는 열쇠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죄악 속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멸망의 생활이며, 빛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어둠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가끔 어둠이 주는 달콤한 즐거움을 찾으려 하고, 그 속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 그러면 빛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은 빛의 길을 가야 한다. 그 빛의 길은 다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바와 같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 30)이시다. 그분은 세상의 죄와 어둠과 죽음을 없애시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며, 끝내는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첫 순간에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 17)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해야 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 시대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 그리고 미래의 인간들에게 인간 구원을 위해 선포하신 복음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큰 은총이며, 인간이 구원받는 지름길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 일찍이 요한은 자기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요한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세리들한테는 "정한 대로만 받고 그 이상을 받아 내지 말라."고 하였고, 군인들에게는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가 3, 10-14) 하고 일러 주었다. 그러므로 회개는 먼저 자신의 잘못과 그릇됨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생활이 그리스도의 복음적 생활과 일치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며 자신의 죄를 싫어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세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젊은 날의 잘못을 눈물로써 회개하며 '고백록'를 썼다. 그리하여 그는 죄인의 상태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었다. 그에 관한 어떤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길을 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웬 여인이 "아우구스티누스, 안녕하세요. 어찌하여, 요즈음은 통 보기가 힘드네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인이여, 이제 나는 과거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니랍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하며 그 여인의 은근한 청을 뒤로 하고 방향을 바꾸어 가던 길을 계속 갔다는 일화가 있다.

 

루가 복음에 나오는 방탕한 둘째아들도 역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루가 15, 11-32). 마찬가지로 우리도 회개하여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오히려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 어두운 면이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회개한다는 것은 뉘우치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회개하기 전에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박해자였다. 그러나 어느 날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뵙고 회개한다. 그 이후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 가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새 생활을 하였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제 하늘 나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잘못을 뉘우치고 천국을 위한 새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그가 죄에서 벗어나 살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천상의 온갖 복락을 주시고자 한다. 그 천상적 복락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고, 그 외아들은 천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길을 따름으로써 천국으로 가게 된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오신 구원과 평화의 빛이시다.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따라 나선 제자들처럼 우리도 하늘 나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회개하고 기쁜 마음으로 응할 수 있도록 생각해 보자.

 

제64단상 : 예수를 어떤 분으로 보느냐

 

"어느 날 예수께서 혼자 기도하시다가 곁에 있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루가 9, 18).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느냐에 관한 것은 예수 시대부터 제기된 질문이었다.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느냐에 따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비신앙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같은 야훼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유다교인이냐, 이슬람교인이냐로 나뉜다. 유다교인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며, 이슬람교인들은 예수를 단지 위대한 예언자로만 인정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어느 날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제자들에게 물어 보셨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신비를 알려 주셨다. 또 병자를 낫게 해주시고 벙어리, 귀머거리, 맹인 등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대해 주시고 인간적인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 세상에 오셔서 이러한 일을 행하신 예수님은 이제 이러한 행적을 보아 온 일반 사람들이 당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셨던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제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는데, 대개는 세례자 요한으로 보고 있고, 또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하나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고 말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위대한 예언자는 당시 사람들이 최고로 생각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인물들에 만족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질문을 하셨다.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시로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세상 끝날 때까지 각자에게 끊임없이 던져질 물음일 것이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이실까?" 또 현대인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인생관이나 철학관은 달라진다. 무신론자들이나 물질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은 예수님을 고작 평범한 인간으로만 볼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그리고 공자와 같이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분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으로 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있는가?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루가 9, 20) 하고 질문하신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위대한 사람 중의 한 분으로만 보는가, 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혹은 하느님으로 보는가, 아니면 인간 중에 뛰어난 분으로만 보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상의 문제이며, 신앙 고백의 문제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보고 믿는다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것은 사도 베드로가 고백한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 9, 20)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따르는 마음이 예수님을 올바로 보고 믿는 마음이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았기 때문에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믿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았기 때문에 주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하였다. 예수님은 사도 베드로로부터 이러한 신앙 고백을 들은 다음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 대해 말해 주신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 23).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는 것과 또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모두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생활 중에 남보다 많은 희생과 봉사가 요구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결코 안이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남보다 더 큰 희생이 요구되고 또 더 많은 봉사를 해야 한다. 그래서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많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남들처럼 쉽게 행동하고 남들 하는 것처럼 적당히 살아갈 것이냐 하는 생활상의 어려움이 많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로부터 당신이 '메시아'라는 고백을 듣고서 그 메시아는 영광과 권력의 메시아가 아니라, 수난과 고통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메시아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루가 9, 22).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왜 고난과 고통의 길을 가셨는지….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 23). "누구든지"란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신자들이나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 모두가 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란 자기 자신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며, "제 십자가를 지고"란 각자에게 주어진 여러 어려운 일들을 갖고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고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봅니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보자.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고 따르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제65단상 : 예언자들의 종교 체험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루가 5, 10).

 

1. 이사야의 소명 체험

이사야는 예언자로서 소명을 받게 될 때 야훼 하느님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이사 6, 1). 그러나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출애급기 3장 6절에서 말하듯이 죽기 전에는 하느님을 볼 수 없다. 이사야가 과연 어떻게 하느님을 뵙게 됐는지 그리고 정확하게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부르심을 전하는 성서의 기록을 통해 신 체험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신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느님을 뵙고 체험하면서, 그 자신이 지극히 죄 많은 인간이며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느꼈고, 그래서 자기는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서의 사상을 보면, "인간은 누구나 죽기 이전에는 하느님을 뵐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본다는 것',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 그 근원을 만나는 것이며, 그 기원으로 돌아감이며, 또한 각자 자기 개인 역사의 마지막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이 원초적 근원을 만날 때, 공통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바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평소에 죄 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원초적 근원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미소한 존재이며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 죄 의식은 반드시 하느님을 화나게 했던 그런 종류뿐 아니라, 우리 생활 중에 하느님을 멀리한 것이나, 하느님을 무의식적으로 피했던 그런 여러 종류의 행동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베드로의 신 체험

많은 종교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말하듯이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만남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주신 분과 생명을 연명하는 피조물과의 만남이므로, 생명 그 자체가 아닌 우리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이사야가 체험했던 이 느낌은 또한 루가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체험과 공통된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이루신 기적을 통해 예수 안에 신성을 느끼며,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루가 5, 8) 하고 고백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하느님, 혹은 어떤 신성한 것을 만날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감정이며,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그만큼 체험하게 되는 인간 최초의 감정이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은 분명히 인간과는 다르다는 "절대자"에 대한 체험이다. 그러면 하느님은 어떻게 다른가?

 

3.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공통된 체험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공통된 체험은, 하느님은 '순결하고, 거룩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순결하고 성스럽게 살아도 인간은 하느님의 그것에 도달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다. 하느님을 생각할 때 그분은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아름답고 성스럽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성스럽다는 것이 그분의 그 모든 것을 종합해 준다. 그러나 성서의 사상을 보면, 그분의 성스러움은 우리의 '부정한 행실'을 단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 모두 죄로만 덮여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부정과 불순이란, 마치 인간이 흰색과 검은 색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 그리고 생명과 죽음,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착하다는 것은 인간이 착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인간이 항상 착한 것은 아니며, 언제라도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악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며 단죄한 사람도 악만 저지르는 것은 아니며, 착하고 선한 일을 할 때도 있다. 인간은 인간인 이상 항상 두 가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선을 택하고 악에 기울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자유로운 결단에 의한 자신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도 말하듯이 의롭고 위대한 것, 금은 불 속에서 단련되어야 순금이 되듯이 우리를 순수하게 만드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불순의 상태에서 순수의 상태로, 그리고 허무의 상태에서 하느님을 소유하는 상태로 변화된다. 이 과정 중에서 하느님을 만나 최초의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신뢰와 신앙의 상태로 가게 되는데, 인간의 두려움을 없애 주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이사야는 하느님을 뵙고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이사 6, 5) 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하느님의 천사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집어 이사야의 입에 대어 그 입을 뜨겁게 해준다. 하느님의 뜨거운 돌이 이사야의 입에 닿았다는 것은 이사야의 입이 전적으로 더럽다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과 깨끗함을 갖고 있던 상태에서 단련되어 깨끗하게 된 것을 상징한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단련되었을 때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이사 6, 7)라는 천사의 말대로 안심과 신뢰의 감정을 체험하며 인간은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일을 행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 것이다.

 

4. 사도들의 소명 체험

이사야의 이러한 체험은 예언자, 사도들에게 공통되어 나타난다. 사도들이나 예언자들 중에 자기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자기는 죄 많은 사람이며, 부족하고 결점투성이임을 깊이 느낀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깊은 신뢰를 통해 사명을 받았다. 이사야의 경우도 그렇고, 사도 바오로도 고백하기를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교회까지 박해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1고린 15, 9)라고 하였다. 이렇게 자기의 죄와 부족한 점을 깊이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고백하기를 "그러나 내가 오늘의 내가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덕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과연 나는 어느 사도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 것입니다."(1고린 15, 10)라고 말했다. 여기서 보듯이 바오로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신의 열심한 노력으로 오늘의 자기가 되었다는 고백을 한다. 또 다른 사도의 체험을 보자. 사도 바오로는 독신으로 지냈지만, 우리 교회의 첫 교황이라고 볼 수 있는 사도 베드로는 갈릴래아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베드로가 사도가 된 것도 이사야나 바오로의 내적 체험과 비슷하다.

 

구약의 이사야는 야훼 하느님의 체험을 얘기했지만, 신약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며 신적 체험을 했는데, 예수님에게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앞에 자기는 지극히 초라한 죄인이라는 체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도가 된 것은 그의 힘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셨던 심리적 안정감과 은총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 주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루가 5, 10).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고 한다.

 

5. 두려움과 신뢰가 교차되는 만남

이상에서 보듯이 우리는 신․구약의 위대한 세 분이 하느님 체험과 소명을 받게 된 동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사야, 베드로, 바오로는 자신들이 깨끗하고 자신 있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예언직과 사도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이며 초라하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면서, 자신들의 약함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신뢰를 두고 용기와 힘을 얻어 주님을 따라 나선 것이다.

 

절대자 하느님과 인간과의 만남은 인간측에서는 항상 두려움과 신뢰가 교차되는 만남의 과정이다. 그리고 하느님측에서는 죄인인 인간을 은총으로 의화시켜 주시며, 당신의 뜻을 실현하도록 사명을 주신다. 이러한 두 가지 쌍방적인 과정 속에서 특히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 속에서 그 사명을 수행할 때, 자기 능력을 초월하는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된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하셨다. 시몬은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뒤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 들어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루가 5, 4-6).

 

제66단상 :왕이신 그리스도

 

"'네가 왕이냐?' 하고 빌라도가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8, 37).

 

교회 전례상 연중 마지막 주일에 거행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1925년 11월 11일, 교황 비오 11세가 제정한 것으로서, 당시에 만연된 세속주의, 무신론적인 현상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가 온 우주의 질서를 지배하는 구세주이심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1. 세상의 왕들

우리는 예수께 대해 왕이라는 찬양을 드린다. 왕은 자기 왕국 내에서 모든 능력과 권세를 행사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기에 왕에 대한 이미지는 왕이 그의 막강한 권한 행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별될 수 있다. 왕이 자기 백성들을 잘 지도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들어 주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선정을 베푼다면, 사람들은 그를 성왕, 인군, 현군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왕이 국민의 바람을 외면하고 자기 왕가만의 이익을 생각하고 국민을 착취한다면, 그 왕은 왕이지만 폭군이라고 불릴 것이다. 역사상 각 민족들은 씨족, 부족, 종족의 형태에 따라, 각각 그들 나름대로의 왕들을 모셔 왔다. 그들 중에는 폭군이라고 불렸던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 혹은 성왕들이라고 불렸던 중국의 요, 순, 우, 탕, 무왕들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

 

요즈음과 같은 현대 사회에서도 왕이 있는 국가들이 많은데,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하는 영국에도 왕이 있고, 벨기에, 포르투갈, 태국 등에도 왕들이 있다. 중국에는 천자라는 명칭으로, 일본에는 천황, 그리고 우리 나라에도 금세기 초까지 왕 제도가 있었다. 그러므로 현대 민주주의 국가라는 체제 속에서도, 왕이 존재하기도 하고, 왕 없이 다른 제도로서 다수의 행복을 도모할 수도 있다.

 

2. 그리스도 신자들의 왕

그런데 우리는 천주교 신자이면서 또 다른 한 분을 왕으로 모시고 있다. 그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왕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그분은 왕이셨으면서도, 세상의 보통 왕들과는 다르게 가난하게 사셨고, 물질적인 부자가 되기를 거부하셨고, 철저히 남의 행복을 위해 사신 분으로 믿는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어린양으로 희생되신 분으로 믿는다. 이러한 '속죄의 어린양'이라는 이미지와 '왕'으로서 갖는 이미지 둘 다 그리스도께 적용된다.

 

우리가 호칭하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 말의 '메시아'라는 말의 그리스어 번역이다. 구약 성서에서 '메시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왕'이라는 말은 동일한 뜻을 갖고 있는 서로 다른 두 언어의 반복이다.

 

구약 성서에서, '기름 발린 왕'은 하느님께 선택되어 자기 백성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지혜와 슬기와 용기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 지상에 실현시키는 주요한 임무를 갖고 있었다. 구약에 예언된 종말론적인 예언자를 생각해 본다면, 이 메시아는 우선 "야훼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는 충실한 종이다"(이사 42, 1; 49, 3). 그는 선택받는 뜻으로 머리에 기름을 발리고, 야훼의 영을 받고, 참된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만국의 빛이 된다. 이사야서 61장에는 이 메시아 활동이 요약되어 나타난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라"(이사 61, 1-3).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은 이러한 구약의 이상적인 메시아 활동이 바로 예수의 인격과 업적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수께 적용된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신약 성서에 500여 번 나오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주님이라는 칭호는 350번, 인자라는 칭호는 80번, 하느님의 아들은 75번, 다윗의 후손은 20번, 그러므로 이중에서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은 예수 자신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 관한 예수님의 태도를 마르코 복음에서 살펴보면, 예수님은 악마가 자신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아도 말 못하게 금지하셨고,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후에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모시려 했을 때, 산으로 몸을 숨기셨다. 그리고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드러내시긴 했어도 그것을 선포하기를 금하셨다.

 

3. 하느님께 순종하는 그리스도 왕

그러면 예수께서 언제부터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드러났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죽음을 앞둔 수난 때부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이었다. 초대 신자들은 이 신앙, 즉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하느님의 업적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는 '야훼의 순명하는 종'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높임을 받은 것으로 본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에서, 바로 이 점을 요약하여 전해 준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필립 2, 1. 5-11).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이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앞으로 올 새 시대의 메시아(왕)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의 나라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띠며, 앞으로 다시는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왕국의 왕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을 믿는 우리는 영원한 왕국의 시민으로 초대받은 것이며, 정의와 공정 그리고 인자한 덕으로 다스리시는 그분의 통치하에서 참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관이다. 그리스도를 왕으로서 모시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뜻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베풀어 주실 영원한 평화를 고대하며 이 현세를 의미 있게 살아가야 한다.

 

제67단상 :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루가 6, 27-28).

 

1. 용서받음의 고마움과 기쁨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툼과 갈등, 분쟁과 싸움이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큰 죄를 지었지만 남으로부터 용서를 받아 본 적이 있다면 피해자의 너그러운 용서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를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죄를 짓고 고해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며 고해 성사를 보면 하느님은 모든 것을 조건 없이 용서하신다.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희망을 갖고 믿는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비록 잘못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얻듯이, 우리는 참된 평화와 행복은 원수를 미워하고 복수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친구로 얻을 때에 더 크고 참된 기쁨이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 평화와 행복을 위한 사랑과 용서와 기도하는 마음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에는 평화와 행복도 있지만 평화와 행복은 마치 질그릇이나 유리 그릇처럼 쉽게 깨지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우리 인간은 평화와 행복을 갈망하지만 그러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선 참으로 인내와 용기와 사랑 그리고 용서와 관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평화와 행복은 마치 자동차가 평화와 사랑을 싣고 잘 달리기 위해선 자동차의 기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관용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우리가 참으로 행복해 하고 평화로울 수 있도록 아주 좋은 방법을 제시해 주셨다. 사랑과 축복과 기도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랑과 용서가 있다면 보다 더 행복하고 평화스러울 것이다.

 

3.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이해와 용서하는 마음

그런데 우리는 생활하면서 왜 그토록 많은 갈등과 분쟁을 겪어야 할까? 실제로 개인과 개인, 공동체간에, 그리고 국가들끼리 혹은 민족간에 미움과 분쟁이 있고 서로 죽이고 파괴하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물질적 이해 관계가 얽힌 과도한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아무리 많이 소유하여도 만족할 줄 모른다. 그 욕심은, 예수께서도 사탄에게서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재물․명예․권력에 대한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것을 건설하고자 하셨을 때, 이러한 세 가지 방법으로는 올바르게 이룰 수 없음을 분명히 아셨다. 그러기에 일찍부터 그것을 포기하시고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그것들이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고 일시적인 기쁨을 주긴 하지만, 인간들을 참으로 행복하게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마음을 비우시어 오직 사랑과 용서와 이해의 마음만을 간직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물질과 재물로 사귀지 않으시고 인간적인 사랑으로 접근하셨으며, 원수들까지도 사랑으로 감화시켜 당신 친구로 만드셨다. 그리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용서로써 악을 이기시고, 악을 저지른 죄인마저도 하느님의 아들딸로 회개시키셨다. 예수님은 참으로 넓은 마음으로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시어, 온갖 미움과 소외를 받던 사람들을 당신의 사랑받는 친구로 만드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어둠과 죄악으로부터 구해 내시어, 참된 평화와 행복을 주는 길은 오직 사랑과 이해와 용서로써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악을 선으로써 이기시고, 미움을 사랑으로써 극복하시고, 분쟁과 갈등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포용하심으로써, 이 세상을 참으로 행복하고 평화스럽게 건설하고자 하셨다.

 

4. 성인들의 모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본받아 이러한 길의 모범을 보여 주신 많은 성인들이 있다. 그중에는 중세의 물질적 타락에서 오직 청빈 정신으로 교회를 구해 내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 또 제2차 세계 대전 중 악명 높은 유다인 학살의 대명사인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사랑의 꽃을 피우신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 그리고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세 부인을 건져 내시고 자신은 탈진하여 숨을 거두신 배문환 신부님 등이 있다. 이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을 가셨고, 비록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나 명예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그리스도의 영원한 행복과 평화에 들어간 분들이다.

 

5. 그리스도인들의 평화를 위한 선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유혹도 받고 분쟁도 겪으며 때로는 억울한 일도 당하지만, 그 때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하겠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루가 6, 27-28).

 

제68단상 : 은혜에 보답하는 삶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 쳤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루가 17, 11-16).

 

루가 복음에는 예수께서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고쳐 주시는 대목이 나온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에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7, 13) 하고 간청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겨 고쳐 주실 마음을 가지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루가 17, 14)고만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그들의 몸은 벌써 깨끗이 나았다.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작용이 있어서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에 신뢰를 갖고 따르는 과정에서 낫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몸이 깨끗해진 열 명 중에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고, 다른 아홉 명의 유다인들은 어디론가 가 버렸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태도를 보고 섭섭한 마음이 들어,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루가 17, 17)라고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감사를 드리러 온 사람이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음에 의아해 하시고 더욱 놀라셨다.

 

유다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으로서 하느님께로부터 무수한 은혜를 받은 민족이었으며 선민이라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민이자 하느님의 백성이었지만, 인간의 일반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참으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나병 환자들이 입은 은혜는 어떤 것인가? 그들의 처지는 온몸이 흉측하게 문드러지고 진물이 나는 상태였으며,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어울릴 수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처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처지에 있던 그들이 깨끗한 상태가 되어 진물과 고름이 멈추고 문드러졌던 몸이 정상적으로 되고 이제 사랑하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이웃과 어울릴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면 그들이 받은 은혜는 얼마나 큰 것인가? 그런데 그 받은 은혜에 대해 그리고 그 흉측한 병을 고쳐 주신 예수께 감사의 말 한마디 안했다는 것은 얼마나 배은 망덕한 태도인가? 더구나 하느님을 믿고 그 백성이라는 유다인들이 그랬다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오히려 감사의 표현을 한 사람은 유다인이 아니라 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예수님은 예리고의 길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을 구해 준 사람도 유다인 사제나 레위 사람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셨다(루가 10, 25-37). 예수님은 마음속에서 이런 유다인들의 우월적이며 배타적인 선민 의식, 종교적 형식주의, 애정과 사랑이 없는 율법주의의 병을 고쳐 주시고자 하였다.

 

루가 복음의 이 말씀을 우리 시대에 적용해 보자. 우리는 세례를 받고서 하느님의 자녀 신분으로 선택을 받았다는 의식을 갖고 있지만, 그러한 신분에 있다고 해서 인간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해야 할 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인들의 선민 의식, 종교적 형식주의 그리고 애정과 사랑이 결핍된 율법주의적 태도가 몸에 많이 배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여 타종교인들의 종교심을 멸시하거나 비웃는 태도, 그리고 성당에 나가 미사를 봉헌하고 헌금을 하니까 특별히 다른 곳에 헌금을 하거나 봉사 활동 혹은 선행을 안해도 괜찮다는 생각, 그리고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마치 구원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티켓을 갖고 있는 듯이 우월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이다. 그뿐 아니라 신자로서 일반 비신자보다 못한 편협함, 외골수, 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 정성이 없는 태도, 인간적인 예의 범절이 없는 행동 등의 모습이 나타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늘 복음에서처럼 치유받고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표현을 하지 않은 배은 망덕한 아홉 사람의 나병 환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착하고 예의 바른 사마리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아직 세례받지 않고 주님을 모르지만, 그리스도 신자보다도 더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은혜받은 삶에 보답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신자를 만날 때보다도 어떤 착한 비신자 안에서 보다 깊은 내면의 인간성을 만나고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예수께서 이방인이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칭찬하셨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보다 더 그리스도인다운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 이렇게 좋은 가르침으로 우리의 양심을 일깨워 주심에 감사를 드리고 더욱더 주님을 믿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모르고 세례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좋은 일을 하여 예수께 칭찬을 받았다. 하물며 주님을 믿고 따르며 세례받은 우리가 좋은 일을 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기쁘게 한다면 예수께 얼마나 흡족한 기쁨이 되겠는가?

 

끝으로 우리는 은혜받은 자답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이웃에게 예의를 갖추고 사랑을 실천하여 우리 주위를 사랑 가득한 보다 나은 세계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성실한 생활을 하도록 다짐하자.

 

제69단상 :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자비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루가 15, 10).

 

1.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죄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착하게 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떠나 자유로이 죄를 짓고, 하느님을 등지고 우상 숭배를 하기도 한다.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거의 숙명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서에서는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음으로써 인간에게 고통과 죽음이 오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류의 첫 조상이 지은 죄를 원죄라고 한다. 이 원죄는 인류의 첫 조상이 지은 것이므로 그 자손들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어, 모든 인류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원죄에 물들어 태어나게 되었다. 하느님의 계획된 은총으로 원죄에 물듦이 없이 태어난 것을 무염 시태라고 한다.

 

우리는 세례 성사를 받음으로써 그 원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고 비로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생기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하느님과의 사이에는 죄라는 것이 있어서 인간과 하느님과의 사이를 단절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지 못하고 고통과 죽음에 파묻히게 한다.

 

2. 회개하는 인간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인간들이 죄에서부터 해방되어 온전히 하느님의 자유 속에, 평화와 은총 속에 생활하기를 바라신다. 또 하느님은 인간이 저지르는 '죄'는 미워하시면서도 그 죄를 저지르는 인간, 죄인은 불쌍히 여기신다. 또 그 죄인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푸신다.

 

옛날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라는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여 하느님을 노하게 한 일이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용서하셨다(출애 32, 7-14). 또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전에는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로서,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틀림없는 것이라고 하였다(1디모 1, 13-15).

 

하느님은 우리 인간, 죄를 자유로이 범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이 세상에서 죄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었다. 죄를 추방하고, 악마를 추방하여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짓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다. 우리 인간이 죄에 물들어 있고 또 매일매일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죄 속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가장 불쌍한 모습이며, 가장 비참한 모습이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기 자녀들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모는 그 자녀들이 올바르고 착하고 훌륭하게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부모의 생각과는 달리 나쁜 짓만 저지르고 습관적인 악한 행동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아마도 부모는 온갖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여 그 자녀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할 것이다.

 

하느님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보다 더 넓고 자비로우시다. 하느님은 전 인류의 아버지이시다. 모든 민족들의 아버지이시며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부자나 가난한 사람, 그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다. 특히 하느님은 가난하고 불쌍하고 또 죄를 저지르는 가엾은 사람들의 아버지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루가 15, 10)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모든 죄인에게 희망을 주셨다. 예수님 그 당시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

 

3. 죄로 인해 하느님과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회개

죄인인 인간이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은 "회개"이다. 이것은 이제까지 죄 속에 파묻혀 살다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누구나 회개해야만 하느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생활 중에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여러 가지 죄를 짓고 있으므로 매순간 끊임없이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회개함으로써 죄로 인해 하느님과 끊어졌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은총과 생명의 끈으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실생활 속에서 과연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반성해 보고, 회개할 것이 있다면 하루빨리 회개하여, 하느님 편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루가 15, 10).

 

제70단상 : 인간의 판단과 하느님의 판단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루가 18, 14).

 

1. 쉽게 행해지는 인간의 판단

우리는 일상 생활 중에 가끔 남을 쉽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는 그 판단받은 사람이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나쁜 사람으로 오해받는 수도 있고, 그 판단하는 사람도 실제와는 달리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수가 있다. 성서의 말씀은 이러한 그릇된 경향들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도록 좋은 말씀을 들려주고 있다.

 

먼저 집회서의 저자는 하느님을 의로우신 재판관으로서 "누구에게도 한쪽에 치우친 판단을 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은 기쁘게 받아들이신다."(집회 35, 12. 16)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루가 복음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교만한 판단과 예수님의 판단을 보여 주고 있다(18, 9-14).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서에는 재판 혹은 심판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가령 다니엘과 수산나의 이야기, 간음하는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 예수님의 판단에 맡긴 이야기, 탕자의 비유 등, 여러 가지 비유를 든 판단을 주제로 한 내용들이 많다. 만일 성서에서 이 판단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을 삭제한다면 많은 부분은 없어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인간 생활 중에, 특히 사랑과 이해가 결핍된 곳에는 항상 남을 심판하고 모함하고 멸시하는 일이 있고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우리도 혹시 남을 그릇되이 판단한 적은 없는지 생각해 보자. 그 동기는 여러 가지 원인에서 오는데 남이 잘되기를 시기하는 마음이라든가, 자기만 잘살고자 하는 마음, 혹은 성서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올 수가 있다. 사람들의 이러한 그릇된 판단은 이웃을 영신적으로 숨막히게 하고, 남의 인격을 무시하며 결국은 남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리게 한다.

 

2. 예수님의 판단

루가 복음에서 보여 주는 예수님의 판단을 생각해 보자(18, 9-14). 두 사람의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먼저 바리사이파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일 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을 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고 하였다. 이러한 생활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 볼 때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태도이며 나무랄 데가 없다. 과연 우리는 다른 것은 그만두더라도 일 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을 할 수 있는가? 한 가지 예로 교회법에서 명하는 대로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의 단식과 금육재도 가끔 지키지 못하고 고해 성사를 보지 않는가?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은 일 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욕심이 없고 정직하고 십일조를 교회에 바친다. 십일조란 자기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다. 만일 매월 백만 원의 수입이 있는 사람이라면 십만 원을 매달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 바리사이파 사람은 매달 십일조를 바쳤다. 그리고 그는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님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기도하였다. '세리'라는 말은 오늘날 세금 징수원과 같은 사람인데, 예수님 시대의 '세금 징수원'들은 어떤 의미에서 유다 민족들 사이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다. 즉 그 당시 '세리'들은 같은 유다 사람들이지만 자기 동족들한테서 세금을 걷어 정복자들인 '로마 제국'에 바치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말하자면 매국노와 같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세리'는 어떻게 기도하였는가? 그는 감히 성당 가까이에 접근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또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자기 가슴을 치며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 13) 하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세리의 태도를 올바르게 보셨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문제는 인간이 하느님께 어떠한 태도를 갖느냐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자기의 의무는 하지만, 그 의무를 지킴으로써 자신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악한 인간들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3. 남을 이해하는 마음

우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인격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약한 입장을 옹호하고 또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욕심이 없고 정직하고 깨끗한 생활을 하고 일 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십일조를 바칠 수 있는 처지에 대해 감사드리면서 또한 그와 아울러 '세리'와 같은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함께 손잡고 이해하고 공동체를 이루려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세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께 고백하고, 죄의 상황에 처해 있지만 한 걸음씩 좋은 길로 가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므로 어떠한 죄인이라도 하느님께 부르짖으면 올바른 사람으로 의화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또 많은 이들이 겉으로 보아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는다 할지라도, 그가 올바른 마음으로 회개하면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갖자.

 

"겸손한 사람의 기도 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집회 35, 17)라고 하였다. 우리는 진심으로 자신의 약한 처지의 개선을 위해 기도하며, 하느님을 겸손되이 찾는 마음, 하느님을 통해 나의 인격이 완성에로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가지 실천 사항으로서 남의 나쁜 점은 결코 말하지 말고 이왕이면 남의 장점을 이야기해 보는 습관을 가져 보자.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루가 18, 14).

 

제71단상 : 일상 생활 속의 하느님의 손길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다.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마태 14, 29-32).

 

1.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과 베드로

마태오 복음에는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장면이 나온다(14, 22-33).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과 고기잡이하던 제자들, 그리고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그 말씀만 듣고 물 속에 뛰어들었던 베드로가 등장한다. 베드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갔을 때는 예수님처럼 물위를 걸어갔으나, 자기 앞에 닥친 거센 바람과 또 자신이 물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자마자, 물 속에 빠져 들게 되어 결국 예수께 "살려 달라."고 구원 요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복음서의 이 장면을 생각하면서 우리 신앙의 한계점과 미약함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 인간 중에 과연 누가 물위를 걸어 다닐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예수님만이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물위를 걸어 다니시는 초자연적인 행동을 보여 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행동은 우리와 같은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베드로가 처음에 아무 의심을 품지 않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갔을 때는 이 세상을 초월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러한 완전한 믿음을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하고 때때로 거센 파도와 같은 도전을 받으며, 일상적 삶의 현실 속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단 한순간도 제대로 갖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조건이다.

 

2. 일상 생활 속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손길

우리의 신앙은 초월적인 것보다는 일상 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감사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을 예수님처럼 물위를 걸어 보고자 하는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물위를 걸어 보고자 하는 바람보다는 일상 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인간적인 것들 안에서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나에게 하느님께서 해주시는 기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초자연적으로 이 세상의 삶을 떠나 물위를 걸어 다니는 것보다는, 오히려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되는 인간임을 자각하며 동료 인간들과 함께 공동선을 위해 일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사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 다닐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것을 한 번 보여 주시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분은 물위에서만 걸어 다닌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병들고, 고달픈 이들과 함께 이 땅 위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노력하셨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기적의 참다운 의미를 아는 것이다.

 

3. 참다운 기적은 인간성의 회복이다

요즈음 세상에서 참다운 기적이란 물위를 걸어 다니는 일보다는 이기적으로 굳어진 마음이 다른 이들과 공동선을 생각할 줄 아는 인간으로 변화되는 것일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날도 인간 구원을 위해 우리 인간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전하고 이루신다. 하느님의 기적은 우리가 알 수 없고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과 도움의 손길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아무 의지할 데 없는 고아들이 노동력이 없고 돈도 없지만 어떻게 먹고 사는가? 이것이 오늘날의 기적이다. 기적은 우리의 일상 생활 안에 매일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느 날 여름 장마로 인해 강이 범람하려고 하자 이웃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보고 피난을 가라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피난은 왜 가시오. 하느님께서 구해 주실 텐데요." 하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마침내 강이 범람하게 되자 그 사람은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 때 마침 배를 타고 가던 사람들이 그 사람 옆을 지나 가면서 그 사람보고 배에 타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구해 주실 텐데 왜 배를 탑니까." 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나서 물이 더 불어나자 그 사람은 전봇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계속 "하느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그 때 마침 지나가던 헬리콥터에서 줄을 하나 내려 보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줄을 잡기를 거절하며 "하느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결국 그는 물에 휩쓸려 가게 되자 그 때서야 하느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 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에게 부르짖을 때 나는 너에게 세 번의 구원의 손길을 베풀지 않았느냐? 너는 그 때마다 거절했노라."

 

이 일화에서 보듯이 우리의 신앙도 인간의 도움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기적만을 바라는 것은 어떤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가다가 빠진 것처럼, 우리는 그 현실을 인정하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의 도움을 고맙게 여기고 또 서로 협조하는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하겠다.

 

제72단상 : 자신을 높이는 사람과 낮추는 사람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 14, 1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는, 어느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고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을 때, 그곳에 초대받은 이들이 저마다 높은 자리,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교훈은 동양의 겸양지덕(謙讓之德)과 상통하는 처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잘나고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렇지 않다는 평가와 더불어 그 사람의 부족함과 단점과 허점이 드러나 무안을 당하게 될 것이며, 반대로 자신은 부족하고 보잘것없고 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렇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어 훌륭하고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예우받게 될 것이라는 교훈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므로 높고 낮은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앞에 높고 낮은 구별이 없다. 사람의 신분을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으로 구별하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이 앉는 '자리'이다.

 

1. 자신을 높이는 사람

그러면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이들인가?

 

우선 예수께서 혼인 잔치의 풍경을 묘사한 것처럼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이들일 것이다. 높은 자리나 높은 지위는 사람에게 묘한 매력을 준다. 우리는 같은 인간이면서도 남보다 뛰어나고 더 훌륭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보이는 겉치레, 바로 높은 자리나 높은 지위가 그러한 허영심을 채워 준다. 그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자신이 이제 남보다 높아졌다는 것에 어떤 우월감을 갖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높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것을 보고 만족감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은 외형상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한 영예로운 자리나 지위를 차지한 이들이 그 자리가 요구하는 책임과 희생과 봉사를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빈 껍데기의 인생을 사는 것이며, 자신은 그 껍데기 속에서 위축되고 부패해 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형태의 사람들은 속임수를 쓰거나 무력을 행사하거나 권모 술수를 써서 합당한 이들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무엄하게도 혹은 잔인하게도 혹은 간사하게 탈취하는 이들이라고 보겠다. 이런 이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방법으로, 인간에게 봉사하는 데 쓰여야 할 권력과 재물과 영예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스스로 탐하는 이들이라고 보겠다. 그래서 집회서에서는 "오만한 자의 불행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뿌리가 그에게 깊이 박혀 있는 까닭이다."(3, 28)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런 이들을 비유하여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이들은 낮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부자격, 부적격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깨달아 자신에게 맞는 직분을 택하고, 또 그 직분에 맞는 일을 행하고 처신하라는 뜻이다.

 

2.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

두 번째로,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은 어떤 이들인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겸손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라고 하였고, 집회서에는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더 겸손하여라.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3, 18)는 말이 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들이 많을수록 사회적, 단체적 분위기가 아름다워지고 우호적이 되며 친절해질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남을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이 지닌 재능이나 능력 그리고 선성을 인정하고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마음으로부터 축복해 주고 그 일과 직무를 맡은 이들이 해야 할 봉사와 수고스러움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직무를 맡은 이들이 그 일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도와 주며, 그들이 직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들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아는 이들이다. 즉 때가 오면 그리고 자기 차례가 오고 기회가 주어지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봉사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주실 기회를 기다리고 또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맡길 직분을 조용히 기다리며 매사에 봉사직에 필요한 지식을 배양하고 능력을 키우며 성실히 준비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낮추는 이들은 하느님과 사람들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고 영예로이 그 직분에 올라 봉사직을 성실히 수행한다.

 

3. 성서에서 묘사되는 겸손한 사람

먼저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집회서에서는 "겸손한 사람의 기도 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35, 17)라고 하였으며,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 25) 하고 기도하셨다. 하느님은 겸손한 이들을 통해 당신의 오묘한 뜻을 드러내 보이신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시고 높으신 분이었지만 인간의 구원을 위해 말구유에서 비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하셨기 때문이다(필립 2, 5-11). 이러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 29)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묵상해 보면서, 우리도 생활 중에 자격도 능력도 열성도 없이 어떤 감투 자리만을 바란 적이 없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그 지위와 자리가 요구하는 바대로 성실하게 일하며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겠다.

 

제73단상 : 자캐오의 회개

 

"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루가 19, 9-10).

 

루가 복음에는 예리고의 세관장 자캐오의 회개와 구원에 대해 나온다. 자캐오는 세리였는데, 당시 세리라는 직책은 유다인들에게서 많은 배척을 받았다. 왜냐하면 세리는 유다인이면서 로마 제국의 관리가 되어 동족인 유다인들에게서 세금을 걷어다가 로마 제국에 바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또 세금을 단순히 걷는 일뿐 아니라 사업의 규모를 보고 세금을 매기는 과정에서 세금을 적게 내게 해준다거나 많이 내게 하여 어떤 부정 이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리라는 직책은 유다인들에게 배척을 받았고, 죄인 취급을 받았다.

 

1. 예리고의 세관장 자캐오

자캐오는 예리고라는 지역의 세관장이었다.

 

예리고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가장 오래 된 성곽이 있고 비옥한 땅을 배경으로 주민들이 오래 전부터 거주한 흔적이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는 8천 년 전부터 거주 지역으로 형성될 정도로 비옥한 곳이었다. 예리고는 예루살렘과 사해, 갈릴래아를 이어 주는 삼각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그리고 사람들도 많이 살던 곳이다.

 

구약에 보면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예리고를 점령하고 들어갔으며, 예수께서 전도 생활을 하실 때 예리고를 수차례 지나다니시며 맹인도 고쳐 주시고 쉬시기도 했던 곳이다. 이러한 예리고에서 세관장을 지냈던 자캐오는 여러 가지로 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위도 높았을 것이다. 그러한 자캐오가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사회적 체면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린 아이처럼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캐오의 이러한 소박한 행동을 보시고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가 19, 5)라고 말씀하셨다. 자캐오는 이 말에 얼른 내려왔고 아주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기 집에 모셨다. 그러나 자캐오를 미워하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루가 19, 7) 하며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자캐오는 그들의 비판적인 말에 상관없이 예수께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루가 19, 8) 하고 말했다.

 

자캐오는 비록 유다인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미움을 받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고 따뜻하게 대해 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했으며,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이기주의적인 마음을 반성하였다. 이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자캐오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분의 인격에 감동을 받고 자신의 아집과 욕심의 벽을 무너뜨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전환되어 회개하였다. 자캐오는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정말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다.

 

2.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오 천억 원

우리 모두 다 알다시피 전직 대통령이 재임 시에 갖가지 명목으로 모아 들인 비자금이 5,000억 원 정도 된다고 공개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돈 중 쓰고 남은 돈은 1,850억 원 정도나 되며 이것은 본의 아니게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개는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본인 자신이 공개한 것이 아니다. 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이 노대통령이 4,000억 원 규모의 비자금을 은행에 숨겨 놓은 일이 있다고 공개하자, 노 전대통령은 그런 일이 결코 없다고 했으며, 명예 훼손으로 박의원을 고소하겠다고 극구 변명했었다. 그러나 증거물이 포착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마지못해 자기 변명을 위한 처신으로 비자금 공개를 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은 실제로 그것 외에도 숨겨 놓은 것이 더 있겠지 하며 의심을 갖고 있었고, 또 그의 진술이 과연 진실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과연 그가 회개했다면 왜 솔직하지 못할까 하며 불신의 분위기가 덮여 있었다.

 

3. 자캐오의 참다운 회개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똑같이 부정 축재를 하였지만, 자캐오의 회개는 참으로 솔직한 자기 반성과 선의의 결심에서 나온 것이다. 자캐오의 회개는 남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겠다는 것이었으며, 남을 속인 일에 대해서는 네 갑절을 갚아 주겠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자캐오의 회개를 보시고 기뻐하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루가 19, 9)라고 하셨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본인 자신의 기쁨은 물론이며 하느님을 흐뭇하게 하고 예수님을 기쁘게 하며, 또 이웃 사람들에게 자신이 쳐 놓은 벽을 무너뜨리고 친교를 이루게 한다.

 

4. 회개해야 할 오늘날의 자캐오들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신을 반성할 줄 모르며, 또 자신의 죄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점점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 가는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 우리는 자캐오처럼 자발적인 마음으로 회개하여, 욕심과 아집으로 가려 있던 자신의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기쁘게 하고 이웃과 참된 친구가 되는 길을 찾아보자. 그리하여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참된 회개의 마음을 가져 보자.

 

제74단상 : 절망 속에서 희망이 된 라자로의 소생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치시자,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1, 44).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항상 체험하는 절망과 비탄 속에서 어떻게 희망과 자유를 가질 것인가? 삶과 죽음-생명의 탄생, 노인의 죽음 등-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교차되는 삶의 현상이다. 우리는 흔히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고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요한 11, 25)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죽었어도 살아 있는 사람, 살았어도 죽어 있는 사람을 구별하도록 하신다. 이것은 성서의 맹인 이야기(요한 9, 1-41)에서 보듯이 맹인이면서 볼 수 있는 사람과 눈을 뜨고서도 볼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영원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케 하심으로써 깊은 절망 속에서도 그리스도께 대한 신뢰만 있다면 희망으로 솟구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즉 새로운 희망, 부활은 세상이 끝날 때에 한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이런 뜻에서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는 예수님 생전에 일어났던 사실임에도 요한 복음 저자는 오늘날에도 이 일이 일어나야 함을 역설한다. 라자로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무력함"이란 뜻이다. 즉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라자로가 죽어 가고 있기에 누이들은 예수께 전갈을 보냈으나 예수님은 소식을 받은 후에도 이틀 동안이나 지체하시며 라자로를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일과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만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는 라자로가 이미 죽어 땅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후였다. 누이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기에 일찍 오시지 않은 것을 원망하면서도 예수께 간청한다. 예수께서 라자로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니 누이는 세말에 일어날 부활로만 알아듣는다. 예수님은 무덤에 가서 라자로를 살리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요한 11, 44).

 

라자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은 바로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 삶 속에서 매일매일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 부활은 이 세상이 끝나는 날 단 한 번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다.

 

에제키엘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시체들에게 말하였다.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에제 37, 12-13).

 

2. 절망 가운데 희망의 표징이 되어야 할 우리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세상, 사회는 라자로처럼 무력하고 병들어 있고 아마도 죽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온갖 불의와 부정과 인권 유린, 생명 경시, 상호 불신과 질투와 경쟁으로 생명을 잃어 가고 있다. 육체적인 생명까지도 서서히 죽어 가고 있고 온갖 질병과 인간이 만들어 낸 공해 등으로 무덤으로 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느님은 침묵하고 계신다.

 

사람들은 절망한다. 왜 하느님은 가만히 계시느냐고…. 아마도 하느님이 가만히 계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느님께서 무덤에 떨어진 우리를 무덤 속에서 끌어내시며 "나오너라."(요한 11, 43) 하시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몸에 감겨 있던 모든 결박을 다른 이들로 하여금 풀어 주라고 하실 것이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요한 11, 44). 아니면 오늘날 결박당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우리에게 그들을 풀어 주어 자유롭게 가도록 하라고 하시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묶인 이들은 누구이겠는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일어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풀어 주라고 말씀하신다. 묶인 이를 풀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당신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말씀과 뜻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바로 우리 인간을 통해 그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75단상 :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가 1, 37-38).

 

1. 나자렛 마을의 성모 영보 성당

이스라엘의 나자렛 마을에는 큰 성당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성모 영보 성당'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 마리아, 요셉께서 생활하셨던 터에 새워진 '성가정 성당'이다. 성모 영보 성당에 들어가면 성당 마당 울타리 벽에 장식된 세계 각국의 성모님의 모습이 우아한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순례객들의 눈길을 끈다. 그리고 성모 영보 성당의 정면 벽에는 우리가 삼종 기도 때 바치는 기도문이 라틴 말로 조각되어 있으며, 옆면 벽에는 성모송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도문들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말은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대답하신 "주님의 뜻대로 저에게 이루어 주소서(Fiat Voluntas tua)."라는 말이다. 마리아의 이 응답은 온 세계가 기다려 온 구원의 응답이었다.

 

일찍이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 14)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다윗 가문의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리라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말씀을 듣고 처음에는 의아해 했지만,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루가 1, 38) 하고 겸손되이 대답하셨다. 이 말씀을 통해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 되셨다.

 

2. 겸손과 신뢰의 기도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인의 자세가 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성모님의 응답은 겸손과 신뢰의 기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자기가 편리한 대로 이용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일에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또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 속에는 자신이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고 노력하면서 어떠한 희생도 달게 받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바치면서도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우리는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좋은 일만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바라면서도 사실상 주님의 뜻은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결코 주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따르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서로 용서하며 진정 이웃을 자기 몸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은 잘났건 못났건 다 하느님의 모상을 타고 태어났으며,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다. 부모는 자기 자녀들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푼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

 

3. 실천 속에 드러나는 주님의 뜻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고 거짓과 위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서 맞아들일 수 없다. 예수님은 사실상 유다인들의 거짓과 위선 속에서 죽으셨다. 그분은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주의적인 마음으로 말미암아 거짓으로 대했다. 그 결과 세상은 더욱 악해지고 냉랭해지고 분열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부조리와 불의와 악도 바로 인간의 이기주의적인 마음 때문이다. 하느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모순과 악과 부조리의 원인이 되실 수는 없다. 하느님은 선 자체이시다. 하느님은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보신 후 "참 좋다."(창세 1, 10)고 하시며 모든 창조물에 선성을 부여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원래가 하느님의 축복 속에 존재하게 된 것이고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갖고 있는 자유의 잘못 사용으로 인해 세상의 악과 불균형과 부조리가 생긴 것이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부조리와 악과 불균형을 보면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한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악이 존재하며 불의가 판을 치고 거짓이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지구의 한쪽에서는 추위와 전쟁과 기아로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풍요를 구가하며 소비가 미덕인 지역도 있다. 우리 신자들 중에도 지금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재산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가지고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없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러나 인간들의 탐욕 때문에 부익부 빈익빈(富益富貧益貧)의 현상은 가중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하느님이 우리의 재산 분배자로 나오셔야 하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인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대로 산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4.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의 공동 기도인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마태 6, 10) 하고 기도한다. 아버지의 뜻은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형제 자매들에게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렇게 좀더 생각하면서 기도한다면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진정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기도를 바치면서도 서로 사랑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이기주의적으로만 산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자기가 가진 재물을 남을 위해 쓰지 않으면서 하느님께만 가난한 자를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구세주 예수의 성탄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사악한 마음 자세는 고치려 하지 않고 그저 세속 사람처럼 크리스마스라는 휴일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위선이다.

 

루가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1, 38)라는 성모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 일맥 상통한다. 예수께서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마태 6, 10) 하고 기도하셨다. 또한 게쎄마니에서 피땀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에도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 39)라고 하셨다. 이같이 예수님과 성모님의 기도를 보면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자유로이 순종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전적인 투신과 순종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됨을 본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의 뜻에 자유로이 순종함으로써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심오한 진리이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자유로운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살고 자유로이 순종한다면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하는 기도는 위선이 아니라 진실이 되는 것이다.

 

제76단상 : 주님의 예기치 않은 방문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성서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집을 찾아오시고 인간은 찾아오신 하느님을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1. 아브라함의 극진한 손님 대접

먼저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세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다(18, 1-10). 아브라함은 이분들을 보자 급히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음식을 드시고 편히 쉬셨다가 길을 가십시오."(창세 18, 4-5 참조) 하고 부탁한다. 그러자 이분들은 아브라함의 청을 받아들여 집에 들어가 아브라함과 그 부인 사라가 준비한 연한 송아지 고기와 젖과 우유와 떡을 드셨다. 아브라함은 이분들이 음식을 들고 계시는 동안 그 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식사 대접을 받고 그에게 아들을 얻게 되리라는 기쁜 소식을 알려 주신다.

 

아브라함은 손님 세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인간적으로 따뜻이 맞아들이고 대접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천사들을 맞아들이고 대접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또 우리가 사는 집으로 방문하신다. 그 여러 가지의 모습들 중에는 설마 하느님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실까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채택하시고 이용하신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 사람들을 이용하시며 사람들을 통해서 하신다.

 

하느님의 뜻을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사람이 협조하고 일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겠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온전한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인간끼리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주님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또 어떤 때는 우리를 시험하시기도 한다.

 

2. 가장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주님

마태오 복음 25장에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고, 또 그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주님을 인간이 어떻게 대해 왔는가에 따라 축복과 저주의 판가름이 된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하신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인데, 그들이 한 것은 사람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대접한 것이었다. 즉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 35-36). 이 말을 듣고 그 의인들이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고, 목마르시고,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병들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우리가 대접했습니까?"(마태 25, 37-40)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 45) 하시며,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마태 25, 46) 하고 말씀하신다.

 

이 마태오 복음 25장의 말씀은 최후의 심판 날의 광경이기도 하다. 문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주님을 따뜻이 맞아들이느냐, 배척하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결정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시지는 않는다. 때로는 우리가 상대하기도 싫고 대면하여 말하기도 싫은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시험해 보시고 믿음을 시험해 보신다. 그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을 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 모든 인간이 당신의 자녀이기에 인간 서로가 한 형제로서 물질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3. 성 마르티노의 외투 반 조각

주님은 굶주리는 모습, 목말라 갈증 나는 모습, 혹은 나그네의 모습, 혹은 병이 들고, 감옥에 갇힌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볼 때마다 바로 주님의 불쌍한 모습으로 여기고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랑은 영원히 남고, 또 그 사랑으로 주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4세기의 성인 마르티노(316-397년)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마르티노가 세례받기 전 군인으로 있을 때, 어느 날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어떤 불쌍한 거지를 만났다. 추운 겨울에 벌벌 떨고 있던 그 거지가 마르티노에게 도와 달라고 청하자, 그는 자기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마침 돈도 없고 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외투를 칼로 잘라 그 반을 불쌍한 거지에게 주었다. 그 날 밤 마르티노는 꿈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꿈 속에서 예수님은 마르티노가 준 외투 반 조각을 입고 나타나시며, 곁에 있는 천사에게 "이 외투는 아직 예비 신자인 마르티노가 준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티노는 그 날 아침에 만났던 거지가 예수님이었음을 깨닫고 더욱 열심히 자선 행위와 큰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프랑스의 유명한 종교 마을인 투르(Tours)라는 곳에서 주교로 봉직하면서 불쌍한 이들을 많이 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4.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사도 요한은 말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었으니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 4, 16-17. 19-21).

 

이러한 성서의 말씀을 생각할 때에 인간에 대한 사랑은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며,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인간으로 나타나신 길손 세 분을 극진히 대접한 것은 곧 하느님을 대접한 것이고, 또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한 것도 곧 하느님을 극진히 대접한 것이었다(루가 10, 38-42).

 

그러므로 인간 상호간의 사랑은 곧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모든 인간을 한결같이 평등하게 사랑하고 더욱이 우리 눈에 보이는 굶주리고 목마르고 아프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주님을 대하는 정성으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영원한 축복을 받도록 해야 하겠다.

 

제77단상 : 준비된 신앙 생활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마태 25, 13).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함을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바 있다. 그중에서도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 1-13)는 우리의 준비된 신앙 생활에 대해 혼인 잔치라는 배경 속에서 나타난다.

 

1. 이스라엘의 혼인 풍습

예로부터 혼사라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중대히 여겨 온 일로 특별히 이스라엘인들에게도 그러했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혼인의 풍습은 지금도 이스라엘의 여러 지방에서 실시되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 나라의 혼인 관습과는 좀 다른 점이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집에 혼인 잔치가 생기게 되면 그 동네 사람들이 전부 나와서 신랑 신부를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신랑 신부로 하여금 될 수 있는 대로 먼 길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게 했다. 이 혼인 잔치는 일 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친구들은 그 신혼 부부를 마치 왕이나 왕후와 같이 대우해서 일평생 가장 기쁘고 즐거운 일 주일이 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개 중류 가정만 되어도 으레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열 사람의 처녀들이 단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신부를 즐겁게 해준다고 한다. 그런데 신랑은 오는 시간을 알리지 않고 처녀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자는 동안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이 큰 재미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개 신랑은 밤중이나 새벽에 오는 것이 예사였으며, 올 때에는 앞에 선 사람이 "신랑이 오니 마중을 나와라." 하고 외친다. 이 때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을 맞아들이기 위해 들러리했던 처녀들은 등불을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마침내 신랑이 집에 들어오면 결혼식은 절정에 달하고 잔칫집 대문은 닫히고 그 후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실제로 실생활에서 거행되던 것이었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비유로서 종말의 긴박한 상황을 전제하며 사람들을 각성시키려고 말씀하셨다.

 

2.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교회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말씀을 매우 애송했다고 한다. 당시 신자들은 주님의 재림이 곧 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정작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님의 재림은 오지 않고 마침내 신자들은 지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비유는 그 당시 박해의 상황 속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혼인 잔치는 성서에서 여러 번에 걸쳐 하늘 나라에 비유된다. 사실 인간 사회에서도 잔치에 참여해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가장 기쁜 일이며 가장 친교적인 일이다(에페 5, 23; 1고린 11, 2).

 

마태오 복음에 등장하는 혼인 잔치의 비유에 나오는 열 사람의 처녀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를 상징한다.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한 것은 교회가 예수님의 재림을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부가 신랑에게 충실해야 하듯이 교회는 신부로서 신랑인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이 오시게 되면 주님을 기다리며 충실히 준비한 사람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로 가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사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 최고의 목표이며 영원한 행복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 있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에서 주님은 미련한 처녀들이 잔칫집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졸았기 때문이 아니다. 존 것은 슬기로운 처녀들이나 미련한 처녀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주님도 존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질책도 꾸중도 안하셨다. 다만 주님이 질책하신 것은 그들이 게으르고 나태해서 준비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였다. 게으름과 나태함은 자기가 능히 할 수 있는데도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여 어떤 일을 하지 않는 행위이다. 반대로 준비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평소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다.

 

3. 평소에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

평소에 올바로 살지 않은 사람이 임종 시에 갑자기 서두른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잘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시험생이 평소에 열심히 공부를 해야지 시험을 며칠 앞두고 밤을 새워 공부를 한다고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갈 리가 없다. 평소에 열심히 생활한 사람의 모범이 되는 가를로 보로메오 성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가를로 성인이 친구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친구가 만약 우리가 한 시간 내에 죽는다고 가정하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할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러자 친구들의 대답은 제각각이었다. 한 친구는 집에 가서 유언장을 작성할 것이라고 했다. 또 한 친구는 빨리 신부님께 가서 고해 성사를 보겠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기도로써 그 시간을 보내겠다며 각자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가를로는 침착하게 "나는 계속해서 카드놀이를 하겠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가를로는 평소에 하늘 나라를 위해 준비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일매일의 삶을 하느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위해서 행동할 준비를 평소에 해 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평소에 준비하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항상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겨울을 지내기 위해서 겨울 동안 먹을 김치도 담고, 또한 겨울 난방을 위해서 기름도 채운다. 이렇게 우리는 겨우살이 준비를 미리 할 줄 안다. 그런데 과연 자기 구원을 위한 준비는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의 구원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기의 영생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이 필요할 때 빌려 쓸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간혹 인간 사회에서는 서로 빌려 주고 빌려 쓰는 일이 좋은 미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이 하느님과 갖는 관계는 자기 자신이 올바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신앙 생활을 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지식, 교양, 신앙 등은 자기 것이 아니다. 자기가 노력하고 애쓰고 꾸준히 수양해서 쌓아야 자기 것이 된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하느님 나라는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유된다고 했다. 저마다, 즉 각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준비이다. 각자가 등불을 태울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

 

요즈음 우리는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준비하는 생활은 하지 않고 세상 일에만 전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세상 일도 꼭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주일에도 자기의 야망을 위해서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세상 일에만 몰두한다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느님보다도 자신의 일을 더 귀중히 여기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신자들은 기름이 있는 곳, 즉 성령과 은혜의 원천에서 참 신앙을 얻는다. 바로 평소에 준비하는 생활이 지혜로운 사람의 생활이다. 지혜는 지혜에 상응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했다(지혜 6, 16).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이처럼 준비하는 생활이다.

 

그러면 여기서 과연 우리는 평소에 예수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등잔뿐만 아니라 기름까지도 준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세상의 빛이다."(마태 5, 14)라고 말씀하셨다. 빛이나 등불은 어두운 세상을 밝혀 주고 길을 인도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우리 신자들이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그 빛을 내게 하는 기름, 즉 성령에 충만된 생활을 해야 한다. 성령은 사랑의 생활로 인도한다. 결국 사랑 속에 사는 사람만이 이 어두운 밤과 같은 세상 속에서 빛을 낼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으로 준비된 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예고 없이 다가오시는 주님을 기꺼이 마중 나갈 수 있을 것이며 마침내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의 잔치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제78단상 : 지도자들의 성실과 봉사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중에 으뜸 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마태 23, 10-13).

 

성서에 보면 공동체의 책임자들과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들이 성실한 마음으로 봉사해야 함을 일깨워 주며 말한 것이 많이 나온다. 예수님은 당시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고발하시며, 그들에게 올바로 살 것을 요구하셨다. 예수님으로부터 질책받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법을 연구하고 백성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입장에 있던 그 시대의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율법의 실행과 적용에 있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고, 또 법의 정신을 살리기보다는 쉽사리 법대로만 처리하여 인간의 진정한 구원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율법적 권위나 찾으려 하고 맹목적인 법 준수를 강요함으로써 하느님의 올바른 뜻을 저버렸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 시대의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해 본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고 보다 정직하고 봉사적인 자세로 살아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여러 계층의 지도자들이 반성해야 하겠지만, 먼저 자신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보다 더 잘살아 보자는 의미에서 교회 내의 봉사자들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 보자.

 

오늘날도 교회 안에는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교계 제도를 통해 하느님 백성을 가르치고 지도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주교, 사제, 부제의 봉사직이 있다. 과연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비판을 모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시대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한 좋은 비판의 이야기가 있다. 성직자들은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니까 물에 빠져도 입만 뜨고, 수도자들은 좋은 말씀만 듣고 실천하지 않으니까 물에 빠져도 귀만 뜬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평신도들은 좋은 여건과 위치에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배만 채우니까 물에 빠져도 배만 뜬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천당에 가 보니 천당에도 주교가 있는 곳과 신부가 있는 곳 그리고 신자들이 있는 곳이 구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평신도들이 있는 곳을 가 보면, 아주 즐겁게 떠들썩하고 시끌벅적하게 서로 기쁘게 대화하고 있고 다음 신부가 있는 곳을 가 보면 아주 대조적으로 몇몇 분들만이 모여 그저 대화만 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다음 주교가 있는 곳을 가 보면 그곳에는 아주 조용하고 정적만 흐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계신가 하고 보니, 아직 온 사람이 없어서 그저 조용한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지옥에 가 보았는데 우선 그곳에는 회장이 와 있었다. 그곳에서 만나 "아니 이곳에는 웬일이냐?"라고 물으니 그 회장은 "아냐! 이곳에는 우리 본당 신부님도 와 계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본당 신부에게 가서 인사를 드리니, 그 신부는 "쉿, 저쪽에 주교님도 계셔." 하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가 비유적으로 혹은 우스운 이야기로 흔히 나옴을 생각해 볼 때, 한편으로는 농담이겠지 하면서도 또 그것이 시사해 주는 바는 크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남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그 직책이 얼마나 어렵고 충실한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그것은 교회의 성직자들뿐 아니라, 국가의 지도자들, 단체의 지도자들, 어떤 공동체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 해당된다. 우리는 모든 이의 공동선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며,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집이나 독선, 그리고 권력의 횡포는 반드시 하느님에 의해 판단받으며 상과 벌의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실한 책임과 공동선을 위한 헌신, 하느님께 대한 충실이다. "너희 사제들에게, 나 이제 이 분부를 내린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기릴 생각이 없으니, 너희에게 내릴 것은 재앙뿐이다. 축복 대신 저주를 내릴 수밖에 없다"(말라 2, 1-2).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라기 예언자를 통해 구약의 사제들의 잘못을 드러내신 것,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인들의 잘못을 드러내신 것, 또 오늘날에 와서 시중에 나도는 얘깃거리 등을 생각하면서 성실하게 살도록 해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자세와 교우들의 모범적인 태도를 보여 준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내세울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극진히 생각하며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며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교우들을 사랑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현대의 모든 사제들, 특히 선교사, 사목자들에게 요구되는 복음 전파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교우들의 입장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라 것이다. 또한 전해진 복음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생활화해야겠다.

 

우리는 이 두 가지 태도를 배우면서 이제까지의 잘못을 반성하고 쇄신하며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서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형제 자매로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제79단상 : 참사랑은 구체적 행동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마르 12, 31).

 

1.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율법과 계명에 대해 우리 신자들 중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자 생활을 하다 보면 "이것은 죄가 되는가?" 혹은 "이것은 계명에 어긋나는가?" 등 이러한 생각들이 가슴과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가끔 평화 방송의 신앙 상담 시간을 듣다 보면 이러한 질문들이 가장 많이 나온다. 이것은 계명과 율법이 그만큼 우리 신자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을 잘 알고 있던 어떤 율법학자가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은 어떤 것인지 예수께 물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셨다(마르 12, 29-31). 당시 유다인의 율법은 613가지로 세분화되어 있었다. 유다인들은 이 모든 것을 잘 지키는 것이 큰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많은 것들을 지켜 나가면서 율법에만 신경 쓰다 보니 과연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모든 계명이 똑같은 비중을 갖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기본 정신을 사랑으로 보셨고, 모든 인간의 행동을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하시고 행동하셨다. 그래서 때때로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기적과 행동 그리고 가르침으로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레위 19, 18), 이 두 사랑이 모든 계명의 요약임을 보여 주셨다.

 

2. 성서의 근본 사상인 사랑과 용서

어떤 분이 성서의 근본 사상을 파악하고자 성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어떤 것인지 조사한 적이 있다. 그는 신약 성서의 각 구절들을 각각 카드로 만들어 분류해 보았는데 그중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사랑'이라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용서'에 관한 말이었다고 한다. 과연 신약 성서는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이 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사랑과 용서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다.

 

얼마 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장식하였던 지존파 살인 집단의 경우나 성수 대교의 붕괴 사건, 그리고 충주호의 관광배 침몰 사건 등, 일련의 가슴 아픈 사고들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고 단적으로 드러난다. 정녕 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무모한 인명을 무참하게 살상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가고 사용할 공공의 다리를 그렇게 허술하게 지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침몰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정원을 초과하도록 사람을 태울 수 있었겠는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바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충실성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3.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는가?

 

우리 인간이 드리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한 표현 방법으로는 우리가 전례 행위 안에서 드리는 인간의 행동과 말이 있다. 즉 예배 행위, 미사 전례 안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신앙 고백, 찬미와 찬송 그리고 그분에 대한 우리의 경건한 몸 동작 등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나 이것도 외부 형식적인 것만 가지고는 안 되며, 마음으로부터 진실된 제사가 되어야 한다.

 

4. 하느님께 드리는 영적 제사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 12, 1)라고 말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1베드 2, 4-5)라고 권고하였다. 바로 이러한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힘껏 봉사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 야고보 사도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억눌린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야고 2, 14-26).

 

5. 신앙 생활 유감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서 사랑과 관심과 친절한 모습이 점점 줄어 가고 있음을 본다고 애석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당에 오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고 기도하러 온다고 하지만, 새로운 사람이 와도 무관심하고, 평화의 인사도 건성으로 하며, 관심과 친절한 행위도 아주 드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사가 끝난 후 교우들간에 다정히 인사하는 좋은 습관도 점점 없어지고 무엇이 그리 바쁜지 쏜살같이 성당 문을 나가 버린다. 그뿐 아니라 사제가 주일 미사 후 인사하기 위해 성당 마당에 서 있어도 무관심하게 지나쳐 가거나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교우들이 많다. 그런 경우에는 참으로 무색해진다. 때때로 사제에게 인사를 하는 교우가 있으면 고맙게 느껴질 정도로 다정히 인사하는 경우가 참 드물어진 것이다. 그렇게 사제와 신자들 그리고 신자들간에도 사랑을 나누지 않으면서 어떻게 모르는 사람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베풀 수 있겠는가? 그리고 열심히 성당에 나가 기도는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본당 공동체를 위해 협력해야 할 때는 냉정하게 외면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되겠는가? 그리고 또한 요즈음 본당에서 봉사 단체나 활동 단체의 장을 기피하려는 현상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봉사 활동에 시간을 할애하기보다는 얼마간의 돈을 내는 것으로 만족해 하는 신자들이 있다면, 신앙을 돈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서는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교회 일로 방문하는 구역 반장, 혹은 선교 봉사 단원들은 그리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대하는 교우들도 있다. 그리고 물건을 팔러 집에 오는 상인이나 도움을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는 문도 열어 주지 않으며, 냉정한 말로 거절하는 신자들이 있는데 과연 그러한 모습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케 하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신앙인의 모습이 보여지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본당에서 파견된 구역장, 반장들이 신자 가정을 방문할 때에도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구역장, 반장들은 본당의 공동체 소식을 전해 주고 또 본당 공동체를 위해 교우들이 협조해야 할 일을 전하러 온 사람들이다.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가능하면 본당 공동체를 위해 협력하자. 본당은 바로 우리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신자들이 주인 의식을 가지고 가꾸고 하느님의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구체적인 모습 속에서 진실로 드러난다는 것을 생각하자.

 

제80단상 : 축복받은 결혼식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요한 2, 1).

 

1. 혼인을 축복해 주신 예수님과 성모님

가나 촌의 혼인 잔치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무언가 평화롭고 흥겨운 느낌이 든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비옥하고 아름다운 마을인 가나 촌에서 벌어진 한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신랑 신부의 결혼을 축복해 주시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 당시 유다인의 결혼 풍습에 의하면 혼인 잔치는 일 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 일 주일간에 걸친 혼인 잔치에서 신랑 신부는 마치 왕과 왕비처럼 대우를 받고 동네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 그리고 성모님도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고 신랑, 신부의 결혼을 축복해 주시고 음식을 드시고 즐거워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혼인 잔치 도중에 술이 떨어진 것이다. 즉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에 즐겨 찾는 술, 그 술이 바닥 난 것이다. 또 제자들과 손님들 역시 술을 마시고 기분을 냈을 것이다. 그런데 술이 떨어졌으니 그 잔치를 주관한 사람들의 입장이 얼마나 난처했겠는가? 바로 이 때 이 딱한 사정을 눈치 챈 성모님께서 무슨 묘책이 없을까 하고 예수께 이 사실을 알린다. 즉 성모님은 예수께 부탁하면 이 딱한 사정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면서도 성모님의 간곡한 부탁이라 거절하시지 않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고 그 혼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셨다.

 

이러한 혼인 잔치의 사건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성모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새삼 더 잘 알 수 있고 또 결혼의 가치를 깊이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우선 성모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볼 때 두 분 사이는 물론 모자지간이다. 예수님은 성모님에게서 태어나셨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또 성모님은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 주신 천주의 모친이시다. 두 분은 인간 구원의 공동 협력자로서 필요와 요구를 들어 주시고 인간의 딱한 사정을 돌보아 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성모님을 통해 예수께 기도드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며 우리의 딱한 사정을 성모님께 간구하여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성모님의 청을 거절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딱한 처지와 입장에 놓였을 때 성모님께 간곡히 부탁드리고 또한 예수께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기도한다.

 

2. 남녀간의 혼인은 하느님의 거룩한 계획의 반영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예수께서 이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혼인을 축복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즉 두 남녀가 결합되는 결혼의 가치를 인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모상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또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라고 축복하셨다(창세 1, 27-28). 이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사람이 나이가 차서 결혼 적령기에 이르면 짝을 찾게 되고 서로 일생을 함께 살겠다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맹세하는데 이것이 혼인 성사이다. 예수께서는 인간 사회의 혼인을 성사의 위치에까지 높여 주시며 축복해 주신 것이다. 이 혼인 성사를 통해 한 쌍의 남녀는 부부라는 가장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되고 자녀를 두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룩한다.

 

이처럼 남녀가 결혼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하느님의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 그리고 성모님도 가나 촌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신랑 신부를 축복해 주신 것이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술이 떨어지자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까지 베푸신 것이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는 모습에 비유하였다. 즉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반기신다"(이사 62, 5). 또 사도 바오로는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2, 5-7)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결혼하여 살면서 하느님을 섬길 수도 있고 결혼하지 않고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다 가치가 있는 일이다.

 

3. 교황으로부터 축복받은 프레데릭 오자남의 결혼

혼인 성사에 대한 이러한 일화가 있다.

 

프레데릭 오자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빈첸시오회도 창립하고 또 소르본 대학의 교수로도 일하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라코르데르라고 하는 신학자인 신부가 친구로 있었다. 그런데 이 유능한 프레데릭이라는 사람이 늦도록 총각으로 지내고 있자, 그 신부는 프레데릭에게 부디 "신부가 되어 훌륭한 주교가 되어 주게."라고 말하였다. 프레데릭은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얼마 후에 어여쁜 아가씨와 결혼했다. 그러자 그 신부는 한탄하면서 말하길 "불쌍한 프레데릭 그마저 덫에 걸리다니." 하면서 애석해 했다. 그런데 이 말이 그 당시 교황 비오 9세의 귀에 들어갔다. 얼마 후에 그 신부는 교황을 알현하게 되었는데 교황은 그 때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봐요 신부님! 예수님은 7성사를 세웠지, 6성사와 하나의 덫을 세운 것은 아닙니다."

 

결혼 생활은 하느님으로부터 축복받는 생활이다. 서로 모르던 남남이 만나 혼인 성사를 통해 한몸을 이루고 인생의 반려자로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가나 촌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여 그 혼인을 축복해 주셨고 또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흥겹게 해주셨음을 생각하면서 앞으로 결혼할 사람들과 또 이미 결혼한 사람들이 행복하고 축복받는 가정 생활을 하도록 기원한다.

 

제81단상 : 칠관왕이신 그리스도

 

"다른 죄수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루가 23, 42-43).

 

전례력으로 볼 때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왕이신 그리스도를 기념하게 된다. 루가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비록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셨지만, 예수 곁에서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던 오른쪽의 강도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서 왕에게 청원하는 대목이 나온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루가 23, 42). 이에 예수께서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는 이 죄수의 청을 들어 주신다. "오늘 네가 정령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 43). 예수님은 왕 중의 왕이시며, 모든 왕이 겸비해야 할 덕을 지니신 분이다. 예수님은 일곱 가지 덕의 왕, 즉 칠관왕이시다.

 

1. 고통의 왕

예수님은 왕이셨지만 화려한 왕관을 쓰신 왕이 아니라 가시관을 쓰신 고통의 왕이었다. 세상의 죄와 악에 희생되어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시고 선과 인내로써 인간의 고통을 없애러 오신 왕이시다.

 

2. 용서의 왕

예수님은 또한 용서의 왕이시다. 세상 사람들은 잘못한 이에게 돌을 던지고 미워하며, 친구로서 동료로서 받아들이지 않지만, 예수님은 회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하시고 당신의 친구로 혹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아 주셨다. 사람들이 미워했던 세리, 창녀들, 방탕한 이들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당신의 다정한 친구로 받아 주셨다(세리 마태오, 세리 자캐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 등).

 

3. 겸손의 왕

예수님은 또한 겸손의 왕이시다.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가난하고 순박한 이들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과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 주셨다. 그러면서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 14)라고 말씀하셨다.

 

4. 봉사의 왕

예수님은 또한 봉사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해 자신의 시간과 능력과 관심을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봉사하신 분이다. 신체적으로 고생하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고생하는 이들을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치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2-13)라고 말씀하셨다. 그뿐 아니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 28)라고 하시며 봉사의 참된 모범을 보여 주셨다.

 

5. 정의의 왕

예수님은 또한 정의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공정하게 판단하시고 심판에 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선과 악을 분명히 가리시고 "예" 할 것은 "예" 하시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이 세상에서 불의와 부정을 몰아내고 정의를 세우고자 하셨다.

 

6. 사랑의 왕

예수님은 또한 사랑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죄와 악에서 허덕이며 불행히 사는 것을 보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으로서 자신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이웃을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참으로 마음속에 사랑을 가득 담으시고, 사람들을 만나고 가르치셨으며, 몸소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이것은 특히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탕자의 비유'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처럼, 예수님은 소외되고 미소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 바로 자신에게 베푼 것과 같다고 하시며 가장 비천하고 미소하고 불쌍한 사람도 사랑해야 함을 일깨워 주셨다.

 

7. 평화의 왕

끝으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적을 제거하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싸움을 하지만, 예수님은 이해와 사랑과 용서로서 평화를 추구하신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한 가르침들은 이 세상이 하느님의 뜻대로 다스려지는 평화의 왕국이 될 수 있게 함이었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와 그의 나라"의 도래에 대해 언급하면서 예수님을 두고서 이렇게 예언하였다.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이사 9, 5-6).

 

이렇게 메시아로서 오신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며 평화의 길을 가르치셨다. 또한 제자들을 여러 마을로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도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루가 10, 5) 하고 권고하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날 때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루가 24, 37) 하고 인사하셨다.

 

진정 예수님은 이 세상에 참된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시다. 예수님의 평화의 길은 참된 겸손으로 고통을 인내로이 참고, 회개하고 뉘우치는 자를 용서하시고, 정의와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으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나라, 평화의 나라를 이룩하고자 하신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본받아 '평화의 기도'를 지으셨는데, 이 기도는 전 세계 곳곳에서 종교적 신념과 이념의 차이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이해 관계 등의 이유로, 또 전쟁과 투쟁으로 상처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참된 화해와 평화를 모색하는 길을 보여 준다. 특히 남북으로 분단되어 동족끼리 가슴에 총을 겨누고 증오와 불안 속에 대치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는 이 '평화의 기도'야말로 우리 민족이 진정으로 평화를 바라며 공동으로 바쳐야 할 '평화의 기도'이다.

 

우리 나라와 세계 곳곳에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은혜를 통한 진정한 평화가 깃들이도록 함께 기도하자.

 

제82단상 : 하느님의 나라를 먼저 찾아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내 어린 양 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루가 12, 30-32).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분주하고 바쁜 생활 가운데에서도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아라."(루가 12, 31) 하시며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신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등에 그만 신경 쓰고 이제 가장 소중한 하느님을 찾으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스스로 그렇게 사셨듯이 '하느님 나라'를 전해 주는 일이 그분께는 최대의 관심사였고 가장 소중한 일이었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이 전해 듣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기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다. 이 기쁜 소식을 외면한 채 일시적인 양식과 물질만을 쫓아다니며 모으고 또 모아서 쌓아 놓고 만족하는 인간들의 삶의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또 몸에다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루가 12, 22)고 하셨다. 그러면서 공중의 새들과 동물들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먹여 살리시며, 들의 꽃들도 하느님의 섭리대로 살아간다고 일깨워 주셨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인간들은 짐승이나 들꽃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주셨다. 창조 때 하느님은 만물을 다스리고 유익하게 사용하라고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살아갈 것을 걱정하고 자꾸 모아서 창고에 쌓아 두려고 하며 그 일 때문에 하느님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일까? 결코 우리는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인간이 먹고사는 것은 한계가 있다. 잘 먹고 잘살면서 가장 소중한 하느님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마음 안에 하느님이 사라지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옛날에 평생을 돈과 재산을 위하여 살다가 결혼도 하지 않은 어떤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오직 귀한 물건을 가지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을 알고 있다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 나그네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 부자는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다 쓰는 것인데 그렇게 귀한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나그네는 "세상에 아무 것도 없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사랑만 있으면 언제나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듣고 보니 그 부자는 과연 사랑이 아주 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금화를 한 움큼 내놓으면서 "그처럼 귀한 것이니 값도 많이 나가겠지요." 하면서 "되도록이면 좋은 것으로 그 사랑을 많이 구해다 주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참 어리석은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하느님을 그러한 태도로 찾고 구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하느님과 사랑을 돈으로 편히 사려는 생각이 현대인들에게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사랑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찾고 체험하고 소유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 나라는 그분의 뜻이 우리 마음 안에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요한 4, 7-21)라고 사랑을 체험하고 나서 말하였다. 하느님 나라는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볼 수도 없으며, 더구나 돈으로 살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과 정의를 통해 체험될 뿐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마음을 채우고 움직이게 하는 상태이다. 그것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 남녀간의 사랑, 이웃간의 사랑 안에서 체험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구하고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존재한다. 예수님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하듯이, 하느님의 나라도 존재한다. 이미 우리는 세례를 통해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말처럼 하늘 나라의 성도들이며 그 시민이다(1베드 2, 9). 그러므로 비록 세속에 몸을 담고 있지만, 하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야 한다. 여러 가지 삶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성서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고 살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이러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고 완성되어 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하늘 나라에 대한 확신과 위로에 찬 말씀을 다시 새겨 보자.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내 어린 양 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루가 12, 30-32).

 

제83단상 : 하느님 나라를 위한 가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

 

1. 가난의 아이러니

성서를 통해 볼 때 구약보다는 신약에서 특별히 가난과 청빈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구약 성서에서는 가난보다는 물질적 축복을 하느님의 은혜로 생각했다고 보여지며, 가난과 청빈은 신약의 예수님으로부터 특히 강조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가난'이라는 말을 생각해 볼 때 물질적인 결핍, 부자가 아닌 사람 등을 생각하게 된다. 가령, 돈이 없는 사람, 배고픈 사람, 또 학교에 갈 입학금이 없어서 쩔쩔매는 사람, 혹은 옷 사 입을 돈이 없어 남루하게 차려 입은 사람 등을 연상하게 된다. 그리고 좀더 차원을 넓게 하여 국가적인 차원으로 생각해 보면, 가난한 나라가 있고 부자 나라가 있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남들이 그렇게 보아주는 부자 나라는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제3 세계라고 지칭하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도 아니며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우리 나라는 가난한 나라였고 6․25 때는 모두가 가난을 체험한 바 있다.

 

우리는 이렇듯 '가난'이라는 말을 항상 우리 가까이에 두고 있다. 지금도 '가난한 상태'를 면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수출을 장려하고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벌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그런데 신약 성서에서는 우리에게 '가난'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 3)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마음으로 알아들어야 하겠는가? 우리 각자는 돈이 필요하고, 지금 생활도 가난한 상태인데 더 가난해져야 한다는 뜻인가? 돈이 좀더 있다면, 좀 널찍한 스튜디오도 얻고 좀더 잘 먹고 필요한 것도 장만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데, 교회에 오면 항상 가난해져야 한다는 말을 들려주고 있으니, 좀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 아닌가? 차라리 성서에서 "부자가 되어라."고 말씀하셨다면, 부자들도 성당에 와서 양심의 가책 없이, 그 부유한 상태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성당에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성서에서는 어느 곳을 읽어 보더라도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의 편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욕구로는 가난한 상태를 싫어한다.

 

2. 성서적 가난의 참다운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에서 가르쳐 주는 '가난'에 대한 참다운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먼저 구약 성서를 보면 처음에는 물질적인 풍요와 부귀와 재산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희망하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 모두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양 떼도 많고 하인도 많이 부리며 물질적 부를 누렸다. 그리고 요셉은 에집트의 수상이 되어 수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관리하였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도 물질적 부를 일생 동안 누렸다. 하느님은 그들이 부자였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물질적 축복을 주셨으며, 오래 살게 해주셨고 그들을 잘 돌보아 주셨다. 그리고 신약 성서에도 보면 부자이면서도 예수님의 축복을 받은 이들도 있고 인정을 받은 이들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 형, 탕자 모두들 부자였고, 그 부자인 상태를 축복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묵시도 역시 금과 옥으로 장식된 부유한 상태로서 묘사된다.

 

이러한 점들로 생각해 볼 때 물질적인 풍요와 재산은 그 자체가 죄악시되는 것이 아니며 부자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상태이다. 예수님도 그 자체를 결코 나쁜 것으로 보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난하고 몰락한 상태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상태이다. '욥'은 처음에 부자였다가 마귀의 시험으로 가난을 체험하고 마침내는 다시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된다.

 

3. 가난을 만드는 죄악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성서를 관찰해 보면 예언자들과 예수님이 부자들을 경고하는 말씀이 나온다. 그것은 선량한 부자들을 욕하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나쁜 짓, 불의를 욕하는 것으로서 옳지 못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다든가, 권력의 횡포를 통해서 혹은 권력층과 결탁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든가, 타인의 정당한 재산을 착취하는 일,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하고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타인을 괴롭히는 일 등을 아주 나쁜 짓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죄를 고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은 바로 이러한 나쁜 권력자들의 폭정과 부자들의 부당한 착취에 의해 생겨난 것이고, 그들이 갖고 있는 재산을 나누어주지 않고 이웃에 대한 무자비함이 원인이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이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아모스 예언자는 권력자들의 횡포를 비난하며 그들의 종말을 경고했다.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아. 너희가 힘 없는 자를 마구 짓밟으며, 그들이 지은 곡식을 거둬 가는구나. 너희는 돌을 다듬어 집을 지어도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탐스럽게 가꾸고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아모 5, 7. 10-12). 그리고 아모스 예언자는 이것을 하느님께 대한 엄청난 죄로 규정하며 그들의 권력의 만용과 횡포를 계속 비난한다. "너희가 나를 거슬러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지었는지, 나는 죄다 알고 있다. 죄 없는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 앞에서 가난한 사람을 물리치는 자들아! 너무도 세상이 악해져서 뜻 있는 사람이 입을 다무는 시대가 되었구나."(아모 5, 12-13) 하고 그 시대의 불의의 상황을 하느님의 심판으로 진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의와 부정 폭정의 위세에 눌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 권리도 못 누리고, 그로 인해 가난하게 된 사람들은 선량한 마음을 가진 이로서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는 "가난한 이", "억압받는 이"가 앞으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의인들을 지칭하는 특수한 표현이 된다.

 

한때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인기를 끌었던 '판관 포청천'도 바로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즉 중국 사회에서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교묘히 저지른 부정과 비리를 파헤치고, 선과 정의를 드러낸 것이다. 이런 판관 포청천의 판결은 보는 이로 하여금 통쾌한 만족감을 준다. '판관 포청천'에서는 가난하고 억눌린 이의 권익을 국가 권력이 보호해 주는 면이 잘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보호해 주는 절대적인 힘은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 절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하늘'에 대한 공경심에서 비롯된다고 보겠다.

 

4.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 축복의 대상

예수님은 특히 이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셨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셨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축복받고 사랑받는 대상이 된 것은 산상 설교에 잘 나타나 있다. 산상 설교의 가르침(마태 5, 1-12)은 예수께서 산에서 가르치셨다고 해서 '산상 설교'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모든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해서 '산상 수훈'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특히 행복에 대한 말씀이라고 해서 '행복 선언'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루가 복음(6, 20-26)에 거의 같은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예수님의 산상 수훈에는 가난한 사람이 가장 처음에 나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 즉 하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였고 루가 복음 사가는 '마음'이라는 말이 없이 그냥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 20)라고 하였다.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즉 하늘 나라의 가장 첫번째 조건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즉 이것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가난한 마음'은 예수님의 일생이 그러했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조건이다. 이 '가난한 마음'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항상 설교의 중심 테마로서 가르쳐 왔다. 이 '가난한 마음'은 행복 선언의 가장 중심이 되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행복 선언에서 이야기하는 여덟 가지 부류의 행복한 사람, 즉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등이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5. 영신적 가난의 필요성

그러나 예수님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는 어리석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요즘 세상에는 이러한 사람들보다는 남을 적당히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사기 치고, 권모 술수에 능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인정받고 사람 대접을 잘 받는 수가 있다. 즉 가치관이 전도된 것이다. 그래서 자라나는 청소년, 학생들의 눈에 올바른 가치관이 성립되지 않고, 그릇되고 거짓된 가치관이 심어짐으로써 사회는 모순과 불균형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우리는 이러한 그릇된 가치관이 횡행하는 세상 속에서 참다운 그리스도교적 덕행을 지녀야 하겠다. 그것은 '가난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가난한 마음'이란 물질적인 가난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영신적인 가난의 생활이 필요하다. 스바니아 예언자가 "너희는 야훼를 찾아라."(스바 2, 3) 하고 말하듯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 생활 중에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내가 사는 것, 나의 위치, 나의 모습, 모두 하느님의 덕택이라고 생각하고 감사드리고,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날을 기다리며, 하느님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그들의 소원을 하느님께 드리고, 하느님의 은혜로 그들의 소원이 채워지기를 쉽게 바라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다. 성서에서 부자들, 권력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믿고,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며, 하느님 없이도 잘살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가난의 정신은 바로 하느님을 찾는 마음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음으로써 받는 행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고, 하느님의 위로를 받고, 땅을 차지하고, 만족하고, 자비를 입고,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의 기준은 이 두 복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결국 물질적 행복을 다시 차지하고 하느님을 뵙게 되는 것으로 나온다. 이 산상 설교는 예수님 사상의 중심이므로 성서의 어느 곳을 펴 보아도 이 문맥을 읽을 수 있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 20, 16). 결국 하느님을 뵙게 되는 날, 모든 것을 차지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은 좋은 것이며 하느님의 축복이다.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만드시고 그것을 인간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주셨다. 인간은 자기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고 사회를 이루어 공동의 유익과 행복을 도모해야 한다.

 

오늘날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특히 이러한 불의와 부정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어도 하소연 못하고 다만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하느님 나라가 임하기를 고대하며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가 사는 시대에 각 상황에서 하느님의 주권이 임하기를 기원하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

 

제84단상 : 하느님의 계명과 인간의 자유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 17).

 

하느님의 율법과 인간의 자유는 마치 줄다리기를 하는 듯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할 계명을 주셨다. 그 계명은 우리 인간들을 위해 주어진 것이고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을 짐스럽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한 방법이 된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능력 중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만물은 그 자체가 지닌 속성, 색깔, 모양 등으로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인간도 그 자체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특히 하느님의 모상을 타고났으며 그러기에 하느님의 신성을 닮은 존재이다. 인간은 진, 선, 미를 추구하는데 학문과 도덕과 예술적 행위를 통해 이를 표현한다. 그리고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 의무를 통해 하느님의 성스러움을 닮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창조 질서를 통해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다면, 인간은 그 자연 법칙과 질서에 순응하고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의지적으로 따름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밝혀진 것을 계시라고 하며 그것은 자연법과 신정법으로 나타난다.

 

자연법은 자연 사물에 내재하는 고유한 법칙을 말한다. 가령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엔 나무들이 결실을 맺는다고 했을 때, 인간은 이러한 자연 사물들의 속성을 이용하여 그 유익함을 취하고 이러한 법칙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신정법이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것이 구체적으로 성문화된 것이다. 신정법의 대표적인 것은 십계명이다(출애 20, 1-17; 신명 5, 6-21). 이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발현하시어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도록 주신 것이다. 이 계명에는 인간의 유익을 위한 하느님의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들을 유익하고 참되게 살게 하고 올바르게 인도할 목적으로 표현된 것이 율법이다. 그래서 구약의 하느님 백성들은 이 율법을 존중하고 그 율법을 지키기에 최선을 다해 왔다. 또한 구약의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올바로 살지 않고 악을 저지를 때마다 하느님의 율법을 알려 주며, 사람들이 이를 지켜 올바른 삶을 살도록 했다.

 

예수께서도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다(마태 5, 17).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며 보람 있는 일이 되겠는가?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우리 인간들이 지켜야 할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자유로이 계명을 지키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것인데 인간은 이 자유로써 스스로의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행동에는 책임이 있다.

 

집회서를 보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선과 악을 놓고 스스로 선택하라고 하시며, 그것은 생명과 죽음을 놓고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신다(집회 15, 15-20). "네가 마음만 먹으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주님께 충실하고 않고는 너에게 달려 있다"(집회 15, 15). 주님은 인간에게 악인이 되라고 명하신 적이 없고 또 죄를 범하도록 원하신 적도 없다. 인간이 악해지는 것, 또 죄를 범하는 것, 벌을 받는 것, 모두 인간의 자유에 대한 책임이며,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왜 이렇게 이 세상에는 악인들이 많으며 불의와 불합리가 있는가 하고 의문을 던지고 그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느님은 악을 창조하신 적도 없고 또 인간에게 악인이 되라고 명하신 적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악들은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심과 남을 무시하고 착취하는 데서 온다. 사람들이 자유로 선택한 결과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명하신다.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스스로 거룩하게 행동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 44).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자유로운 행동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계명은 생명의 길이며 은총과 축복의 길이다. 그러나 거기엔 또한 수많은 유혹과 어려움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유를 가지고 선과 악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법들과 인간의 양심은 인간에게 생의 방향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생명의 길, 은총과 축복의 길을 선택하고 자유로이 하느님께 순종하여 구원을 얻어야 한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주님께 충실하고 않고는 너에게 달려 있다"(집회 15, 15).

 

제85단상 : 한국 103위 순교 성인들

 

"사람들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받는 고통은 후에 받을 큰 축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 뜻에 맞는 사람들임을 인정하신 것이다. 도가니 속에서 금을 시험하듯이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을 번제물로 받아들이셨다"(지혜 3, 4-6).

 

1. 성인은 어떤 분인가?

우리 나라에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선포되고 전 세계 신자들의 공경을 받으시는 성인들이 계심을 생각할 때 참으로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인'이 되셨다 함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성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말한다. 각 종교에는 그 종교의 가르침과 이상을 실현한 이상적 인간이 있다.

 

유교에서는 군자(君子), 불교에서는 아라한(arahat)이나 보살, 도교에서는 신선(神仙)이나 도인(道人)이라는 말로 불리는데, 이들 각 종교의 이상적 인물은 그 나름대로 인간의 이상적 상태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교의 이상적 인물이 되었다는 것이며, 하느님의 마음에 흡족한 상태의 인간상에 도달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 이상적 인물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 노력하고 있는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하기에 처음부터 그러한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는지,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생각해 보자. "성인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그 가능성은 다 지니고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될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 누구에게나 이 씨앗은 주어져 있다. 다만 이 씨앗을 어떻게 가꾸어 가느냐가 문제이다. 예수님도 복음의 씨를 사람들의 마음밭에 뿌릴 때, 길밭, 돌밭, 가시덤불, 좋은 밭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루가 8, 4-15). 씨가 어느 곳에나 떨어지듯이, 하느님 말씀도 사람들의 여러 형태의 마음밭에 떨어진다. 길바닥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악의 세력에 휘말려 그 말씀을 빼앗기고 믿음도 생겨나지 못한 것이며,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뿌리를 내지 못하여 그 믿음이 오래가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살아가는 동안에 세상 걱정과 재물과 현세의 쾌락에 눌려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좋은 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받아들여 착한 마음으로 꾸준히 열매를 맺은 것을 말한다.

 

2. 한국 순교 성인들의 다양한 신앙적 모범

우리 나라의 200년 교회사에 있어서도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 땅에도 복음의 씨가 중국으로부터 날아왔다. 그 씨는 책의 형태로 조선 시대의 우리 선조들에게 파종되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는 예수님의 비유처럼, 길밭, 돌밭, 가시덤불, 좋은 밭의 형태로 나타났다. 우리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교회 창설 후 100년간에 걸친 박해의 과정에서 복음의 말씀을 듣자마자 그것을 길에 버린 이들이 있었고, 혹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거나, 박해의 칼날 앞에 배교한 이들도 있었다. 혹은 천주교 신자를 밀고하거나 적극적으로 박해에 가담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져 신앙의 꽃을 피우고 순교의 열매를 맺은 이들이 1만 명을 헤아리고 있다. 그중 103위 성인은 모두 순교의 꽃을 피우고 자랑스럽게 신앙의 열매를 맺은 이들이다. 한국의 103위 성인은 모두 순교의 영광을 받고 성인품에 오른 것은 공통적이지만, 그들이 성인품에 오르기 전 성인이 되는 과정에 있어서의 그 길은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양반의 반열에 있었고, 어떤 이는 천민의 신분에 있었고, 또 중인의 신분에도 있었다. 그리고 유학자가 있었는가 하면 불교나 도교나 미신을 숭배하던 이들도 있었고, 성직자들뿐 아니라, 궁녀나 동정녀 출신, 혹은 결혼한 부부들, 과부, 동정 부부 등 그들의 출신 성분은 참으로 다양했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복음의 말씀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여 자기들의 마음밭에서 성장하도록 했고 마침내 순교의 열매를 맺었다. "아무나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성인이 될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바로 우리 한국의 신앙 선조들이 그 찬란하고 훌륭한 성인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다.

 

한국 성인들은 "나 야훼는 거룩하다.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20, 26)고 하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한 사람들이며,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 48) 하신 예수님의 권고를 실천한 이들이다. 우리도 이제 이 시대에 요구되는 신앙 증언과 신앙 생활로 그리스도교의 이상적 인물이며 목표인 '성인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3. 한국 성인들의 순교 정신

성인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 길을 우리에게 이미 가르쳐 주셨다. 루가 복음에 보면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9, 23)라고 가르쳐 주셨으며, 지혜서에서는 "도가니 속에서 금을 시험하듯이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을 번제물로 받아들이셨다."(3, 6)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성인은 바로 이러한 길을 가신 분들이다. 우리 나라의 순교 성인들은 모두 자신을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또한 그 신앙을 고난의 도가니 속에서 견디어 내고 극복한 것이다. 이분들은 성인이 되기까지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으셨다. 어떠한 분도 고난 없이 성인이 되신 분은 없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신앙의 시련을 겪으셨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자기 생명까지 바치심으로써 그 신앙을 증거해야 하는 관문을 통과하였다.

 

우리 선조들이 무명으로 가장 많이 순교한 해미 성지에 가 보면 신앙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관문을 통과했음을 볼 수 있다. 이분들은 단지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이름만으로 붙잡혀 와서, 무수히 매를 맞고 온갖 고문을 당하시며 배교를 강요당하셨다. 그리고 관가에서는 이분들을 교우들 앞에서 고문하여, 그분들이 모진 매를 맞고 고통으로 지르는 비명 소리에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도록 온갖 방법을 다 사용했다. 그러나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고문당하는 다른 신자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있는 신자들은 그 시련을 이겨 낼 수 있도록 서로 위로하고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관가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씩 그러한 고문의 과정을 겪고도 도저히 배교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교우들이 보는 앞에서 목매달아 죽이거나, 섬돌에 내리쳐 죽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분들을 마치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하였으며, 온갖 오물을 버리는 시궁창에 버려 죽게 내버려 두었고, 그래도 그 죽음의 시궁창 속에서 살아 나오면 마지막으로 장정 여럿이 그 발을 잡아 거꾸로 들어 섬돌에 머리를 내리쳐 죽이기도 했다. 지금도 해미성에는 신자들을 목매달아 죽였던 '호야나무'가 있고, 신자들의 머리가 깨졌던 '섬돌'이 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순교 성인들은 모두 한 분도 예외 없이 그냥 성인이 되신 것이 아니다. 한 분 한 분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고문과 죽음의 공포를 직면하면서 그것을 견디어 내고 마침내 생명을 바쳐 자기 신앙을 증거하신 신앙의 승리자이시다. 그분들은 자기가 고문을 받다가 혹시 마음이 약해져 배교할 것을 오히려 걱정하였으며, 그래서 오히려 빨리 죽기를 소원했던 분들이다.

 

4. 오늘날의 순교 신앙 정신

우리 순교 성인들의 이러한 신앙 정신을 생각할 때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 생활은 과거 박해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편리해졌다. 쉽게 미사에 참여할 수도 있고, 성사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사에 빠지거나 성사도 보지 않고 냉담 상태로 지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교회에서 맡기는 봉사직을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기피하거나 혹은 맡았다 해도 적극성과 책임성을 보이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비방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자. 구체적으로는 비록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성당 청소를 비롯하여 교회의 봉사 활동,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책임을 맡은 일들에 대해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순교 신앙 선조들의 후예들이 해야 할 자그마한 일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 순교 성인들이 이 시대에 사셨다면 그분들은 교회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위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한국의 103위 성인의 순교 신앙 정신을 본받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는 신앙 정신을 우리 시대에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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