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제2독서 야고보 2,14-18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복음 마르코 8,27-35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여러분의 기도 덕분에 연수 잘 다녀왔습니다. 임원들과의 단합과 함께 성소자들을 위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3일 동안 빈자리를 채워주신 새벽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더욱 더 열심히 살아가는 빠다킹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종종 제게 부탁을 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즉, 어떤 어려움이 있는데 그 어려움의 해결을 위한 조언을 해달라는 것이지요. 그분의 사연을 들으면 정말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달리 없습니다. 그저 “저 역시 기도 중에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말뿐이지요. 특별한 대답을 받기를 원했지만 별 특별한 내용이 없어서인지 실망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의 별 내용 없는 대답을 받은 한 자매님께서 이렇게 메일을 보내셨더군요.
‘솔직히 신부님의 답장을 받고서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니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도 중에 함께 해주시겠다는 말씀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고통과 시련을 그 누가 해결해 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고통과 시련의 몫은 바로 나의 것이지요. 그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부족하고 나약하기만 한 우리들과 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에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 약속으로 인해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여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긴 과학적으로도 이를 증명한 실험이 있더군요.
일반적으로 쥐들이 포만감을 느끼는 양은 하루 평균 100Kcal라고 합니다. 그래서 두 그룹으로 쥐들을 분류해서 첫째 그룹의 쥐에게는 포만감을 느끼는 양을 주고 환경도 깨끗하게 꾸몄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룹의 쥐들에게는 포만감을 느낄 수 없는 85Kcal 정도의 먹이만을 주었지요.
이렇게 키운 쥐들에게 얼마 후 암을 유발시키는 화학물질을 주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그룹에서는 65%의 암 발병률이 나타났고, 두 번째 그룹에는 단 4%만이 발병한 것입니다. 바로 포만감이 병원균과 싸워 이기게 하는 T임파구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이었지요.
고통과 시련이 없는 모든 것이 다 채워져야 행복할 것 같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을 때 더욱 더 건강해질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 스승 예수님께 베드로가 나서서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반박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꾸짖습니다.
이제 더 이상 베드로처럼 사람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 주님의 칭찬과 함께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은 곧 날개를 다는 것이다(앙투안 바리).
여러분 덕분에 좋은 공기 많이 마시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더 노력합시다.
물은 몇 도에 끓습니까? 우리들이 알고 있는 상식은 100도입니다. 그런데 이 100도에서 더 열을 가하면 어떻게 될까요? 110도, 120도 계속해서 온도가 올라갈까요? 아닙니다. 물의 온도는 100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멈춥니다. 여기서 더 이상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고 열을 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물은 식어서 100도 이하로 떨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100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열을 가하게 되면 액체의 물이 기체로 변화되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 모습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자신의 상식만을 내세워서 100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다고 그냥 열을 가하지 않으면 식어서 아무런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열을 가하면 기체라는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요? 사실 내가 노력한 만큼 그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성과가 곧바로 나오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불평불만으로 일관하게 되지요. 포기하지 않고 조금 더 나아가는 노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외적인 환경 탓으로 돌릴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님께 대한 믿음 역시 이렇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을 외면하셨다고 원망하는 사람들을 종종 뵙습니다. 그런데 혹시 앞선 이야기처럼 물이 기체로 변하기 직전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100도의 순간에서 멈췄던 것처럼 자신의 노력이 어느 한 순간 멈춘 것은 아니었을까요?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그러한 노력의 힘을 통해 분명히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나의 것으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